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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자: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강등식》 (LE TRAITRE: Dégradation d'Alfred Dreyf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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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드레퓌스 사건(Affaire Dreyfus)은 19세기 말 프랑스 제3공화국이 독일과의 전후 관계에서 유대인 혈통의 프랑스군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1859–1935)에게 부당하게 스파이 혐의를 씌운 것을 둘러싸고 프랑스 국내에서 극심한 정치적, 사회적 논란이 발생한 사건이다.피해자 드레퓌스는 뜻있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다행히 몇 년 만에 석방되었지만, 후에도 이 사건은 오랫동안 프랑스 정계 및 사회의 치열한 논쟁거리로 남아 근현대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는 근대 이래 인권과 연대를 표방하던 프랑스에서의 반유대주의가 극명하게 수면 위로 떠오른 사건이었으며, 동시에 인권 운동과 시오니즘이 태동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2. 배경
1894년 당시 프랑스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충격에서 완전히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독일의 통일을 이루려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정책과 이를 저지하려던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국이 가열차게 충돌했지만 결국에는 프랑스가 패함으로써 스트라스부르와 메스를 상실하고 마침내 독일은 통일을 달성해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하고 50억 프랑의 보상금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패배는 프랑스가 더이상 서유럽의 육군 최강국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때문에 전쟁이 패배로 끝나자 프랑스의 여론은 들끓어올랐다. 즉 패배의 원인을 누군가에게 덮어씌우기 위해 혈안이 된 상황이었는데 프랑스 패배의 원인이 암묵적인 반역 행위에 있었다는 결론과 함께 정부는 강력한 군사력과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정책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로써 프랑스 사회에 다시 한번 쇼비니즘의 바람이 불어닥쳤다.[1]
당시 프랑스와 독일은 치열한 첩보전을 바탕으로 유럽에서의 실권을 장악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프랑스가 이러한 분위기로 흐르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특히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시작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이룩해 온 프랑스의 민주주의에 신생 독일 제국이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당시 프랑스인들의 인식도 여기에 한몫한 듯하다. 이 때문에 드레퓌스 이전에 비유대계 프랑스인들도 여럿 억울한 간첩몰이를 당해서 투옥되기도 했다. 과학자 튀르팽은 독일에 폭탄 제조법을 팔아넘겼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간첩죄로 투옥되었는데 사실 진짜 간첩은 튀르팽을 밀고하고 평소에 애국자 코스프레를 엄청 하고 다니던 그의 조수였다.
물론 프랑스는 여러 차례의 혁명을 겪은 후였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개인의 인권을 중요시하였고 가장 먼저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할 만큼 민족이나 인종을 넘어서는 포용력을 지향하고 있었지만 제3공화정 치하인 1890년대 프랑스 사회 내부에서는 아직도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뚜렷했다. 특히 《라 리브르 파롤(La Libre Parole)》과 같은 반유대주의 신문의 창간은 프랑스 국민사회의 민주주의에 반하는 인종차별적인 정서를 고조시키고 있었고 1892년 프랑스 정국을 발칵 뒤집은 파나마 스캔들에 유대계 자본이 관여한 것이 밝혀지면서 대중들 사이에서도 반유대주의가 고조되어 갔다.
더불어 독일이 통일된 후 유럽 내 국가 간의 세력이 균형을 잡아감에 따라 이전 프랑스의 영광[2]을 그리워하던 프랑스인들은 강력한 군대와 국가를 열망하였고 이러한 국가주의적인 정서는 반유대주의 사상 등과 더불어 점점 더 배타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처럼 ①패전으로 인한 혼란, ②국가 제일주의, 그리고 ③반유대주의 정서가 맞물리면서 결국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키는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3. 전개
3.1. 1894년 9월
1894년 9월,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 정보국은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의 우편함에서 한 장의 편지를 입수했다. 익명의 발신인이 보낸 편지 안에는 프랑스 육군의 기밀문서에 해당하는 한 장의 명세서가 들어 있었으며 수취인은 독일 대사관의 무관 막시밀리안 폰 슈바르츠코펜(Maximilian Friedrich Wilhelm August Leopold von Schwartzkoppen) 육군 대령이었다.알프레드 드레퓌스의 초상 |
10월 15일 오전 9시 샤를아르튀르 공스(Charles-Arthur Gonse, 1838–1917) 장군은 수습참모 면담을 핑계로 드레퓌스를 불러냈다. 이들은 드레퓌스에게 유출된 것으로 파악된 120mm 포 수압식 제동기에 관한 문서를 읽어주면서 받아적으라고 하였는데 이 문서를 한 번도 보고받지 못한 드레퓌스는 담담히 문서를 써내려갔다. 이들은 드레퓌스의 손이 떨리는 것처럼 보이자 그가 간첩임이 드러났음을 직감하고 벌벌 떨었다고 궁예질을 시도하면서 "왜 그러나? 자네 떨고 있군!"이라고 추궁했지만 드레퓌스는 그저 날씨가 추워서 손가락이 곱은 것뿐이었고 드레퓌스는 "제가 그랬습니까?"라고 심드렁하게 넘겨 버렸다. 그러자 이들은 드레퓌스가 수치심이라곤 없는 놈이라고 분노하면서 한참 동안 드레퓌스가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고 사무적으로 문서를 받아적자 심리전을 포기하고 다짜고짜 체포해 버렸다. 드레퓌스는 분노하여 자신의 반역죄를 입증할 증거를 보여달라고 요구했으나 그의 수사를 맡은 아르망 뒤 파티 드 클람(Charles Armand Auguste Ferdinand Mercier du Paty de Clam, 1853–1916) 소령은 증거는 얼마든지 있다고 큰소리를 치면서 정작 증거를 보여주지는 않고 그저 권총을 내밀면서 자살하라고 요구했다. 물론 아무 죄가 없었던 드레퓌스는 자살을 거부했다.
1894년 12월 19일 파리 근교의 한 궁전 건물에서 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은 공개여부에 대한 논쟁으로 시작되었는데 드레퓌스의 변호인인 에드가르 드망주(Edgar Demange, 1841–1925)는 유죄의 증거가 명세서 하나뿐이며 그것도 그를 범인으로 몰기에는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여론의 반전을 노리고 공개재판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당시 드레퓌스는 진술 순서가 되자 그는 명세서에 언급된 내용을 통보받은 사실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으나 자신은 명세서에 언급된 마다가스카르 원정과 120mm 포와 그 지원부대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게 불가능하다고 차근차근 진술하였다. 국방성에서 나온 참관인도 드레퓌스의 무죄를 생각했으나 상황은 갑자기 반전되었다. 드레퓌스의 동료들이 모두 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한편 드레퓌스의 필적이 명세서의 필적과는 다르다는 사실은 "그가 명세서를 쓸 때 남의 필적으로 가장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란 희한한 논리를 앞세웠다.
사실 이때 핵심 증거가 된 필적은 그저 조금 유사한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발견된 종이는 13개 다음절 단어로 되어 있었는데 이 중 4개의 단어가 드레퓌스의 필체와 비슷했고 이것이 드레퓌스가 범인이라는 증거로 제시된 것이다. 하지만 반유대주의에 물든 군 상층부는 이런 희박한 증거만으로도 유대인인 드레퓌스 대위를 범인으로 단정해 버렸다.[4] 또 해당 명세서는 독일어투가 역력한 서툰 프랑스어로 작성되었는데 드레퓌스는 손색 없이 완벽한 프랑스어를 구사했다.[5]
재판이 시작된 지 나흘 만에 심리는 종결되었다. 재판은 막장 그 자체였는데 위에 언급된 베르티용의 개드립 외에도 뒤 파티 소령은 드레퓌스가 간첩이란 게 들켜 벌벌 떨었다거나 드레퓌스가 독일인과 결탁하여 보험사기를 쳤다 등의 주장을 늘어놓았으나 변호사가 드레퓌스가 어느 대목에서 떨었는가, 드레퓌스가 얻은 부당 수익이 얼마인가라고 질문하자 뒤 파티 소령은 갑자기 화를 내면서 어떤 증거도 꺼내길 거부했다. 이후 위베르조제프 앙리(Hubert-Joseph Henry, 1846–1898) 소령이 '드레퓌스가 간첩이란 증거가 있지만 군사기밀이라서 제출하지 않겠다, 어쨌거나 그는 간첩'이라고 희대의 논리를 전개하였고 변호사가 프랑스 형법 101조와 헌법을 근거로 이를 밝힐 걸 요구하자 재판관은 장교의 명예를 의심하지 말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재판관들이 판결을 논의하기 위해 퇴정하려고 할 때 재판관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모가 적힌 봉투가 전해졌다. 판결을 심의하는 동안 작은 봉투 안에 든 내용을 재판관들에게 읽어준 다음에는 다시 봉인해서 그 봉투를 전한 장교에게 되돌려 달라. 한마디로 상부가 재판관들에게 외압을 행사해 이미 재판을 결정낸 셈이다. 논고와 최후변론을 들은 후 드레퓌스는 호송되어 나갔고[6] 재판관들은 만장일치로 드레퓌스에게 반역죄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7] 1895년 1월 드레퓌스는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섬(Île du Diable)'에 유배당했다.[8] 프랑스 군부는 자기네가 생각해도 하도 관련 정황이 개판이니까 드레퓌스에게 자백을 한다면 가족과 함께 유형을 빙자로 요양할 수 있는 경치 좋은 곳에 보내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드레퓌스는 오로지 공정한 재판만을 바란다고 거절했다.
