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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 개요
Diaspora / διασπορά고전 그리스어로 파종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집단 혹은 이주 그 자체를 의미한다.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남중국계 화교[1], 아일랜드인, 스코틀랜드인[2], 남인도인[3], 그리스인 등이 세계사 속에서 전세계를 누빈 경우다. 상술한 민족 집단 중 화교와 인도계, 그리스계를 제외하면 본토보다 외국으로 퍼진 후손들이 많은 디아스포라 민족으로 유명하다.
2. 역사적 사례
2.1. 유대인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수로 인하여 중동 전역에 유대인 집단이 확산되었는데 원래 디아스포라는 고전 그리스어 단어지만 좁은 의미에서 디아스포라라고 하면 대체로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의미한다. 이전까진 선지자들과 왕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혼합 종교적 관습이나 다신교 신앙이 완전히 수그러들지 않았으나 희한하게도 포로기 시련을 거치면서 이런 관습이나 신앙 양태가 거의 씨가 마르다 싶다 할 정도로 근절되었다. 신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자유는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다르게[4] 유대인들이 포로기 기간 동안에 삶에서 자율성을 빼앗긴 것에 익숙해져 자아가 약해졌고 힘든 삶 속에서 더욱 신앙에 의지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신앙이 바로잡혔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는 이스라엘 신앙 분파들끼리 서로 우상숭배자 내지는 다신교도라고 욕하면서 경쟁적으로 일신교쪽 방향으로 갈 정도. 이후로도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재정착과 외세의 침입으로 인한 이주를 반복하게 된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디아스포라는 서기 132년에 일어났는데, 로마 제국을 상대로 일으킨 반란[5]이 진압된 이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거주를 금지하면서 많은 유대인들이 국외로 이주하게 된다.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일대에서만 살고 있다가 강제로 쫓겨났다는 인식이 있지만, 유대-로마 전쟁 이전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자발적으로 이집트나 소아시아 일대로 이주하고 있었다. 애초에 기원전 4세기부터 서기 1세기까지 약 500년간 이어졌던 헬레니즘 시대의 분위기 자체가 사해동포주의로 가득 차있어서 국외 이주를 그렇게 꺼리는 분위기가 아니기도 했고, 상대적으로 미개발지역이었던 팔레스타인보다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게 먹고 살기에 유리했다. 중요한 점은 로마 제국이 예루살렘을 제외한 다른 팔레스타인 지방을 포함한 전 지역에서의 유대인 거주를 허용했다는 것이다. 또한 예루살렘 거주가 금지된 것은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뿐이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영적인 의미로 죄 많은 세상 가운데에서 본향인 천국을 소망하면서 신앙을 지키며 힘겹게 살아가는 성도들을 상징한다.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기 기간은 70년이었는데, 이 기간은 성경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수명에 해당하는 기간이기도 하다.[6] 즉, 성도들은 인생 자체가 바벨론 포로기인 것이다.
