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대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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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식민지 전쟁 Guerra Colonial Portuguesa Portuguese Colonial War | |||
1970년의 전황. 포르투갈 통제 지역(초록), 분쟁 지역(노랑), 독립군 통제 지역(빨강)[1] | |||
기간 | |||
1961년 2월 4일 ~ 1974년 4월 25일 | |||
장소 | |||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카보베르데, 상투메 프린시페, 포르투갈령 인도 | |||
원인 |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탈식민주의의 등장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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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 국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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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연 평균 10만 7천 명[20] | 4~6만 명 추정 | ||
피해 | |||
8,289명 전사[21] 15,507명 부상 | 66,000여 명 전사 민간인 10만 명 이상 사망 | ||
결과 | |||
포르투갈군의 전술적 승리, 독립군의 전략적 승리 | |||
영향 | |||
포르투갈 제국의 사실상 해체, 카네이션 혁명으로 인한 포르투갈 제2공화국 민주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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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은 1961년부터 1974년까지 포르투갈 제2공화국(이스타두 노부)과 포르투갈령 식민지의 독립을 주장하는 무장단체들 간에 벌어진 군사적 충돌을 의미한다. 포르투갈에서는 '해외전쟁(Guerra do Ultramar)', 옛 식민지 국가들에서는 '해방전쟁(Guerra de Libertação)'이라고도 부른다. 넓은 의미에서는 인도의 고아 침공(Invasão de Goa)도 이 전쟁에 포함된다.2. 마지막 식민제국
포르투갈 제국의 1934년 영토.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카보베르데, 포르투갈령 인도 식민지 등이 지도에 나와 있다. |
포르투갈은 작은 나라가 아니다(Portugal não é um país pequeno) |
전간기 포르투갈에서 발간된 포르투갈령 해외 식민지와 유럽 국가들과의 면적 비교용 지도. 포르투갈의 해외 식민지를 전부 합치면 유럽 주요 5개국인 영국, 프랑스,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의 영토를 합친 것보다도 근소하게 더 컸다.[22] |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 당시부터 해외 식민지를 개척해 온 식민지 경영에 도가 튼 나라였다. 포르투갈 제국은 남아메리카의 브라질, 아프리카의 기니비사우, 앙골라, 모잠비크, 아시아의 마카오와 고아, 다만, 디우, 동티모르 등 세계 각지에 거점을 건설하고 식민지 착취를 통해 얻은 지하자원과 농산물 등으로 국부를 축적하였다.
하지만 다른 식민제국들과의 충돌이 계속되면서 피해가 누적되자 작은 나라인 포르투갈은 힘을 유지할 수 없었다. 1822년 제국의 중심이던 브라질이 독립하면서[23] 포르투갈의 국력은 쇠퇴기로 접어든다. 본토의 인구도 적고 변변한 산업이나 자원도 없던 포르투갈[24]은 조상들이 마련해 둔 앙골라, 기니비사우, 모잠비크 등 남아 있는 해외 식민지 경영에 목숨을 걸게 되고 그 과정에서 일명 '장미색 지도(Mapa cor-de-rosa)' 계획으로 지금의 말라위, 잠비아, 짐바브웨를 장악해 앙골라와 모잠비크를 이으려 했지만 잠비아와 말라위, 짐바브웨 지역으로 진출하려던 영국의 저지로 실패했다.[25] 1910년 제1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식민지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1945년 이후 유럽 식민제국들의 지배를 받고 있던 해외 식민지들이 하나 둘씩 독립하는 탈식민지화가 대두했다. 이 시기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같은 다른 식민제국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을 통해 국가가 초토화되는 수준의 큰 피해를 입다보니 이미 식민지 경영이 불가능할 정도로 국력이 약화되어, 이를 놓치지 않은 식민지들과의 독립 전쟁을 거치면서 식민지를 거의 다 잃어버렸다.[26] 그러나 포르투갈은 2차대전의 피해를 직접 입지 않아서 여유가 있었고, 포르투갈에게 있어 식민지를 놓아준다는 것은 국가 경제의 파탄을 의미했다. 이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던 이스타두 노부(Estado Novo)[27] 체제는 수백 년 간 지속되어 온 식민지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유지하려 하였다. 이스타두 노부 체제도 민족자결과 식민지 독립 열기를 알고 있어서 1951년 이후 공식적으로 식민지들의 지위를 해외주(Províncias Ultramarinas)로 변경하였으나, 실상은 이전과 거의 변함없는 통치가 지속되었고 식민지 전쟁이 발발한 1961년까지 식민지 현지인들은 포르투갈 시민과 법적으로 차별적인 위치에 놓여 있었다.
포르투갈에게 있어 식민지 문제는 국가 정체성과 연결된 문제이기도 했다. 포르투갈은 유럽의 1세대 식민제국으로 해외 식민지와 신항로를 개척하고 대항해시대를 열면서 세계 무대에 등장했다. 탈식민지화가 대두되자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해외 식민지를 놓아줘야 할 처지에 놓였고, 포르투갈은 그것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포르투갈 식민제국의 수호는 포르투갈 본토에서는 좌우파를 넘어선 문제였다. 이스타두 노부 체제와 살라자르 정부에 격렬히 저항한 사회주의자들 역시 식민지 수호를 주장했다. 포르투갈 외교관들은 포르투갈 제국의 인종 융화 정책과 식민지 현지인에게 식민지 정부와 군의 고위직을 개방하는 것이 식민지의 문명화를 가능하게 하며 바로 그것이 포르투갈 식민주의의 원칙이라고 홍보했다.
포르투갈 정부는 브라질의 저명한 사회학자 지우베르투 지 멜루 프레이리(Gilberto de Mello Freyre, 1900년 3월 15일 ~ 1987년 7월 18일)가 주장한 루주트로피칼리즈무(Luso-tropicalismo) 이론을 근거로 포르투갈 식민제국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주트로피칼리즈무 이론은 포르투갈의 따뜻한 기후와 근대 전 페니키아, 켈트족, 로마인, 서고트족, 무어인 등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만들어진 독특한 환경이 포르투갈 제국이 타 문화와 인종에 대해 인간적이고 포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프레이리는 포르투갈 제국이 15세기부터 다문화적, 다인종적, 그리고 범대륙적(pluricontinental)이었다며 포르투갈이 해외 영토를 잃는다는 것은 포르투갈 국가의 종말이라고 주장했다. 포르투갈의 이스타두 노부는 30-40년대에는 이러한 이론을 무시했으나, 2차대전 이후 식민지 해방의 물결이 밀어닥치자 이 아이디어를 제국의 존속 근거로 채택하게 된다.
