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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파퐁

1. 개요2. 일생
2.1. 2차 대전 전2.2. 2차 대전 당시2.3. 2차 대전 후
2.3.1. 1961년 파리 학살2.3.2. 샤론 지하철역 학살
2.4. 파리 경찰청장 은퇴와 그후2.5. 몰락2.6. 최후
3.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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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Maurice Papon(1910.09.03 ~ 2007.02.17)
파일:Maurice_Papon_1.jpg 파일:11.12.67_Présentation_officielle_du_Concorde_(1967)_-_53Fi1793_(Maurice_Papon).jpg 파일:노년의 모리스 파퐁.webp
1945년 4월의 모습 1967년 12월 11일의 모습 1997~1998년의 모습
그는 프랑스 공무원의 전형이었으며, 고도로 교양 있고 명석했으나, 필요하다면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
그의 사망에 대해 다룬 슈피겔의 기사 중

프랑스의 전직 관료, 경찰, 정치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비시 프랑스에 협조하며 약 1,600명의 유대인 추방에 앞장섰던 인물이었으며 종전 후에도 독립을 요구하는 알제리 사람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여러 요직을 거쳤다가 친나치 전적이 발각되어 몰락한 인물이다.

2. 일생

2.1. 2차 대전 전

1910년 9월 3일에 파리 근교의 그레찰만빌리에르에서 부유한 중도좌파 성향 변호사 겹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에 파퐁의 아버지는 코뮌의 시장으로 선출되어 1937년까지 그 직책을 역임했다. 어린 모리스 파퐁은 수많은 명사들이 배출된 리세 루이르그랑에 재학한 후[1] 1929년부터 1932년까지는 파리 정치 대학에서 법학, 심리학, 사회학을 전공했고, 1930년에 공직에 입문한 후 출세가도를 달리며 1935년 7월에 내무부에 취직하게 된다. 1932년에는 폴레트 아소(Paulette Asso, 1910~1998)[2]와 결혼해 1남 2녀를 두었다.

2.2. 2차 대전 당시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초반에 파퐁은 리비아, 레바논, 시리아에서 프랑스 비밀 기관에 협조하다가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함락당한 후인 1940년 11월에 고국에 돌아오고는 비시 프랑스에 협조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파퐁은 1941년 1월에 내무부 중앙 관리 국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41년 2월에는 내무부 장관 겸 행정부 사무총장에 올랐고, 1942년 5월에는 피에르 라발에 의해 프랑스 남서부의 지롱드 데파르트망의 서열 2위 직책이던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파퐁은 비시 정권의 고위 경찰 관리로 근무하며 유태인 문제 서비스의 감독관 역할을 수행했고, 이 과정에서 나치 독일슈츠슈타펠과 정기적으로 협력했다. 파퐁은 1942년 7월부터 1944년 8월 사이에 12편의 열차를 통해 지롱드 데파르트망에 거주한 1560명의 유대인들을 독일 당국에 인도했고,[3] 이 유대인들은 파리 북부의 수용소를 거친 후 대부분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고, 소수만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파퐁은 1942년 7월까지 204개 회사를 '비유대화'시켰고, 유대인 소유의 토지 64개를 매각했으며, 493개의 다른 기업을 ' 비유대화'하는 과정에도 참여했다.

1944년 9월에 보르도가 해방된 이후 파퐁은 자유 프랑스 수반이던 샤를 드골을 처음으로 만났고[4], 이후에는 레지스탕스에게 빌붙으며 보르도에서 활동하던 좌파 성향의 레지스탕스 가스통 퀴쟁(Gaston Cusin, 1903~1993)의 보호를 받는다.

