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FE3A7><colcolor=#000> 프랑스 왕국 루이 15세의 왕비 마리아 레슈친스카 Maria Leszczyńska | ||
이름 | 폴란드어 | 마리아 카롤리나 조피아 펠리차 레슈친스카 (Maria Karolina Zofia Felicja Leszczyńska) |
프랑스어 | 마리 카롤린 소피 펠리시테 레그쟁스카 (Marie Caroline Sophie Félicité Leszczynska) | |
출생 | 1703년 6월 23일 | |
합스부르크 제국 보헤미아 왕국 슬레스코 트레브니츠[1] | ||
사망 | 1768년 6월 24일 (향년 65세) | |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 ||
배우자 | 루이 15세 (1725년 결혼) | |
자녀 | 엘리자베트, 앙리에트, 마리 루이즈, 루이, 필리프, 아델라이드, 빅투아르, 소피, 테레즈, 루이즈 | |
아버지 |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 | |
어머니 | 카타르지나 오팔린스카 | |
형제 | 안나 | |
종교 | 가톨릭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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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의 공주이자 프랑스 왕국의 왕 루이 15세의 왕비.2. 생애
2.1. 폴란드의 왕녀
마리 레슈친스카의 아버지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는 1704년에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으로 즉위했으나 1709년 왕위에서 쫓겨나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고, 차녀 마리 레슈친스카도 궁핍한 생활을 했다.[2]루이 15세의 원래 약혼자는 사촌인 스페인의 마리아나 빅토리아[3]였다. 1721년에 프랑스-스페인 양국의 부르봉 가문 사이의 단결과 화합을 위해 루이 15세의 섭정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가[4] 추진한 혼약으로, 루이 15세는 마리아나와 결혼하고 스페인의 왕세자 루이스는 오를레앙 공작의 딸 루이즈 엘리자베트와 결혼하는 방안이었다.[5] 마리아나는 미리 프랑스에 익숙해지도록 베르사유 궁전에 보내졌지만 루이 15세도 마리아나도 둘 다 너무 어려서 정식 혼인은 미루고 약혼자의 신분으로 베르사유에 머물렀다. 그러나 1723년에 오를레앙 공 필리프 2세와 스페인의 루이스 1세가 죽는 등 양국의 정치적 상황이 급변하게 되었다. 오를레앙 공의 뒤를 이어 섭정이 된 부르봉-콩데 공작[6]은 오를레앙 가문을 싫어하여 기존의 정책을 엎으려 했고, 뭣보다 어린 왕의 후사를 크게 우려했다. 부르봉-콩데 공작은 루이 15세의 나이가 아직 어리고 후계자 없이 사망할 시 스페인 왕가나 오를레앙 가문이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것을 염려해 후계자를 빨리 얻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7] 마리아나는 나이가 너무 어려 후계자 생산을 빨리 할 수 없다는 이유로 파혼하고 스페인으로 돌려보내자 대노한 스페인에서는 맞불로 루이스 1세와 결혼한 오를레앙 공작의 딸 루이즈 엘리자베트도 프랑스로 쫓아버렸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와 스페인 양국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8] 루이 15세와 파혼한 마리아나는 이후 포르투갈의 왕세자 주제와 혼인하여 포르투갈의 왕비가 된다. 마리아나는 훗날 자신의 딸들이 프랑스로부터 혼인을 제안받자 이를 거절하는 형태로 불쾌함을 표했다.