당시 포르투갈령 아프리카 식민지에서는 교육을 받은 현지 원주민이 포르투갈군의 전문직이나 행정부・교육・위생기관 및 민간기업에서 비교적 고위직에 임명되는 것이 허용되고 있었다. 또한 식민시대 초기부터 포르투갈인과 현지인의 통혼은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었으며, 포르투갈인뿐만 아니라 원주민에게도 초등~중등교육・기술교육의 기회가 보장되었다. 독립운동과 식민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아프리카인들 중에선 포르투갈 유학파 출신이 적지 않았다. 앙골라의 아고스티뉴 네투(António Agostinho Neto, 1922년 9월 17일 ~ 1979년 9월 10일)와 조나스 사빔비(Jonas Malheiro Savimbi, 1934년 8월 3일 ~ 2002년 2월 22일), 모잠비크의 사모라 마셸(Samora Moisés Machel, 1933년 9월 29일 ~ 1986년 10월 19일)과 조아킹 시사누(Joaquim Alberto Chissano, 1939년 10월 22일 ~ ), 기니비사우의 아밀카르 카브랄(Amílcar Lopes Cabral, 1924년 9월 12일 ~ 1973년 1월 20일) 등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라서 포르투갈 본토도 독재 정권의 우민화 정책 때문에 문맹률이 40%에 육박하는 상황이었는데, 식민지에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는 없었다. 앙골라와 모잠비크에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이 들어선 것은 이미 식민지 전쟁이 발발한 이후인 1962년에야 이루어졌다. 교육기회를 제대로 잡아서 출세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으며, 특히 앙골라와 모잠비크의 문맹률은 80-90%를 넘나들 정도였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대다수 원주민들은 여전히 차별 속에 놓여 있었다. 이런 환경을 바탕으로 50년대 중반 이후 반식민주의를 내건 민족주의, 공산주의 조직들이 왕성하게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3. 발단
2차대전 이후, 미소 양대 초강대국은 사상적・경제적・군사적으로 각자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전세계 각지의 반란세력을 후원하였다.때는 1950년대 후반, 포르투갈은 2차대전 당시 중립을 유지했지만, 한편으론 광대한 식민지 유지 비용의 부담이 점차 증가하였다. 포르투갈은 NATO에 가입했으나, NATO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서유럽을 방어하는 것인 만큼 아프리카 전쟁에 서방국가들의 지원을 얻어낸다는 살라자르의 당초 구상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나토 가입에 따라 소위 '나토 세대'라고 부리는 장교단이 육성되었다. 그들은 향후 식민지 전쟁에서 작전계획의 입안 및 수행을 담당할 우수한 인재들로 출세가도를 달리며 군의 고위직을 차지했지만, 동시에 서유럽 물을 먹어 자유주의 사상에 공감하고 기존 체제에 회의감을 품는 이들도 많았다. 이같이 서유럽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군부와 독재정권 사이의 단절은 점차 심화되었는데, 1961년의 쿠데타 미수사건을 이스타두 노부 체제 붕괴의 시작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 식민지에서의 분쟁에 대처하기 위해 별도의 독립된 사령부가 설치되었지만, 이는 오히려 육해공 3군의 협조가 결여되게끔 만든 실책이라고 평가된다.
1950년대 중반부터 활발해진 식민지 원주민의 독립운동은 점차 격화되었고, 1960년대에 들어선 무장 게릴라가 출현하기에 이르렀는데 주로 공산주의 계열이 주도하고 있었다. 전쟁 기간 중에 포르투갈군과 무장 게릴라 세력은 서로 수많은 잔학행위를 자행하였다.
한편 미국은 올뎅 호베르투(Álvaro Holden Roberto)를 지도자로 하는 우파 성향의 앙골라 인민동맹(UPA)을 지원했다. 1961년 2월 4일, 콩고에 거점을 둔 UPA 게릴라가 국경을 넘어 앙골라 북부에 침공, 형무소를 습격하여 경찰관 7명과 현지인 40명을 살해한 데 이어 3월 15일엔 앙골라 북부를 침공해 농장, 정부 청사, 그리고 시장에 불을 지르고 파괴했으며 백인 1천 명・흑인 6천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포르투갈 당국은 즉시 보복을 결의했으며, 이로써 13년에 걸친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이 시작되었다.[28]
4. 전개
4.1. 포르투갈의 상황
UPA를 후원하고 있던 미국의 케네디 행정부는 포르투갈 정부에 조속한 식민지 독립을 요구했다. 또한 61년 4월의 포르투갈 군부 쿠데타 미수사건은 CIA가 배후에서 조종하였는데, 이 쿠데타는 사전에 발각되어 불발로 끝났지만 살라자르 체제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라자르는 미국의 압력과 군부의 반발을 물리쳤다. 그리고 해외영토를 사수한다는 결의 하에 육군장관직을 겸임했으며, 대규모 증원부대를 아프리카에 파견하였다. 모든 성인 남성은 3년간의 병역 의무를 지게 되었으며 대부분이 식민지에서 싸울 수 있도록 소집령이 내려지는 등 군국화 현상이 농후해져 갔다.
포르투갈은 다른 열강에 비해 보다 오랫동안 아프리카에서 군림해 왔기 때문에, 현지에 강력한 기반을 구축해둔 상태였다. 게릴라와의 전투에서 포르투갈군은 시종 유리한 고지를 점했고, 포르투갈의 승리가 확정적이자 미국은 게릴라에 대한 지원을 서서히 줄여갔다. 소련도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4.2. 아프리카 식민지들의 상황
개전 당시, 앙골라에서는 중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게릴라의 무력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게릴라들이 사회기반시설 파괴 및 민간인 살해 등 활동지역에서 혼란을 유발시키자 포르투갈군은 '사회 혼란을 유발시키는 게릴라에 맞서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도 함께 싸운다'는 프란시스쿠 고메스 포르투갈 앙골라 주둔군 사령관의 공투(共鬪)전략에 따라 지방 농민을 회유하는 데 성공했으며, 동맹국인 남아공의 지원도 가능했던 덕에 순조로운 토벌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모잠비크 전선 역시 동맹국 남아공과 로디지아, 그리고 흑인이 통치하는 흑인 국가였음에도 60년대 당시 반공주의/친남아공, 친로디지아, 친포르투갈 노선을 견지하던 말라위의 지원을 얻은 포르투갈군이 북부 지방에 고립된 게릴라들을 밀어붙이고 있었고 카보베르데나 상투메프린시페는 바다 상에 고립되어 있는 작은 섬나라라는 여건상 게릴라 활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쟁기간 내내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전쟁 후반인 1970년대 초가 되면 포르투갈의 군사적 능력은 한계에 이르렀지만, 포르투갈군의 공세로 인해 게릴라는 대부분 산간벽지로 밀려났고 앙골라의 모든 도시와 대부분의 농촌을 장악한 포르투갈군이 인종을 불문하고 주민들을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다. 그 결과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임에도 앙골라로 향하는 이민자 수는 오히려 증가세를 보이고 있었고 결국 전쟁 후반기에 미국, 프랑스, 영국, 서독, 네덜란드, 이탈리아, 그리스 등 서방 국가들도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배를 사실상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남아공, 로디지아, 말라위의 지원을 얻은 포르투갈군에게 게릴라군들이 밀려나가던 모잠비크, 앙골라 등 다른 식민지들과 달리 정작 기니비사우에서는 총력전에 가까운 양상으로 전황이 매우 급박하게 돌아갔다. 오히려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기니비사우에서는 중국, 쿠바, 소련 등 제2세계 공산주의 국가들과 인접국인 세네갈과 기니의 지원을 받은 게릴라가 전세를 역전시켰고 앙골라, 모잠비크에서는 남아공이 포르투갈을 지원해준 것과 달리 기니비사우 전선에서는 자신의 영향권이 아닌 데다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포르투갈의 게릴라 진압을 지원해 주지 않았다.
