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02 22:17:48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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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 }}}}}}}}}}}}
<colbgcolor=#D2CEEF><colcolor=#000000> 라 발리에르와 보주르 여공작
루이즈 드라발리에르
Louise de La Vallière,
Duchesse de La Vallière et de Vaujou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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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프랑수아즈루이즈 드라봄르블랑드라발리에르[1]
(Françoise-Louise de La Baume Le Blanc de La Vallière)
출생 1644년 8월 6일
프랑스 왕국 투르
사망 1710년 6월 7일 (향년 65세)
프랑스 왕국 파리
자녀 샤를, 필리프, 루이, 마리 안, 루이
아버지 로랑 드라발리에르
어머니 프랑수아즈 르프로보

1. 개요2. 상세3. 여담

[clearfix]

1. 개요

루이 14세의 공식적인 첫 번째 정부. 발리에르와 보주르의 여공작 작위를 받았다.

원래는 루이 14세의 제수인 오를레앙 공작부인 앙리에트[2]의 시녀였다. 루이 14세와 불륜관계였던 앙리에트가 추문을 염려해 이 사실을 숨기고자 자신의 시녀였던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를 루이 14세에게 들이밀어 애첩이 되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앙리에트는 그저 겉보기에만 애인 사이가 됐을 뿐 루이 14세가 루이즈에게 정말 빠질리 없다고 여겼지만, 루이 14세가 정말로 루이즈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아예 루이 14세의 재위 기간동안 최초의 공식 정부가 되어버렸다.

2. 상세

1644년 프랑스 투르에서 하급 귀족이었던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고위 관료였던 탓에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는데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가 7살때 아버지가 사망했다.[3] 4년 후 루이즈의 어머니는 재혼을 하게 되는데 그 상대는 생레미 후작으로 오를레앙 공작의 집사이기도 했다.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는 결국 어머니를 따라 새아버지가 일하는 오를레앙 공작의 궁정으로 들어가 공작가의 사람들과 생활하게 된다.

1660년 이번엔 오를레앙 공작[4]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5], 미망인이 된 공작부인은 일가족을 데리고 파리의 뤽상부르 궁전으로 이사를 하게 되는데 라 발리에르도 따라가 파리 사교계에 데뷔하게 된다. 다음해 루이 14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가 새로운 오를레앙 공작으로 서임되고 잉글랜드의 헨리에타(프랑스어로 앙리에트)와 결혼하면서 라 발리에르는 앙리에트의 시녀가 된다.

문제는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가 양성애자로 앙리에트와 사이가 나빴는데 루이 14세 역시 왕비인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프랑스어로 마리 테레즈)와 사이가 별로였다는 것이다. 시녀에게조차 깍듯할 정도로 예절에 진심이었던 루이 14세는 비록 왕비인 마리 테레즈에게 정중한 태도를 보였지만 그녀에게서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했는데 마리 테레즈의 부족한 외모도 외모였거니와 착하지만 우둔한 성격도 루이 14세에게는 잘 맞지 않았다. 루이 14세는 전반적으로 예쁘고 활달하며 재치있는 성격을 좋아했는데 바로 앙리에트가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결국 루이 14세의 제수인 앙리에트가 왕비인 마리 테레즈를 제치고, 루이 14세의 궁정에서 주체적인 인물이 되자 이런저런 추문이 돌기 시작했다. 물론 당대에 왕의 불륜 자체가 커다란 흠결은 아니었으나 그 상대가 제수씨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일단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부터가 아무리 부인에게 관심이 없다해도 자기 아내가 형의 정부가 되는 것은 체면의 문제였기에 길길히 날뛰었고 마리 테레즈도 남편과 동서의 불륜설에 충격을 받고, 이에 태후인 안 도트리슈마저 극단적인 발언까지 하며 루이 14세와 앙리에트 사이에 스캔들이 나는 것을 엄금하자 앙리에트는 더이상 소문이 돌지 못하도록 연막작전을 생각해내는데 바로 그 대상이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였다.