루이 15세와 마리아나와의 혼인이 취소된 후 루이 15세의 신부감으로 가장 유력하게 추진되었던 사람은 영국의 국왕 조지 2세의 딸들인 앤[9]과 캐롤라인이었다. 양국간에 진지하게 결혼협상이 오고 갔으나 결국 가톨릭으로의 개종 문제 때문에 무산되었다. 덴마크 공주인 샤를로테 아말리아도 거론되었지만 무산되었다.[10] 가톨릭 국가의 공주 중에서는 로렌의 공녀 엘리자베트 테레즈(루이 15세와 7촌간)[11]가 가장 유력했지만, 외가가 오를레앙 가문이었기 때문에 부르봉-콩데 공작에 의해 거부되었다. 모데나의 공녀 엔리케타 데스테도 신붓감으로 고려되었지만, 이 역시 오를레앙 가문과 친하다는 이유로 내쳐졌다.[12]
부르봉-콩데 공작은 자신의 누이들인 앙리에트 루이즈와 엘리자베트 알렉산드리느를 왕비로 밀었는데 공작과 그 정부인 마담 드 프리는 이 혼인을 통해 루이 15세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를 원했지만, 마담 드 프리는 공작의 누이들과 사이가 나빴다. 자매도 마담 드 프리에게 호락호락하게 움직이지 않았고 어머니인 프랑수아즈 드 부르봉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이즈음 다시 영국 공주와의 결혼협상이 재개되었고, 조지 2세의 딸 앤과 아멜리아, 앙리에트 루이즈와 엘리자베트 알렉산드리느가 최종 후보 4인이 되었다. 영국은 지난 협상 때보다 유연한 태도로 종교협상에서 앤과 아멜리아가 루이 15세와 혼인하게 된다면 개종에 동의한다고 양보하였기 때문에 결혼이 유력해졌지만, 막판에 루이 15세의 가정교사인 플뢰리 추기경이 강력하게 반대해서 영국 공주와의 결혼은 최종적으로 무산되었다. 더불어 마담 드 프리의 방해공작으로 부르봉-콩데 공작의 두 누이들도 탈락하였다. 플뢰리 추기경이 선호하는 신부감은 헤세-로텐부르크의 캐롤라인이었다.
이 때 마리 레슈친스카는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 중이었고, 원래는 부르봉-콩데 공작의 후처로 거론되었다. 하지만 부르봉-콩데 공작의 어머니 프랑수아즈 드 부르봉[13]은 마리 레슈친스카의 지체가 낮다고 이를 거절하였다. 마리의 아버지 스타니스와프는 바덴 공작 루트비히 게오르그와 혼인 협상을 시작했으나, 마리의 지참금이 적다는 이유로 거부당하였다. 부르봉-콩데 공작의 남동생인 샤롤레 백작 샤를과의 결혼도 고려되었지만 역시 프랑수아즈 드 부르봉에 의해 거절되었다. 전 섭정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의 작위를 계승한 루이 도를레앙과의 결혼도 추진되었지만 거절되었다. 당초 부르봉-콩데 공작의 정부인 마담 드 프리는 마리 레슈친스카가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공작의 후처로 강력히 추천하였다. 하지만 부르봉-콩데 공작의 재혼문제보다는 국왕의 결혼 문제가 더 시급했고, 부르봉-콩데 공작과 플뢰리 추기경의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마리 레슈친스키가 뜬금없이 신붓감으로 떠올랐다. 플뢰리 추기경 입장에서는 연줄 없는 마리 레슈친스키가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부르봉-콩데와 마담 드 프리 입장에서는 마리가 결혼을 통해 자신들에게 신세졌기 때문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 보았다.
더불어 하필 나라도 없는 공주인 마리 레슈친스카가 프랑스 왕비로 선택된 건 폴란드 왕실이 대대로 자손이 많았다는 집안 내력(...)이 크게 작용했는데 프랑스에서 어린 루이 15세가 급사하면 부르봉 직계가 끊긴다는 위기감에 최대한 빨리 후계자를 얻기 원해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유력한 왕비 후보였던 다른 나라의 공주들이 심사위원들 간의 이해관계가 불일치되면서 떨어져나간 반면 마리 레슈친스카는 권력이 없어서 이해관계와도 무관했고[14], 나라도 없는 공주를 왕비로 만들어주면 은혜를 갚을 거라고 기대한 이들의 욕심도 함께 작용했다. 어쨌든 기대하던 대로 마리 레슈친스카는 자녀 10명을 낳았지만 그 중 2명만이 아들이었고 성인으로 성장한 것은 루이 페르디낭[15] 뿐이었다.
2.2. 프랑스의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는 교양 있는 여인으로, 조용하고 상냥하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왕실의 공식적인 의무를 이행함과 동시에 12년 동안 총 10명의 아이를 낳는 등, 매년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며 왕비의 의무를 다했다.하지만 1733년에 25살이 된 루이 15세가 첫 정부(情婦)를 들이면서 마리는 왕의 총애를 잃기 시작했고 사실상 별거에 들어갔다. 루이 15세도 초반에는 마리와 금슬이 좋았다고는 하지만 얌전하고 순종적인 왕비에게 질린 모양인지 오래 지나지 않아 정부를 갈아치우는 호색한 기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마리 레슈친스카도 남편의 바람둥이 기질과 항시적인 임신에 짜증나 완전히 별거 상태가 되었다. 자녀들을 출산한 뒤로는 임파선염을 핑계로 잠자리를 거절했다고. 덧붙여 왕비의 별명은 '항상 누워 있고 늘 배불러 있고 계속 아이를 낳는 여자'.
