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Das Mirakel des Hauses Brandenburg. 7년 전쟁(1756년 ~ 1763년) 중에 일어난 두 번의 사건을 가리킨다.2. 1차 기적
1759년 8월 12일 쿠너스도르프 전투[1]에서 프리드리히 2세가 대패하여 3만 7천 가운데 절반에 달하는 1만 9천 명을 잃자,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 베를린을 향해 러시아, 오스트리아 연합군이 진군해왔다. 프리드리히 2세는 1759년 8월 16일, 베를린의 벽 아래에 파묻힐 각오로 필사적으로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같은 날 러시아 제국군은 오데르 강을 건넜고, 그 다음 날 오스트리아군도 강을 넘었으며 나머지 오스트리아군도 작센으로부터 베를린을 향해 북진해왔다.프리드리히는 베를린에 남은 병력을 긁어모아 총 3만 3천명의 병사를 배치하여 9만 명에 달하는 적군과 싸울 채비를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리드리히가 직접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 이라 부른 사건이 일어났는데, 오스트리아, 러시아군이 베를린을 점령하지 않고, 1759년 9월에 오자마자 철수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실 연합군은 쿠너스도르프에서 2만명의 병력을 잃는 등 프로이센 못지 않은 타격을 입은 상태였고, 적진 깊숙히 들어온 나머지 보급이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쿠너스도르프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던 프리드리히 2세의 장군이자 동복의 아우인 왕자 프리드리히 하인리히(1726 –1802)의 군대가 멀쩡하게 남아 있다는 데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리하여 연합군은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을 코앞에 두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프로이센은 전쟁에서 패배하기 직전에 가까스로 살아날 수 있었다.
3. 2차 기적
7년 전쟁 말기 프로이센은 전쟁으로 피폐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120명의 장군, 1500명의 장교, 10만 명이 넘는 병력을 잃는 등 군사적 역량이 한계에 달해 가는 상황이었고, 대다수 국민들은 평화를 바라고 있었다.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만 제국을 끌어들이고자 했지만 실패했고, 동맹국인 영국은 평화조약을 맺도록 압력을 넣고 있었다.이에 프리드리히는 자살할 것까지 고려하게 되었는데, 그러던 와중인 1762년 1월에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가 사망하고, 그녀의 조카인 표트르 3세가 제위에 올랐다. 표트르는 황제가 되기 전부터 프리드리히를 숭배한다는 것을 드러내놓고 다닐 정도였으며, 즉위하자마자 프로이센과의 평화교섭에 나섰다.
결국 같은 해 3월, 5월에 휴전조약과 평화조약이 맺어지게 되는데 전쟁 중 러시아가 점령한 모든 영토를 반환하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철군했다. 사실 옐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할 당시 러시아 또한 국내 상황이 매우 좋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전쟁에서 발을 빼는 것 자체는 크게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문제는, 앞서 말했듯이 승전국으로서 챙길 수 있는 이권들을 모조리 포기한 채 오히려 프로이센 좋은 일만 시킨 것. 수많은 피를 흘리고도 제대로 된 대가도 없이 평화협상을 해준 이 기적 같은 사태는 7년 전쟁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러시아 황실과 귀족들도 경악시켰으며 이 사건으로 표트르 3세의 평판은 땅으로 떨어졌고 결국 폐위당했다. 이렇게 프로이센은 다시 한번 패배 직전의 위기에서 극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4. 결론
많은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독일 사람들은 이것을 단순히 행운이라고 여기지 않는다고 한다. "최후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라. 그래야 기적은 일어난다" 라는 대왕의 말처럼 이것을 '프리드리히 정신'이라고 부르고 가르친다고 한다.5. 번외편 : 나치 독일
1945년 봄, 베를린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을 무렵 이 '기적' 이 다시금 언급되었다. 나치의 재무장관이던 루츠 폰 크로지크(Lutz Graf Schwerin von Krosigk 1887-1977)는 자신의 일기에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아돌프 히틀러에게 프리드리히 대왕의 자서전을 낭독했는데, 자서전의 내용 중에서도 특히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 부분을 큰 소리로 읽어주었다고 기록했다. 그에 따르면 괴벨스가 낭독을 마치자, 히틀러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고 한다.1945년 4월 12일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사망이 알려졌고, 크로지크에 의하면 이 소식을 들은 괴벨스는 히틀러에게 전화로 "여제가 죽었습니다."라고 전했다고 한다. 7년 전쟁 중 있었던 옐리자베타 여제의 사망과 루즈벨트의 죽음을 동일시한 것이다. 실제로도 루즈벨트가 죽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동부 전선의 병사들을 비롯한, 독일 고위층 사이에서 서방 연합군이 독일과 함께 공산주의에 맞서 싸울 것이라는 루머가 돌았다.[2] 하지만 서방 연합군은 전혀 흔들리는 기색 없이, 독일을 압박해왔고 결국 함락되고 히틀러가 자살하기에 이른다.
