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80d53><colcolor=#ffffff> 스웨덴 팔츠츠바이브뤼켄 왕조 제3대 국왕 칼 12세 Karl XII | |||
출생 | 1682년 6월 17일 | ||
스웨덴 스톡홀름 트레 크레노르[1] | |||
사망 | 1718년 11월 30일 (향년 36세) | ||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프레드릭스할 (現 노르웨이 할렌) | |||
재위기간 | 스웨덴 국왕 | ||
1697년 4월 5일 ~ 1718년 11월 30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a80d53><colcolor=#fff> 가문 | 팔츠츠바이브뤼켄 가문 | |
아버지 | 칼 11세 | ||
어머니 | 덴마크의 울리케 엘레오노레 | ||
형제자매 | 헤드비그 소피아, 울리카 엘레오노라 | ||
종교 | 루터교회 | }}}}}}}}} |
[clearfix]
1. 개요
스웨덴 제국의 왕.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취미는 늑대 사냥과 곰 사냥일 정도로 강인한 면모를 보이던 왕이었다. 전술적 감각에서는 당대 최고 수준이었으나 외교에서 약점을 보이며 이웃 국가들을 적으로 돌리는 바람에 몰락한 인물이다. 태어나서 말을 이해할 때부터 승마와 검술을 배우고 병법을 공부한 후 15살에 즉위하여 18살에 대북방전쟁을 치르다 36살에 요절하였으니 반평생 싸우다 죽은 셈이다.[2]2. 생애
즉위 직후인 1697년의 칼 12세. |
아버지인 칼 11세가 1697년,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15살의 나이에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했다. 초기에는 자신을 보좌하던 섭정위원회의 말을 거스르지 않고 순종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섭정위원회가 이권을 두고 갈라서기 시작하자 그 틈을 타 반대파 귀족들을 모두 쳐내면서 강력한 왕권을 쥐었다.
그리고 이때, 급변하는 역사의 파도가 칼 12세의 앞에 들이닥쳤다.
2.1. 소년 왕, 전쟁터에 나서다
"영토에 관한 한 짐을 공격하는 이는 무조건 쳐부술 것이고, 절대 타협은 없을 것이오."
볼테르와 주고받은 편지 中
당시 루스 차르국의 표트르 1세는 발트해로 나가기 위한 항구를 얻기 위해 덴마크,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연합하여 스웨덴을 상대로 대북방전쟁을 일으켰다. 거의 즉위하자마자 터진 사건이라 칼 12세의 인생은 사실상 이 전쟁이 처음이자 끝이 되었다.볼테르와 주고받은 편지 中
1700년 작센 선제후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 14,000명이 스웨덴령 리보니아의 리가 요새를 침공한 것을 시작으로 덴마크군 16,000명도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을 침공했고, 루스 차르국 또한 4만 명을 동원해 나르바 요새를 공격했다. 칼 12세는 사방에서 밀려오는 공격을 막는 것보다 역공을 통한 동맹 붕괴를 노리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칼 12세는 잉글랜드 왕국의 협조를 얻어 스웨덴군 8,000명을 43척의 전함에 나눠 태운 후 덴마크 코펜하겐 북부 해안 상륙에 성공했고 결국 덴마크를 동맹에서 이탈시켰다. 그리고 지체없이 스웨덴령 리보니아와 에스토니아로 진격, 그곳을 공격하던 루스 차르국군과의 격전을 벌이게 되는데 첫번째 전투였던 나르바 전투에서 훈련이 잘된 스웨덴군의 기습 공격이 성공함과 동시에 루스 차르국군이 자신들이 고용한 용병들을 무시하는 행동으로 인해 결국 단순 숫자에서도 3배가 많았던[3] 루스 차르국군이 대 참패를 하기에 이른다. 무기들은 물론이고 정예병까지 몰살되었던 상황이라 만약 모스크바로 바로 진격했다면 표트르 1세 또한 손쓸 방법이 없었고 칼 12세의 측근들 또한 모스크바로의 진격을 제안했으나, 칼 12세는 작센 선제후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치기위해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버렸다.[4]
2만에 달하는 작센, 폴란드, 리투아니아, 루스 차르국 연합군과 프라우슈타트에서 마주한 칼 12세는 1만의 스웨덴군을 이끌고 공격을 감행, 그야말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스웨덴군의 전사자는 단 400명에 불과했는데, 연합군은 전사자 7천명, 포로가 7천명이었다.