경건한 신앙심의 소유자였던 마리는 매일 자신의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새벽 1시에 봉헌되는 미사에 참례했다. 이후 그녀는 신앙심을 바탕으로 다양한 자선활동을 실시했다.출처 여기에는 가난한 여자아이들을 위한 교육도 있었다. 이런 자선활동의 일환으로 그녀는 베르사유 궁전 주위에 수녀원인 리세 오슈(Lycée Hoche)를 설립했다.[16]
마리는 자신의 친한 친구들과 서클을 이루어 함께 지냈으며, 종종 음악 콘서트를 열거나 식사를 하는 등 궁 내의 음악행사를 지원했다. 그녀는 독서와 그림, 음악을 좋아했으며 자수를 놓거나 때로는 친한 지인들과 카드게임 같은 도박을 하며 유흥을 즐겼다고 한다.
하지만 자식들과는 궁정의 공식적인 행사를 제외하고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고도 하며, 자식들이 이에 관해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마리 레슈친스카는 자식들의 도덕적, 종교적 교육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도와주려고 애썼다.[17] 그러나 오냐오냐 스타일인 루이 15세 때문에 딸들은 신분 의식만 꽉 차고 개념 없는 부류로 자라고 만다.
왕비는 자기 방에서 손님들을 접대하고 공식적인 업무를 이행하는 등 자기 방식대로 최선을 다해 궁정생활을 영위했다. 볼테르와 에밀 드 샤틀레가 베르사유를 방문하기도 했는데 에밀은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의 옆에 앉는 대단한 특권을 누렸다.
이후 마리 레슈친스카는 궁정의 음모에 연루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유지하다가 65세에 세상을 떠났다.
의외로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퐁파두르 부인과는 관계가 좋은 편이었다. 역대 프랑스 왕비 중에서도 유독 남편의 정부에게 관대한 성품이기도 했거니와[18] 퐁파두르도 왕비한테 신경도 안 쓰는 루이 15세 대신 자신이 허름한 거처를 수선해주는 등 왕비에게도 알아서 처신을 잘했기 때문. 정부가 정실부인을 잘 모시는 것이 좋게 보이기도 했고 왕비도 가끔 퐁파두르를 멕이려고 해봤지만 대놓고 실패했는데도 결국 나갔다 온 사이 퐁파두르가 보기 좋게 고쳐준 자기 처소를 본 왕비가 한숨을 쉬며 "첩이 있어야한다면 그 여자가 좋겠군" 라는 말을 남긴 걸로 보아 퐁파두르만큼 자신에게도 도움 될 애첩이 없을 듯 해서 인정한 것 같다.
3. 평가
'궁정에 틀어박혀 에티켓과 출산 의무에 충실한 왕비'라는 프랑스 왕비의 모범적인 사례. 정치나 왕궁 바깥 사정에 대해서는 일절 신경 끄고 취미에만 몰두하며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게다가 남편의 애첩 퐁파두르 부인이 워낙 공식적으로 나대는 이미지로 국민 욕받이 역할을 해서 그녀가 욕 먹을 일도 없었고, 퐁파두르 부인이 워낙 정치와 문화면에서 넘사벽이다 보니 완전 묻혔을 뿐이지, 사실 그녀 역시 재능이 뛰어나서 모국어인 폴란드어를 비롯한 6개에 달하는 외국어를 구사, 철학과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었으며 아마추어 음악가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엄친딸.