2.3. 2차 대전 후

파퐁은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뻔뻔하게도 자기가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다는 거짓 증명서를 만들며 자기가 레지스탕스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마냥 가장했고, 1945년 10월에는 내무부 장관이자 알제리 부국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47년 1월에는 코르시카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48년에는 일반 전시 복무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1949년 10월에는 알제리 콩스탕틴의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파퐁은 1954년에는 보호국 사무총장으로 모로코에 가서 모로코 민족주의자들을 탄압하는 데 협조했고, 1955년부터 1958년까지 고향의 시장을 역임했으며, 알제리 전쟁 중인 1956년에 콩스탄틴으로 돌아와 사실상 동부 알제리 지사와도 같던 콩스탄틴 지역 지사를 역임하며 민간인에 대한 고문을 포함하여 알제리인들의 독립운동 탄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5] 1958년 3월에는 파리 경찰서장이 되었다.

파리 경찰서장이 된 파퐁은 1958년 5월에 있던 쿠데타 모의에도 참여했는데, 이 쿠데타는 드골의 대통령 집권의 기반이 되었다. 이후 1961년 7월 12일에 파퐁은 샤를 드골 대통령에게 '국가에 봉사한 공로'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파퐁은 알제리에서의 경험을 바탕삼아 후술할 두 폭동적 시위진압을 자행해 큰 비판을 받는다.

2.3.1. 1961년 파리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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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정리하자면 1961년 10월 17일에 파퐁의 명령을 받은 파리의 경찰들이 평화롭게 시위하는 알제리인들에게 유혈진압을 퍼부어 공식적으로만 48명, 최대 200명 이상이 사망한 사건이다. 게다가 프랑스 정부는 이 학살을 은폐해오다가[6] 학살 37년 뒤인 1998년에야 학살 사실을 인정했으며, 대통령 차원에서 학살을 인정한 것도 이 학살로부터 무려 51년이나 지난 2012년이었다.

2.3.2. 샤론 지하철역 학살

1962년 2월 8일에 프랑스의 공산당원들과 노동총동맹 노조원들이 파리 지하철 9호선의 샤론(Charonne)역에서 알제리의 독립에 반대하던 극우 준군사 조직 비밀군사조직(OAS)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는데, 파퐁은 이번에도 경찰을 투입하여 시위를 유혈진압했다. 이 시위 진압은 로제 프레(Roger Frey, 1913~1997) 내무장관과 샤를 드골 대통령의 동의 하에 이루어졌다.

경찰은 '정적'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평화적으로 시위하던 시위대에게 상술한 경찰봉을 휘두르거나 최루탄을 투척했으며, 지하철 환풍구에 사용되는 26~40kg 정도의 무거운 철판을 계단에 있는 시위대들에게 던졌는데, 이 진압으로 16세 소년 1명을 포함한 8명이 현장에서 사망했고 250명 이상이 다쳤으며, 부상자 중 9명은 병원에서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이 유혈진압에 대해 로제르 프레이 내무장관은 '무장한 조직적인 폭도 집단이 경찰들을 공격했다'는 허위 발표를 했고, 1962년 4월 12일에 미셸 드브레 총리는 파퐁에게 '지도자이자 조직가로서의 (파퐁의) 자질과 (파퐁이) 종종 섬세하고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에 특별한 경의를 표한다'는 편지를 썼다. 2월 13일에 열린 샤론 지하철역 학살의 사망자들의 대규모 장례식에는 정부 추산으로만 50만 명이 참석하며 이들을 추도했다.

2.4. 파리 경찰청장 은퇴와 그후

1965년 10월 29일에에 파리에서 모로코 국적의 반프랑스 인사 메디 벤바르카(Mehdi Ben Barka, 1920~?)가 프랑스 경찰에 의해 납치당한 후 실종되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은 모로코 정부에서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프랑스 정보 요원과 CIA, 모사드까지 관련되었다는 설도 있는 미스터리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의 후폭풍으로 파퐁은 1967년 1월 18일에 파리 경찰청장직을 사임한다.