전쟁을 수행하면서 포르투갈은 국제사회의 비난에 따른 무기 금수・경제제재에도 대처해야 했다. 무장 게릴라 집단 중엔 앙골라의 MPLA・UNITA・FNLA, 기니비사우의 PAIGC, 모잠비크의 FRELIMO 등이 있었지만, 독립의 성공은 사실 이들 조직의 전과라기보다는 포르투갈 본국에서 발생한 카네이션 혁명의 영향이 가장 컸다.
4.2.1. 앙골라 독립 전쟁
자세한 내용은 앙골라 독립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4.2.2. 기니비사우 독립 전쟁
▲ 전선으로 행군하는 기니 카보베르데 독립아프리카당(PAIGC) 게릴라 독립군 대원들.
포르투갈령 기니에서는 1963년 1월, 공산주의 계열의 기니 카보베르데 독립아프리카당(PAIGC)이 전투를 개시했으며, PAIGC는 쿠바와 중국, 체코슬로바키아, 소련 등 여러 공산권 국가들로부터 군사원조를 받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포르투갈의 역사학자들은 기니비사우 전쟁을 '포르투갈의 베트남 전쟁'이라고 평가하는데, 이것은 다른 게릴라들과는 다르게 PAIGC가 잘 훈련되어 있고 무장 상태도 좋았으며 이웃 국가들인 세네갈과 기니에서 상당한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아프리카 지역에 위치해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로디지아, 말라위 등 주변 남부 아프리카 국가들의 지지를 받으며 전쟁에서 포르투갈이 유리한 국면을 차지했던 모잠비크, 앙골라와 달리 기니비사우는 멀리 서아프리카에 위치해있었고 정글이 많은 데다 게릴라 세력에 우호적이었던 이웃 국가들 때문에 포르투갈은 이 전역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포르투갈군은 수도 비사우 등 주요 도시와 도로를 지키는 데에만 집중했으며 수도 비사우와 일부 해안가 지역을 제외한 지역들 대부분이 PAIGC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리고 남아공이 포르투갈을 지원하여 포르투갈이 독립군 게릴라 세력들을 제압하였던 모잠비크 전선, 앙골라 전선과는 달리 기니비사우는 멀리 서아프리카에 위치해 있었는데다 남아공과 지리적인 거리와 가까웠고 포르투갈이 영향력을 상실하고 독립국으로 독립하게 되면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백인 정권 체제에도 악영향이 미칠 가능성이 높았던 모잠비크나 앙골라와는 형세가 판이하게 달라 남아공은 포르투갈의 기니비사우 전쟁에 개입하여 포르투갈을 지원하지 않았다.[29]
1968년, 안토니우 드 스피놀라(António Sebastião Ribeiro de Spínola) 장군이 포르투갈령 기니비사우의 총독 겸 주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스피놀라 장군은 PAIGC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개혁과 공작에 착수했다. 대민 작전이 개시되었고 학교, 병원, 도로, 교통시설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아프리카화' 정책에 따라 식민지 현지인의 포르투갈군 입대가 대규모로 증가했다. 반격에 나선 포르투갈은 스피놀라 장군의 전략에 따라 특수 해병대(Destacamentos de Fuzileiros Especiais)를 동원, 늪지에서의 기동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전황을 점차 개선시켜갔다. 포르투갈군은 주도권을 탈환하는 데엔 실패했지만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뒀다.
1970년 11월, 포르투갈군은 '녹해(綠海) 작전'을 실행하였다. 작전 목표는 기니 공화국의 세쿠 투레 정권을 전복시키고, PAIGC의 수장 아밀카르 카브랄을 체포하는 한편, PAIGC의 공병기를 파괴하고 포르투갈군 포로를 구출한다는 것이었다. 포르투갈군 특수부대가 기니의 수도 코나크리를 공격, 카브랄 체포엔 실패하였으나, 포로 구출과 선박 파괴엔 성공했다.
포르투갈군의 기니 공격에 충격을 받은 나이지리아와 알제리는 기니에 대한 원조를 늘렸으며, 소련도 서아프리카 연안 경호를 명목으로 전함을 파견했다. 포르투갈의 또다른 공격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1968년부터 72년까지 포르투갈군은 공세를 강화하면서 PAIGC의 거점들을 차례로 공략하였다. 동시에 반군에 대한 공작에 착수하여 PAIGC의 분열을 도모했다. 이 전략은 73년 1월에 카브랄이 암살당함으로써 결실을 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AIGC는 소련과 쿠바, 체코, 중국 등 공산권 국가들의 든든한 군사 지원을 배경으로 전력 소모를 보충할 수 있었다. 소련의 Il-14 폭격기와 스트렐라 대공 미사일 지원으로 포르투갈 공군의 작전은 심각하게 제한되었으며 포르투갈의 제공권이 위협받았다.
기니비사우 전선은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 독립 전쟁의 전선들 중 포르투갈군이 가장 고전한 곳이었으며, 그만큼 피해도 컸다. 남아공의 지원으로 포르투갈군이 전선에서 우위를 차지하며 정세가 안정되어 있었던 앙골라, 모잠비크와는 달리 경제, 사회적으로도 침체를 면치 못했다.
4.2.3. 모잠비크 독립 전쟁
▲ 1973년 모잠비크 해방전선(FRELIMO) 게릴라들에게 돌격하며 소총을 난사하는 포르투갈군.
모잠비크에서는 1964년부터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민족주의·공산주의 성향의 식민지 독립운동 게릴라 저항 조직인 모잠비크 해방전선(Frente de Libertação de Moçambique), 약칭 '프렐리무'(FRELIMO)가 포르투갈군과의 식민지 독립 전쟁을 주도했다.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중부의 잠베지강 유역까지 전쟁이 확산되었으나, 모잠비크 주둔 포르투갈군 병력이 소수였던 탓도 있어 프렐리무가 1960년대까지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전쟁 기간 동안 프렐리무는 당시 프렐리무의 최대 후원국이던 인접 국가들인 탄자니아와 잠비아를 비롯해 중국, 소련, 쿠바,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등 여러 공산권 국가들[30]과 당시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의 맹주였던 이집트 등의 지원을 받으며 전선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한편 포르투갈군은 잠비아·말라위와의 국경을 봉쇄하여 양면에서 프렐리무를 압박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리고 모잠비크와 인접해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로디지아 등 남부 아프리카의 백인 통치 국가들과 심지어 흑인이 통치하는 흑인 국가였음에도 당시 친포르투갈 성향이 강했던 말라위도 프렐리무와 싸우던 포르투갈을 지지하면서 모잠비크에서 포르투갈군과 프렐리무군의 전쟁은 국제 대리전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울자 드 아히아가(Kaúlza de Oliveira de Arriaga) 모잠비크 주둔 포르투갈군 준장의 지휘하에 1970년 6월, 북부지방에 산재한 프렐리무 기지를 파괴한다는 내용의 '고르디우스의 매듭 작전'이 개시되었다. 이 작전의 결과, 프렐리무는 와해 직전의 상황까지 몰린 반면, 모잠비크 전선에서도 포르투갈의 주도권 장악이 확정되었다.