앙리에트의 시점에선 미모의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와 루이 14세를 같이 두면 루이 14세의 애인은 루이즈라는 소문이 나겠지만, 그녀의 신앙심과 얌전한 성격상 루이 14세의 관심은 크게 끌지 못할테니 실속은 본인이 차리면 된다고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루이 14세가 루이즈와 사랑에 빠진 척만 한 게 아니라 정말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성격도 중요하지만 예쁜 게 가장 중요했다.

루이 14세를 진심으로 사랑하긴 했으나 야심없고 심약한 성격으로 인해 궁중 암투에 약했다. 반면 신앙심이 강하다보니 아무리 상대가 왕이라고는 해도 불륜을 저지르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심했다. 한편 루이 14세는 비록 루이즈의 미모와 순수함에 반하긴 했지만 동시에 그의 본성에 좀 더 맞는 연애, 즉 좀 더 밝고 유쾌한 재치를 가진 또다른 여자를 갈구하게 되었다. 곧 그런 인물이 등장했으니 마리 테레즈 왕비의 시녀였던 몽테스팡 후작부인이었다. 야심만만했던 몽테스팡 후작부인은 루이 14세를 유혹한 것은 물론 마리 테레즈 왕비에게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아 그녀의 입지에 위협을 가했다. 따라서 루이즈는 죄책감에 더해 불안과 왕에 대한 의존증에 시달리게 되었고 마침내 사고를 치게 되는데 1667년 군대를 방문한 루이 14세를 뒤따라간 것이다. 전통적으로 군대는 그 성격상 외부 여성의 방문에 대해 금기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당시 프랑스군의 경우 왕이라 하더라도 왕비 이외의 여자를 군영에 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금기를 깨고 루이즈가 왕을 찾아오자 예의범절에 편집증적일 정도로 집착했던 루이 14세는 대노했고,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하라 명령했는데 심지어 루이즈에게 음식도 주지 않아서 그녀는 굶어야 했다고 한다.

이미 입지가 흔들리던 루이즈는 이 사건으로 루이 14세의 총애를 명백히 잃었고 왕은 비록 루이즈를 궁정에 그대로 두기는 했지만 그녀의 역할은 왕의 다른 스캔들을 덮기위한 형식적인 역할로 돌아갔다. 결국 루이 14세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게 된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는 종교에 훨씬 더 심취하게 되었고 궁정을 떠나 수녀가 되겠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동안 루이즈를 이용해먹던 몽테스팡 후작부인은 크게 당황해서 뒤늦게나마 루이 14세를 움직여 루이즈의 딸에게 작위를 내리는 등의 회유책을 썼지만 소용이 없었고 결국 1675년 루이즈는 종신서약을 하고 수녀원에 들어 수도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것도 일반 수녀원이 아니라 매우 엄격한 규칙으로 유명한 카르멜 수도회 소속의 수녀원에 들어갔는데 이 과정에서 맹트농 부인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6] 원래도 좋지 않았던 건강 때문에 수녀원에서도 계속 고통에 시달렸지만 이 고통을 속죄의 수단으로 여기며 오히려 반겼고 빨리 죽기를 원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수녀원 입회 이후로도 36년이나 살며 수녀생활을 이어가게 되었고 결국 1710년 65세의 나이에 수녀원에서 병사했고 수녀원 묘지에 묻혔다.

루이 14세의 왕비 마리 테레즈가 평소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를 미워했는데 그녀가 수녀원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그 모습을 보러갔다가 궁정에서 화려하게 살던 루이즈가 초라한 옷을 입고 발을 절뚝이면서[7] 세탁물을 널러가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설이 있다. 다만 이는 상당히 왜곡된 내용일 가능성이 높다.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가 수도원에 갈 무렵에는 이미 루이 14세의 총애를 잃은 지 오래였는데다가 왕실을 떠날 때 마리 테레즈 왕비에게 직접 찾아가 공개적으로 사과를 했고 선량한 성격의 왕비도 이를 관대하게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이후 수녀가 된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를 마리 테레즈가 정기적으로 찾아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런 식으로 루이즈를 찾아간 사람들이 모두 속세시절 친구들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왕비도 루이즈를 친구로 생각하고 찾아간 듯 하다. 반면 몽테스팡 후작부인은 단 두번 방문했는데 모두 왕비가 데려간 것이라고.

