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 제15대 국회의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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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 갑 이의익 사퇴 (1998.5.2.) * 달성 김석원 사퇴 (1998.2.17.) * 동 갑 김복동 작고 (2000.4.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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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폐지된 선거구 {{{#!wiki style="margin: -5px -10px; display: inline-table" | <tablebordercolor=#580009><tablebgcolor=#580009> | 서구 갑 서구 일부 西區 甲 Seo A | }}} | |||
<colbgcolor=#580009><colcolor=#fff> 선거인 수 | 123,443명 (1996) | |||||
상위 행정구역 | 대구광역시 | |||||
관할 구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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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설년도 | 1988년 | |||||
이전 선거구 | 중구·서구 (대구 제 1 선거구) | |||||
이후 선거구 | 서구 | |||||
국회의원 | | 백승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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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선거구제 실시와 함께 13대 총선부터 신설되었던 선거구로, 16대 총선부터는 서구의 인구 감소로 서구 을 선거구와 합구되어 서구 단일 선거구가 되었다.광장코아 상권, 서대구공단 등 서구의 서남부 지역을 관할했다. 옛 서구 을 선거구보다는 아파트단지도 많았고, 백승홍의 존재로 야권 세도 나름 있었던 선거구다.
하나회 멤버로 내무부장관,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정호용과 경제기획원 차관,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을 역임하고 민선 1,2기 대구광역시장을 지낸 문희갑의 지역구였던 곳으로 거물급 인사들이 거쳐가 19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수성구 갑보다 정치적 위상이 더 높았다.[1]
2. 역대 국회의원 목록
<rowcolor=#fff> 대수 | 당선인 | 당적 | 임기 |
13대 | 정호용 | | 1988년 5월 30일 ~ 1990년 1월 8일[2] |
문희갑 | [[민주자유당|]] | 1990년 4월 3일 ~ 1992년 5월 29일 | |
14대 | 정호용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2년 5월 30일 ~ 1996년 5월 29일 |
15대 | 백승홍 | 1996년 5월 30일 ~ 2000년 5월 29일 |
3. 역대 선거 결과
3.1.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구 갑 내당1동, 내당2동, 내당3동, 내당4동, 비산4동, 평리2동, 평리4동, 평리5동, 상이동, 중리동 | |||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정당 | 득표율 | 비고 | |
1 | 정호용(鄭鎬溶) | 52,847 | 1위 |
| 54.34% | 당선 | |
2 | 서훈(徐勳) | 19,242 | 3위 |
[[통일민주당|]] | 19.79% | 낙선 | |
3 | 양의강(梁義網) | 884 | 5위 |
[[평화민주당|]] | 0.91% | 낙선 | |
4 | 백승홍(白承弘) | 22,234 | 2위 |
[[신민주공화당|]] | 22.86% | 낙선 | |
5 | 김현근(金顯根) | 2,044 | 4위 |
| 2.10% | 낙선 | |
계 | 선거인 수 | 123,691 | 투표율 79.16% |
투표 수 | 97,919 | ||
무효표 수 | 668 |
문제는 당선 이후에 터진다. 정호용 의원은 5.18 민주화운동당시 특전사 사령관으로써 진압 작전에 적극 참여했기에, 광주 특위를 거치면서 5공의 핵심 인물로 지목되어 많은 지탄을 받는다. 정호용은 결국 정권 이미지 악화와 3당 합당 과정에서 발생할 차질을 우려한 노태우 정부의 압박을 받고[3] 반강제적으로 의원직을 사퇴한다. 보궐선거에서는 정호용이 재출마했다가 사퇴했고, 민자당 문희갑 후보가 당선됐다.
한편 이 선거에서 2위로 낙선한 백승홍 후보는 이후 꼬마민주당, 민주당을 거치며 1990년 재보궐선거와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낙선하다가 무소속으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드디어 당선되어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을 지냈으며[4], 3위로 낙선한 서훈 후보는 고향이 있는 동구 을로 지역구를 옮겨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출마해 석패했다가 1993년 재보궐선거, 15대 총선에서 당선되며 재선 의원을 지냈다.
3.2. 1990년 4·3 재보궐선거
서구 갑 내당1동, 내당2동, 내당3동, 내당4동, 비산4동, 평리2동, 평리4동, 평리5동, 상이동, 중리동 | |||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정당 | 득표율 | 비고 | |
1 | 문희갑(文熹甲) | 41,970 | 1위 |
[[민주자유당|]] | 51.55% | 당선 | |
2 | 김현근(金顯根) | 5,199 | 3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5.50% | 낙선 | |
3 | 백승홍(白承弘) | 34,242 | 2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42.50% | 낙선 | |
| | 사퇴 |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계 | 선거인 수 | 132,364 | 투표율 63.95% |
투표 수 | 84,644 | ||
무효표 수 | 3,253 |
현역 국회의원이던 정호용은 3당 합당 과정에서 김영삼과 김종필의 요구에 따라서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부탁에 의하여 사퇴하고, 이 과정에서 노태우에게 보궐선거 공천을 약속받는다.[5] 그렇지만 민주자유당은 정호용이 아닌 문희갑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을 공천하고, 정호용은 명예회복을 위하여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한다.# 무소속 출마엔 부인의 권유가 있었다고.