프랑스군은 물론 가톨릭 교회와 우익 언론들은 일제히 드레퓌스를 비난하고 반유대주의를 선동했으며, 당시 프랑스 사회는 드레퓌스를 탈탈 털어 뼈도 안 남길 정도의 험악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처벌당하는 장교는 군의 명예를 생각해 조용히 끝내는 게 보통인데 드레퓌스 대위는 전 포병연대원들이 연병장에 도열한 가운데 다른 장교가 드레퓌스의 예복에서 계급장과 훈장, 단추[9] 등을 억지로 떼어내고 예도를 분지르는 굴욕적인 강등식을 공개적으로 행했다는 것이 이를 보여준다. "유대인을 죽여라!" 라는 구호를 외치는 군중을 본 드레퓌스는 평소 무척 점잖은 성격이었음에도 참지 못하고 "프랑스 만세! 나는 죄가 없다!"고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항변했다. 처음에 군중은 더욱 흥분해서 죽여라고 날뛰었으나 드레퓌스의 너무도 처절한 울부짖음에 나중에는 기가 죽었고 분위기도 반전되었다. 이것 때문에 보수 언론은 드레퓌스가 이겼다고 그냥 몰매나 때릴 것을 요상한 강등식 따위를 해서 의혹을 퍼뜨리게 만들었다고 군부를 마구 비난했다.
한편 이 난장판은 곧 독일 측에도 주목받았다. 슈바르츠코펜은 기자회견을 통해서 프랑스 언론의 보도는 사실관계에 맞지 않은 것이 많다는 입장을 밝혔고 빌헬름 2세는 뮌스터 백작을 프랑스에 특사로 파견하여 자신은 드 뭐시기라는 유대인은 알지 못한다는 입장을 전달하게 했지만 장 카지미르페리에 대통령은 드레퓌스가 간첩이란 증거가 있다면서 예의 그 명세서 드립을 쳤다.
드레퓌스는 악마섬으로 유배되었다. 드레퓌스가 라로셸에 내리자 흥분한 폭도들이 몰려와서 드레퓌스를 마구 구타했는데 호송하는 헌병들이 폭도들을 막으려고 하자 드레퓌스는 경비병들을 저지하면서 자신의 셔츠를 뜯어 가슴을 풀어헤치고 "나를 모욕하지 마시오. 당신들이 꿰뚫어보지 못하는 이 가슴 속의 심장은 깨끗하며 아무런 오점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내가 죄가 있다고 믿는다면 자, 내 몸뚱이를 마음대로 하십시오. 나는 내 몸을 아무런 후회없이 당신들에게 바치겠소."라며 그들을 마주하였다. 그러자 군중들이 감화되어 진정하...는 감동적 결말은 없었고 결국 헌병들이 폭도들을 몽둥이로 두들겨패서 내쫓아야 했다. 드레퓌스는 라로셸에서 1월 12일 레 도로 호송되었고 2월 21일 예고없이 악마섬에 보내졌다. 웃긴 것은 프랑스 해군이 누군가가 호송선을 습격해서 드레퓌스를 구출할 때에 대비해 대규모 호위함 전대를 딸려보냈는데 이에 대해 슬로바키아 출신의 미국인 언론인 니컬러스 할라스(Nicholas Halasz)는 "유대인들이 자체 해군을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라고 비웃었다는 점이다.
드레퓌스는 악마섬에서 혹독한 복역을 치러야 했는데 24시간 내내 감시를 받았고 밤에는 두 발에 겹으로 찬 쇠사슬을 차야 했고 적도의 무더위에도 짐승만도 못한 대우를 받아야 했다. 그나마 아내 뤼시가 편지에 써 보내 준 믿음과 사랑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나는 당신의 아내라는 것이 자랑스러워.(중략).. 이 무서운 불행이 덮치기까지 우리가 누렸던 그 완전하고 깨끗한 기쁨을 맛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중략)... 그 행복했던 생활을 되찾으려면 이 무서운 수수께끼를 푸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겠지.(중략).. 나는 믿어.내 믿음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아.
아내 뤼시가 보낸 편지
아내 뤼시가 보낸 편지
어떤 악마가 정직한 우리 가족에게 이런 불행과 치욕을 안겨 주었을까...(중략)... 나는 온 세상을 향해 내 결백을 외치고 싶어. 내 숨이 끊어질 때까지 내 피의 마지막 한 방울이 남을 때까지, 나는 날마다 쉬지 않고 외칠 거야. 나는 죄가 없다고!
드레퓌스의 편지 중
드레퓌스의 편지 중
그러나 드레퓌스는 머지않아 가족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권리조차 박탈당했다. 드레퓌스의 아내 뤼시와 형 마티외(Mathieu Dreyfus, 1857–1930)는 드레퓌스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모두 허사였고 당국은 뤼시가 남편을 위해 악마섬으로 이주하겠다는 청원도 거부했다. 드레퓌스는 창밖에 대고 고함을 지르면서 스트레스를 풀곤 했지만 나중에 그것도 못하게 하기 위해 그를 밤마다 묶어 놨다. 그렇게 형무소에서 병들어 죽는 것으로 드레퓌스의 운명이 정해진 줄 안 순간 한 줄기 진실이 찾아들었다.
3.2. 1896년
2년이 흐른 후 참모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던 조르주 피카르 중령[10]이 우연히 당시의 문건을 열람하였다. 이 배경도 기가 막혔는데 원래 국방장관 오귀스트 메르시에(Auguste Mercier, 1833–1921)는 형법을 기만하고 드레퓌스를 조진 것을 은폐하기 위해 관련 증거를 모두 없애라고 정보국에 지시했으나 정보국에서는 메르시에가 각종 위법행위를 자신들에게 꼬리 자르기를 하려는 시도라고 여겨서 증거를 은폐하지 않고 비밀서류철로 잘 정리해서 숨겨 놨고 피카르 중령이 새로 부임하면서 전임자인 장 상데르(Jean Sandherr, 1846–1897) 중령이 그에게 관련 자료를 넘겨준 것이다. 한편 굉장히 촉망받던 드레퓌스가 어쩌다가 반역자가 됐는지 그 동기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를 그럴듯하게 여긴 피카르 중령이 자체적 조사에 나섰다. 그 결과 그는 '드레퓌스를 진범으로 지목할 근거가 없다'는 것과 정보국에서 방첩대 실무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던 에스테라지 육군 소령의 문체가 명세표와 똑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즉 간첩 잡는 게 임무인 장교가 간첩질을 했다는 얘기다.[11]피카르 중령은 이 조사 결과를 상관인 공스 장군에 보고하고 재심을 요구하지만 참모본부가 받아들일 리 없었다. 자기들 목이 날아갈 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드레퓌스 사건을 그대로 묻어 버리려고 했고 피카르 중령은 오히려 욕을 먹어야 했다.
공스: "도대체 자네는 무엇 때문에 그 유대인을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나?"