여담으로 루이 14세의 주요 정부인 루이즈 본인, 몽테스팡 후작부인, 맹트농 부인 중 가장 먼저 루이 14세의 선택을 받았지만 의외로 나이는 가장 어렸다. 심지어 나이 차이도 많이 나서 몽테스팡 후작부인보다 4살, 맹트농 부인보다는 무려 9살이나 어리다. 다른 두 명은 궁정 밖에서 이미 결혼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다가[8] 궁정에 들어온 데 반해,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는 10대 시절에 왕궁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루이즈가 제대로(?) 사귄 첫 남자가 루이 14세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다 몇년 못가 총애를 잃고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수녀로 여생을 살았으니 자신의 행복이란 측면에선 남자복이 정말 없는 셈이다.

불행히도 자식복도 없었다. 루이 14세와의 사이에서 5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1남 1녀만 살아남았다. 딸 마리 안 드 부르봉(Marie-Anne de Bourbon)은 아버지 루이 14세의 귀여움을 받았으며, 방계 왕족인 콩티 공과 결혼했으나 10대에 과부가 되었고 남은 여생동안 재혼을 하지 않았다. 아들 베르망두아 백작 루이 드 부르봉(Louis de Bourbon, comte de Vermandois)은 10대 중반에 동성애 모임에 들어갔다가, 들키는 바람에 분노한 루이 14세에 의해 군대에 보내졌는데 얼마 안가 거기서 병사했다.[9] 왕의 총애를 받았던 것치고는 여러모로 불쌍한 여인이었다.

3. 여담

  • 로얄 미스트리스 중에는 유부녀가 많은데, 그중에서 별로 없는 미혼 출신 정부이다. 중간에 모 후작과의 혼담이 국왕 부부로부터 들어왔으나 후작과 루이즈 다 거부했다.

[1] 로망스어게르만어권의 인명이나 지명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2] 본명은 잉글랜드의 헨리에타(Henrietta of England). 잉글랜드 국왕이자 청교도 혁명으로 처형당한 찰스 1세의 막내딸이자 왕정복고 이후 왕위에 오른 찰스 2세의 여동생이었다. 또한 헨리에타의 어머니인 앙리에트 마리루이 13세의 여동생이자 프랑스의 공주였으므로, 헨리에타는 남편인 필리프 1세와 시아주버님이자 내연남이었던 루이 14세와 사촌지간이기도 했다.[3] 이때부터 어머니의 재혼까지 수년간 기록이 없는데 주변환경과 이후 나타나는 성격을 보면 아마도 수녀원에 보내져 교육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4] 루이 13세의 동생 가스통 도를레앙.[5] 아들은 유아기에 사망하고 딸들만 남았는데, 프랑스에선 살리카법에 따라 딸들에게는 작위가 상속되지 않았다.[6] 맹트농 역시 수녀원 출신이었다.[7] 한쪽 다리가 짧았기 때문에 특수 제작된 신발을 신어야 했는데 수녀원에 들어가면서 신지 못하게 되어 절뚝이면서 걸어야 했던 것이다.[8] 몽테스팡 후작부인의 경우 오를레앙 공작부인의 시녀가 된 것은 라 발리에르보다 먼저였지만 왕실에 들어와 루이 14세를 만나게 된 것은 훨씬 이후로 이미 결혼한 다음이었다.[9] 아들 루이의 사망 소식을 들은 라 발리에르가 "그 애가 죽었을 때가 아니라, 태어났을 때 울었어야 했는데."라고 한 말이 서구권에서 나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