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어: Italo-argentinos
이탈리아어: Italo-argentini
1. 개요
이탈리아계 아르헨티나인들은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이탈리아 출신 후손들을 의미한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큰 민족 집단으로서 최대 3천만 명의 아르헨티나인들이 이탈리아계 핏줄을 이어 받은 것으로 파악되는데, 이는 아르헨티나 전체 인구의 약 62.5%에 해당된다. 이 덕분에 아르헨티나 스페인어는 상당부분 이탈리아 각지의 방언에 영향을 받았으며, 아르헨티나 요리 등의 아르헨티나 문화는 이탈리아 문화의 큰 영향을 받았다.2. 이민사
이탈리아계 아르헨티나인들은 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이탈리아인들의 후손이다. 아르헨티나는 국토 대부분이 비옥하고 광활한 팜파스 평원에 위치하여 농업에 유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구 밀도도 낮아 새로 농경지를 개간하고 정착하기 이상적이었으며, 아르헨티나의 국민소득 수준 역시 유럽 상위권 국가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근대 이탈리아는 농민들의 빈곤 문제가 심각했다. 특히 이탈리아 남부의 경우 제한적인 토지에 비해 인구가 많았고 펠라그라병 같은 영양 결핍으로 인한 질병도 흔했다. 빈곤을 탈출하기 위해 상당수의 이탈리아인들이 미국 이민을 선택하는데, 가톨릭을 믿는 이탈리아인 인구들이 대거 유입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WASP들에 의해 이탈리아인 이민 쿼터제가 시행되었고, 이탈리아인들의 미국 이민이 많은 제한을 받게 되었다. 미국 이민 조건이 까다로워지자 다시 상당수의 이탈리아인들은 브라질로도 대량 이민을 가기 시작했으나, 브라질의 경우 과거 흑인 노예제 대농장 문화의 영향으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 당시에도 농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구타와 폭력이 난무하였고, 상당수의 이탈리아인 이민자들이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오는 상황이 일어났다. 20세기 초반에는 아르헨티나가 미국에 비해 이민 제한도 없으며 노동 환경도 브라질보다 훨씬 좋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탈리아인들이 아르헨티나로 대거 이민하기 시작하고 그 결과 오늘날 아르헨티나 인구의 상당수가 이탈리아계 조상을 두게 되었다.
연도 | 이민 인구 | 전체 이민자 중 이탈리아 출신 비율 |
1861 ~ 1870 | 113,554 | 71 % |
1871 ~ 1880 | 152,061 | 58 % |
1881 ~ 1890 | 493,885 | 59 % |
1891 ~ 1900 | 425,693 | 57 % |
1901 ~ 1910 | 796,190 | 45 % |
1911 ~ 1920 | 347,388 | 29 % |
1861 ~ 1920 총합 | 2,270,525 | 59 % |
아직 대량 이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 1869년 아르헨티나의 인구는 200만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1880년에서 1905년 사이 300만여 명에 달하는 인구가 유럽에서 아르헨티나로 입국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계절노동자였으나[1] 영구적으로 정착한 인구 역시 상당한 수준이었다. 1900년 당시에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거주민 중 1/3이 외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고 이민 2세대까지 합치면 절반을 넘겼을 것이다. 또한 아르헨티나의 출산율이 훨씬 뒤인 2010년대 중반까지 인구대체수준을 웃돌았기 때문에 202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아르헨티나 인구가 이탈리아 인구수를 넘길것이라는 말이 나올정도였다.
비교하자면 이탈리아계 미국인 중에서는 이탈리아 남부 출신, 이탈리아계 브라질인 중에는 이탈리아 북부 출신 비중이 높았다면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이탈리아인들은 북부와 남부 출신 비중이 서로 비등한 편이었다. 19세기에는 북이탈리아 출신 이민자들의 비중이 높았으나 20세기 초반 이탈리아 북부가 공업화된 것을 계기로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이탈리아 북부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민 가는 비중이 감소하고 대신 남부 출신 이민자들의 비중이 높아졌다.
3. 정치
이탈리아계들이 많다보니 이탈리아 본토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이들을 대변할 정당을 창당해서 이탈리아 의회 선거구 중 해외 선거구에서 의석 수를 획득하고 있다. 당사도 이탈리아가 아닌 아르헨티나에 있다.4. 유명인
- 후안 페론[2]
- 프란치스코 교황
- 디에고 마라도나
- 디에고 밀리토, 가브리엘 밀리토
- 디에고 시메오네
- 레오폴도 갈티에리
- 레이날도 비그노네
- 리오넬 메시
- 리오넬 스칼로니
- 로드리고 데 파울
- 마누 지노빌리
- 마우로 이카르디
- 마우리시오 마크리
-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 막시마 소레기에타 세루티
- 발렌틴 카르보니
- 아스토르 피아졸라
- 안드레스 노시오니
-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3]
- 앙헬 디 마리아
- 앤디 무시에티
- 파울로 디발라[4]
- 하비에르 마스체라노
- 하비에르 사네티
- 하비에르 파스토레
이외의 인물들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관련 항목
[1] 북반구에 위치한 이탈리아와 남반구에 위치한 아르헨티나는 수확철이 달랐고 이 때문에 아르헨티나에서 이른바 골론드리나스(Golondrinas; 제비)라고 해서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 농한기를 맞은 농업 노동자들이 이주노동자로 찾아오곤 했다. 19세기 말 남유럽에서 아르헨티나로 가는 뱃삯이 50달러 정도였는데, 이 금액은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 철도로 독일로 이동하는 표값보다도 쌌다.[2] 증조부가 당시 사르데냐인으로 1830년대 스페인으로 이주했다가 나중에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종종 자신의 사르데냐 핏줄을 자랑스러워했다.[3] 혈통 한정. 국가대표팀은 스페인을 선택했다.[4] 외할머니가 이탈리아 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