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0-31 19:05:06

유수호(정치인)

파일:국회상징.png [[대한민국|{{{#70000B 대한민국 }}}]] [[대한민국 국회|{{{#70000B 국회}}}]][[대한민국 국회의원|{{{#70000B 의원 }}}]] ([[대구광역시|{{{#70000B 대구광역시 }}}]] [[중구(대구)|{{{#70000B 중구 }}}]])
신설
유성환
이만섭
,(제12대 / 대구광역시 서구·중구),
제13~14대
유수호
제15대
박준규
파일:external/www.idaegu.co.kr/2015110901000342500022011.jpg
이름 유수호(劉守鎬)
생몰 1931년 12월 16일 ~ 2015년 11월 7일 (83세)
본관 강릉 유씨
학력 경북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법학 / 학사)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13, 14
가족 장남: 유승정, 장녀: 유진희,
차남: 유승민, 손자: 유훈동, 손녀 유담
종교 불교

1. 개요2. 생애
2.1. 판사 시절2.2. 정치인 시절
3. 가족관계4. 선거 이력

1. 개요

박정희 정권 시절 말 안 듣는 판사로 유명했던, 법조인으로서의 양심을 지켰던 판사 출신 정치인. 바른미래당 유승민 의원의 아버지이자 유담의 할아버지.

2. 생애

1931년 경상북도 영주군 이산면에서 태어났다.[1]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2] 1951년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1955년에 졸업하였다. 1955년에 제7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였으며, 1960년 육군 군법무관 대위로 군 복무를 마친 뒤, 대구지방법원 판사로 법조인 생활을 시작하였다.

1973년 판사 재임용에 탈락한 후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1985년부터 정치인으로 활약했다. 그러던 2015년 11월 7일에 세상을 떠났다. 84세 생일이 불과 한 달 앞이었다.

첫째 유승정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사법고시 합격후 서울남부지방법원장과 경상남도 선거관리위원장을 역임한 법조인이며 현재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둘째 유진희는 약사로 알려져있다. 막내 유승민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KDI 선임연구위원과 4선의원과 바른미래당의 당대표로 활동중이다.

2.1. 판사 시절


파일:유수호 1.jpg

부산지법 부장판사 시절 용두산 공원에서 수학여행을 온 차남 유승민과 찍은 기념사진.

1960년 대구지방법원 판사, 1966년 대구고등법원 판사, 1968년 대법원 재판연구관, 1970년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를 역임하였다. 당시 형사배석판사였던 이선우 변호사에 따르면, 재기발랄하고, 촌철살인의 언변을 구사하셨던 분이었다고 한다. 그 입담은 아들에게 잘 이어진 모양.

부산지법 부장판사 시절인 1971년 부산진구 을 지역구의 민주공화당원 강성태, 최영해가 당시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최두고 후보의 패색이 짙어지자 당원 천여명을 몰고 가 위협하며 개표소에 유리병을 던지는 등 난동을 부린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에 유수호 재판장은 주범인 공화당원 두 명에게 징역형이라는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이는 한창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적 지지를 얻고 있던 시기였고, 아무도 건들지 못할 정도의 세력을 가진 공화당원에게 드물게 실형이 내려진 것이다.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4.27 개표조작 사건'[3]의 주범인 윤동수 울산시장에게 징역 3년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이는 박정희가 부정선거로 당선되었음을 법적으로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박정희의 대통령 당선 이후 어수선하던 당시 정국을 완전히 뒤흔드는 빌미가 되었다. 두 달 뒤에는 박정희 정권 퇴진을 부르짖으며 반정부 시위를 주동한 당시 부산대학교 총학생회장 김정길에 대한 구속적부심에서 "증거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없다"며 김정길을 석방하였다. 결국 이러한 행동으로 박정희 정권에게 단단히 찍혔으며, 10월 유신 이후 1973년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참여정부에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최영도 변호사도 당시 해직판사중 1인이였는데, 그는 유수호 전 판사에 대해 올곧은 판사며 소신있는 재판을 했던 사람이다. 또한 사법파동 당시 박정희 정권의 판사 재임용 탈락방침에 부산에 있는 판사들을 소집해 회의하고 미리 사표를 제출하자고 한 사람이 유수호 판사였다 고 증언하였다.

또한 국민의 정부 초기 행정자치부 장관이자,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반자로 알려진 김정길 전 장관은, 당시 유신 직전이라 학생운동에 박정희 정권은 상당히 민감했는데, 유수호 부장판사님이 쉽지 않은 판결을 해주셨고 저는 큰 신세를 졌다라고 증언하였다.

그 후 대구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였고, 대구고려합동법률사무소에서 일하였다. 이후 46세라는 꽤 이른 나이에 제30대 대구지방변호사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후에 대한변호사협회 부회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법조인 시절부터 남모르게 장학사업이나 불우이웃을 많이 도왔다고 한다. 훗날 고 유수호 전 의원의 장례식에서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동창회장이 조문하면서, 옛날 경북대 사회학과 학생 하나가 백혈병을 앓을때 치료비를 보태주었던 것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전했다.