2.2. 아시아
일반적으로 가장 유명한 사례는 중국과 인도다. 중원에서는 고대 시대부터 이미 많은 한족과 호족을 막론하고 화북과 막북, 북방의 민족들이 왕조가 멸망할때마다 화중, 화남 등 남쪽으로 이주하여 현지인과 통혼 혼혈되어 융화되어 갔으며 이 북방의 민족들이 바로 오리지널 화교(華僑)라고 할 수 있다.[7]본격적인 화교의 기원은 19세기 이후 청나라가 혼란스러워지면서부터이다. 당시 청나라를 떠난 한족들의 대부분은 동남아로 향했으나, 일부는 미국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미국 서부 일대로 이주하였으며, 중국계 미국인들이 되었다. 이들중 상당수가 말레이시아 주석 광산이나 미대륙 횡단철도 건설을 비롯한 일용직 노동자에 종사했기 때문에 이들을 일컬는 쿨리(苦力, coolies)라는 차별적 용어가 유행하고 호주나 미국, 멕시코 등지에서는 백인우월주의적 인종차별을 받기도 했다. 다만 쿨리라는 단어 자체가 중국인만을 지칭한 것은 아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당시 유럽 및 미주에서 육체 노동직에 종사하는 인도인들도 쿨리라고 불렸다. 비슷한 시기 인도인들 역시 먹고 살길을 찾아 동남아시아나 카리브 해 섬나라들 동아프리카 케냐와 우간다, 탄자니아 그리고 남아공, 오세아니아 일대로 대거 이주를 해나갔는데, 속어로 데시(Desi)라고도 불리는 이들의 수는 약 2500만 명 정도인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 인도인 디아스포라는 인교(印僑)라고도 불리며 동남아의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뿐만 아니라 피지, 가이아나, 수리남,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중요한 민족 구성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일본 역시 중국, 인도에 비하는 규모까지는 아니지만 전국시대로부터 일제 때까지 동남아 각지나 브라질에서 일본계 미국인, 일본계 브라질인, 일본계 팔라우인과도 같은 디아스포라 이주 세력을 이루었고, 이를 화교(和僑) 라고 한다.
또한 20세기 중반,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베트남 전쟁의 종전 및 여러 국가들의 공산화 당시 발생하여 싱가포르, 호주와 같은 주변 국가에 정착한 보트피플도 디아스포라의 범주에 들어간다.
2.2.1. 한국
한민족 역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말 사이에 상당한 규모의 디아스포라를 경험했다. 조선 구한말기의 혼란을 피해 1860년대부터 많은 수의 사람들이 연해주와 만주 일대로 이주하였다.[8] 1910년 국권침탈 이후에는 단순히 경제적인 동기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동기를 가지고 해외로 이주하는 수가 늘어났는데, 일제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1920년대 연평균 대략 1만명이 국외 이주를 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1930년대 이후로는 일본 제국의 제국주의적 해외 침공 등에 동원되어 강제로 이주된 사람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서 1945년 광복 당시 통계로 공식적으로만 일본에 약 110만 명, 만주 일대에 120만 명이 이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48년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로는 미국으로의 이주가 주를 이루어 1965년 미국 당국이 이민법을 개정하면서 직계 가족들의 경우 제한없이 초청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로 미국 이민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져 이민자의 수가 일본계 미국인(150만명) 보다도 많은 260만명에 달했다. 미국 이외에도 일본(90만명), 중국(250만명), 중앙아시아(50만명) 등에도 디아스포라가 이루어졌다. 하위 문단의 해외동포는 대체로 이 시기 이주한 한국인 디아스포라 후예들이다.2.2.1.1. 재일 한국인, 조선적
이 중 일본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은 재일 한국인이 되었으며 그 중 한국의 국적을 보유하지 않는 자들은 조선적이라고 한다. 다수가 광복과 동시에 귀국하였고 법이 개정되면서 남아있는 조선적도 대한민국으로 귀국할 수 있게 되었으며, 북한 정권의 공작에 속아서 일부는 북한으로 들어가게 되어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2.2.1.2. 고려인
러시아 연해주, 외만주로 이주했던 한인들은 소련의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하여 고려인으로 머무르게 되었다. 사할린에도 한인이 남아있다. 옐친이 1993년 강제이주에 대해 사과를 하며 연해주, 우수리스크, 사할린으로 다시 돌아온 고려인도 있었다. 연구에 따르면, 2002년에 약 470,000명의 고려인이 독립국가연합에 거주하며, 그중 198,000명이 우즈베키스탄에, 125,000명이 러시아, 105,000명이 카자흐스탄, 19,000명이 키르기스스탄, 12,000명이 우크라이나, 6,000명이 타지키스탄, 3,000명이 투르크메니스탄, 5,000명이 기타 지역에 살고 있다.2.2.1.3. 조선족
