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4 13:01:34

요한 파리키다

<colbgcolor=#fff><colcolor=#000000> 명목상 슈바벤 공작
요한 파리키다
Johann Parricida
이름 요한
(Johann)
별칭 존속 살인자
(Parricida)
출생 1290년
사망 1312년 또는 1313년 12월 13일 (향년 약 23세)
이탈리아 반도 피사(추측)
아버지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2세[1]
어머니 보헤미아의 아네슈카[2]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알브레히트 1세와의 갈등2.3. 존속살인과 그 이후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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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합스부르크 가문 초대 독일왕 루돌프 1세의 손자이자 백부 알브레히트 1세를 살해한 살인자로, 존속 살인자(Parricida)라는 별칭을 지녔다. 명목상 슈바벤 공작이었기에 슈바벤의 요한(Johann von Schwaben)이라고도 불리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지배한 영지는 없어 땅 없는 공작(Hertzog Anlant)이라는 모욕적인 별칭 역시 지니고 있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독일왕 루돌프 1세의 차남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2세와 보헤미아 국왕 오타카르 2세의 딸 보헤미아의 아네슈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연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1291년 1월 1일 이전, 약 1290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요한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 루돌프 2세는 갑작스러운 사망 직전 혹은 직후였다.

아버지의 때이른 죽음만 해도 비극적인 일이었으나 설상가상으로 그는 친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친척들 사이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당대 유럽의 영주들은 같은 가문의 형제 및 친척들과 영지를 분할해서 상속했는데, 친가의 친척들에게 있어서 요한의 탄생은 곧 영지를 나누어야 할 경쟁자가 늘어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요한은 그나마 외가인 프르셰미슬 왕조로부터 원조를 받을 수 있었고, 프르셰미슬 왕조의 숙부 바츨라프 2세가 다스리는 보헤미아 왕국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발상지 부근 슈바벤 브루크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인 아네슈카 역시 이른 나이에 사망하는 등 요한은 힘겨운 유소년 시절을 보냈다.

2.2. 알브레히트 1세와의 갈등

요한과 백부 알브레히트 1세 사이 갈등의 씨앗은 요한의 아버지인 루돌프 2세 대에 이미 뿌려진 셈이었는데, 요한의 할아버지이자 알브레히트 1세, 루돌프 2세의 아버지였던 루돌프 1세는 본디 오스트리아 공국슈타이어마르크 공국 등 새로 얻은 영토들을 게르만족의 전통적인 분할 상속을 통해 아들들에게 나눠 상속하려고 하였다.[3] 그러나 루돌프 1세는 분할 상속보다 장자 상속이 경쟁에서 유리하다고 생각하였는지 마음을 바꾸어 맏아들 알브레히트 1세에게 실질적으로 모든 영지들을 상속했다. 루돌프 2세는 1282년에 이미 알브레히트 1세와 함께 오스트리아 공작, 슈타이어마르크 공작이 된 상태였지만 결국 1283년 6월 1일 라인팔덴 조약을 통해 자신의 지분을 포기해야 했다. 루돌프 2세는 대신 슈바벤 공작위를 하사받았지만 이는 명목상의 공작위로, 루돌프 2세에게는 실질적인 영지가 없었다.

루돌프 2세로서는 본디 얻었어야 할 상속분을 포기한 대가로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가문 내의 불화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루돌프 2세는 약 20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하였지만 루돌프 2세의 외동아들 요한이 태어났고, 본디 아버지의 몫을 상속받아야 했을 요한은 아버지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알브레히트 1세와 대립하였다. 그러나 알브레히트 1세는 조카의 권리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3세의 사망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 내에서 혈연적으로 바츨라프 3세와 더 가까웠던[4] 조카인 요한 대신 자신의 맏아들인 루돌프 3세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밀어주어 요한을 더욱 분노케 했다. 요한은 알브레히트 1세에게 아버지가 받았어야 했을 보상을 재촉했지만 알브레히트 1세는 이를 무시하였고, 어머니 아네슈카가 결혼 지참금으로 가져왔던 키부르크의 영토 역시 돌려주지 않았다. 요한은 슈바벤 공작이었지만 이는 아버지의 공작위와 마찬가지로 명목상이었고, 땅 없는 공작으로 조롱받게 된 요한은 백부에 대한 증오를 키워나갔다.

2.3. 존속살인과 그 이후

1308년 4월 30일 저녁, 알브레히트 1세가 빈티투어에서 개최한 연회에 초대받은 요한은 알브레히트 1세가 건넨 화환을 거부하며 꽃을 받지 않겠다고 외쳤다. 요한은 다음 날 알브레히트 1세가 로이스 강을 건너다 수행원들과 떨어진 틈을 노려 공모자들을 이끌고 알브레히트 1세를 공격했다. 요한은 아무 말 없이 백부를 향해 달려가 저항하는 백부의 두개골을 쪼개버렸다. 알브레히트 1세의 아들들은 요한의 계승권을 완전히 박탈시켰고, 특히 알브레히트 1세의 3남 레오폴트 1세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요한의 지지자들을 모두 처형하는 한편 요한을 찾아 직접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알브레히트 1세의 살해에 가담한 공모자들은 대체적으로 알브레히트 1세의 지배에 대해 반감을 품은 슈바벤 지역의 영주들이었다. 루돌프 1세의 숙부로부터 기원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친척들 역시 마찬가지로 이에 가담했다. 알브레히트 1세의 사망으로 새로운 황제를 선출해야 하는 상황이 된 선제후들은 존속살인이 벌어진 가문에 제위를 넘겨줄 수 없다며 룩셈부르크 가문의 하인리히 백작을 하인리히 7세로 선출했고, 그 결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제위 세습은 일시적으로 좌절되었다.[5]

정작 새로이 독일왕으로 선출된 하인리히 7세는 알브레히트 1세를 살해한 이들에게 제국 추방령(Reichsacht)을 내렸다. 특히 백부를 살해한 요한에게는 존속 살인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요한은 이후 종적을 감추고 숨어 지냈지만 1312년 혹은 1313년이탈리아 반도 피사의 수도원으로 피신한 요한을 하인리히 7세가 방문했다고 전해진다. 하인리히 7세의 은혜를 구했다고도 하는데, 아마 억류되어 있다가 그 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곳에 위치한 성 니콜로 수도원 교회에 요한의 미완성 묘석 비문이 남아 있다.

3. 기타



[1] 합스부르크 가문의 초대 독일왕 루돌프 1세의 차남이다.[2] 오타카르 2세의 딸이다.[3] 루돌프 1세에게는 둘 이외의 아들도 있었지만 일찍 사망하였기에 실질적으로 남은 아들은 알브레히트 1세와 루돌프 2세 둘뿐이었다.[4] 요한의 어머니가 오타카르 2세의 딸 아네슈카였기에 요한은 바츨라프 3세와 사촌지간이었다.[5] 알브레히트 1세의 고손자 알브레히트 5세1438년 독일왕 알브레히트 2세로 선출된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사실상 제위를 세습하게 되는데, 알브레히트 1세의 사망 이후 제위를 되찾는 데에 약 130년이 걸린 셈이다.[6] Johann! Johann! Als du die Rache wahr gemacht Am alten Mann. Und wehe! nimmer wird der Fluch Mit dir begraben, Dir, der den Ohm und Herrn erschlug, Johann von Schwab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