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23:34:16

원홍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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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C63B7><colcolor=#fff> {{{#fff 대한민국 제29대 육군3사관학교장}}}
원홍규
元홍규 | Won hong-gyu
본관 원주 원씨
학력 원주고등학교 (졸업 / 21회)
고려대학교 (산업공학 / 학사)
종교 천주교 (세례명: 요셉)
군사 경력
임관 육군제3사관학교 (16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79년 2월 ~ 2016년 5월
최종 계급 소장 (대한민국 육군)
최종 보직 육군본부 감찰실장
주요 보직 육군3사관학교
제7보병사단
육군특수전사령부 참모장
제7공수특전여단
육군3사관학교 생도대장
제31보병사단 제96보병연대
수도방위사령부 제1경비단 소대장

1. 개요2. 학력3. 생애4. 경력5. 평판
5.1. 간부들의 평가5.2. 용사들의 평가5.3. 그 외
6.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육군장성급 장교로 최종 계급은 소장으로 제7보병사단장과 육군3사관학교장을 역임하였다.

2. 학력

3. 생애

강원도 출신으로 원주고등학교(21회)를 졸업하고 육군3사관학교에 입교하였다. 1979년 2월 육군3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한 후, 육군보병학교에서의 초군반 교육을 마치고 수도방위사령부[1] 제1경비단의 소대장으로 보직되었다. 소대장 임기를 마치고 군 위탁 편입으로 고려대학교 산업공학과에 진학하여 그 곳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2].

준장 진급 후 육군3사관학교 생도대장, 제7공수특전여단장 등을 거쳐 소장으로 진급하였으며 대한민국 육군본부 감찰실장 보을 마지막으로 전역하였다.

전역 후에는 상지대학교 석좌교수와 아세아직업전문학교장 학장을 맡다가 현재는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감사실장을 맡고 있다.

4. 경력

5. 평판

휘하 간부와 용사들이 이 사람의 참모 역량을 최악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평판이 매우 나쁘다. 본인의 후배 장군인 윤의철(육사 43기) 장군에 버금갈 정도로 평가가 좋지 못하다[6]. 전형적인 멍부라 할 수 있다. 어떻게 이 멍청한 인간이 장군까지 진급할 수 있었을까? 보통 장교들은 멍청하면 중령 진급도 안 되는데[7]

5.1. 간부들의 평가

  • 간부들의 평에 따르면 지시를 한 번 내릴 때 명확한 기준이 없었을 뿐 아니라 막무가내식으로 일을 시키기만 했다. '거기 있잖아, 내 말이 뭔지는 잘 알지?'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하고 다녔다.[8]
  • 이 사람의 '그거 무엇인지'라는 말을 알아듣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해하기가 어려웠다는 평이 중론이다. 휘하 참모와 용사들은 이 사람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시간을 낭비해야만 했다. 똑똑한 참모가 이 사람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듣고 지시를 이행했는데도 이 사람은 툭 하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하고 다녔다.
  • 첫 보고 건을 보자마자 무조건 반려시키고 보았다. 몇 번이고 고쳐야 받아주었을 정도로 업무 효율이 낮은 사람이었다.
  • 육군3사관학교 생도대장 시절 생일빵을 때린 임관을 7일 앞둔 생도들을 퇴교 처분하고 런닝만 입혀 내쫓았으며 행정소송 취하를 종용했다. #
  • 생도대장 시절 3사 생도들은 하루에 10km(아침 2km, 오후 4km, 금요일 주간 구보 10km, 토요일 산악구보 완전군장 10km)가량을 구보해야 했다. 이는 후임 생도대장인 박종진 장군에 의해서 완화되었다. 박 장군은 생도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으며, 이후 소장, 중장을 거쳐 대장으로 전역하였다.
  • 제7공수특전여단장 시절 전투체육에서 구기종목을 모두 없애버리고 매주 수요일 산악구보 측정으로 바꾸었다. 또, 천리행군과 ATT, 고등산악 등 훈련을 자주 시켰음에도 개인정비 시간조차 주지 않아서 부상을 입는 장병들이 많았다. 정작 전임 여단장 때보다 훈련 성과가 나빴을 뿐 아니라 체력단련 실적 측면에서도 평가가 나빴다.