앙골라 전역과 마찬가지로 모잠비크에서도 현지인이 중용되었으며, 현지인 지원자로 구성된 특수작전부대가 운용되기도 했다. 포르투갈 제국은 주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근대화 작업에 착수해 새로운 도로, 철도망, 다리, 관개시설, 학교, 그리고 병원들이 모잠비크에 건설되었다. 포르투갈은 또한 카오라바사(Cahora Bassa) 댐 건설을 시작했고, 이것은 포르투갈이 현지인들에게 약속한 '문명화'가 진행 중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요소였다. 자연스럽게 카오라바사 댐 건설 현장은 프렐리무군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
테테주(Tete)의 카오라바사 댐 건설에는 모잠비크 주둔 포르투갈군 병력의 절반이 투입되었으며, 이곳은 프렐리무의 주요 공격 목표였으나, 정작 공격은 번번히 실패로 끝났다. 전쟁기간을 통틀어, 프렐리무가 도시를 공격하여 성공한 것은 단 한 차례뿐이었다. 1973년까지 포르투갈군은 북부의 프렐리무 점거지들을 제외한 영토의 대부분을 수복하며 승전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모잠비크 전선에서 눈부신 전과를 거둔 아히아가 준장은 74년 초 갑자기 경질되고 만다.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정황상 아히아가의 경질은 카에타누 수상이 '쿠데타 방지'를 위해 내린 조치였을 가능성이 높다. 카에타누 정부는 아히아가 준장이 해외 식민지를 수호하고 포르투갈 좌파 세력의 집권을 막기 위한 보수-우파 성격의 쿠데타를 조직하려 했다고 의심했다. 그러나 결국 그해 4월, 아히아가 준장의 우려대로 좌파 군인들에 의해 쿠데타가 발생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4.3. 번외: 인도의 고아 합병
한편, 남아시아에서는 포르투갈과 인도가 포르투갈령 고아와 다만, 디우, 다드라, 나가르하벨리를 두고 갈등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포르투갈이 대항해시대 당시에 확보한 인도 내 거점 중 하나로, 포르투갈이 수백년 간 지배해 온 지역이었다. 1945년 이후 포르투갈령 인도 내부에서도 탈식민지화와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게 된다. 인도에서 온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독립 촉구 시위를 조직하고 대규모 집회를 벌여 독립을 요구했으며, 인도 공화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고아 해방당(Azad Gomantak Dal)이나 고아인 연합 전선 같은 무장단체가 등장해 포르투갈의 통치 기반을 약화시켰다. 포르투갈군의 카를루스 아자레두(Carlos Azaredo) 대위(장군으로 전역)는 포르투갈의 일간지 이스프레수(Expresso)에서 고아 전역이 아프리카 전역보다 더 치열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사람들이 말하는 것과는 반대로 우리 군이 맞닥뜨린 가장 조직되어 있는 게릴라 조직은 고아에 있습니다. 나는 앙골라와 기니에서도 싸워봤기 때문에 그 점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1961년에만 80명의 정치인들이 살해당했습니다. 고아 해방당(Azad Gomantak Dal)의 핵심 인원은 고아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영국군 소속으로 몽고메리 장군 휘하에서 독일군과 싸웠던 사람들입니다."
-카를루스 아자레두(Carlos Azaredo)
-카를루스 아자레두(Carlos Azaredo)
한편, 1950년부터 시작된 포르투갈과 인도 사이의 외교 협상은 원활히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1950년 2월, 인도 공화국 정부는 포르투갈 살라자르 정부에게 포르투갈령 인도 식민지에 대한 협상 개시를 요구했지만 살라자르 정부는 "인도 식민지는 포르투갈의 일부이며 반환은 불가능하고, 고아가 포르투갈의 소유가 되었을 때 인도 공화국은 없었기 때문에 현 인도 정부는 고아 지방에 대한 소유권이 없다"라고 주장했다.[31] 포르투갈 정부가 그 어떠한 협상도 거부하자 인도 정부는 1953년 6월 리스본 주재 대사관을 철수시켰다.
1954년, 인도 공화국 정부는 고아 등 포르투갈령 인도 식민지를 방문하는 데 필요한 비자 발급을 제한했다. 다드라와 나가르하벨리에 주둔한 포르투갈군이 무장게릴라에게 공격당했다. 1955년, 수천 명의 인도 사회운동가들이 고아 지방에 침투하려 하자 포르투갈 식민 정부는 강력 대응해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1955년 9월, 인도 공화국 정부는 고아에 있는 영사관을 폐쇄했다.
살라자르 정부는 인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영국, 브라질, 그리고 UN 안전보장이사회에 중재를 요청했다. UN 주재 인도 대사는 인도 정부가 무력을 사용하려 한다는 주장을 일축했으며, 인도 주재 미국 대사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는 식민지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1954년, 인도 정부의 지원을 받은 무장단체들이 다드라와 나가르하벨리를 침공했다. 포르투갈은 침입자 격퇴를 위해 인도 정부에게 통행권을 요청했지만 인도 정부는 요청을 묵살했다. 인도 경찰력과 무장단체는 다드라와 나가르하벨리 점령을 성공하고, 다드라나가르하벨리 주민이 통치하는 명목상의 독립국으로 만들었다. 포르투갈은 이 사건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했다. 1960년 4월, 국제사법재판소는 포르투갈의 다드라와 나가르하벨리 지역에 대한 영유권과 주권을 인정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지역들이 포르투갈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고아 탈환을 위해 인도에선 대규모 침공군이 조직되고 위기를 느낀 살라자르 정부는 군부에 대응을 요구했다. 포르투갈 국방부 장관 보텔류 모니스(Botelho Moniz)를 비롯한 장군들은 탈식민지화에 저항하는 것은 포르투갈군의 자살과도 같다고 주장했지만 살라자르 총리는 조언을 모두 무시했다. 침공 나흘 전인 1961년 12월 14일, 살라자르 총리는 고아 총독 마누엘 안토니우 바살루 이 실바(Manuel António Vassalo e Silva)에게 마지막 한 명까지 고아를 지키다 죽으라고 명령했다.
4.3.1. 고아 전역
중재가 사실상 어려워지자 포르투갈도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1척의 프리깃과 3척의 순찰선을 동원하여 인근 해역에 대한 순찰 활동을 강화했고[32], 3천여 명의 보병에 현지인 병력을 더하여 약 4천 명의 방어군을 편성했다. 여기에 더하여 약 2천 명의 경찰력으로 인도인에 의한 테러 활동을 경계했고, 축구 팀으로 위장하여 고아에 도착한 방공포 부대가 여기에 더해져서 인도 공군의 저지 임무를 맡았다.사실 포르투갈은 자국령 인도에 수비병력을 증원할 여력이 없었다. 포르투갈 자체가 워낙 소국이어서 병력이 충분한 것도 아니었고, 인도 말고도 관리해야 할 식민지도 세계에 산재해 있었다. 아시아에는 마카오와 동티모르가 있었고, 아프리카에는 앙골라, 모잠비크, 상투메 프린시페, 카보베르데, 기니비사우 등에 식민지가 있었다.[33] 한편, 포르투갈 식민지 정부는 전투가 시작되기 전 포르투갈 국적 민간인들을 모두 대피시켰다.