만주(간도)에 이주한 한인들은 광복 이후에도 절반 이상이 현지에 머무른다. 귀국 대신에 남아 있는 것을 선택하면서 이들은 국공내전에 참전하고 중국공산당에 입당하며 활동하였다. 1952년 만주에 독립국가가 아닌 자치구인 연변조선민족자치구가 만들어졌다.[9] 1950년대 후반부터 중국공산당에서 홍위병을 자처하며 한민족 내셔널리즘과 조선족 종족에 대한 숙청 활동을 펼치면서 이후 조선족 사회에 중화 내셔널리즘 교육이 더욱 강화되고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 우상화 교육이 실시되었다. 또한 같은 시기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공산당에서 당의 뜻에 반하면 모든 것이 반동 취급당하면서 이후로 중국과 중국인의 방식에 가깝게 살아가게 되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에 조선족이 많이 유입되었다.2.3. 유럽
디아스포라의 어원이 고전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잦은 대규모 이주가 행해졌고,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유명해지기 전에는 그리스인 디아스포라가 대표적인 디아스포라였다. 폴리스를 생활단위로 삼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중해와 흑해 전역에 진출하여 도시국가를 건설하였고, 이 중 일부는 지금까지도 대도시로 생존해있다. 프랑스의 마르세유나,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 타란토 등이 대표적인 사례. 또한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정복과 대제국 건설 이후로는 많은 그리스인들이 동방에 식민시를 건설하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대표적인 사례.[10] 덧붙여서 게르만족의 대이동, 슬라브족의 이동도 디아스포라에 해당한다는 시각도 일부 존재한다.중세에는 봉건제의 특성상 고대만큼 잦은 이주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십자군 전쟁을 통한 십자군 국가 같이 기독교도 집단들의 중동, 근동 이주나 서유럽에서부터 아메리카 대륙까지 사실상 당대 전 세계를 누빈 바이킹 혹은 동방식민운동, 대항해시대 같은 사례도 있기는 하다.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이후로 유럽에서의 대규모 이주는 다시 시작된다. 유럽 각국에서 미대륙 내의 식민지 개발에 나서기도 했고, 비슷한 시기 유럽 전역을 뒤흔든 종교개혁과 맞물려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이주했기 때문. 이들은 현재 북남미에 정착하고 있던 백인들의 선조가 되었으며 아메리카 원주민, 노예로 끌고온 흑인과 혼혈하여 히스패닉, 메스티소나 흑백혼혈이 형성되었다.
아일랜드에서도 대기근을 피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의 이주를 택했다. 대기근 직전 아일랜드의 인구수가 850만 명 정도였는데, 대기근 직후 400만으로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2세기 가까이가 지난 지금도 인구수가 600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3분의 1은 굶어 죽고 3분의 1은 미국으로 가고 보니 3분의 1만 남았다.라는 블랙 유머까지 있을 정도. 같은 켈트계인 스코틀랜드 또한 잉글랜드의 박해 및 비슷한 기근을 피해 북미, 호주로 대거 이주하여, 현재 5백만 남짓한 본토 인구수에 비해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 미국인, 호주인의 수는 그 두 배를 넘는다. 켈트계 이민자의 대규모 유입은 미국식 영어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신생 미국의 경제적 발전이 본격화된 19세기 중반 유럽에서는 경제적 동기와 기술적 발달[12]이 결합하여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 대이동이 이루어진다. 독일에서만 1840년부터 1870년까지의 약 30년 남짓한 기간동안 공식적으로만 240만 명이 미국으로 이주했으며[13], 19세기 후반부터는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이나 이탈리아를 비롯한 남유럽 일대에서의 대규모 북미 이주가 이루어진다. 미국뿐만 아니고,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도 백인을 선호했던것은 매한가지인지라 수 많은 독일인,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스페인인, 포르투갈인, 아랍인들이 라틴아메리카로 이주했다.
아르메니아인 역시 오랜 전란과 학살로 인해 중동이나 유럽, 미주 각국으로 이주해서 외국에 있는 아르메니아계가 많다.