5.2. 용사들의 평가

  • 지휘관을 역임할 때마다 용사들을 관리하는 역량이 서툴러서 휘하 용사의 자살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이를 은폐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 육사 출신 후배 장군인 윤의철 장군과 판박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통제에만 이상하게 집착했지, 정작 성과는 나오지도 않았다는 비판이 있다.
  • 한 용사의 증언에 따르면 '나는 너희를 믿지 않는다. 너희를 믿을 바에 우리집 개를 믿는다.'고 하였다. 용사들의 관점에서 개보다 못한 인생이라는 말이 나올 법하다.
  • 96연대장 시절 아침마다 기상하면 대대에서 연대까지 뜀걸음을 시켰다.
  • 제7보병사단장 시절 기존에 있던 휴가를 모두 삭제하였다. 개인 휴가를 모두 단체 휴가로 바꿔서 개인이 따로 휴가를 나갈 수 없는 구조를 만들었다. 휴가를 새로 주지도 않았는데, 특급전사도 예외가 아니었다.[9] 결국 8연대에 소속된 모 용사가 김관진 당시 국방부장관 트위터에 직접 마음의 편지를 쓰는 사태가 벌어졌다. 김 장관 역시 이러한 심각성을 인지하여 원 장군에게 휴가를 복구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원 장군 본인은 복구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상급자에 대한 하극상이 아닐 수 없다.
  • 원 장군이 없애버린 휴가는 후임 사단장인 구홍모 장군이 다시 복구하였다. 이후, 구홍모 장군은 중장 진급에 성공하여 요직에 올라탔다[10].
  • 사단장 시절 개인 여건과 상관 없이 알통 구보를 강요하여 용사의 전투력 저하를 일으켰다.
  • 주말에는 개인 휴식 여건을 보장하지 않고 부대 주변 대민 봉사활동으로 돼지풀 제거를 강요하였다.
  • 사단 위수지역이 3주동안 춘천까지 확대되었다가 철회되었는데 당시 지역주민들과 갈등을 빚어서 그랬다고 한다. 결국 갈등이 해결되면서 환원되었다. 결국 원 사단장은 휴가를 없애고 이걸 다 외출로 바뀌버리면서 화천군에서 지역경제발전에 대한 공로로 상까지 받았다.
  • 동아리 활동이라는 명목하에 일과시간 종료 후 매일 1시간씩 강제로 공부를 시켰다. 즉 모든 개인정비 시간 및 여유시간을 규정에도 없는 사단장의 명령 때문에 가장 중요한 시간들을 박탈당했다는 의미이다. 그 시간에는 TV 시청도 금지 당했으며 대부분의 용사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5.3. 그 외

  • 한 번은 민간인과 시비가 붙었다는 이유만으로 군사경찰을 불렀으며, 민간인을 폭행하려한 전적이 있다.
  • 사단장 시절 본인이 담배를 싫어한다는 이유로 잠시 사단 전 구역을 금연구역화하고 흡연장 철수를 명한 적이 있다.

6. 여담

  • 천주교 신자로 세례명은 요셉이다.
  • 3사 4기수 후배인 서정열 장군과의 공통점으로 제7보병사단장, 육군3사관학교장, 육군본부 감찰실장 보직을 이어서 수행했다는 점이 있다. 하지만, 평판은 극과 극이다. 서 장군은 예나 지금이나 휘하 병력들로부터 존경을 받지만, 원 장군 본인은 휘하 참모와 용사로부터 평판이 매우 나쁘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 아들 원승환은 학군사관 54기로 임관하여 본인에 이어 군인의 길을 걷고 있다. 본인의 전역 한 달을 앞두고 특전사에서 같이 공수훈련을 받았다.


[1] 당시 사령관은 전성각으로, 후임자는 12.12 군사반란의 피해자 중 한 명인 장태완 장군이다.[2] 본인의 3사 2기수 선배인 한동주 장군도 소대장 임기를 마치고 고려대학교 행정학과에 진학하여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3] 후임 박종진[4] 전임 이상현, 후임 구홍모[5] 전임 김길영, 후임 금용백[6] 참고로 윤의철 장군은 문재인 정부 인사이다. 문재인 정부 하에서 국가위기관리센터장을 역임한 바 있다.[7] 보직이 잘 풀리거나 정권이 본인과 맞으면 가능하다. 윤의철의 경우 역시, 문재인 정권과 맞아서 중장까진 올라간 것이다.[8] 이 것은 지도자 원리를 기반으로 하는 것도 모자라 형식적으로나마 주는 재량권까지 빼앗는 악습이다.[9] 이건 윤의철만도 못한 짓이다. 윤의철은 최소한 특급전사에게는 휴가는 지급했다.[10] 거기에 구홍모 장군은 용장이면서 덕장으로 평판이 자자했고, 합동참모본부 내 요직에 올라탈만큼 능력까지 뛰어났을 뿐 아니라 이종섭국방부장관의 고향 친구이자 육사 40기 동기라는 점도 한몫했다. 구홍모 장군의 후임 사단장인 서정열 장군도 능력자에 덕장으로 평판이 자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