게다가 이런 와중에 국제정세마저 포르투갈을 따라주지 않았다. 포르투갈 해군은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고아에 증원 함대를 급파하려고 시도했으나,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의 통과를 불허하며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34]
한편 최소 2개 사단 이상의 인도 육군이 침공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었으며, 해상에는 항모 비크란트를 중심으로 한 항모기동부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게다가 인도는 본국에서의 전쟁 수행인 반면, 포르투갈은 지구 반대편의 식민지를 지키기 위한 장거리 전쟁이었다. 고아, 디우, 다만은 인도 본토와 직접 연결되어 있었고 제해권도 인도의 것이었으며 주민들도 절대다수가 인도계라 당연히 인도 본국에 합류하길 열망했다. 그 때문에 인도군은 작전시 보급의 우려가 전혀 없었고 점령지 치안유지나 민간인의 적대행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민간인들이 인도군을 위해 사보타주를 할 가능성이 높았다. 포르투갈의 전력은 인도에게 육해공 모두 열세였다.
인도 해군을 저지하다 격침당한 포르투갈 해군의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급 프리깃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 함(NRP Afonso de Albuquerque)
1961년 12월 17일 밤, 인도 지상군이 고아와 다만 디우로 진격했다. 12월 18일, 인도 공군 잉글리시 일렉트릭 캔버라 폭격기들이 고아의 포르투갈 수비군을 폭격하는 것으로 공식적으로 교전이 시작되었다. 인도 해군은 고아 근처의 안제디브(Anjediv) 섬으로 진격해 섬을 점령하려 했다. 포르투갈 수비군 대부분은 이 시점에서 도주했고,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호만 홀로 남아 몰려오는 인도 해군을 저지했다.
뒤이어 인도 함대의 선두에 섰던 레오파드급 초계함 2척과 알부케르크함 간의 교전이 벌어졌다. 알부케르크함은 전투 내내 무려 400발이 넘는 포탄을 발사하며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1950년대에 건조된 최신 방공초계함인 레오파드급과 1930년대에 건조된 노령함이었던 알부케르크는 애초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결국 짧은 해전 후 알부케르크함은 무력화[35] 되었고 인도 해군은 안제디브 섬을 장악했다. 안제디브 섬이 점령됨으로써 포르투갈의 해상 탈출은 완전히 봉쇄되었다.
개전 직후 UN 안전보장이사회가 소집되었지만, 인도와 친한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안보리는 결의안 채택에 실패했다.
인도군의 진주를 환영하는 고아 주민들
포르투갈군의 무저항으로 다만이 개전 17시간만에 인도 수중에 넘어가고 짧은 교전 후에 디우도 인도군이 점령했다. 그나마 오래 버틴 게 고아 주둔군이었지만 현지 주민들이 인도에 붙어 버리자 저항 의욕을 잃고 12월 19일 백기투항하고 450년에 걸친 포르투갈의 인도 식민지 운영의 역사는 이로서 종결되었다. 항복 선언 직후,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인도군이 고아로 진입해 주요 관공서를 접수하고 수비군을 무장해제시키고 통제권을 인수하는 것으로 이 짧은 전쟁은 끝났다.
원래 포르투갈은 본토에서 파견한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항구에서 버틴다는 센티넬라 계획(Plano Sentinela)을 작성한 바 있었다. 그러나 현지 수비군은 계획 실행을 포기했고, 뒤늦게 고아 봉쇄를 뚫기 위한 함대 증원을 준비할 즈음에는 이미 항복한 뒤였다. 리스본의 총리 관저에 머물던 살라자르 총리는 수비군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했다며 격분했고, 이에 실바 총독은 불필요한 인명피해와 파괴활동을 최소화한 결정이었다고 항변했다. 포르투갈 정부는 고아를 인도에게 넘겨주느니 차라리 파괴해 버리라고 명령했지만 수비군은 명령을 무시했다.[36]
포르투갈 정부는 인도 정부와 모든 공식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1962년 1월에 이루어진 의회 연설에서 살라자르 총리는 국가 주권의 수호를 호소하며 포르투갈의 정당한 영토와 국민이 외국에 넘어가는 것을 방관할 수는 없다고 호소했다. 포르투갈의 우방 자유진영은 형식상 인도를 비난하긴 했지만 어떠한 실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형식상으로는 소수민족의 독립 및 권리 회복을 주장하는 소련과 공산진영은 인도를 지지했고 아프리카 및 아시아의 신생 독립국들은 인도의 고아 점령을 유럽 제국주의 침략자에 대한 아시아인의 정당한 권리 회복 및 통쾌한 복수로 여기며 열렬히 환영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인도는 제3세계 동맹의 맹주로서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고 고아, 다만디우, 다드라나가르하벨리를 인도에 병합했다.
인도의 고아 합병은 포르투갈의 아시아 식민지인 포르투갈령 마카오에도 영향을 주었다. 1966년 포르투갈령 마카오 정부는 친중공 중국계의 폭동을 진압했는데, 이에 중화인민공화국이 반발하자 포르투갈 정부는 인도의 예에서 볼 때 인민해방군과 전쟁을 벌이면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중공과 커넥션이 있었던 중국계 마카오인들의 중재를 통해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요구 사항을 받아들였다. 포르투갈령 마카오 정부는 포르투갈 중앙정부가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음을 알아채고는 반공 색채를 누그러뜨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던 본국의 방침도 무시하고[37] 중화인민공화국과 교류하며 중국국민당 관련 기관의 활동을 금지하는 등 포르투갈의 해외령이었음에도 중화인민공화국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5. 절정
1972년에는 1966년에 개막한 앙골라 동부 전선(Frente Leste) 전역이 포르투갈의 승리로 끝났다. 네투를 위시한 MPLA 수뇌부는 해외로 도주했으며 남아 있던 MPLA 잔당은 분열되었다. 소련은 MPLA에 대한 지원을 완전히 중단했고 탄자니아의 줄리어스 니에레레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게 MPLA 대신 FNLA를 지원하라고 종용했다. 1973년 중공을 방문한 올뎅 호베르투는 중공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심지어 일부 MPLA 세력은 FNLA를 처리하기 위해 포르투갈군과 협력하기도 했다.[38]1973년, 모잠비크의 FRELIMO 세력은 대부분 변두리 지역으로 후퇴했으며, 내부 권력 투쟁 끝에 온건파가 쫓겨나고 강경파인 사모라 마셸이 FRELIMO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게릴라 세력은 시민들의 포르투갈 정부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키기 위해 민간인 거주지에 대인지뢰를 매설했으며 일부 포르투갈 이주자들은 리스본의 카에타누 정부에 전쟁을 빨리 끝내라고 항의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게릴라 세력이 지탄받는 경우가 더 많았다. FRELIMO가 포르투갈군과의 전면전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세력이 극도로 위축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포르투갈군이 개시한 고르디우스 매듭 작전의 대성공과 1972년에 이루어진 테테 주에 대한 FRELIMO의 공세 작전 패전으로 모잠비크 전역은 안정되어가기 시작했다.