선거전은 팽팽한 접전으로 흘러갔으며, 당시 민주자유당은 3당 합당 이후 치러지는 첫 선거라 현역 대구지역 국회의원들에게 동책을 맡도록 하고 안기부 등을 통하여 정호용을 미행까지 하며 압박했으며#, 결국 이를 견디다 못한 정호용의 부인이 자살 기도까지 하자# 결국 정호용은 후보등록까지 마감했음에도 사퇴하고 만다.
그렇지만 정호용의 사퇴 이후 정호용의 지지층이 모두 문희갑 후보에게 간 것은 아니었다. 무소속 백승홍 후보는 당초 정호용과 문희갑 후보의 경쟁으로 인한 어부지리 효과를 노리다 정호용의 사퇴에 압력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정호용 지지층을 흡수하려고 시도했고#, 결국 선거 결과 문희갑 후보는 텃밭인 대구에서 출마하였음에도[6] 51.5%의 득표율로 겨우 과반을 넘겼으며 당시 백승홍 후보는 42.5%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비록 낙선했지만 2005년 재보궐선거에서 이강철이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44.1%의 득표율을 기록하기 이전까지 대구에서 민주당계 정당 소속으로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여담으로 정호용의 사퇴로 인하여 남은 선거자금이 후일 문희갑의 대구광역시장 임기 말에 발생한 비자금 파동의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3.3.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구 갑 내당1동, 내당2동, 내당3동, 내당4동, 비산4동, 평리2동, 평리4동, 평리5동, 상이동, 중리동 | |||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정당 | 득표율 | 비고 | |
1 | 문희갑(文熹甲) | 26,763 | 2위 |
[[민주자유당|]] | 27.30% | 낙선 | |
2 | 백승홍(白承弘) | 16,795 | 3위 |
| 17.13% | 낙선 | |
3 | 김현근(金顯根) | 3,938 | 4위 |
| 4.02% | 낙선 | |
4 | 정호용(鄭鎬溶) | 50,533 | 1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51.55% | 당선 | |
계 | 선거인 수 | 133,591 | 투표율 74.06% |
투표 수 | 98,936 | ||
무효표 수 | 907 |
3.4.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구 갑 내당1동, 내당2동, 내당3동, 내당4동, 비산4동, 평리2동, 평리4동, 평리5동, 평리6동, 상이동, 중리동 | |||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정당 | 득표율 | 비고 | |
1 | 강용진(姜湧珍) | 7,840 | 4위 |
[[신한국당|]] | 10.74% | 낙선 | |
2 | 우동철(禹東喆) | 1,502 | 7위 |
| 2.06% | 당선 | |
3 | 김풍삼(金豊三) | 8,748 | 3위 |
[[자유민주연합|]] | 11.98% | 낙선 | |
4 | 김천희(金天熙) | 2,262 | 6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3.10% | 낙선 | |
5 | 김현근(金顯根) | 2,657 | 5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3.64% | 낙선 | |
6 | 나학진(羅學鎭) | 841 | 8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15% | 낙선 | |
7 | 백승홍(白承弘) | 29,568 | 1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40.50% | 당선 | |
8 | 정호용(鄭鎬溶) | 19,583 | 2위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6.83% | 낙선 | |
계 | 선거인 수 | 123,443 | 투표율 60.12% |
투표 수 | 73,001 | ||
무효표 수 | 1,217 |
[1] 수성구 갑 선거구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94년 재보궐선거부터다. 수성구 갑 지역구도 박철언, 김부겸, 주호영 등 거물급 인사들이 거쳐간 곳이다.[2] 의원직 사퇴[3] 이 과정에서 경북고 1년 후배인 서동권 안기부장에게 멱살을 잡히기까지 했다.[4] 16대 총선에서는 선거구 통폐합으로 서 갑 선거구가 폐지되며 중구에서 출마, 당선됐다.[5] 이게 무슨 소리냐 하겠지만, 당시에는 속칭 맹형규법으로 불리는 법안이 시행되기 이전이라 본인이 재보궐선거의 원인을 제공해도 본인이 재출마하는 것이 가능했다.[6] 다만 지금과는 달리 당시의 서구는 젊은 층들의 비중이 높고 야권 지지층도 적지 않았던 곳이다. 13대 총선에서는 정호용이 과반으로 승리하였지만 12대 총선에서는 중구·서구 선거구에서 신한민주당의 유성환 후보가 1위로 당선되는데 크게 기여한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