2년 후인 1702년에 펼쳐진 클리슈프 전투에서는 천재적인 전략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을 박살내버리고 폴란드 북부를 휩쓸면서 폐허로 만들었다. 결국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항복을 선언했고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2세를 폐위시킨 후 스웨덴의 편에 섰다. 이때가 그의 전성기였다.
2.2. 표트르 1세와의 맞대결
스웨덴을 침공해 온 세력들 중 표트르 1세가 버티고 있는 루스 차르국만이 남게 되자 칼 12세는 곧바로 기수를 돌려 모스크바로 침공을 감행했으나 그 사이 표트르 1세는 군사력을 원상 복구하는 데 성공했다.1708년 7월 홀로프친 전투에서 루스 차르국을 격파했으나 스몰렌스크의 강력한 저항에 발이 묶인 칼 12세와 스웨덴군은 청야전술과 동장군으로 인해 전염병이 퍼지며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모스크바 직행을 포기하고 우크라이나로 방향을 돌렸다.
때마침 우크라이나의 코자키인 이반 마제파가 루스 차르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꿈꾸며 스웨덴군을 도와 봉기하였다. 칼 12세는 스웨덴과 코자키 연합군 16,000명을 이끌고 1709년 여름 루스 차르국의 폴타바를 공격했다. 이 소식에 표트르 1세는 자신이 직접 42,00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출전하여 당대 최고의 전쟁 영웅들끼리의 맞대결이 펼쳐졌다.
하지만 이 때 칼 12세가 다리에 부상을 입어[5] 지휘를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칼 12세의 수석 군사 고문이자 육군 부사령관인 칼 구스타브 렌셸드(Carl Gustav Rehnskiöld) (1651년 ~ 1722년)가 대리로 지휘했다. 이에 따른 지휘 체계 붕괴와 수적 열세, 표트르 1세의 전략이 먹혀 들어가며 패배를 모르던 칼 12세와 스웨덴군에게 폴타바 전투에서 뼈아픈 참패를 안겼다.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단 한 번의 패배로 대북방전쟁에서 스웨덴의 몰락으로 이어진 점은 마치 항우와 비슷하다. 결국 수많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전투에 의해 승패가 갈릴 만큼 스웨덴의 체급이 작았다고 볼 수 있다.[6]
패배한 칼 12세는 너무나도 깊숙히 진격해 있었던 탓에 스웨덴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루스 차르국에게 패한 아픔이 있는 아흐메트 3세는 칼 12세를 극진히 대접했다.
스웨덴군과 오스만 제국군은 1711년 프루트강 전투에서 루스 차르국을 대파했다. 그러나 표트르 1세가 휴전을 요청하자, 아흐메트 3세는 아조프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휴전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오스만의 힘을 빌려 루스 차르국에 큰 타격을 입히려던 칼 12세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더군다나 오스만 제국 황실에 친 스웨덴 세력을 심으려고 획책하던 것이 발각된 것은 물론 자신과 부하들의 주둔비용이 오스만 제국 재정에 부담을 주고 그의 측근이 막대한 빚을 지자 상인들과 연계되어 있던 예니체리가 쳐들어와서 소규모 충돌이 벌어진 끝에 찍 소리도 못하고 갇혀 지냈다.
그 사이 스웨덴에게 이를 갈던 덴마크나 작센, 폴란드-리투아니아, 프로이센 왕국, 하노버 선제후국까지 숟가락을 얹으면서 스웨덴은 사면초가에 몰렸다. 그럼에도 루스 차르국을 무력으로 물리치겠다는 야심을 버리지 못하다가 1715년에서야 조국으로 돌아갔는데, 돌아오자마자 덴마크를 침공하면서 또 전쟁을 시작했다.
2.3. 사망
칼 12세의 시신을 매고 철수하는 스웨덴군. 1884년 구스타프 세데르스트룀 작. |
1718년 11월 30일, 칼 12세는 당시 덴마크 영토였던 노르웨이의 요새 할렌을 공격하던 중, 유탄이 관자놀이를 관통하는 바람에 즉사했다. 국왕이 전사하자 스웨덴군은 철수했다.
