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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Українська Народня Республіка Ukrainian People's Republic (UPR) | |||
국기 | 국장 | ||
위치 | |||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주장한 영토[1] | |||
1917년 11월 20일 ~ 1921년 3월 18일 | |||
국가 | 우크라이나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으리 | ||
수도 | 키이우 | ||
면적 | 603,700 ㎢ | ||
인구 | 23,430,407명 | ||
역사 | 건국: 1917년 11월 20일 독립: 1918년 1월 25일 멸망: 1921년 3월 18일 망명정부 수립: 1921년 망명정부 해산: 199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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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17년에 오늘날 우크라이나 지역에 건국된 우크라이나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2. 건국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고 러시아 제국은 모든 국력을 쏟아부었다. 결국 전쟁을 감당하지 못하고 러시아 제국이 2월 혁명으로 휘청이자 러시아의 지배 아래 있던 우크라이나는 이 타이밍을 계기로 독립했다. 독립 이전부터 우크라이나의 의회를 자처하여 수립된 우크라이나 중앙라다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이자 역사가인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를 의장으로 선출하고 총 네 번의 보편선언을 반포하여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야심차게 선포한 독립은 순식간에 위태로워졌다. 우크라이나의 정치 엘리트들은 새 국가를 이끄는데에 필요한 능력과 경험이 심각하게 부족했고, 이로 인해 경제난과 사회 혼란이 발생했다. 설상가상으로 1917년 12월부터는 동쪽에서 볼셰비키의 침공으로 수도 키이우가 함락당하여 독립을 선포하자마자 나라가 망할 위기에 놓였다. 이에 우크라이나 정부는 동맹국에 식량을 제공하는 대가로 동맹국 군대를 끌어들여 볼셰비키를 몰아냈다. 동맹국 군대에게 탈탈 털린 볼셰비키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인정했다.
3. 쿠데타와 우크라이나국
몇 개월간의 전쟁 끝에 찾아온 평화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사회는 여전히 극도로 불안정하였다. 이런 상황을 틈타 러시아 제국군 중장 출신의 파울로 스코로파즈키[2]가 쿠데타를 일으켜 1918년 4월 29일 중앙 은행과 군사 및 내무를 관장하는 정부 청사를 장악하였다. 다음날, 인민공화국에 충성하던 시치 소총병대[3]가 무장해제되었고 곧 스코로파즈키를 군주(Hetman)으로 하는 우크라이나국이 수립되었다. 우크라이나를 식량 공급기지로 써먹으려던 동맹국은 우크라이나가 안정화되기를 원하고 있었기에 스코로파즈키의 쿠데타를 환영하였다.스코로파즈키의 우크라이나국 정부는 경제 안정, 우크라이나계 포로 송환, 문화예술 진흥 등 여러 분야에서 성과를 냈지만, 본질적으로는 반동주의적 정권이었다. 스코로파즈키 정권은 농민들로부터 식량을 (반강제로[4]) 징발하여 동맹국에 수출하였다. 또 인민공화국 시절 시행된 토지개혁을 무효화하여 지주들에게 토지를 돌려주었으며 사회주의 정당들을 불법화하고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였다. 또한 내각과 군대 간부의 대부분을 우크라이나의 독립에 무관심하거나 심지어는 독립에 반대하는 친러 지식인과 장교들로 채웠다. 이에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로 이루어진 급진적 반스코로파즈키 세력은 정부 건물에 대해 방화와 파괴 등 테러를 가했고, 1918년 7월에는 우크라이나 주둔 독일군 사령관 헤르만 폰 아이히호른을 암살하였다.
여러 정책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거세어지자 스코로파즈키는 반대파와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18년 8월, 스코로파즈키와 반스코로파즈키 세력은 스코로파즈키가 쿠데타와 함께 해체했던 시치 소총병대를 재편성하는 데에 합의했다. 그때쯤이면 이미 동맹국이 전쟁에서 패배한 것, 그리고 스코로파즈키가 그들에게 도움을 구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스코로파즈키 정권은 동뱅국의 군사적 지원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동맹국의 붕괴는 곧 스코로파즈키 정권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스코로파즈키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러시아 백군의 도움을 구하려 했고, 안톤 데니킨의 남러시아 정부와 연합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에서의 그의 입지를 더욱 악화시켰다.
1918년 11월 16일, 사회주의자이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인 시몬 페틀류라가 이끄는 우크라이나 인민군이 우크라이나국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대부분의 부대는 페틀류라를 지지했고, 스코로파즈키를 지지하는 부대는 그의 친위사단이 거의 유일했다. 12월 14일 우크라이나 인민군이 수도 키이우를 점령하자 스코로파즈키는 헤트만 직위를 포기하고 가족과 함께 독일로 망명했다.