피카르: " 그 사람은 죄가 없으니까요"
공스: " 이봐! 국방장관과 참모총장[12]이 이미 끝난 사건이라고 하는데, 그래 자네는 다시 재판을 열자는 말인가?"
피카르: "장군님, 그 사람은 무죄입니다."
공스: "국방장관과 참모총장이 진실이라고 하면 내게는 그게 진실이야. 자네만 입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피카르: "장군님 말씀을 듣자니까 구역질이 납니다. 아직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제가 이 비밀을 죽을 때까지 감추지는 않을 겁니다."
피카르: " 그 사람은 죄가 없으니까요"
공스: " 이봐! 국방장관과 참모총장[12]이 이미 끝난 사건이라고 하는데, 그래 자네는 다시 재판을 열자는 말인가?"
피카르: "장군님, 그 사람은 무죄입니다."
공스: "국방장관과 참모총장이 진실이라고 하면 내게는 그게 진실이야. 자네만 입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피카르: "장군님 말씀을 듣자니까 구역질이 납니다. 아직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제가 이 비밀을 죽을 때까지 감추지는 않을 겁니다."
결국 피카르 중령은 동부의 정보당국 시찰을 명목으로 파리에서 쫓겨났으며 이후 프랑스령 알제리와 튀니지 파견을 강제로 떠나면서 사실상 좌천되었고 드레퓌스를 음해하는 데 적극 앞장선 앙리 소령이 정보국장 대리로서 정보국을 장악했다. 에스테라지는 여론에 못 이겨 체포되었지만 몇 달 뒤 은밀히 영국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드레퓌스 사건 자체가 워낙 큰 이슈였던 탓에 소문이 안 날 리가 없었다. 일단 좌천 직전에 피카르 중령이 잘 알고 지내던 변호사를 통해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유포시킨 것도 한몫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와중에 동생의 무죄를 위해 포기하지 않았던 마티외는 어느 신문사를 통해 속임수 기사를 실었는데 그 내용은 "반역자 드레퓌스의 죄를 증명할 수 있는 뚜렷한 증거가 있다. 그런데도 그것을 밝히지 않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아직도 드레퓌스가 죄를 짓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는 만큼 지금이라도 그 증거를 공개하는 것이 좋겠다."였다. 이렇게 해서 드레퓌스란 이름이 다시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르 마텡’이라는 보수주의 계열의 신문이 '그놈의 범죄를 입증해 보이겠다'는 식으로 명세서의 사본을 공개하면서 오히려 기름통에 불을 붙였다. 사본의 서체가 누구의 것이네, 아니네에서 불붙은 논쟁이 재심 반대파와 재심 요구파로 갈리면서 마치 내전을 방불케 하는 엄청난 논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 재심 반대파(즉 반드레퓌스파)는 대부분 공화제, 프랑스 혁명 이념에 반대하는 왕당파들, 옛 귀족들, 군부세력과 과격한 가톨릭주의자들, 보수 우익 정치인들, 군국주의자들 및 이와 연계된 신문들로 이들은 '국가안보 위해(危害) 세력에 대한 경고와 군의 위신을 존중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이 반대편의 재심 요구파에는 양심적인 지식인과 법률가들, 공화주의자와 일부 진보적인 정치인들, 소수의 신문들이 있었으며 이 사건을 초기에는 유산 계급 내부의 투쟁으로 생각했던 사회주의자와 노동 계급이 뒤늦게 가담했다.
기득권을 형성했던 대다수의 신문들이 드레퓌스를 정죄하는 편파보도를 하는 동안 피가로 신문이 처음으로 에스테라지를 진범으로 주목하는 보도를 내보냈다.[13] 하지만 이런 소수 신문들의 의견은 대다수의 보수 신문들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프랑스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 가톨릭과 보수 세력은 군의 위신을 국가의 생명으로 그 어떠한 것보다도 중요하게 보는 군국주의 사고방식에 찌들어서 "군은 절대 무오류의 조직이며 군의 위신이 곧 국가의 위신이다. 따라서 군부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곧 국가의 멸망이다" 같은 어처구니없는 주장들을 공공연히 하고 있었는데 이는 문민통제를 무시하고 군을 중심으로 언젠가 공화국을 엎어야 한다는 보수주의자들의 시각을 드러낸 것이었다. 사실 여기서 더 나간 쪽들에는 군부도 알 바 아니었는데 일부 언론은 드레퓌스를 사형에 처하지 않은 군부도 반역자라고 폭파시켜야 한다고 난리도 아니었다. 심지어 외무부가 독일에 거액의 뇌물을 받고 간첩 드레퓌스를 살려주기로 합의를 봤다는 구체적인 보도들이 그 어떤 증거도 없이 돌아다녔고 드레퓌스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독일 귀족들과 회동했느니 어쩌니 다른 외국까지 끌어들이는 갖은 헛소문들이 판을 쳤다.
결국 에스테라지는 (존재하지도 않는) '유대인 국제 비밀조직에 대항한 영웅'(...)으로 무죄를 선고받았고 앙리 소령은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피카르 중령은 한직으로 좌천당한 것도 모자라 군사기밀 누설죄로 체포되었다.
또 드레퓌스가 체포된 지 3년 만에 우연히 명세서의 필적과 에스테라지 소령의 필적이 동일함을 알게 된 드레퓌스의 형 마티외가 에스테라지를 고발했지만 당국은 '이미 종결된 사건이라 어쩔 수 없다'고 둘러대기만 했다.
3.3. 1898년 1월
〈나는 고발한다…! 에밀 졸라가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J'Accuse...!: Lettre au Président de la République, Par Émile Zola) |
Voilà donc, monsieur le Président, les faits qui expliquent comment une erreur judiciaire a pu être commise; et les preuves morales, la situation de fortune de Dreyfus, l’absence de motifs, son continuel cri d’innocence, achèvent de le montrer comme une victime des extraordinaires imaginations du commandant du Paty de Clam, du milieu clérical où il se trouvait, de la chasse aux « sales juifs », qui déshonore notre époque. [중략] Je n’ai qu’une passion, celle de la lumière, au nom de l’humanité qui a tant souffert et qui a droit au bonheur. Ma protestation enflammée n’est que le cri de mon âme. Qu’on ose donc me traduire en cour d’assises et que l’enquête ait lieu au grand jour !
대통령 각하. 바로 이렇게 해서 사법적 오판이 저질러졌습니다. 게다가 드레퓌스의 도덕성, 부유한 환경, 범죄 동기의 부재, 끝없는 무죄의 외침은 그가 뒤 파티 드 클람 소령의 기발한 상상력, 그를 둘러싼 종교적 환경, 우리 시대의 불명예인 ‘더러운 유대인’ 사냥 등의 희생자였음을 더욱 확신하게 합니다. [중략] 저는 그토록 큰 고통을 겪은 인류, 바야흐로 행복 추구의 권리를 지닌 인류의 이름으로 오직 하나의 열정, 즉 진실의 빛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의 불타는 항의는 저의 영혼의 외침일 뿐입니다. 그러니 부디 저를 중죄 재판소로 소환하여 푸른 하늘 아래에서 조사하시기 바랍니다![14]
에스테라지가 유대인 국제비밀조직에 대항한 영웅으로 추앙되고 군국주의와 국가주의가 사회에 만연하자 이에 큰 충격을 받은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가 마침내 행동에 나섰다. 에밀 졸라는 1898년 1월 13일 문학 신문 《로로르(L'Aurore, '여명')》에 〈나는 고발한다...!〉[15]라는 제목의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냈다.대통령 각하. 바로 이렇게 해서 사법적 오판이 저질러졌습니다. 게다가 드레퓌스의 도덕성, 부유한 환경, 범죄 동기의 부재, 끝없는 무죄의 외침은 그가 뒤 파티 드 클람 소령의 기발한 상상력, 그를 둘러싼 종교적 환경, 우리 시대의 불명예인 ‘더러운 유대인’ 사냥 등의 희생자였음을 더욱 확신하게 합니다. [중략] 저는 그토록 큰 고통을 겪은 인류, 바야흐로 행복 추구의 권리를 지닌 인류의 이름으로 오직 하나의 열정, 즉 진실의 빛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의 불타는 항의는 저의 영혼의 외침일 뿐입니다. 그러니 부디 저를 중죄 재판소로 소환하여 푸른 하늘 아래에서 조사하시기 바랍니다![14]
졸라는 이 글에서 아무런 근거 없이 드레퓌스를 유죄로 몰아간 첫 번째 군사법정과 증거가 명확한 스파이 에스테라지를 무죄석방한 두 번째 군사법정을 고발하는 동시에 드레퓌스에 대한 재심을 강하게 요구했다.