그의 사후에도 스웨덴은 루스 차르국, 덴마크와 전쟁을 지속했으나 결국 1721년 뉘스타드[7] 조약으로 전쟁을 끝냈다. 이 조약으로 스웨덴은 17세기에 획득한 발트해 연안과 북독일 대부분을 상실했으며, 러시아는 발트해로 통하는 출구를 열어 유럽 열강의 일원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칼 12세의 죽음 이후 스웨덴은 열강에서 탈락하게 되었고 오늘날 스웨덴인들도 그가 전사한 것을 아쉬워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당시 스웨덴의 민심은 20년에 달하는 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피폐해졌는데도 칼 12세는 전쟁을 고집하여 여론이 험악해진 상태였던지라, 국왕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슬퍼하기보다는 평화가 도래하는 것이 아닌가 기대하며 기뻐하는 분위기였다. 후술한 암살설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
2.3.1. 암살?
1917년에 마지막으로 부검된 칼 12세의 시신. | 스톡홀름의 리다르홀름 교회에 있는 칼 12세의 석관. |
칼 12세의 죽음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적의 저격수가 발사한 머스킷 탄이나 요새에서 발사한 포도탄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 칼 12세가 사망한 참호의 주변은 요새에서 쏜 총탄과 포탄에 희생자가 많이 나던 곳이었고, 그의 모자에 난 구멍이나 머리의 상처는 느린 탄속이 발사된 포도탄이 만드는 것들과 유사하다.
다른 하나는 암살당했다는 것이다.[8] 왕이 너무 갑작스럽게 사망했기 때문에 암살설은 사망 당시부터 꾸준히 있었으며, 이 단락 도입부의 사진을 보면, 관자놀이의 구멍이 너무 커서 사인이 유탄이 아니라 머스킷으로 관자놀이에 쏜 초근접 사격으로도 보인다.[9] 또한 시신은 발견 당시 참호에서 엎드린 채로 발견되었는데, 시신은 요새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총상은 가로로 났다는 점도 이상하다고 부각되었다. 게다가 그의 주변에 여러 사람들이 있었지만, 어두워서 아무도 왕이 죽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나아가 한 병사가 칼 12세의 시신에서 황동 단추로 만든 총알[10]을 수거해서 보관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후대에 발견된 그 총알을 검사해보니 혈흔이 묻어 있었다. DNA 검사 결과 혈흔의 DNA는 칼 12세의 DNA와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났지만, 양이 너무 적어서 명확한 결론을 내긴 힘들었다. 여하간 이런 결과로 한때 암살설이 유력해보였지만 2005년에 Peter From은 황동 단추 전설은 터무니없다고 반박하는 등 사안은 여전히 논쟁 중에 있다.
정말로 암살당했다면 용의선상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전쟁에 지칠대로 지쳤을 칼 12세의 부하들이다. 1716년 이후에는 전쟁의 대세가 기울었음에도 불구하고 칼 12세는 휴전을 거부하고 전쟁을 강행했기에, 스웨덴 국민들은 전쟁에 염증을 내며 모두 왕이 미쳤다고 생각하는 상황이었다. 다른 하나는 왕권에 가까웠던 귀족들이다. 칼 12세는 미혼이라 후계자가 없었기에, 처남인 프레드리크 1세, 혹은 사촌 팔츠츠바이브뤼켄 궁정백 구스타프 자무엘 레오폴트(Gustav Samuel Leopold von Pfalz-Zweibrücken 1670~1731) 등의 잠재적 계승자들이 왕위를 노리고 암살을 사주했을 가능성도 있다.
1917년까지 세 번이나 부검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았고, 지금도 스웨덴 역사학계와 서양 역사학계에서는 칼 12세의 죽음이 암살인가 전사인가 하는 논쟁이 꾸준히 있다. 2022년에도 탄도 실험과 왕의 두개골에 납흔이 없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포도탄에 저격당했다는 설이 나왔다.
3. 후계자
칼 12세는 미혼으로 후계자 지명도 하지 않고[11] 전사했다. 누나 헤드비그 소피아의 아들인 카를 프리드리히[12]와 여동생인 울리카 엘레오노라, 살리카법 때문에 팔츠츠바이브뤼켄 궁정백국을 물려받은 부계쪽 친척 구스타프 자무엘 레오폴트(칼 10세 구스타브의 동생 요한 아돌프의 아들) 3인이 유력 후계자로 떠올랐으나 구스타프 자무엘 레오폴트는 나이도 많은데다가 이쪽 역시 자식이 없었고, 앞선 둘에 비하면 명분이나 지지하는 세력이 미약했다. 결국 스웨덴 왕위 계승은 카를 프리드리히와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대결이 되었는데 헤드비그 소피아가 울리카 엘레오노라보다 언니이기 때문에 헤드비그 소피아의 아들 카를 프리드리히가 이모인 울리카 엘레오노라보다 계승서열이 더 앞섰지만 왕권을 제한하는 조건으로 아르비드 호른과 타협하여 여왕이 된 울리카 엘레오노라가 남편인 헤센카셀[13]의 방백(Landgraf)[14] 프리드리히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둘 다 죽었을 때 칼 12세의 6촌 동생 아돌프 프레드리크가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하였고, 그의 가계인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는 나폴레옹 전쟁 시기까지 이어졌다.4. 기타
1703년에는 성경을 스웨덴어로 다시 번역하도록 했는데 이 시기에 나온 성경 판본은 무려 217년간 스웨덴 국교회에서 사용되었다. #일본에서는 유성왕이란 별칭이 있다. 은하영웅전설에서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과 비슷하다고 언급된 북방 소국의 유성왕이 바로 이 사람이다.