게다가 파퐁의 사임 전인 1966년 6월 17일에는 '행정 경찰 또는 사법 경찰 작전의 틀 안에서 저질러진 행위'를 포함하는 사면법이 승인되어 상술한 두 학살의 책임을 조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이후 드골은 파퐁이 쉬드 아비아시옹[7]의 사장이 되는 것을 도왔고, 파퐁은 '항공 건설 구조의 개혁을 위해서는 큰 권위를 가진 고위 관리가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1967년 1월 1일부터 1968년 8월 3일에 사임할 때까지 쉬드 아비아시옹의 사장으로 재직하며 A300 프로그램의 시작에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1968년 5월에는 68운동을 보고는 "점령의 귀환인가? 젊은 독일인 아나키스트 콩방디트가 자유롭게 폭동을 조직하고 있다."고 썼으며[8], 같은 달에는 드골파 정당인 UDR 소속의 하원의원 후보로 출마해 프랑스 중부의 셰르주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이후에도 2번이나 재선되며 1983년까지 국회의원직을 역임한 데다가, 1971년과 1977년에는 셰르주에 위치한 코뮌인 생아망몽트롱의 시장으로 선출되었다.[9] 그 외에도 파퐁은 랭스에 있는 유리 공예 회사인 Verreries mécaniques champenoises의 이사를 역임하기도 했으며, 1978년 4월 6일부터 1981년 5월 13일까지는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정권의 예산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2.5. 몰락

이렇게 호의호식하던 파퐁은 1981년 5월 6일에 르 카나르 앙셰네(Le Canard enchaîné)라는 풍자 주간지에 의해 나치에 협력한 과거가 폭로되며 몰락하기 시작한다.[10] 이 기사에는 파퐁의 생존자가 공개한 파퐁이 서명한 문서들도 공개되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저명한 나치 사냥꾼 세르주 클라르스펠드[11]와 비테 클라르스펠드(Beate Auguste Klarsfeld, 1939~) 부부는 파퐁을 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많은 힘을 기울였다. 파퐁은 이 폭로에 대해 "이 폭로의 내용은 거짓이고 좌파들이 내가 뛰어난 경력을 쌓았기 때문에 정치적 음모를 꾸민 것이다"라고 반발했다.

결국 1983년 1월 19일에 파퐁은 공소시효가 성립하지 않는 '인도에 대한 죄', 암살공모, 직권남용으로 기소되었다. 이로부터 3개월 뒤에 파퐁은 피해자 유족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으나 당연히 패소했다. 이후 파퐁은 12년간 3번이나 기소를 받고도 2차례나 자신의 피해자들을 자신에 대한 '비방적 비난'을 이유로 차례로 고소장을 제출했다. 1995년 7월에 12년에 걸친 파퐁에 대한 조사가 끝났고,[12] 1995년 12월에 파퐁은 나치의 패망으로부터 반세기가 훨씬 지난 뒤에야 법원에 출두했으며, 1997년 10월 8일에 파퐁은 드디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재판은 5만 페이지의 서류와 93명의 증인과 함께 진행되었고, 1998년 4월 2일까지 계속된 프랑스 역사상 가장 긴 재판이었다. 파퐁은 법원에 첫 출두한 후인 1996년 3월 5일에 리베라시옹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나 자신을 책망할 것이 없다. 반대로... 나는 완벽하게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재판에서는 파퐁이 서명한 유대인 추방을 명령하는 서류 등이 증거로 제출되었지만, 당시 만으로 87세였던 파퐁은 '나는 고급 관료로서 명령을 집행하는 입장에 불과했고, 연행된 유대인이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이라는 운명에 대해 몰랐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그리고 파퐁은 재판 중에 홀로코스트 중에 사망한 사람들을 거의 언급하지 않은 것은 물론, 자신을 '프랑스 법률 역사상 가장 슬픈 장'의 희생자로 묘사했으며, 심지어는 '이 재판이 대숙청 당시 소련의 재판과 같고, 나는 드레퓌스와 똑같은 위치에 있다.'는 주장을 한 것을 넘어 클라스펠드 부부의 딸인 아르노 클라르스펠드(Arno Klarsfeld, 1965~)에게 "나는 가능한 한 많은 유대인들을 추방으로부터 구하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나는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려고 했으나 유대인 호송이 생각나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하지도 못하고 아내와 함께 울었다. 나는 내 동포들과 유대인 외국인들에 대한 애도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라고 태연하게 말했다.