4. 가족관계
4.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녀 | 파르마 공작부인 엘리사베타 (Élisabeth, Duchess of Parma) | 1727년 8월 14일 | 1759년 12월 6일 | 파르마 공작 필리포[19] 슬하 1남 2녀[20] |
2녀 | 안 앙리에트 공주 (Princess Henriette) | 1727년 8월 14일 | 1752년 2월 10일 | |
3녀 | 마리 루이즈 공주 (Princess Marie-Louise) | 1728년 7월 28일 | 1733년 2월 19일 | |
1남 |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 (Louis, Dauphin of France) | 1729년 9월 4일 | 1765년 12월 20일 |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 슬하 1녀 |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슬하 4남 3녀[21] | ||||
2남 | 앙주 공작 필리프 (Philip, Duke of Anjou) | 1730년 8월 30일 | 1733년 4월 7일 | |
4녀 | 아델라이드 공주 (Princess Adelaide) | 1732년 3월 30일 | 1800년 2월 27일 | |
5녀 | 빅투아르 공주 (Princess Victoria) | 1733년 5월 11일 | 1799년 6월 7일 | |
6녀 | 소피 공주 (Princess Sophie) | 1734년 7월 27일 | 1782년 3월 2일 | |
7녀 | 테레즈 공주 (Princess Theresa) | 1736년 5월 16일 | 1744년 9월 28일 | |
8녀 | 생 드니 수도원장 루이즈마리 (Louise-Marie, Prioress of Saint Denis) | 1737년 7월 15일 | 1787년 12월 23일 |
5. 여담
- 부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었던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가 로렌 공국으로 망명왔을 때 전속요리사 마들렌이 만든 조개빵이 마리아 레슈친스카에게 전해졌는데 이 음식이 마들렌이다.
- 루이 14세의 아내였던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이후 42년 만에 나타난 프랑스 왕비였다.
[1] 현 폴란드 돌니실롱스크 주 트셰브니차(Trzebnica)[2] 훗날 스타니스와프 1세는 딸의 결혼으로 인한 프랑스 왕국 도움으로 알자스의 작은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3] 루이 15세의 숙부 펠리페 5세의 딸로 스페인의 공주였다.[4] 루이 14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아들. 루이 15세에겐 재종조부(할아버지의 사촌)다.[5] 오를레앙 공작의 또다른 딸인 필리피네 엘리자베트는 인판테 카를로스(후일의 카를로스 3세)와 약혼하였다.[6] 앙리 4세의 숙부인 콩데 공의 후손이다. 살리카 법에 의거해서 오를레앙 가문이 끊어지면, 그 다음의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7] 그런데 이게 명분이 아니라 진심인 것이 부르봉-콩데 공작은 한밤 중에 자면서도 몽유병처럼 왕의 결혼을 중얼거리다가 들켜 자기도 쇼크 먹고 왕을 빨리 결혼시켜야겠다고 다짐했다는 것.[8] 이후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을 계기로 양국의 관계는 회복되었다.[9] 후일에 네덜란드의 빌럼 4세와 혼인했다.[10] 가톨릭으로의 개종문제에 더해서, 프랑스의 전통적 동맹국인 스웨덴과의 관계를 훼손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스웨덴과 덴마크는 적대관계였기 때문이다.[11] 로렌 공 레오폴트 1세의 딸로 어머니는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딸 엘리자베트-샤를로테이고, 엘리자베트 테레즈의 남동생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1세. 이후 엘리자베트 테레즈는 사르데냐의 왕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와 혼인했다.[12] 엔리체타 데스테의 올케가 오를레앙 공의 딸이었다.[13] 루이 14세의 서녀, 생모는 몽테스팡 후작부인.[14] 그러나 이는 결국 장인이 나라 없는 왕이란 사실이 본인의 체면에 먹칠을 한다고 생각한 루이 15세가 폴란드 왕위를 두고 전쟁에 개입하면서 안 좋은 쪽으로 작용한다.[15] 루이 16세의 아버지.[16] 건축가는 리샤르 미크(Richard Mique, 1728 ~ 1794). 프랑스 혁명 이후인 1803년에 중등학교로 변모하는데 나중에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원 또는 대학교에 사실상 자동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입학 경쟁률이 엄청난 곳이다.[17] 특히 성장한 자녀 중 유일한 아들인 루이 왕세자의 교육에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루이 왕세자는 아버지 루이 15세보다 먼저 사망해서 그의 아들 루이 16세가 조부의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았다.[18] 사실 진심으로 관대하게 대했다기보다는, 남편 루이 15세가 워낙 이 여자 저 여자 끼고 다니다 보니 일일이 신경쓰다간 한도 끝도 없어서(...) 아예 눈 감고 귀 막은 것에 가깝다.[19] 펠리페 5세의 5남이다.[20]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대공비 이사벨라, 파르마 공작 페르디난도 1세, 스페인의 왕비 마리아 루이사.[21]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 샤르데냐의 클로틸데 왕비, 엘리자베트 공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