2.4. 아프리카
자발적 동기로 이루어진 다른 지역에서의 이주와 달리[14], 아프리카의 디아스포라는 인신매매의 성격이 아주 짙다. 16~19세기 사이의 약 4세기동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행해진 노예무역으로 인하여 천만명 이상의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전 세계 곳곳에 팔려나간 것으로 추정되며, 이 중 상당수는 미주대륙으로 끌려갔다. 미국에서의 흑인은 남북 전쟁과 노예 해방 이후 남부에서 북부로 대이동하였다.특이 케이스로 17세기에 개신교 성향 백인들로서 종교적 자유를 찾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역으로 이주해온 보어인이 있다.
3. 문서가 개설된 디아스포라
3.1. 유럽
- 덴마크인
- 영국인
- 프랑스계 영국인
- 아일랜드계 영국인
- 인도계 영국인
- 파키스탄계 영국인
- 영국 흑인
- 폴란드계 영국인
- 러시아계 영국인
- 우크라이나계 영국인
- 일본계 영국인
- 한국계 영국인
- 헝가리계 영국인
- 튀르키예계 영국인
- 독일계 영국인
- 아르메니아계 영국인
- 그리스계 영국인
- 리투아니아계 영국인
- 벨라루스계 영국인
- 네덜란드인
- 프랑스인
- 러시아계 프랑스인
- 폴란드계 프랑스인
- 인도계 프랑스인
- 베트남계 프랑스인
- 이란계 프랑스인
- 아르메니아계 프랑스인
- 아랍계 프랑스인
- 그리스계 프랑스인
- 튀르키예계 프랑스인
- 우크라이나계 프랑스인
- 한국계 프랑스인
- 프랑스 흑인
- 아일랜드계 프랑스인
- 벨라루스계 프랑스인
- 이탈리아인
- 스페인인
- 독일인
- 러시아계 독일인
- 튀르키예계 독일인
- 폴란드계 독일인
- 이란계 독일인
- 아프가니스탄계 독일인
- 인도계 독일인
- 그리스계 독일인
- 아르메니아계 독일인
- 독일 흑인
- 우크라이나계 독일인
- 아일랜드계 독일인
- 벨라루스계 독일인
- 에스토니아인
- 라트비아인
- 리투아니아인
- 루마니아인
- 스웨덴인
- 세르비아인
- 우크라이나인
-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 폴란드계 우크라이나인
- 헝가리계 우크라이나인
- 불가리아계 우크라이나인
- 루마니아계 우크라이나인
- 아르메니아계 우크라이나인
- 한국계 우크라이나인
- 그리스계 우크라이나인
- 튀르키예계 우크라이나인
- 이탈리아계 우크라이나인
- 리투아니아계 우크라이나인
- 독일계 우크라이나인
- 벨라루스계 우크라이나인
- 러시아인
- 폴란드계 러시아인
- 한국계 러시아인
- 인도계 러시아인
- 독일계 러시아인
-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 중국계 러시아인
- 아르메니아계 러시아인
- 이란계 러시아인
- 러시아 흑인
- 몽골계 러시아인
- 아프가니스탄계 러시아인
- 불가리아계 러시아인
- 쿠르드계 러시아인
- 재러 베트남인
- 일본계 러시아인
- 이탈리아계 러시아인
- 덴마크계 러시아인
- 루마니아계 러시아인
- 오스트리아계 러시아인
- 핀란드계 러시아인
- 스웨덴계 러시아인
- 영국계 러시아인
- 아일랜드계 러시아인
- 그리스계 러시아인 / 흑해 그리스인
- 튀르키예계 러시아인 / 메스케티 튀르크
- 프랑스계 러시아인
- 노르웨이계 러시아인
- 스페인계 러시아인
- 네덜란드계 러시아인
- 스위스계 러시아인
- 체코계 러시아인
- 크로아티아계 러시아인
- 헝가리계 러시아인
- 라트비아계 러시아인
- 에스토니아계 러시아인
- 아랍계 러시아인
- 벨라루스계 러시아인
- 아제르바이잔계 러시아인
- 미국계 러시아인
- 타지키스탄계 러시아인
- 세르비아계 러시아인
- 핀란드인
- 포르투갈인
- 폴란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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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튀르키예인