당시 에밀 졸라는 공개편지를 들고 주요 대형신문을 찾아다녔으나 모두 거절당했고 군소신문인 《로로르》에서 간신히 승낙을 받았다. 모든 언론이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하는 군부와 보수 세력에 완전 쫄아 있었다. 듣보잡이었던 《로로르》는 에밀 졸라의 편지가 실린 날 평소보다 10배가량 많은 30만 부라는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로로르》의 편집장 조르주 클레망소 본인이 파장을 예상하고 이 정도로 부수를 늘렸음에도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고 한다.
본디 에밀 졸라가 쓴 공개편지의 제목은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아주 온건한 것이었는데 〈나는 고발한다〉라는 매우 강렬하고 도발적인 제목으로 바꾼 건 《로로르》의 편집장인 조르주 클레망소였다. 클레망소는 이 글이 불러올 어마어마한 파장을 각오하고 좀 더 호소력을 더하기 위해 제목을 바꾼 것이다.
로로르의 창간자이자 편집장인 조르주 클레망소는 “프랑스를 치명적 위기에서 구한 것은 사상의 자유 및 표현의 자유였다”고 말했고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나는 졸라를 향한 깊은 존경과 끝없는 찬사를 보낸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들은 한 해에도 백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 다르크나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며 에밀 졸라를 옹호했으며 홍당무로 알려진 작가 쥘 르나르도 졸라를 옹호하며 드레퓌스 사건을 조작이라고 비난했다.
반면 재심 반대파는 졸라의 기사를 길거리에서 불태우는가 하면 초상을 목매달았으며 "졸라를 죽여라!", "유대인을 죽여라!", "군대 만세!" 따위의 구호를 외치면서 군중을 선동하여 유대인 상점을 약탈하거나 유대인에게 테러를 가하는 등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일상을 팽개친 프랑스인들은 드레퓌스 사건에 관한 말다툼과 주먹다짐으로 시간을 보냈고[16] 각계각층의 지도자들도 인간의 권리와 국가의 이익이라는 대전제 사이에서 극렬한 논쟁을 벌여야 했다.
결국 군부는 에밀 졸라에게 '군법회의를 중상모략했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했고 졸라는 런던으로 망명했다. 나중에 프랑스로 되돌아오긴 했지만 1902년 연탄가스 중독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의문의 이 사고는, 실제로 굴뚝 청소부가 '누군가'의 지령으로 굴뚝을 막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당시 에밀 졸라의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상원과 하원, 문민 권력, 군부 권력, 거대 신문, 거대 신문이 중독시킨 여론 등 모든 것이 저에게 적대적입니다. 제 편으로는 오직 하나의 관념, 즉 진실과 정의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제 마음은 너무나 평온합니다. 저는 승리할 것입니다. 저는 정녕 우리나라가 거짓과 불의 속에 머무르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늘 여기서 저는 유죄 선고를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프랑스가 자신의 명예를 구해준 데 대해 제게 감사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17]
3.4. 1898년 여름
프랑스의 풍자 화가이자 만평가인 카랑 다슈(Caran d'Ache, 1858–1909)[18]가 1898년 2월 14일, 《르 피가로》지에 게재한 만평. 당대 드레퓌스 사건을 두고 프랑스 국민의 여론이 얼마나 분열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
이 사건은 이미 세계적인 이슈가 되어[19] 진보적 지식인들의 항의와 비난이 이어지고 졸라를 옹호하는 각국의 여론이 줄을 이었다. 프랑스 국내에서도 드레퓌스에 관한 일은 가장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 되었으며, 이 사안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에 따라 진영이 첨예하게 갈렸다.
그러던 중 1898년 8월 30일. 드레퓌스 사건의 모의자 중 하나인 앙리 중령이 피카르 중령을 모함하기 위해 에스테라지와 함께 조작한 증거가 거짓으로 밝혀질 위기에 처하자 면도칼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20] 같은 시점에 에스테라지는 영국으로 도망쳤다.[21] 앙리 중령의 죽음은 사건의 새로운 분수령이 되었고, 재심파에 유리한 국면을 열어주었다. 군의 명예와 국가주의를 부르짖던 재심 반대파들은 진실을 알고자 하는 재심파의 거센 재심요구에 다시 부딪히게 되었다.
3.5. 1899년 9월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고등법원의 재심은 1899년 6월 3일에 열렸다. 법원은 명세서가 드레퓌스가 아닌 에스테라지에 의해 쓰였음을 근거로 드레퓌스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던 1894년 12월의 재판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드레퓌스는 브르타뉴 지방의 소도시 렌에서 다시 군사재판을 받았다. 이때 드레퓌스는 5년 동안 외부와의 연락이 끊긴 채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그러나 증인으로 출석한 참모본부의 상관들은 여전히 증거날조와 위증으로 일관했고, 법원은 정상을 참작하여 드레퓌스에게 10년형을 언도했다. 재판관 7명 중 단 2명만이 드레퓌스의 무죄를 인정했다.
"드디어 진실이 승리하는구나!" 하고 기대했던 여론이 또다시 들끓었다. 이 충격은 프랑스 내 지식인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까지 미쳐서 각국 프랑스 대사관에 시위대들이 진을 치고 항의하는가 하면 프랑스 국기 공개 화형식에, 프랑스의 모든 것에 대한 보이콧 결의안까지 나왔다. 에밀 졸라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혐의가 풀려 영국에서 귀국했던 졸라였지만 다시 펜을 들어 재심판결의 부당함을 폭로하면서 여론을 주도해 나갔다.
결국 국내/외 여론에 밀린 프랑스 군부는 드레퓌스에게 유죄 판결을 인정하는 대신 즉각적인 사면을 제안함으로써 사건을 일단락하려고 했다. 많은 재심파의 인사들은 유죄 인정에 대해 반대했지만 드레퓌스 본인은 5년간의 수감생활 동안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라서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당시 드레퓌스는 말라리아에 걸려 투병하고 있었으며 병세가 극도로 악화되어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였고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렸다. 당시 드레퓌스는 대서양의 프랑스령 섬에 있는 교도소로 보내졌는데 여기서 재소자를 처우하는 방식은 직접 죽이지는 않을 거지만 사람 취급도 하지 않을 것이니 그나마 덜 고통받고 싶으면 알아서 죽어주는 게 좋을 거다 이런 식이었다. 영화 빠삐용에 나온 게 절대 과장이 아니다. 결국 드레퓌스가 군의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사건의 한 막이 종결되었다.
하지만 드레퓌스의 항복으로 인하여 드레퓌스파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군경력을 걸고 그의 복권을 위해 노력한 피카르 중령은 한동안 드레퓌스에게 절연을 선언했고 조르주 클레망소 역시 드레퓌스에게 "우리가 지난 10년간 싸운 건 단순히 당신 하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로운 조국의 건설을 위해서였다. 당신은 당신의 편안함만 생각하느냐?"고 항의했으며 샤를 페기(Charles Pierre Péguy, 1873 ~ 1914)는 "우리는 드레퓌스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데, 드레퓌스는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정작 프랑스 유대계는 드레퓌스 사건의 장기화가 반유대주의를 강화할 것이라고 여겨 드레퓌스의 사면 수용을 지지했고 드레퓌스 본인도 극도로 지친 나머지 자신을 비난하는 재심파들에게 "제발 잠자코 있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자백해 버리겠소.", "당신들도 알겠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소?"라고 빈정대면서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3.6. 1906년 7월
사건이 일단락되었다고는 하지만 불완전 연소에 불과했다. 결국 1899년 드레퓌스파가 정부를 구성하였고 계속된 지식인들의 격려에 힘입어 사건이 일어난 지 10년 만인 1904년 3월 드레퓌스는 형 마티외의 도움으로 새로운 증거들을 첨부하여 최고재판소에 재심을 청구했다.결국 1906년 7월 12일 최고재판소는 렌 군법회의의 유죄 판결을 오판으로 파기해 드레퓌스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드레퓌스와 피카르를 복권시켰다.[22] 그리고 프랑스 정부는 드레퓌스에게 소령 특진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는 것으로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 사죄했다. 드레퓌스는 무죄 선고를 받은 뒤 열흘 만에 군대로 돌아왔고 사관학교 연병장에서 열린 행사에서 육군 소령 계급장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드레퓌스는 복권되어 잠시 군에 복무하였지만 유형기간 내내 쇠약해진 몸 때문에 다음 해 전역해야 했다. 부당한 판결로 10년간 군문을 떠나 있었던 것에 대한 보상도 받지 못했으며 단지 명예전역을 하는 선에서 만족해야만 했다. 이후 드레퓌스는 민간인으로 조용히 지내다가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소집되어 갈티에리 장군 휘하의 파리 방위군 포병참모가 되었고 중령으로 진급하여 포병병과 후방지원임무에 종사했으며 베르됭 전투 등 프랑스군의 굵직한 전투 다수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종전 후 퇴역하여 파리에서 살다가 1935년 7월 12일에 사망했다.