1973년까지 포르투갈은 기니비사우를 제외한 나머지 식민지를 대부분 평정하는데 성공했다. 1974년에는 앙골라와 모잠비크의 게릴라 활동은 남아공과 로디지아의 지원을 받는 포르투갈군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시골과 변두리 지역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기니비사우에서만 이웃 기니 공화국과 세네갈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게릴라가 수도 비사우와 일부 포르투갈군 점령지역을 제외한 기니비사우 영토 전역을 석권하는 등 유의미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포르투갈 정부는 기니비사우 전선에서의 패배를 인정했지만 전투를 포기하는 것은 다른 두 지역의 게릴라들의 세를 불려주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기에 포르투갈군은 기니비사우 전선에서의 전쟁을 이어갔다.
포르투갈령 아프리카 식민지 내부 게릴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앙골라, 모잠비크, 그리고 포르투갈의 경제는 매년 성장하고 있었다. 1960년대부터 그동안 극도로 낙후되어 있었던 앙골라에선 유례가 없는 경제성장이 계속되었고 포르투갈 정부는 도시화되고 잘 개발된 해안지방과 낙후된 내륙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망을 건설했다. 포르투갈 정부는 식민지 정착자들을 지원했고, 메트로폴르(metrópole)라 불리는 유럽계 포르투갈인 이민자들이 아프리카 식민지로 몰려들어 가령 앙골라의 유럽인 인구는 1944년 4만 명에서 1974년엔 40만 명까지 늘어났다.
5.1. 내부의 불안 요인
그러나 장기간 지속된 식민지 전쟁으로 국가경제는 거의 파산 직전이었고, 국민들 사이에선 반전 사상이 퍼져나갔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게릴라 활동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한 대규모 군사 작전이 감행되었고, 국가 예산의 44%가 군비로 지출되었다. 모든 남성은 군대에서 3년 이상 의무 복무를 해야 됐고, 최소 2년 이상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복무해야 했다. 징병에 반대한 많은 포르투갈 젊은이들이 해외로 탈출했고 포르투갈군은 식민지의 현지인들을 징집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시작한 1961년 식민지 흑인들이 포르투갈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8%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74년 4월에는 50%를 넘어섰다. 포르투갈의 교육 정책으로 인해 흑인들의 문맹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정식으로 장교 과정을 밟을 수 있는 흑인은 거의 없었으나, 전쟁 말기에는 초급 장교로 진급한 흑인도 많아졌다.포르투갈의 카에타누 총리는 기니비사우의 PAIGC 게릴라와 협상을 개시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한 스피놀라 장군을 경질했다. 많은 사람들이 스피놀라 장군을 전쟁 영웅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카에타누 총리의 이 결정은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포르투갈군이 기니비사우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포르투갈의 승리가 확정적이라고 믿었다. 미국의 닉슨 행정부와 영국, 서독, 프랑스 등 서방 주요 강대국들은 포르투갈 식민제국이 마지막까지 게릴라들을 진압하며 살아남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아프리카 전선에서의 승리가 포르투갈 국내의 여론 분열을 해소할 것이라고 믿었다.
식민지 무장 게릴라 지원으로는 전쟁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소련과 공산진영은 국제무대에서 포르투갈을 고립시키는 데 집중했다. 당시 포르투갈 내에서 불법으로 규정된 포르투갈 공산당은 1950년대부터 모든 식민지의 완전 독립을 주장하고 있었다.
1964년 4월, 포르투갈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민주사회 행동위원회(Acção Democrato-Social)는 식민지 문제가 전쟁보다는 정치적 협상으로 해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6년, 사회주의자 정치인 마리우 소아르스(Mário Soares)[39]는 범국민적 합의를 거친 국민투표를 통해 포르투갈의 해외 영토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상황이 달라졌다. 상황수첩(Cadernos Circunstância), 시간과 방법(Tempo e Modo), 논란(Polémica) 같은 유인물들이 대학가에서 돌기 시작했다. 반전운동이 대학가에서 확산되었고 이스타두 노부 체제를 비방하는 선전물이 곳곳에 붙여졌다. 무장혁명행동(Acção Revolucionária Armada)이나 혁명여단(Brigadas Revolucionárias) 같은 좌파 무장테러단체가 조직되어 군 시설에 대한 테러와 사보타주를 감행했다. 오에이라스에 있는 NATO 사령부가 이들에 의해 공격당했고 탕쿠스(Tancos) 공군기지가 공격받아 군용 헬리콥터 수 대가 파괴되기도 했다.
카에타누 정부는 여론을 돌리기 위해 재정 정상화를 위한 군 예산의 삭감과 함께 여러 개혁 조치를 발표했다. 이 조치는 많은 장교들에게 불만을 샀는데, 특히 출신환경이 좋지 않았던 젊은 장교단이 크게 반발했다. 동시기에 소련의 영향을 받은 포르투갈 국내 좌익세력이 군부 내부까지 침투했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이스타두 노부 체제에 불만이 많은 청년 장교들이 중심이 되어 군부 쿠데타를 통한 카에타누 정부 전복과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한 신체제 건설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6. 결말
시민들이 달아 준 카네이션을 달고 있는 쿠데타군
1974년 4월 25일 새벽, 좌익계열 청년 장교들이 중심이 된 '국군 운동'(Movimento das Forças Armadas, MFA)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리스본과 포르투갈 전국의 전략 요충지를 점령했다. 소위 말하는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초기에는 일부 병력만이 쿠데타 세력에 동조했으나 점차 그 세가 불어났으며 정부에 충성하는 부대는 병력을 출동시키길 꺼렸다. 카에타누 총리는 곧 투항하고 쿠데타 세력에게 추대된 스피놀라 장군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전쟁과 전시 체제에 지친 리스본 시민들은 군인들의 궐기에 환호했다.
좌파 장교들이 중심이 된 임시정부[40]는 해외 식민지를 모두 포기하기로 결의했다. 포르투갈 군대와 관료들이 제일 먼저 식민지에서 떠났으며 해외에 나가 있던 수십만의 포르투갈 노동자들, 소상공인들, 그리고 농부들도 귀국했는데 포르투갈 본토 사람들은 이들을 '귀환자(Retornados)'라고 불렀다.
이에 해외 식민지들은 독립국가로 독립하였고, 포르투갈의 신정부는 포르투갈령 인도의 인도 병합을 승인하였다.
포르투갈이 해외 식민지들을 모두 포기했으므로 남은 것은 마카오밖에 없었다. 그 마카오도 카네이션 혁명 이후 지속적으로 중국에 반환하겠다고 했지만 중국이 홍콩 반환 문제로 인해 거부해서 포기하지 못했을 뿐이며 양국은 마카오에 대해 '중국 땅이지만 포르투갈 정부가 행정권을 행사하는 곳'으로 해석하는 데 합의하였다. 그리고 그 마카오도 1999년에 반환이 이뤄졌다. 또한 2002년 인도네시아에 병합되었다 독립한 동티모르의 독립을 승인함으로서 지구상의 최초의 식민제국이자 마지막 식민제국은 이렇게 무너졌다.