사실 루즈벨트를 옐리자베타와 동일시한 것은 무리였다. 비교적 친소 성향인 루즈벨트에 비해 트루먼은 반공 성향이 더 강했지만, 당시 서방 연합군은 나치의 만행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즉,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보다 파시즘에 대한 적개심이 훨씬 더 큰 상황이었다. 때문에 추축국이 완전히 패배할 때까지 소련과 전면 대립하는 일은 없었다. 또한 18세기에는 표트르 3세라는 황제 개인의 돌발적인 행위에 의해 전쟁의 흐름이 바뀌었지만,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으로 뽑힌 트루먼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었다.[3] 게다가 이미 독소불가침조약 등의 국제적 협상을 여러번 어기고 침략전쟁을 일으키면서 거의 전세계 모든 나라의 신뢰를 잃어버렸고, 전쟁 막바지에 패배만 거듭하며 패망을 목전에 두고 손을 내미는 독일은 연합국에게 협상조차 바랄 수 없는 처지였다.
설사 아주 만에 하나 미국을 비롯한 서방연합군이 공세를 멈추고, 휴전을 했다 하더라도 바뀌는 건 없다. 1944년 아르덴 대공세의 실패로 독일의 마지막 예비전력은 모조리 소멸되었고, 서부전선을 유지하던 발터 모델의 B집단군도 이때쯤이면 빈껍데기만 남은 상태였다. 당장 루즈벨트의 사망 3일 뒤인 4월 15일에 모델은 자신의 이름으로 국민돌격대원들에게 제대증을 발부하여, B집단군을 해체시키고 병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기 시작했다. 동시기의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불로냐가 함락되고 고딕 라인이 무너지는 중이었다. 이 상황에서 연합군이 교전을 멈추어 서부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의 병력을 동부전선으로 전용한들 독일측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대부분의 장비를 잃어버리고 기진맥진한 알보병 패잔병 수십만 명을 동부전선에 추가한들, 수천 대의 카츄샤 다연장로켓이 퍼붓는 화력을 등에 업고 T-34 전차 수천 대와 함께 몰려오는 악에 받친 소련의 6백만 대군을 막을 수 있는가? 절대로 불가능했다. 다만 종전 직후 언싱커블 작전을 구상한 처칠이나 미국의 국방성 장관 포레스탈처럼 독일군을 유지하여 소련군을 공격하는 데 쓰자고 주장한 사람이 없지는 않았으나 이들의 주장도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참고로 이웃나라 폴란드에는 "비스와 강의 기적"[4]이 있다.
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과 동맹이었던 일본 역시 패전이 확실시되자 항복 직전까지 소련을 통해 미국과 강화하는 계획을 시도했지만 역시 소용없었다.[5]
[1] 독일-폴란드 국경인 오데르강변의 서로 마주보는 양국 프랑크푸르트안데어오데르중에서 폴란드 방면이다. 폴란드어로는 Słubice(스우비체).[2] 실제로 냉전을 대비해서 연합국이 나치 지도층을 그대로 등용하고 동구권과 싸우는 계획안을 처칠이 만들기도 하였다. 물론 현실성이 전혀 없어 전량 폐기되었다.[3] "Die Zarin ist tot." Doch das Wunder von 1762 wiederholte sich nicht.[4]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중 일어난 일이다.[5] 망상병은 추축국 공통인지 일본도 처음에는 전쟁 때 얻은 걸 유지한 채 강화하겠다는 되도않는 조건을 내걸었지만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결국 천황제 유지로 허들을 낮춘 후 항복하는 것으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