한편 피카르 중령은 대령을 건너뛰고 단숨에 준장으로 진급하여 이후 국방장관까지 지냈다. 그냥 넘어가도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을 드레퓌스 사건을 그가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문제제기를 했기 때문에 중간에 군문에서 나가야 했고 양심을 따른 것을 감안하여 파격적인 조치를 취해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3.7. 드레퓌스 사후
드레퓌스 사후에도 이 사건은 프랑스의 정치 논쟁에 있어 잊을만하면 뜨거운 감자로 남았다. 일단 드레퓌스 본인은 연이은 재심 끝에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유대인 차별이 불러낸 사법농단' vs '유대인의 압력에 굴복하여 간첩을 무죄방면'이라는 두 주장이 끝없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후자는 '드레퓌스가 실제로 간첩질을 했음에도 에밀 졸라를 비롯한 친유대계 지식인들이 들고 일어나 여론을 형성했고 프랑스 사법부가 여론에 떠밀려 법리 원칙이 아닌 다수결로 무죄를 선고했다'고 끊임없이 주장했다.[23]이렇다 보니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에서 '끝이 안 나는 답없는 논쟁'의 대명사가 되었고 관련된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다.
또 드레퓌스의 복권은 프랑스의 반유대주의가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드레퓌스가 복권된 것을 본 많은 프랑스 극우 세력들은 강력한 유대인 비밀조직이 드레퓌스를 후원했기 때문에 드레퓌스가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여겨 프랑스 사회에 암약하는 유대인들의 음모를 발본색원해야 한다고 여겼다. 쉽게 말해 드레퓌스는 무죄가 아닌데 여론과 유대인들의 압박에 못이겨 사법부가 죄가 있음에도 어쩔 수 없이 무죄를 선고했다는 주장이다. 이 때문에 프랑스 유대계가 드레퓌스에게 사면안을 받아들이는 선에서 일을 끝내자고 권고한 바가 있으며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브리삭 가문, 로슈푸코 가문, 뤼네 가문, 위제스 가문을 비롯한 파리의 유력 귀족 사회는 유대인 음모론을 적극 수용해 프리메이슨과 무신론자들이 프랑스를 파괴하려 한다고 주장했다.[24] 이후 프랑스 극우파는 비시 프랑스 수립에 적극 가담해 프랑스 유대인의 색출과 학살에 협조했다. 이와 연관된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942년의 벨디브 사건이다.[25] 드레퓌스의 손녀인 마들렌 레비도 비시 프랑스 시기 나치 독일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1943년 아우슈비츠에서 목숨을 잃었다.
한편 진범 에스테라지는 판결이 나왔을 땐 이미 변장해 벨기에 브뤼셀을 거쳐 영국으로 도주한 뒤였으며 1932년까지 반유대주의 글을 신문에 기고하는 등의 삶을 살면서 천수를 누리다 갔다. 유해는 그가 거주하던 마을 인근의 성 니콜라오 성당[26] 무덤에 묻혀 있다고 하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결국 해묵은 논쟁은 군부의 항복으로 끝났다. 1995년 9월 12일자 <리베라시옹>에는 드레퓌스 사건 이후 100년 만에 처음으로 프랑스 육군이 드레퓌스 대위가 무죄라는 사실을 선언했고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해에 프랑스 군사(軍史) 담당이었던 육군의 장루이 무뤼(Jean-Louis Mourrut) 장군이 드레퓌스의 무죄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여 더 이상 극우파들도 드레퓌스 간첩설을 떠들 수 없게 되어 논란이 종식되었다.
1906년 당시 대법원에 의해 드레퓌스가 복권되기는 했지만 프랑스군은 군법회의가 음모와 조작으로 얼룩졌다는 것까지는 인정하지 않았고 그저 법원에서 무죄라고 했으니 이를 따를 뿐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군은 예로부터 초보수주의적 성향을 견지하는 입장에 서 왔다가 마침내 그가 무죄라고 시인한 것. 물론 당시 사건을 주도한 군인들은 이미 다 죽은 지 오래였으니 실제로 잘못을 저지른 이들 중 책임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4. 여파
흔히 19세기 반유대주의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받지만 드레퓌스 자신은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아마 본인을 유대인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던 듯.당시 서유럽에서는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구분이 매우 어려웠는데 많은 유대인들이 긴 세월을 거치는 동안 문화적, 혈연적으로 서유럽에 거의 동화되어 버려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유대인을 구분하고 차별하는 동유럽 및 러시아인들을 비웃거나 인종차별에 분노하는 게 당시 서유럽의 풍토였다. 그랬기 때문에 드레퓌스 본인도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조차 갖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정작 유대인이 간첩이라는 소문이 돌자마자 전 프랑스에서 반유대주의의 광풍이 일었다.
1900년대 초 사건이 일단락되기는 했지만 정계에서는 일부 보수 인사들이 아직도 드레퓌스가 유죄임을 주장했고 심지어 '나는 그가 아직도 유죄임을 믿는다'는 투의 논문과 서적도 수차례 발간되었다.
국가와 군을 모든 것의 우위에 두는 군국주의 세력, 극우파의 선동에 휩싸인 대중의 광기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건으로 말 그대로 프랑스가 반으로 쪼개졌다. 실제로 재심 판결 전에 드레퓌스를 지지하던 대학 교수들은 대학에서 쫓겨나고 정치인들은 선거에서 모조리 낙선하는 등 한때 진보파가 거의 궤멸당하기 직전까지 몰렸다.
드레퓌스 사건이 프랑스에서 논란이 되자 결투가 급증했다. 당시에는 모욕을 받는 일이 생기면 결투로 해결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드레퓌스 사건 이전과 비교해 보면 배 이상으로 늘었다고 한다. 사건의 관련자였던 조르주 피카르 중령은 물론이고 심지어 진범인 에스테라지까지도 이 사건으로 인해서 결투했다고 한다.
한편 프랑스 혁명 이후 인권과 평등을 외치면서 전 유럽에서 가장 유대인에게 관대했던 프랑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박살내고 유대인 전체를 잠재적인 반국가집단으로 낙인찍는 행태를 보인 것은 엄청난 후폭풍을 야기하였다. 전 유럽의 유대인은 엄청난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중세 시대부터 유럽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유대인 거주 구역인 게토에 모여 살았는데 교육, 육아, 결혼, 취미생활 등 모든 것을 랍비를 중심으로 한 유대교 공동체 안에서만 해결하는 폐쇄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700년대 후반과 1800년대 초반에 이르면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제국을 중심으로 많은 유대계 인사들이 "우리는 (우월한) 유대인. 우리는 우리끼리만 산다"면서 주류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스스로 고립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사회에서 차별받는 이유라고 결론을 내렸다.[27] 이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아예 종교에 연연하지 않는 삶을 통해서 유대인의 정체성을 잊고 스스로를 독일인 혹은 오스트리아인으로 규정지으면서 사회에 동화되기 시작했다.[28]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들이 기독교 중심의 주류 사회에 융화되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유대인이라는 낙인을 지울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져들었고 이럴 바에는 유대인의 정체성을 살려서 우리들끼리 모여 사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다. 마침 이 사건을 취재하던 유대인 기자인 테오도르 헤르츨은 유대인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독자적인 유대인 국가 건설을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전 유럽의 많은 유대인들이 여기에 동감하면서 결집하기 시작했다. 바로 시오니즘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오늘날 이스라엘 국민들의 애국심이 그렇게 강한 것도 이때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여하튼 이 사건은 현재는 인권탄압 등의 사례로 주로 인용되며 국가가 일단 결정한 사안을 일개 개인이 뒤집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로 인용되기도 한다. 다수의 악이 소수의 진실을 억압하고 덮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근대식 마녀사냥의 전형적인 틀을 이루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5. 기타
- 드레퓌스 사건의 전말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건 니콜라스 할라즈가 쓴《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29]이 《드레퓌스》라는 이름으로 1978년 9월 5일에 처음 나왔을 때부터였다. 이미 이 무렵에도 꽤 팔리고 읽혔으며 이야기가 퍼졌다. 1982년에는 겉갈이(표지교체)를 하면서 책이름을 조금 바꾸었다. 1988년에 유시민이 출간한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 《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의 내용이 일부 편역되었는데 유시민의 책이 인기를 끌면서 해당 내용도 많이 알려졌다. 1990년대 들어선 위기철의 논리야 시리즈에 드레퓌스 사건이 등장해 꽤 많은 어린이들에게 알려졌다.