7. 그 이후
카네이션 혁명에 의한 혼란은 식민지 주민과 군 관계자의 대규모 탈출을 초래하였다. 최대의 식민지인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는 백인과 흑인을 불문하고 총 1백만명 이상의 주민이 떠났는데, 이 일련의 대탈주는 역사상 평시에 행해진 집단 이주 가운데서도 최대 규모였다.1974년 4월 25일의 쿠데타 이후 이스타두 노부 체제를 무너트리고 등장한 '구국 군사 정부'(Junta de Salvação Nacional)가 포르투갈의 정국을 이끌게 된다. 뒤이어 혁명 진행 과정(Processo Revolucionário Em Curso)이라는 여러 사회정치적 세력간 매우 열띤 정치적 대립기가 나타났다. 군사정권 내부에서도 스피놀라 장군을 중심으로 한 보수파와 좌익 MFA가 대립했으며, MFA 내부에서도 공산당을 지지하는 급진파와 온건 사회주의자들이 대립했다. 이러한 대립은 1975년 11월 25일 공산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군부 내 급진 좌익 세력의 포르투갈 공산화를 위한 쿠데타로 극에 달했다. 혼란은 1976년 4월 25일에 치러진 보통선거 전후로 서서히 진정되어 갔다.
앙골라에서는 포르투갈 제국이 무너지자 독립운동 세력이 분열되어 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은 앙골라 해방인민운동(MPLA)과 미국과 중국, 이스라엘, 남아공의 지원을 받은 앙골라 민족해방전선(FNLA) - 앙골라 완전독립 민족동맹(UNITA)[41] 연합이 1975년부터 앙골라 내전을 벌였다. 처음에는 소련·동유럽 국가들의 원조를 받은 MPLA가 미국·중화인민공화국의 원조를 받은 연합 세력을 압도하였으나, 10월 말 남아프리카 공화국 군대의 개입으로 형세는 역전되었다. 그러나 11월 초부터 쿠바군의 투입과[42], 소련의 무기원조 확대로 형세는 다시 역전되면서 1976년 2월에는 MPLA의 승리가 확정적이었다.[43] 내전 중 MPLA는 앙골라 인민공화국, 연합 세력은 앙골라 민주 공화국을 수립했고 각각 소련, 쿠바, 동독과 미국, 남아공, 중국 등의 지원을 받았다. 내전으로 인해 앙골라에서 약 50만명의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 120만 명 이상의 실향민과 약 3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고, 100만 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전쟁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었다. 앙골라는 산유국이자 세계 수위의 다이아몬드 생산국으로 이 때문에 내전 이후 경제회복은 상대적으로 빠른 편이었지만, 역으로 석유는 MPLA의, 다이아몬드는 UNITA의 자금줄이 되어 냉전이 끝난 2000년대까지 잔혹한 내전이 이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모잠비크에선 집권당이었던 모잠비크 해방전선(FRELIMO)의 강경좌익노선에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이 끝난 1975년에 결성된 우파계열 반군 모잠비크 민족저항운동(RENAMO)이 반발해 내전을 벌였다. 앙골라와 마찬가지로 FRELIMO는 이웃 공산국가들과 공산진영의 지원을 받았으며 RENAMO는 로디지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아프리카 내에 남아 있던 백인 정권들의 지원을 받았다. RENAMO는 도로, 병원, 학교, 농장, 마을 등을 공격했으며 양측 간의 구조적인 대학살과 고문은 자주 벌어졌다. RENAMO는 농업지역의 인프라를 붕괴시키는 전략을 사용하여 특히 모잠비크의 남부 지역에 공격을 집중했다. 모잠비크는 독립 후 내전 외에도 여러가지 문제에 직면했다. 불경기 및 사회적인 퇴행, 공산주의자들의 전체주의적인 행태, 뇌물, 빈곤, 경제적 불평등, 실패한 계획경제가 혁명 초기의 정열을 실추시켰다. 게다가 포르투갈인 숙련노동자들이 출국한 후 모잠비크는 사회기반 시설의 정비 및 보수에 기술자가 턱없이 부족해져 모잠비크 경제가 추락하는 원인이 되었다. 내전으로 인해 모잠비크에서 약 100만 명의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고, 500만 명 이상의 실향민이 생겨났으며 가족과 분리된 어린이도 250만이 넘었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던 카보베르데와 기니비사우, 상투메 프린시페에서도 쿠데타와 정정 불안이 이어졌다. 기니비사우에선 집권 공산주의자들과 군부 세력간의 물고 물리는 쿠데타가 발생했고, 몇 차례의 저강도 분쟁이 일어났다. 상투메 프린시페에선 집권 사회주의 세력에 반발하는 쿠데타 시도가 수 차례 있었다. 카보베르데의 경우 20세기 후반 동안 최빈국을 탈출한 몇 안되는 나라 중 하나가 되긴 했지만, 집권 사회주의 세력인 카보베르데 아프리카독립당(Partido Africano da Independência de Cabo Verde, PAICV)이 철권통치를 벌였다. 그래도 카보베르데와 상투메프린시페는 1990년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주의로 전환하게 되었다.
독립을 달성한 아프리카의 구 포르투갈령 식민지 국가들은 카보베르데 정도를 제외하곤 초반의 희망과는 달리 경제악화・공산독재・부패・빈곤・불평등・정책의 실패 등 여러 문제점들을 노출했고, 사회질서와 경제수준을 회복시키는 것이 독립 이후의 과제로 부상했다.
한편 아프리카 밖의 동티모르에서도 독립 직후 무장 세력 간의 내전이 벌어졌고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FRETELIN)이 주도권을 잡아서 독립을 선언했으나 1975년 12월 7일 지척에 좌익 성향의 정권이 들어서는 걸 용납할 수 없던 인도네시아가 미국, 호주, 말레이시아, 영국 등의 묵인 하에 동티모르를 침공해 27번째 주인 티모르티무르 주로 일방적으로 합병했다. 이후 인도네시아 정부의 심각한 유혈 탄압이 지속되다가 수하르토 독재정권이 무너지면서 동티모르의 독립을 승인하게 되었다. 이후 동티모르는 2002년 정식으로 독립국가가 되었다. 옛 포르투갈의 식민지들 중에서 그나마 중국과 인도에 흡수된 마카오와 고아 등은 정치적 불안정이나 경제적 쇠퇴를 크게 겪지 않았다.
8. 여담
최초이자 마지막 식민제국의 최후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제3세계 역사에서는 중요한 사건이지만 대한민국에서의 인지도는 낮다. 유럽의 가난한 2류 국가인 포르투갈과 낙후된 제3세계 독립운동 세력의 싸움이니만큼 흥미도가 낮고, 독립운동 주도 세력이 좌익 / 공산주의 계열인 데다가 공산권 국가들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를 실시하고 있던 백인 정부는 포르투갈 식민지가 무너지고 흑인 정권이 들어서자 위기감을 느껴서 핵개발을 강행했다.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2의 캠페인 첫 미션이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에서 이어지는 앙골라 내전을 다루고 있다. MPLA와 UNITA, UNITA의 지도자 조나스 사빔비, 그리고 MPLA을 지원한 쿠바군이 미션에 등장한다.
이 시기에 '앙골라는 우리 것이다'라는 선전 노래#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하여 나온 만화가 있는데, 일본인 만화가 코이케 카즈오와 히라노 진이 그린 <사하라: 여자 외인 부대>이다. 전 세계 각지에서 여자들만 모여서 만들어진 외인부대가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이 포르투갈을 상대로 벌이는 독립 투쟁을 저지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국내에도 2000년에 번역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완전히 절판되어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고, 인터넷 중고 헌책방에서야 구할 수 있다.