오스만 제국에서 머물렀을 때 현지 요리인 쾨프테에 매료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쾨프테의 레시피를 전수받았고 이 요리가 바로 미트볼이 된다.
스웨덴의 메탈 밴드 사바톤의 앨범 및 동명의 곡 Carolus Rex, Poltava 그리고 Konungens Likfärd는 모두 이 칼 12세에 대해 노래하거나, 칼 12세와 관련된 노래이다.[15]
여러모로 용감하고 겁이 없는 인물이였는데, 곰 학살자라는 이명에 국왕이자 총사령관이 최전선에서 돌격하는 건 기본이었고 전장 한가운데에서 참호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직접 정찰을 하자 그를 도우러 온 프랑스 장교가 깜짝 놀라 "폐하. 총알은 신분 따지지 않고 날아옵니다. 몸을 피하십시오."라고 대단히 상식적인 경고를 하자 "걱정 마시게, 짐이 총알을 한 두번 본 줄 아느냐?"라고 대답하였고 근처에 있던 스웨덴 장교는 "말리면 더 위험한 행동을 하실 테니 그냥 두시오."라고 말했다.
스웨덴 극우주의자들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로 그가 사망한 11월 30일에 극우주의자들이 행진을 하는 등 여러모로 스웨덴 사회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고 한다.[16]
[1] 그가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 자리에 지은 궁전이 현재의 스톡홀름 왕궁.[2] 관련 기사도 있으니 참고.[3] 스웨덴군은 10,500명, 루스 차르국은 3만 명.[4] 모스크바로 진격했으면 전쟁 흐름이 크게 변했을텐데 작센 선제후국 및 폴란드-리투아니아 측에 후방을 공격당할 위험이 있다는 잘못된 판단이 결과적으로는 스웨덴을 몰락시켰다.[5] 저격수가 쏜 유탄이 발뒤꿈치를 뚫고 들어가 엄지발가락에 박혔다. 이 때문에 수술로 총탄을 제거하고 상처가 나을 때까지 걸을 수가 없었다.[6] 실제 18세기 스웨덴의 인구는 스웨덴과 핀란드를 다 합쳐도 200만이 되지 않았다.[7] 현 핀란드 우시카우풍키(Uusikaupunki).[8] 대표적으로 Carl. o. Nordling의 논문이 있다.[9] 당시 쓰던 머스킷볼은 지금 총탄보다 구경이 더 크다. 최소 9mm부터 12~13mm까지 정도.[10] 당시 스웨덴에서는 왕은 대부분의 총알에는 무적이지만, 왕의 재킷에 달린 황동 단추로 만든 총알에는 죽는다는 미신이 있었다.[11] 생전에 후계자 지명을 해달라고 여러 차례 부탁을 받았으나 '지금도 신하들이 내게 복종하지 않는데 내가 죽으면 더 복종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후계자 지명을 거부했다.#[12] 클리슈프 전투에서 전사한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프리드리히 4세의 아들로 표트르 1세의 장녀 안나 페트로브나와 결혼해 얻은 아들 카를 페터 울리히가 나중에 러시아 제국의 표트르 3세로 즉위한다.[13] 독일 제국이 핀란드 내전 이후 핀란드에 세우려 했던 왕조이기도 하며, 원소 하슘의 이름의 유래가 된 가문이기도 하다.[14] 백작에 해당되는 작위이다. 일반 백작보다는 높지만 변경백 (후작/Markgraf, Marquis)보다는 낮다.[15] Carolus Rex는 칼 12세의 즉위, Poltava는 칼 12세의 대패였던 폴타바 전투 그리고 Konungens Likfärd(영어판 Long Live the King)는 칼 12세의 죽음에 대해 다룬다.[16]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의 자서전에도 나오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