- 진범이었던 페르디낭 에스테라지의 경우 영국에 망명한 뒤 그대로 눌러앉아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살았는데 프랑스 정부에서 끝끝내 그를 잡아서 재판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진범으로 인정하지도 않은 점[30]을 보면 '이중간첩 아니었냐'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전술했던 것처럼 에스테라지는 영국으로 도망친 후 자신은 상부의 명령으로 독일 무관에게 접근한 이중첩자였다는 내용으로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이 떡밥을 던진 것은 '진 도이세'라는 프랑스 역사학자로 이를 입증하기 위한 증거를 여러 가지로 수집하였다. 도이세가 제기한 근거 중 하나는 에스테라지는 독일에게 포병대의 정보를 누설하였는데 이 정보를 '앙리'라는 장교로부터 제공받았다. 그런데 앙리도 첩보부에서 일하는 장교로 포병대의 핵심 정보에 전혀 접근할 수 없었던 인물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따라서 앙리가 제공한 정보는 첩보부에서 독일에게 일부러 넘기기 위해 정성들여 작성한 가짜 정보이고 이를 이중첩자였던 에스테라지가 독일에게 진짜인 것처럼 속이고 넘겼다는 것이다.
만일 에스테라지가 이중첩자였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아주 심각한데 그 이유는 프랑스 정부가 진상을 알면서도 국익을 위해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몰았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드레퓌스가 무죄인 것과 별개로 이것도 심각한 사안이 되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드레퓌스에 대한 무죄와 당시 군 수뇌부의 음모가 있었음은 프랑스군과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했지만 이중첩자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당시 에스테라지가 이중첩자였고 그가 누설한 기밀이 프랑스 정부가 조작한 것이라면 범인이 누구인가 이전에 애당초 기밀 누설 자체가 없었고 프랑스 정부도 이를 알면서도 반유대주의를 부채질하기 위해 드레퓌스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군부에서 정보교환이 꼬여서 한 쪽에서 착각하고 기밀 누설이라고 크게 떠들었다가 수습하기 위해 만만한 희생양을 골랐을 수도 있지만 그 경우에도 프랑스 정부는 드레퓌스가 범인이 아니라는 점을 확고하게 알면서 누명을 씌웠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의 프랑스 정부는 이를 끝까지 부정할 테니 진실은 저 너머에…
- 이 모든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끝내 드레퓌스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독일 무관 막시밀리안 폰 슈바르츠코펜은 1917년 죽기 직전에 "드레퓌스는 죄가 없다"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회고록에 자신은 드레퓌스를 알지 못했다고 기술했다. #
- <킬빌>에서 소피 파탈 역을 맡은 프랑스의 여배우 쥘리 드레퓌스가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방계 후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남자 형제 중 한 명이 쥘리 드레퓌스의 조상이다.[31] 1960년대를 풍미한 프랑스의 스타 여배우 아누크 에메[32]의 원래 성이 드레퓌스인지라 이쪽도 드레퓌스 후손 아니냐는 얘기도 좀 있다. 아누크 에메 본인은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33]
- 1899년 영화 제작자였던 조르주 멜리에스가 이 사건을 다룬 11편짜리 단편 무성 영화 시리즈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최초의 실화 기반 영화 중 하나로 꼽히며, 특수효과까지 사용하여 대부분의 장면을 현실적으로 재연하고자 하였다. 드레퓌스 역에는 닮은꼴의 노동자가 출연했고, 멜리에스 본인은 드레퓌스의 변호사였던 페르낭 라보리[34] 역으로 출연했다. 멜리에스는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공식적인 의견을 밝힌 적은 없지만, 영화 내에서 드레퓌스의 억울함을 부각하여 드레퓌스에 대한 지지를 은연 중 드러내었다는 견해가 있다.
- 도전 골든벨 파주문산여고 편에서 이 답이 골든벨 문제로 출제되었다.
- 드레퓌스 사건으로 프랑스 정치권이 혼란한 틈을 타 당시 보나파르트 가문의 수장이었던 빅토르 보나파르트(1862~1926)가 프랑스 제3공화국을 전복시키고 프랑스 제3제국을 세우려 시도했으나, 드레퓌스 사건이 일단락 되면서 실패했다.
6. 창작물에서의 등장
- <프라하의 묘지>에서 작품 후반에 주요하게 다루는 사건 중 하나다. 문제가 되는 문서는 위조된 것이며 범인은 작품의 주인공인 시모네 시모니니. 다만 문서 위조 의뢰를 받아들였는데 일감이랍시고 온 필적견본은 드레퓌스가 아니라 에스테라지의 것이었다. 이는 실수가 아니라 철저히 계획된 것으로, 이중스파이였던 에스테라지를 기회가 될 경우 좌천시키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던 것.
- 미국 영화에도 큰 궤적을 남겼는데 해당 사건을 영화화하여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 《에밀 졸라의 생애》가 그것이다. 에밀 졸라의 열변과 논리적인 변호로 드레퓌스 측이 승리할 것만 같던 법정 다툼이 패배로 끝날 때의 반전은… 올리버 스톤 감독이 JFK를 연출할 때 《에밀 졸라의 생애》를 많은 부분 참고했다고 한다.[35]
- 2014년 영화 로보캅에서 인공지능에게 치안을 맡기지 않는다는 법률인 드레이퍼스 법률이 언급된다. 본 작품의 로보캅은 대기업 OCP에서 로봇 장사로 큰 이득을 보는데 걸림돌인 이 법률의 헛점(사이보그면 인공지능이 아니니...)을 파고들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로 나온다. 본 작품에서 로보캅을 만든 박사 역의 배우가 명배우 게리 올드먼인데 우연히도 그가 같은 해에 찍은 영화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에서 맡은 배역 이름도 드레이퍼스다.
- 2019년 본 사건을 소재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연출을 맡아 장교와 스파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감독이 오랫동안 만들고 싶었던 영화라고 한다. 장 뒤자르댕과 루이 가렐이 각각 피카르 중령 역과 드레퓌스 대위 역으로 출연한다. 영화 자체는 베니스 국제 영화제와 프랑스의 세자르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비평적으로 높은 성취를 이뤘으나 감독인 로만 폴란스키가 자신의 엽색 행각을 변호하기 위해 영화를 이용했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논란에 휩싸였다.
- 한국 대체역사 웹소설 고종, 군밤의 왕에서도 잠깐 등장한다. 조선에서 고위직으로 활동하는 에른스트 오페르트[36]는 파리의 랍비 명문가인 드레퓌스(Dreyfus) 가문과 사돈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게 사건의 당사자인 알프레드 드레퓌스(Dreyfuss) 대위의 집안과 사돈을 맺은 것으로 소문이 퍼지면서 작가 왈 '오지랖 넓은 조선 사람들'이 오페르트를 만날 때마다 오씨 대감의 사돈댁 일을 가지고 오만가지 걱정을 하며 소문이 부풀려 전국팔도로 퍼졌으며, 조선 조정에서도 이를 도우라는 뜻에서 오페르트가 그토록 원하던 사직을 윤허해 버린다. 정작 오페르트와 인연을 맺은 드레퓌스 가문은 알프레드 드레퓌스와는 성만 비슷할 뿐 아무 상관 없었다. 다만 사건 자체가 워낙 심각해서 프랑스 국내의 수많은 유대인들이 사건의 여파에 휘말린 터라 오페르트의 사돈댁에서도 같은 유대인으로서 드레퓌스 대위를 지원해 달라고 오페르트에게 요청했고 결국 조선 측과 오페르트가 여론전에 가담한 것.