4. 디렉토리야의 수립
총무국 혹은 사무국이라 번역되는 디렉토리야는 스코로파즈키 정권에 맞서 정변을 일으킨 1918년 11월 13~14일에 결성되었다.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새로운 의회가 선출될 때까지 디렉토리야가 정부를 맡기로 했다. 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원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와 브세볼로드 홀루보비치가 선호했던 중앙 라다의 기능은 복원되지 않았다.
새로운 평의회인 노동자 의회는 공화국 보호를 위한 특별 정부 기관으로 디렉토리야를 임명했다. 국가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노동자 의회가 없을 때 법률을 제정하는 임무를 맡았고 , 인민 장관 협의회가 행정권을 부여 받았다. 디렉토리야는 다양한 정당과 단체의 대표 5명으로 구성되었다.
디렉토리야는 인민공화국을 재건하였다. 이제 인민공화국은 시몬 페틀류라에 의해 지배되기 시작했다.
5. 멸망
그러나 소비에트 러시아는 독일 항복 직후 11월 1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파기, 이듬해 1월 초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중앙 라다는 협상을 요청했지만 붉은 군대는 우크라이나군을 몰아내고 키이우를 함락시켰다. 디렉토리야 정부는 빈니차로 천도했다.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대소전쟁이 더 급하다는 판단에 따라 1920년 4월 22일 폴란드와 바르샤바 조약을 체결, 갈리치아 동부의 폴란드 영유를 인정하는 대신 우크라이나의 정통 정부로 승인받고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으로 우크라이나 중부와 동부를 수복하려 했다.
하지만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은 폴란드의 어중간한 승리로 끝나버렸고[5], 1921년 리가 조약으로 오늘날 우크라이나 영토 중 갈리치아 동부는 폴란드령, 나머지는 러시아 SFSR의 소속 공화국 우크라이나 SSR령으로 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토사구팽당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이로써 붕괴하고 정부는 국외로 망명하였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이 되어서야 소련 해체로 소련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이후 우크라이나 독립 1주년을 이틀 앞둔 1992년 망명 정부의 대표였던 플라부크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법적 후계자로 새 정부를 인정하고 레오니드 크라우추크 대통령에게 권한을 이임하면서 정식적으로 소멸하였다.
6. 의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우크라이나 역사상 최초의 우크라이나인 민족국가이다.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에 속한 지역들의 대부분을 안정적으로 통치했지만, 존속기간이 짧았고 이후에는 네스토르 마흐노의 흑군과 안톤 데니킨의 남러시아 정부, 소비에트 세력이 난립하고 소련으로 편입되면서 폴란드령이 된 서부를 제외하고는 조국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적었다. 하지만 지속되는 소련 정부의 탄압과 삽질로 인해 민족주의자들은 1차대전 이후에 생겨난 비볼셰비키 계열의 우크라이나 정권이나 군벌들에 대해 재평가 하게 되었고 특히 민족주의가 강했던 갈리치아 지역에서 반소 파르티잔이 종전 이후에도 활동하였다.2022년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밀려 역사의 미아로 남아 관심조차 받지 못했으나, 러시아가 다시 우크라이나를 자국의 영향권 내로 복속시키려는 패권주의의 야욕으로 우크라이나를 압박하자, 우크라이나사 최초의 민족국가로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실체에 대하여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다만 극렬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무능하고 이전에 서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폴란드와 손을 잡아서 우크라이나를 둘로 분열시켰다는 이유로 호의적이지 않다.
7. 군사
자세한 내용은 우크라이나 인민군 문서 참고하십시오.8. 매체
- 전략게임 하츠 오브 아이언 4의 유명 모드 중 하나인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6]에서는 멸망한 국가로 등장한다. 스코로파즈키의 우크라이나국으로 공화주의 루트를 타면 재건할 수 있다.
- 우크라이나 스팀펑크 만화인 볼랴의 배경으로 나온다.
[1]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측이 제출한 지도로, 이대로 자신들의 영역을 확정지으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 러일전쟁에서 복무한 코자크 사령관이자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우크라이나 제 1군단을 지휘한 군단장이었다. 그는 제 1차 자유 코자크 대회에서 지도자(Otaman)으로 선출되었다.[3]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소속 우크라이나계 병사들로 이루어진 부대였다.[4] 스코로파즈키는 식량징발을 원치 않았으나 독일군 사령부의 요구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시행했다.[5] 폴란드의 원초 목표는 우크라이나 독립 더 나아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중흥이었는데, 러시아 SFSR과 폴란드가 정전한 1920년 10월까지 폴란드-우크라이나 동맹이 얻은 영역은 우크라이나 서단부에 지나지 않았다.[6] 1차 세계대전에서 동맹국이 승리한 세계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