파퐁에 대해 검찰은 유대인에 대한 체포, 구금, 살인관여, 살인관여미수를 근거로 금고 20년을 구형했으나, 1998년 4월 2일에 있던 최종판결에서 모리스 파퐁은 관료로 유대인 연행을 실행한 것에 대한 형사책임을 인정하면서도 '파퐁이 지롱드 데파르트망의 사무국장일 때 강제수용소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는 판단으로 살인관여, 살인관여미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아 금고 10년의 판결을 내렸다.

이후 파퐁은 1998년 5월 20일자 르 몽드지에 1961년의 파리 학살을 다룬 글을 싣고는 이 글을 "1961년 10월 17일 밤에 모리스 파퐁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경찰에 의해 자행된 대학살이 있었다."라고 끝맺은 적이 있는 역사학자 장뤽 에이나우디를 1998년 7월에 '공무원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으나, 당연히 1999년 3월 26일에 파퐁의 명예훼손 소송은 기각되었다.

그러나 형을 선고받은 후에 파퐁은 바로 수감되지 않고 집에 있었는데, 이는 파퐁이 유죄 판결에 대해 항소한 것이 계류되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파퐁은 1999년 10월 12일에 집을 몰래 빠져나온 후 로베르 드라로슈푸코(Robert de La Rochefoucauld)[13]라는 가명으로 스위스로 도피했으나, 당연히 프랑스는 파퐁에게 국제 체포 영장을 발부했고, 결국 파퐁은 9일 뒤인 1999년 10월 21일에 스위스에 있는 호텔에서 스위스 경찰에 체포되어 프랑스로 송환된 후[14] 1999년 10월 22일에 파리의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물론 드골이 수여했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은 동년 11월 18일에 박탈되었다.

수감된 후에도 파퐁은 고령을 이유로 2000년 3월부터 3번이나 가석방 신청을 요구했다가 자크 시라크 대통령에게 거절당했으며, 이후에도 파퐁은 '프랑스가 나를 비인도적이고 굴욕적인 대우에 처하게 했다'고 주장하며 변호인단들을 동원해 유럽인권재판소에다가 항소를 했으나, 2001년 6월 8일에 유럽인권재판소는 이를 기각했다.

그러나 파리 항소 법원은 2002년 7월에 파퐁의 상소를 건강상의 이유로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파퐁은 동년 9월 18일에 석방되었으며, 파퐁에게는 법적 비용으로 65,400유로(약 9,070만 원)가 지급되었다. 파퐁의 변호인단은 프랑스에서 '2002년 3월에 제정된 법률에 따라 병약한 노인 수감자들이 외부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석방해달라'는 별도의 청원을 했고, 이 항소도 받아들여져 파퐁은 후자의 법안이 적용된 두 번째 수감자가 되었다. 당연히 이에 대해 클라스펠드 부부와 파퐁에 의한 피해자들의 유족들은 반발했다. 어이없게도 변호인 측의 항소에서 파퐁이 '완전히 병석에 누워있다'고 주장한 것과는 달리 실제 파퐁은 석방될 때 두 발로 걸어나왔다.