조선 주불공사 김홍집은 평소 성품대로 당당하게 언론에 호소하고자 했으나 바로 된서리를 맞고는 제대로 독이 올라 대강 "이 모든 사태는 카이저의 지시를 받은 간첩단의 음모이며 우리는 독일 간첩 300명의 명단을 보유하고 있으나 일신상의 위협을 느껴 밝힐 수 없다"는 내용의 논설을 오페르트 명의로 발표하며 여론에 초대형 폭탄을 터뜨린다. 명단의 진위는 어찌 됐든 프랑스인 입맛에 딱 맞는 내용이라 온 프랑스에 일파만파 퍼지면서 엄청난 논란이 일어났다. 저 간첩단 300명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진짜 간첩일 수도 있었고 그 중 한 명이라도 빠져나간다면 프랑스 내에서 엄청난 큰일이 나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프랑스 군부 내에서 진정하고 사건을 되짚어보자는 여론이 나와 판결 과정을 되돌아보니 뭔가 미심쩍은 게 있어 자체적으로 내부조사를 했는데, 하필 방첩대 소령 페르디낭 에스테라지가 진범임이 밝혀졌다. 그 조사 결과를 받아들자 간첩을 잡아야 할 방첩대에 간첩이 있다면 진짜로 프랑스 안에 간첩들이 드글거린다는 논리가 자동으로 도출되며 군부 전체가 발칵 뒤집혔고, 이렇게 프랑스가 혼란에 빠지면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다름아닌 독일이므로 드레퓌스 사건이 독일의 선동극이었다는 의미가 결과적으로 조선 측 고발이 사실이 되어 프랑스 사회를 다른 의미로 발칵 뒤집으면서 반유대주의 문제를 방첩, 반독 문제로 돌려버리며 드레퓌스 대위는 더 빨리 명예를 회복하고 드레퓌스 사건이 원 역사보다 무난하게 해결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원역사보다는 덜하게 시온주의가 대두되면서 새로 탄생한 유대 복지재단의 유대인들이 고종의 호의로 조선에 대거 이주하게 되었으며, 이들이 설립한 키부츠가 조선 사회에 농협이란 명칭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후 시온주의자 유대인들은 루이지애나도, 알래스카도 사고파는데 가나안 땅이라고 안 될 게 뭐 있겠냐며 돈을 모으기 시작해 대전쟁 이후 오스만 제국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혁명으로 재편된 이슬람 공화국에게서 유대 복지재단이 이스라엘 땅을 사들여서 원역사보다 훨씬 깔끔하게 이스라엘을 건국한다. 불필요하게 넓은 비핵심 영토 청산이라는 과제와 근대화 재원이 필요했던 이슬람 공화국에서도 알짜배기 땅과는 거리가 먼 팔레스타인 땅을 사가겠다는 유대 재단의 제안은 이득이었기에 서로 윈-윈 관계가 되며 협상이 타결된다. - 또 다른 소설인 카이저를 구했다에서도 초반에 비중 있게 등장하는데 주인공인 한스 초이가 빌헬름 황태자와 함께 보러간 축구장에서 우연히 만난 프랑스 기자와의 즉석 인터뷰로 드레퓌스는 무죄라고 말하면서 프랑스를 대혼란에 빠트린다. 그 여파로 드레퓌스는 사면이 아닌 재심을 받게 되고 이에 드레퓌스는 한스에게 감사 편지를 보낸다. 한편 대통령인 에밀 루베는 원 역사보다 4년 빨리 정교분리를 시행하나 이에 반발한 프랑스 가톨릭과 보수파들이 결집해 정치적 대립이 극심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 스티븐 맥퀸,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1973년작 빠삐용에도 잠시 언급된다. 빠삐용이 마지막 수감지로 악마섬에 도착하고 무심코 앉은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드레퓌스 대위가 앉은 바위였다. 물론 팻말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악마섬의 다른 수감자가 바위에 앉은 빠삐용을 쫓아내며 바위의 내력을 알려준다.
7. 같이 보기
[1] 웃기게도 이 시기에 불어 역사상 특이한 언어 운동도 일어났는데 '유성 구개수 마찰음'으로 발음되던 r을 라틴어처럼 '치경 전동음'으로 발음하자는 복고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적대국인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을 위시한) 주변국에서 '유럽의 중심이라면서 정작 대부분 유럽인들이 구사할 수 있는 전동음을 구사할 수 없다'고 깐 적이 있기 때문이다. 패전 직후인 1888년은 국제음성기호가 막 발표되던 참이라 음성학에 대한 관심이 크게 태동되던 시기였다.[2] 프랑스는 중세가 끝나면서부터 서유럽 내에서 단일국가로는 언제나 육군 최강국이었다. 루이 14세 시절에는 다른 강대국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거대한 육군을 자랑하였으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시절에는 한때 서유럽의 대부분을 지배하였고 나폴레옹 3세 시절에는 최소한 표면으로라도 해외진출 및 경제발전, 국위선양을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패배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고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이 믿었다.[3] 오랭 주 뮐루즈 출생. 즉, 프랑스가 알자스-로렌을 상실했을 때 프랑스로 이주한 실향민이다.[4] 한 저명한 범죄학 전문가(참고한 책의 저자도 저명한 범죄학 전문가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는 "한 단어에서 우연히 필체가 일치할 확률은 0.2이고, 따라서 4개 단어에서 필체가 일치할 확률은〖0.2〗^4=0.0016이다"라고 증언하였는데 군사재판이 그 증언을 수용한 것이다. 1896년 진범인 에스테라지가 잡혔으나 비밀리에 방면되었고 1899년 드레퓌스에 대한 재심에서 군사재판은 원심을 확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필요한 확률은 단순히 4개 단어가 우연히 모두 일치할 확률이 아니라 "13개 단어 중에서" 4개 이상의 단어가 우연하게 일치할 확률인 0.253이다. 이라는 과정을 통해 계산이 가능하다. 드레퓌스가 범인이라는 가정과 상관없이 우연히 필적이 일치할 확률은 25.3%나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드레퓌스는 정당한 증거에 의해 죄가 정립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출처: 허명회, 『법과 통계학』, 한나래, 2011.[5] 반대로 나중에 진범으로 밝혀진 페르디낭 발진 에스테라지(Charles Marie Ferdinand Walsin Esterhazy / 'Walsin-Esterhazy' 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1847 ~ 1923) 소령은 원래 헝가리인으로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서 복무하다가 1870년에야 프랑스군에 입대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드레퓌스에 비하면 프랑스어가 좀 서툴렀다.[6] 이때는 판결문을 낭독할 때 피고인의 출석은 허락되지 않았다.[7] 구속되어 있던 형무소에서 텅 빈 법정으로 돌아와 판결을 들은 드레퓌스는 다시 감방으로 돌아온 후 자살을 시도했으나 형무소 책임자의 설득과 아내 뤼시(Lucie Dreyfus-Hadamard, 1869–1945)의 위로로 포기했다.[8] 영화 빠삐용의 그 곳이다. 중간에 "드레퓌스 대위의 자리"라는 대사가 나온다.[9] 당시 프랑스 육군의 단추에는 소속 연대 등을 나타내는 숫자나 문양이 들어갔다. 그런 단추를 뗀다는 것은 더 이상 그를 연대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10] 조르주 피카르 중령은 드레퓌스 대위가 다닌 육군대학의 교관 출신으로, 드레퓌스도 피카르에게 교육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11] 의외일지 모르지만 소련의 간첩 로버트 필립 핸슨(Robert Philip Hansen)이나 올드리치 에임스(Aldrich Ames)의 사례에서 보듯이 방첩 책임자가 간첩으로 활동하는 사례는 생각보다 흔하다.