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80d53><colcolor=#ffffff> 스웨덴 바사 왕조 제3대 국왕 요한 3세 Johan III | |
출생 | 1537년 12월 20일 |
스웨덴 스테예보리 성 | |
사망 | 1592년 11월 17일 (향년 54세) |
스웨덴 스톡홀름 트레 크로노르[1] | |
재위 | 스웨덴 왕국의 왕 |
1569년 1월 ~ 1592년 11월 17일 | |
배우자 | 카타지나 야기엘론카[2] (1562년 결혼 / 1583년 사망) |
구닐라 비엘케 (1585년 결혼) | |
자녀 | 이사벨라, 지그문트 3세 바사, 안나, 요한, 소피아[3](사생아) |
아버지 | 구스타브 1세 바사 |
어머니 | 마르가레타 레이욘후부드 |
형제 | 카타리나, 세실리아, 망누스, 안나, 소피아, 엘리사베트, 칼 9세 |
종교 | 가톨릭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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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복형 에리크 14세를 폐위시키고 즉위하였으며, 말년에 가톨릭을 부활시키고자 시도하여 스웨덴을 다시 파국으로 몰고갔다.2. 생애
구스타브 1세 바사의 둘째 아들로 1557년 핀란드[4] 공작으로 책봉되었다.이미 구스타브 1세가 살아있던 시절부터 에리크 14세와는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으며, 남서수오미 지역을 봉토로 받은 이후부터는 독단적인 외교 정책을 추구해 폴란드 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의 누이 카타지나 야기엘론카와 결혼했다. 이에 열받은 에리크 14세는 그를 투옥했으나, 1567년에 석방되었고 막내동생 칼과 제휴하여 에리크 14세를 몰아내 스웨덴 왕위를 차지했다.
1570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중재로 슈테틴 조약을 체결하여 덴마크와의 갈등에 종지부를 찍었다. 루스 차르국과의 계속된 리보니아 전쟁에서는 폰투스 드 라 가르디(Pontus de la Gardie 1520~1585)[5]를 파견하여 켁스홀름(Kexholm)[6]과 이조라[7]를 정복했다.
말년에는 아들 시기스문드를 폴란드 왕위 후보자로 내세워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통치자로 앉혔으며 가톨릭의 부활을 꾀했으나 동생 칼 공작에게 저지당했다. 자신의 종교적인 견해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1592년 화병으로 사망했다.
3. 기타
- 그가 예전에 핀란드 공작으로 부임했던 덕분에 오늘날 핀란드에는 그의 유산이 많이 남아있다. 1558년 비에르네보리(Björneborg)를 세웠으며, 투르쿠 성에는 그와 관련된 전시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 그는 역대 스웨덴 국왕 중에 처음으로 핀란드 대공(Storfurste av Finland)을 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