2.6. 최후

이후 파퐁은 고향에서 요양생활을 했는데, 2003년 7월 4일에는 국무원에서 파퐁의 정지된 퇴직 연금 지급을 재개하기로 판결했고, 파퐁은 이후에도 형량에 대한 항소를 했다가 2004년 6월 11일에 프랑스 최고 법원에서 기각당했다. 그리고 동년 3월에는 언론 인터뷰를 위해 사진을 찍는 동안 박탈된 훈장을 착용하고 있어서 구설수에 올랐고, 결국 파퐁은 2,500유로(약 347만 원)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이후 모리스 파퐁은 2007년 2월 13일에 심부전으로 심장 수술을 받은 후 처음에는 호전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4일 뒤인 2007년 2월 17일에 병원에서 향년 9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이렇게 파퐁은 결국 죽을 때까지 자신의 악행으로 인한 피해자들에게 단 한 마디의 형식적인 사과도 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에 파퐁의 변호사 중 한 명이었던 프랑수아 비유맹(François Vuillemin, 1968~)은 파퐁이 레지옹 도뇌르 훈장과 함께 매장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는데, 이 주장에 대해 극우 성향인 장마리 르펜국민전선을 제외한 모든 프랑스 정당이 분노를 표했으나, 결국 2007년 2월 21일에 장례식을 거친 후 파퐁은 가족 묘지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과 함께 매장되었다.

3. 참고 자료



[1] 후에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는 조르주 퐁피두가 파퐁의 동창이었다.[2] 후술할 재판에서 남편의 유죄 판결이 나오기 1주일 전에 사망했다.[3] 사실 이 사실이 폭로될 당시에는 1690명(13세 미만의 어린이 288명 포함)이 인도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들 중 130명은 실제로는 유대인이 아니여서 이송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파퐁은 이를 이들을 '습격'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수송 예정 명단에서 삭제했다고 거짓말을 했다.[4] 이때 드골과 그의 주변인들은 파퐁의 과거를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고 한다.[5] 물론 공무원이던 파퐁이 직접 고문에 가담했을 가능성은 전무하지만, 정황상 알제리인 독립운동가에 대한 고문을 지시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실제로 파퐁이 후에 저지른 파리 학살을 연구했던 프랑스의 역사학자 장뤼크 에노디(Jean-Luc Einaudi, 1951~2014)는 파퐁이 1956년부터 1958년까지 동부 알제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하며, 파퐁은 이 '공로'로 프랑스 본토 정부로부터 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6] 학살 당시에는 사망자 수를 3명으로 터무니없이 축소하고는, 그것도 시위대의 총격에 대응한 경찰의 정당방위었다고 완전히 왜곡했다.[7] Sud Aviation, 1957년부터 1970년까지 존재한 에어버스의 전신격인 항공기 제작사. 초기형 제트기인 쉬드 아비아시옹 카라벨의 제작사로도 유명하다.[8] 참고로 파퐁의 후임 경찰청장인 모리스 그리모(Maurice Grimaud, 1913~2009)는 68운동을 단 한 명의 사망자 없이 수습했다.[9] 이때 파퐁은 '장 뮬랭 고등학교'의 주춧돌을 놓기도 했는데, 이는 한국으로 치면 김덕기가 '유관순 고등학교'의 주춧돌을 놓은 꼴과 다를 바가 없다![10] 참고로 이로부터 15일 뒤에는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도 임기 기간 만료로 퇴진했다.[11] Serge Klarsfeld, 1935~. 루마니아 태생의 유대계 프랑스인이었으며, '리옹의 도살자'로 불리던 슈츠슈타펠 대위 클라우스 바르비의 재판 회부에도 큰 도움을 줬다.[12] 1987년 2월 11일에 절차상의 오류로 파퐁에 대한 전체 수사가 취소되어 원점으로 돌아가 1988년 7월 8일에 '인도에 대한 죄'로 재기소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후 1992년 6월 22일에 파퐁은 유대인 추방에서의 역할에 대한 조사가 확대되며 또다시 기소되었다.[13] 참고로 이 이름을 가진 1923년생 레지스탕스가 있는데, 이 사람은 파퐁과 달리 진짜 레지스탕스에 영국의 정보기관인 SOE에서도 근무하며 나치에 저항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재판에서 파퐁을 두둔했고, 파퐁에게 여권을 줘서 파퐁의 탈출을 도왔다. 이후 로슈푸코는 2012년에 사망했다.[14] 바로 그날에 프랑스 최고 법원은 파퐁이 청문회에 출두하지 않아 항소할 권리가 무효화되었다고 판결하면서 파퐁의 항소를 기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