그래야 오랫동안 안 잡히니까[12] 당시 참모총장은 라울 드 부아데프르(Raoul de Boisdeffre, 1839–1919)였다.[13]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의 르 피가로는 우파 신문의 대명사라는 것이다. 물론 진실을 밝히는 데 좌우가 따로 있는 건 아니긴 하지만 당시 보수 진영의 절대 다수가 드레퓌스를 비난하는 입장이었음을 고려하면 꽤나 아이러니한 일화. 사실 대한민국의 동아일보도 군사독재 시기에는 진보 언론이었으나 민주화 이후론 우경화된 것을 생각하면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14] 편지의 마지막 문장. 프랑스어 원문의 출처는 위키문헌(영어/프랑스어판), 한국어 번역본의 출처는 여기.[15] 혹은 〈나는 탄핵한다...!〉 등으로도 번역된다. 다만, 밑에서 볼 수 있듯이 에밀 졸라가 쓴 원래 제목은 그냥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였다.[16] 아래의 신문만평이 당시 상황을 잘 나타내고 있다.[17] 현재 에밀 졸라가 영면 중인 팡테옹의 정면에 AUX GRANDS HOMMES LA PATRIE RECONNAISSANTE(조국이 위대한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정말 그의 예언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이다.[18] 필명으로 본명은 에마뉘엘 푸아레(Emmanuel Poiré). 할아버지가 나폴레옹을 따라 종군한 군인 출신으로, 포로가 된 뒤 러시아에 정착하였고 그곳에서 출생하였다.[19] 러시아인인 안톤 체호프도 10년지기 지인 수보린(체호프의 글을 여러 번 실어준 잡지의 운영자이자 작가, 평론가였다)과 이 일 때문에 절연했다고 한다. 그는 드레퓌스 사면 운동을 펼치는 에밀 졸라를 적극적으로 지지했지만, 수보린은 보수적인 견해를 지녔던 탓이다.[20] 자살이 아니라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살해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앙리 중령은 왼손으로 자살했는데 생전의 앙리 중령은 오른손잡이였기 때문이었다.[21] 그는 영국의 어느 출판사에서 많은 돈을 받고 자기 이야기를 책으로 썼는데, 자기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독일의 기밀을 캐기 위해 독일 무관에게 접근한 이중첩자였다는 내용이었다.[22] 유감스럽게도 에밀 졸라는 드레퓌스의 복권을 보지 못한 채 1902년 수면 중 난로에서 불완전 연소로 인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한 뒤였다. 이것은 누군가의 지령을 받은 굴뚝 청소부가 의도적으로 굴뚝을 막아 일어난 암살 사주로 밝혀졌다.[23] 여기에는 드레퓌스가 무죄 선고를 받기 전 사면되었을 때 '사면'이라는 결과를 인정할 수 없었던 드레퓌스파가 드레퓌스를 힐난하자 복역 생활에 너무나 지쳐 있던 드레퓌스가 본인 스스로 사실상 간첩임을 인정하는 것에 가까운 발언을 한 탓도 컸다.[24] 다만 모든 귀족 가문이 이에 동조한 건 아니었다. 일례로 폴리냐크 공작은 에밀 졸라를 지지하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 마르셀 프루스트에게 드레퓌스가 유배되어 있는 동안 그 잘난 유대인 비밀결사는 대체 뭘 하고 있었냐고 빈정댔다고 한다.[25] La rafle du Vélodrome d'Hiber Razzia des Wintervelodroms. 1942년 7월 16일부터 17일까지 프랑스 경찰이 13,152명의 유대인을 일제 검거한 뒤 파리 제15지구에 위치한 자전거 경기장인 벨로드롬 디베르(Vélodrome d'Hiver, 약칭 벨디브·Vél d'Hiv)에 수용한 사건으로, 이들은 제대로 된 음식이나 거처도 제공받지 못하다가 그냥 끌려갔으며 이들 중 12,884명은 남녀노소로 갈라진 뒤 차례로 아우슈비츠로 보내져 학살당했다. 프랑스에서 최초로 성인 남성이 아닌 아동, 여성, 노인 유대인이 대규모로 체포된 사건으로, 당시 체포된 아동만 해도 4000명이 넘었다. 이 일제 검거는 독일의 요청이 아니라 비시 프랑스 정부가 직접 실시했다. 프랑스는 이 사건의 조사에 대해 공공연하게 압력을 가하는 등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것 때문에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벨디브 추모 행사에 참석했다가 유족들에게 거하게 욕을 얻어먹었다. 1995년에야 당시 대통령 자크 시라크에 의해 인정되었고 사건 발발 70주년인 2012년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26] 같은 이름의 성당이 유럽 전역에 많으니 주의할 것. 즉 영국 뿐만 아니라 독일이나 프랑스 등 다른 국가들에도 이런 이름의 성당이 많이 있다.[27] 당시 유대인들은 상업과 금융업 혹은 의사 같은 전문직에 종사했는데 벌어들인 돈을 오직 유대교 공동체 내에서만 소비했다. 이들의 모든 생활이 철저하게 유대교 공동체 안에서만 이루어졌으니 당연한 상황이었다. 비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자신들의 돈이 유대교 공동체로 빨려 들어가기만 할 뿐 나오지를 않으니 짜증이 날 수밖에...[28] 이때 많은 유대계들은 개종 이후에 유대계라는 의식이 희미해지다 못해 사라져서 제2차 세계 대전 때 나치에 의해 자신이 유대인 혈통이라는 것을 알고 충격으로 까무러친 사람들도 많았다. 자신이 유대인임을 부정했는데도 나치에게 끌려가서 죽임을 당한 유대계 추정 피해자들도 꽤 많았다고 한다.[29] 1998년에《나는 고발한다 - 드레퓌스 사건과 에밀 졸라》란 제목으로 재출간되었으며 2018년 나는 고발한다-드레퓌스 사건과 집단히스테리라는 제목으로 변경되어 다시 출간되었다.[30] 조금만 건들면 불어 버릴 테니 프랑스 정부는 필사적으로 보호해야만 했다.[31] 참고로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아버지인 라파엘과 어머니인 자네트의 사이에서 9남매(마티외, 라셸 실, 베르트, 앙리에트, 레옹, 자크, 루이, 에르네스틴)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그후 1891년 뤼시 드레퓌스와 결혼하여 피에르와 잔을 낳았다.[32] 풀네임 Nicole Françoise Florence Dreyfus, Anouk Aimée라는 활동명으로 1966년 영화 '남과 여'의 여주인공을 맡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배우 중 한 명이지만 전성기에는 잔 모로, 브리짓 바르도에 밀려서 인기면에서는 2인자 위치였다.[33] 드레퓌스(Dreyfus)라는 성의 유래는 16세기 독일 트리어에서 박해를 피해 알자스에 정착한 유대인 집단이 기원으로 트리어 출신 유대인들에게 일괄적으로 부여한 Trevus(트리어 출신이라는 뜻의 라틴어 Treviranus의 변형)라는 명칭이 변형된 것이다. 드레퓌스라는 성을 쓰는 사람들은 알자스와 유대인이라는 배경적 공통점은 있으나 친족으로 드러난 게 아닌 이상 상호 연관성은 크게 없다. #[34] 1899년 8월 14일 렌에서 총격을 받아 부상을 입은 사건이 있었고, 해당 영화에서도 이를 다루었다.[35] 클레이 쇼를 법정에 세우고 다양한 증거와 논리로 그가 케네디 암살범임을 증명했음에도 무죄가 선고된다. 당시 관객들이 매우 당황했다고. 물론 음모론일 뿐, 실제로는…[36] 오페르트 도굴 사건의 그 오페르트가 맞다. 원역사와 다르게 조선이 일찍 개항하면서 운산 금광의 채굴권을 가져가려다가 40년 노상 군밤장수 경험으로 사기꾼의 수법이라면 잘 아는 김귀남이 캐치해 조선 정부에 졸지에 등용당해져 광무총국 사장으로 배치되어 30년 동안 쎄빠지게 구르게 되어버린 것. 조정에 하도 오래 있다 보니 허연 수염이 났고, 실력은 있었는지 외국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종2품의 자리에 올라 오씨 대감이라고 불리곤 한다. 최종 시호는 장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