9. 같이 보기
[1] 전쟁 후반기에 있었던 포르투갈군의 대규모 공세인 '고르디우스 매듭' 작전(모잠비크)과 '청해' 작전(기니비사우) 개시 전이며, '동부 전선' 전역(앙골라) 종결 전의 지도이다.[2] 앙골라 민족해방전선[3] 카빈다 월경지 해방전선. 콩고민주공화국과 콩고 공화국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1975년 1월 알보르조약으로 앙골라에 병합됐다. 앙골라 산유량의 60%를 담당한다.[4] 기니비사우 독립투쟁전선[5] 살라자르의 후임 총리[6] 포르투갈 제13대 대통령[7] 앙골라 주둔군 사령관[8] 포르투갈령 기니 총독 겸 주둔군 사령관[9] 모잠비크 주둔군 사령관(1964 - 1969)[10] 모잠비크 주둔군 사령관(1969 - 1974)[11] 마지막 고아 총독[12] MPLA 서기장[13] FNLA 의장[14] 기니비사우의 독립운동가. 위 아밀카르 카브랄의 동생으로 후에 기니비사우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15] 기니비사우의 독립운동가. 후에 기니비사우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985년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16] 모잠비크의 독립운동가. 후에 모잠비크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17] FRELIMO 초대 서기장[18] 모잠비크의 독립운동가. 후에 모잠비크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19] 모잠비크의 독립운동가[20] 누적 인원 총 140만 명[21] 전후 독립 세력에 처형된 현지인 병사 7천여 명 제외[22] 브라질 독립 이후로도 본국보다 약 24배나 더 큰 식민지를 지배하고 있던 셈이다.[23] 포르투갈 본토 자체도 워낙 작고 인구도 적으며, 또한 나폴레옹 전쟁 당시 리우데자네이루에 임시 수도를 두기까지 했는지라 브라질은 더 이상 단순한 식민지가 아닌 자치령급으로 격상되어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왕국"이라는 동군연합 형태로 국가를 묶어야 했다. 그 정도로 정치-경제적 위상이 한참 높아져 있던 터라, 식민지로 재격하하려는 움직임에 브라질이 순응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윽고 페드루 왕태자가 현지 귀족들과 함께 독립을 선언하고 이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포르투갈은 브라질에 대한 통제력을 영구히 상실한다.[24] 2022년 기준 포르투갈의 인구는 천만 명을 겨우 넘는다. 게다가 식민지였던 브라질의 이민 인구 수준에 따라 매년 포르투갈 인구가 늘었다가 줄었다가를 반복하며 바뀔 정도이다. 2억이 넘는 브라질과 교류가 많기에 브라질의 사정에 따라 그때 그때 포르투갈 인구가 흔들리는 것. 지금도 포르투갈은 서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인 산업 구조를 가진 나라다.[25] 이 당시 포르투갈은 말라위와 잠비아, 짐바브웨 일대를 둘러싼 영국과의 분쟁에서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 등 다른 서유럽 열강들의 외교적 중재를 요청했으나 영국이 중재를 거부하는 바람에 짐바브웨와 잠비아, 말라위를 식민지로 삼지 못했다. 이 시기에 작곡된 것이 현 포르투갈 국가로 초창기에는 '영국에 맞서 전진하라'는 가사가 들어갔다.[26] 프랑스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알제리 전쟁으로 핵심 식민지 베트남과 알제리를 잃었고, 결국 1960년경에 나머지도 거의 다 풀어줘야 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 영국도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위기) 때 굴욕을 겪어 더 이상 세계 정세를 쥐락펴락하던 대영제국이 아님을 인증해 버렸다.[27] 포르투갈어로 "새로운 국가"라는 뜻으로, 1933년부터 1974년까지 포르투갈에 있었던 권위주의 체제이다.[28] UPA는 전쟁이 본격화된 1961년부터 FNLA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29]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백인 정권 시절이던 1960년대 말 서아프리카 국가였던 나이지리아에서 일어난 비아프라 전쟁 당시 나이지리아와 전쟁 중이던 비아프라를 지원하며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군사 개입을 시도했다가 1970년 비아프라가 나이지리아에게 패망하면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30] 당시 불가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공산당이 정권을 잡았다는 이유로 반공을 내세우던 포르투갈의 살라자르 정권이 단교를 선포하면서 포르투갈과의 외교관계가 단절되어 있었다. 이후 1970년대에 살라자르가 사망하고 뒤이어 집권한 카에타누 총리가 1974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실각하여 포르투갈의 정권이 교체되면서 불가리아와 포르투갈이 재수교했다.[31] 포르투갈 세력이 인도에 도착했을 당시 인도는 수십 ~ 수백 개의 소왕국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포르투갈은 지방의 여러 소왕국들에게서 빼앗은 영토로 포르투갈령 인도 식민지를 구성했다.[32] 이 4척의 프리깃 중에 고아를 함락한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의 이름을 딴 함정도 있었다.[33] 특히 앙골라에서는 1960년부터 본격적인 무장 독립투쟁이 시작되면서 아무리 봐도 인도 식민지에 대한 병력 증원은 무리였다.[34] 그렇잖아도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제3세계의 맹주를 자처하고 있었으므로 포르투갈보다는 인도의 편을 드는 게 당연했다.[35] 포격으로 알부케르크함의 보일러와 엔진이 파괴된 상태에서 승조원들이 함을 해상 포대로 사용하기 위해 고의로 지상으로 좌초시켰고, 이 상태에서 두 시간 가량 더 저항하다 결국 인도군이 함에 올라타 승조원들을 제압하고 나서야 교전이 마무리되었다.[36] 물론 그런 짓을 했다가는 수비군은 인도군이나 고아인들의 보복을 받아 학살당할 수도 있었을 테니 목숨이 아깝다면 하지 않는 편이 현명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37] 당시 포르투갈은 중화민국과 수교하고 있었다.[38] 이때 외부 지원이 끊기고 집중적으로 포르투갈의 공격을 받은 MPLA는 궤멸 직전에 놓였다. 네투가 돌아와 혼란을 수습하지 않았다면 MPLA는 와해됐을 것이다.[39] 포르투갈의 정치가(1924.12.7 - 2017.1.7). 대학 시절부터 이스타두 노부 체제에 맞서 싸워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데 공헌하여 '포르투갈 민주화의 아버지'라 불린다. 1973년 독일에서 포르투갈 사회당을 창당하였으며, 총리와 대통령직을 각각 두 차례 역임하였다.[40] 스피놀라 장군 등 보수-우파 계열의 장교들이 요직에 있었지만 실권은 MFA가 쥐고 있었다.[41] UNITA는 원래 중국의 지원을 받은 마오주의 성향이었으나 이후 미국과 남아공의 지원을 받게 되면서 반공주의 성향으로 선회했다.[42] 5만 명의 쿠바군이 MPLA를 지원하기 위해 앙골라에 투입되었다.[43] 그러나 앙골라 내전은 장기화되었고, 2002년이 돼서야 양측 간의 적극적 적대행위가 중단되었으며, 2008년 총선 결과에 야당(UNITA) 세력이 승복해 완전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