2.2. 정치인 시절

박정희에게 단단히 밉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민주공화당에 경상북도 대구시 동구-남구 선거구로 공천 신청을 하였으나 이효상에 밀려 공천에서 탈락하였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인 1985년 경북고등학교 동기인 노태우, 김윤환, 정호용와의 인연으로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였고,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대구직할시 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통일민주당 김현규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파일:ㅇㅅㅎ.png

민주정의당 국회의원 시절 소탈하고 대범하면서도 의리 있는 정치인으로 통하였다. 여당 의원이었지만 강단과 소신이 있어서 정부에 여당에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4] 심지어는 국회의원 당선 직후, 1988년 '월간조선' 8월호 좌담회에 참석해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때는 제6공화국노태우 시절이었다.
지나간 3, 4공화국 때 만든 긴급조치법 따위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은 한 마디로 위정자나 한 정부가 자기네들의 구미에만 맞는 법을 제정한 것이지, 국민을 위한 법을 제정한 것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가령 유신시절 긴급조치로 재판받은 피의자에게 7년 이상의 징역을 선고하곤 했지만 국민은 진심으로 그 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법을 옳은 법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은 자연법적 정의를 실정법이 제대로 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파일:유수호.jpg

월간조선 좌담회에 참석한 유수호 의원과 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 심지어 저 발언당시 유수호는 초선이였다.

또한 한 화물운전기사는, 네이버 카페에서 유수호 의원님께서는 35년전 개별면허 추진당시 다른 국회의원들은 각설이 취급하였지만, 유수호 의원님은 함께 아파하고 도움을 주셨다.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자유당 후보로 대구 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치러진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에 이종찬 전 의원 진영에 섰다. 그러나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992년 10월 박철언, 김용환, 장경우 의원 등과 함께 민자당을 탈당하여 이종찬 의원이 주도하는 새한국당에 합류했다.

199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새한국당이 정주영 전 회장이 대표로 있는 통일국민당과 통합을 할 때, 새한국당의 통합 협상대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통일국민당으로 들어간 후 정주영 전 회장의 당선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1992년 대선 몇일 앞두고 불거진 초원복집 사건때 국민당쪽 고발인으로 활약하였다.

파일:유수호 2.jpg

정주영 전 회장이 대선에 패배한 뒤 통일국민당은 신정치개혁당과 합당하여 신민당이 되었는데, 이때 유수호 역시 신민당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1994년말 신민당을 탈당하였고, 1995년 초 자유민주연합이 창당할 때 합류하였다.

자민련 의원 시절이던 1995년 김영삼이 저정한 5.18 특별법이 법률 불소급 원칙을 어긴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특별법은 헌법위반이라고 한 사람들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이제 와서 헌정질서를 바로잡겠다고 하니 이게 무슨 꼴이냐. 특히 전 대통령들 밑에서 공천 받고 녹 먹은 사람들이 자기 보스를 잡아넣겠다는 것이 도의적으로 맞는 말이냐.",[5]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대한민국 헌법 위에 군림하고 있는가?" 등의 발언을 했다.

파일:유수호 3.jpg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불출마를 선언하였고 "더 이상 정치를 해야 할 명분과 사명을 찾기 어려운 이때쯤 정치를 마감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판단했다. 천직인 재야 법조인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남기면서 정계를 은퇴하였다. 이후 자유민주연합 상임고문에 임명되었다.

3. 가족관계

부인 강옥성과 함께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장남 유승정(1955년생)은 경북고-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자신과 똑같이 육군 군법무관 대위로 군 복무를 한 뒤 서울남부지방법원장까지 역임하였으며, 현재는 법무법인 바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장녀 유진희는 약사로 알려져 있다.

사위 김진기(1949년생)는 경북고-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역시 자신과 똑같이 육군 군법무관 대위로 군 복무를 한 뒤 대구고등법원장까지 역임하였다.

차남 유승민(1958년생)은 경북고-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육군 병장으로 군 복무를 한 뒤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 한국개발연구원에서 선임연구위원으로 근무하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영입으로 제17대, 18대, 19대, 20대 국회의원(한나라당[6], 새누리당[7], 바른정당[8])을 역임하였다. 아버지가 의리를 중시하는 호인형인 데 반해, 차남은 원리원칙적인 성격이며, 아버지가 가치보다 사람을 더 중시했던 반면에, 차남은 사람보다 가치를 더 추구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국회법 개정과 관련하여 유승민 의원이 박근혜 대통령과 마찰을 빚은 것을 두고, 아버지인 유수호 전 의원이 판사로 재직하던 박정희 정권 때 유신정권에 반대되는 판결을 했다가 면직된 전력이 있어 2대에 걸친 인연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인연이 깊긴 한 것이, 마찰을 빚기도 했으나 선대 유수호는 결국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에 공천신청을 했고 2대 유승민 역시 애초에 마찰을 빚기 이전에 2대 박근혜의 비서실장 출신이다.

4.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대구 중구) 민주정의당 47,594(56.9%) 당선(1위)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대구 중구) 민주자유당 29,625(46.9%) 당선(1위)


[1] 다만 일가는 대구광역시로 이사해서 유수호 전 의원의 자택은 대구 남구 대명동에 있었다. 그렇지만 사후 영주에 안장되었다.[2] 노태우와 동기동창이다.[3] 윤동수 울산시장과 울산시 공무원들이 개표를 조작하는 등 선거부정을 저질러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울산시 득표율이 76%에서 81.2%로 상승하게 만들었던 사건.[4] 이만섭국회의장이 한 말이다. 매일신문 2011년 7월 9일자[5] 동아일보 1995년 12월 12일자 기사[6] 17~18대[7] 19~20대 초기[8] 20대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