- 오스트리아인
- 조지아인
- 아르메니아인
- 벨기에인
- 벨라루스인
- 몰도바인
3.2. 아시아
3.3. 오세아니아
3.4. 북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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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계 멕시코인
- 인도계 멕시코인
- 덴마크계 멕시코인
- 벨기에계 멕시코인
- 중국계 멕시코인
- 멕시코 유대인
- 멕시코 흑인
- 캐나다계 멕시코인
- 쿠바인
3.5. 남아메리카
- 브라질인
- 브라질 백인
- 독일계 브라질인
- 레바논계 브라질인
- 시리아계 브라질인
- 프랑스계 브라질인
- 이탈리아계 브라질인
- 스페인계 브라질인
- 폴란드계 브라질인
- 우크라이나계 브라질인
- 리투아니아계 브라질인
- 포르투갈계 브라질인
- 미국계 브라질인
- 한국계 브라질인
- 일본계 브라질인
- 중국계 브라질인
- 크로아티아계 브라질인
- 아르메니아계 브라질인
- 브라질 흑인
- 튀르키예계 브라질인
- 아르헨티나인
- 아일랜드계 아르헨티나인
- 스페인계 아르헨티나인
- 독일계 아르헨티나인
- 프랑스계 아르헨티나인
- 이탈리아계 아르헨티나인
- 크로아티아계 아르헨티나인
- 폴란드계 아르헨티나인
- 우크라이나계 아르헨티나인
- 벨라루스계 아르헨티나인
- 아랍계 아르헨티나인
- 슬로베니아계 아르헨티나인
- 아르메니아계 아르헨티나인
- 오스트리아계 아르헨티나인
- 포르투갈계 아르헨티나인
- 한국계 아르헨티나인
- 네덜란드계 아르헨티나인
- 튀르키예계 아르헨티나인
- 일본계 아르헨티나인
- 우루과이인
- 칠레인
- 베네수엘라인
- 페루인
- 볼리비아인
3.6. 아프리카
[1] 객가인, 민남인 등[2] 아일랜드계 미국인 인구 및 스코틀랜드계 미국인 인구가 본토 인구보다 더 많다.[3] 타밀인이 대표적이다.[4] 무제한적인 자율성은 사람의 자아를 매우 강하게 만든다.[5] 제1차 유대-로마 전쟁(AD 66~70), 바르 코크바의 난(AD 132~135년).[6]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편 90편 10절)[7] 정화의 대원정으로 유명한 정화 역시 한족이 아닌 회족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8] 20세기 초반부터 하와이를 비롯한 미주로의 이주도 시작되었지만, 이 시기 주된 이민지는 만주와 연해주 일대였다.[9] 후에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강등되어 현재의 연변으로 이어지게 된다.[10] 사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독보적인 인지도를 지니고 있을 뿐이지,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는 제국 전역에 굉장히 많았다.[11] 게르만족과 달리 훈족은 유목민임을 감안해야 한다. 유목 특성상 정착 없이 계속 이동하기 때문에 훈족의 이동은 디아스포라로 볼 수 없다.[12] 증기선과 같은 당시로는 신식 교통이 개발되면서 해외 이주가 훨씬 쉬워졌다.[13] 1865년 당시 독일 연방의 공식 인구가 3500만 명 정도였다. 인구의 7~8%가 빠져나갔던 것.[14] 반투족의 이동같은 민족대이주 사례도 있었다.[15] 잔류 러시아인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이 사할린섬 남부를 차지하면서 소멸했다.[16] 알제리 전쟁 후 거의 소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