1. 개요
폴란드계 프랑스인은 프랑스에 거주하는 폴란드인 또는 폴란드계 후손들이다. 폴란드와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수백년동안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논리로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프랑스내의 폴란드인의 규모와 입지도 상당히 큰 편이다.2. 역사
폴란드와 프랑스가 관계를 맺기 시작한 때는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 야기에우워 왕조 시절부터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프랑스 왕국과 교류가 활발했었다. 양국은 천주교를 믿고 있었고 폴란드와 프랑스 귀족들은 서로 영향을 많이 주고 받았다. 폴란드인들이 일방적으로 프랑스 문화를 배운 것보다는 프랑스 귀족들이 폴란드 귀족들의 문화를 배워오는 경우도 있었다. 1573년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의 뒤를 이어 왕으로 선출된 헨리크 발레지와 그를 따라온 시종들은 폴란드인들은 남자들도 향수를 쓴다는 점이나 바벨 왕궁에 다른 방들과 별도로 분리된 화장실 및 온수와 냉수가 따로 나오는 수도꼭지를 가진 욕실이 있다는 점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폴란드에서 프랑스로 돌아간 헨리크 발레지는 프랑스에서 왕으로 즉위한 이후 루브르 궁전이나 다른 왕궁에도 바벨 왕궁의 화장실 및 욕실과 유사한 시설을 설치할 것을 지시했다.프랑스의 문화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영향을 주면서 프랑스어가 당시 폴란드 귀족들의 주요 언어로 사용되었다. 또한 18세기에 흥성한 폴란드 계몽주의 또한 프랑스의 몽테스키외, 장 자크 루소 등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당시 자긍심 높던 폴란드 귀족들은 주변의 정교회 신자들은 거의 야만인에 가깝게 취급했지만, 프랑스/이탈리아 문화만큼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함께 라이프치히 전투에 참전한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
본격적인 이주는 18세기 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폴란드 분할로 멸망한 이후부터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에 의해 분할되어 멸망하면서 이후 많은 폴란드인이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으로 참전하여 사기가 높은 정예 부대로 명성을 떨쳤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 실패하면서 나폴레옹 측에 참전한 폴란드 군인 대다수가 사망하면서 이들은 본격적인 폴란드계 프랑스인의 선조가 되지는 못하였다.
1830년 11월 봉기가 다음해 진압되고, 1863년 1월 봉기 역시 러시아 제국군에게 진압당했는데 러시아 제국은 여기에 대해 구 폴란드 귀족들에 대한 토지 몰수로 대응했다. 토지를 몰수당한 상당수의 폴란드 귀족들은 프랑스로 이주하기 시작했는데, 그 숫자는 1만에 달했다. 이렇게 이주한 폴란드인들 중에는 유대인, 립카 타타르족들도 일부 포함되었는데 특히 유대인의 비중이 높았다. 20세기에도 폴란드인들의 프랑스 이주는 이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는 과정에서 폴란드 군인 상당수가 영국과 프랑스로 탈출하여 나치 독일에 대한 항전을 지속하였다. 냉전 당시에 양국 관계는 활발하지 못했다가 냉전이 끝난 뒤 폴란드 공산 정권이 붕괴하고 양국관계가 회복되면서 폴란드인들의 프랑스 이주가 이어졌다.
2000년대 중반에 폴란드가 유럽 연합에 가입하면서 높은 임금수준과 더 나은 복지제도를 노리고 프랑스로 이주하는 폴란드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3. 문화
사실상 19세기 폴란드 민족주의 문화의 상당부분은 프랑스 내 폴란드인들이 견인하였다. 여기에는 사정이 있는데 19세기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은 대다수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귀족, 지주 계층 출신이었다. 당시 일반 폴란드 농민들은 민족주의가 뭔지 잘 몰랐으며 그 때문에 1830년 폴란드 부흥 운동 당시 농민들은 민족주의 부흥 운동을 뭔지 몰라서 외면하였다. 폴란드 본토에서 독립 운동을 하다 진압당하고 체포당한 폴란드 엘리트들은 원래 평소 사용하던 언어가 프랑스어였던데다 프랑스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제국의 경쟁국이던 이유로 주로 상당수가 프랑스로 이민하였던 것. 이민 규모에 대해서는 당시 정확한 통계는 없고 추정만 가능하지만 19세기 프랑스인들은 프랑스에 온 러시아인들을 폴란드인으로 혼동하는 일이 많았다는 기록을 보면 꽤 규모가 컸었던 듯 하다.폴란드 민족문학의 대부 아담 미츠키에비츠, 바르샤바 쇼팽 국제공항에 이름이 들어간 프레데리크 쇼팽, 마리 퀴리 부인은 폴란드계 프랑스인이면서 동시에 폴란드 민족주의의 자랑이기도 하다.
3.1. 언어
근대에 수많은 폴란드인들이 프랑스로 이주했기 때문에 프랑스인으로 많이 동화된 폴란드인들은 프랑스어를 주로 사용한다. 하지만 최근에 이주한 폴란드인들은 폴란드어를 사용한다.3.2. 종교
종교적으로 폴란드와 프랑스가 천주교를 믿고 있기 때문에 폴란드계 프랑스인들의 대부분은 천주교를 믿고 있다.4. 유명 인물
- 나탈리 코쉬스코모리제[1]
-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
- 레뱅 퀴르자와
- 로랑 코시엘니
- 마리 퀴리
- 프레데리크 쇼팽
-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 - 무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이었다.[2]
- 야엘 브론피베[3]
- 엘리자베스 데비키
- 유리 조르카에프[4]
- 조르주 볼린스키[5]
5. 관련 문서
[1] 프랑스의 정치인으로 부계가 폴란드계다.[2]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폐위되고 딸 마리 레슈친스카와 결혼한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에게 로렌 공국을 받아 이 덕에 현재 로렌의 낭시에 이 사람이 짓고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온 스타니슬라스 광장이 남아 있다.[3] 친할아버지가 폴란드 유대인이다.[4] 아버지가 칼미크인과 폴란드인의 혼혈.[5] 프랑스의 만화가로, 샤를리 엡도 테러사건의 피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