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
프로이센 왕국 | ||||||||||||
바이에른 왕국 | 작센 왕국 | 뷔르템베르크 왕국 | ||||||||||
바덴 대공국 | 헤센 대공국 | 올덴부르크 대공국 |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국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 | ||||||||||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 | 작센마이닝겐 공국 | 작센알텐부르크 공국 | ||||||||||
안할트 공국 |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 리페 후국 | ||||||||||
샤움부르크리페 후국 | 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 후국 | 슈바르츠부르크존더샤우젠 후국 | ||||||||||
발데크피르몬트 후국 | 로이스게라 후국 | 로이스그라이츠 후국 | ||||||||||
함부르크 제국도시 | 브레멘 제국도시 | 뤼베크 제국도시 | ||||||||||
엘자스로트링겐 제국영토 | }}}}}}}}} |
- 독일어: Reichsland Elsaß-Lothringen
[clearfix]
1. 개요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이 프랑스 제2제국에게 승리를 거두고 독일 제국이 성립되면서, 독일어권인 알자스 지역의 대부분[1]과 로렌의 일부 지역[2]이 독일 제국에 합병되었다. 당시 독일 제국에 편입된 영토를 의미한다.2. 병합 역사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프랑스에게서 배상금을 받아내는 것까지는 좋지만 영토까지 가져가면 프랑스의 복수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우려하면서 알자스-로렌의 합병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프랑스 제1의 공업지대인 알자스-로렌의 기업가들이라는 새로운 경쟁자를 맞이해야 할 남독일 지방의 기업가들도 반대를 표했다.[3] 그러나 육군 참모총장인 헬무트 폰 몰트케와 군은 전술적, 전략적 이유로 알자스-로렌의 병합에 찬성하였으며 같은 독일 민족이니 당연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여론은 알자스-로렌의 병합에 압도적으로 찬성이었다. 마지막으로 최고 결정권자였던 황제 빌헬름 1세가 몰트케의 손을 들어주면서[4] 결국 비스마르크도 반대 의사를 접었고, 알자스-로렌의 병합이 결정되었다.[5]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직후 알자스-로렌의 정치 상황은 매우 혼란했다. 1870∼1880년대에는 알자스 로렌 지역에서 배출한 제국의회 의원의 대부분이 독일 제국과 거리감이 있는 가톨릭계의 항의파였고, 제국 내 지위를 요구하는 자치파는 소수였다.
이때 알자스 로렌에서 이와 같은 여론 결과가 나온 것은 군국주의의 대명사였던 프로이센 왕국과 호엔촐레른 가문에 대한 거부감이 컸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 당시 거의 모든 독일인들은 통일을 간절히 염원했지만 그 과정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달랐다. 때문에 1848년 프랑크푸르트 회의가 열리기도 했지만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독일에서는 강성 이미지가 강한 프로이센 주도하의 통일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진 경우도 많았는데, 특히 가톨릭 성향이 강한 남부 독일에서는 골수 루터교회 프로이센[6]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다. 때문에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후 프로이센 주도하에 북독일연맹이 창설되었을 때 남부 독일 지역은 모두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해 연맹에 불참했는데, 오스트리아 제국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독일 연방 역외 영토[7]를 포기못한다며 배째라로 나오니 소독일주의에 따라 강제로 배제된 것이지만, 바이에른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은 프로이센에 대한 거부감이 컸기에 연맹에 가입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뷔르템베르크 및 바덴과 함께 남서독일권 즉 슈바벤 지역을 구성하고 있던 알자스[8]의 여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갑작스럽게 독일 제국이 선포되면서, 갑작스레 달성된 독일 통일에 대해서 독일인들의 내부 의견은 엇갈렸다. 독일 통일이라는 대의에 대해서는 모두 찬성하지만 상술되어 있듯이 남부 독일에서는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에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또 프로이센 못지 않은 강국인 오스트리아가 배제된 채 이루어진 불완전한 통일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비스마르크는 알자스에 대해 광범위한 자치를 허용하는 등 알자스를 관대하게 통치하여 이들이 프랑스를 잊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프랑스로부터 군사적 위협이 컸기에 알자스-로렌 지역은 결국 라이히슬란트(제국직할령)로 지정되어 1902년까지 프로이센 관료들의 통치를 받으며 효율적인 자치정부가 들어서지 못했다.
이에 일부 주민들은 알자스-로렌이 실질적으로 차별을 당하고 있으며, 심지어 독일의 식민지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패배로 제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선 프랑스에 호감을 갖는 이들도 있었다. 젊은이들은 군복무 기간이 훨씬 짧았던 프랑스쪽에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기도 했다. 이 기간에 스스로를 프랑스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독일령이 된 알자스-로렌에서 이주해 나간 경우도 있다.[9]
그러나 독일 제국의 눈부신 경제 발전에 따라 알자스-로렌의 상황도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알자스-로렌 지역에도 산업단지가 조성되었고, 산업이 발전하면서 인구도 많이 증가했다. 외부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입되었다. 독일 제국은 알자스의 수도 슈트라스부르크(현 스트라스부르)에 황제 빌헬름 2세의 이름을 딴 카이저 빌헬름 대학교를 세웠는데, 이는 독일 최고의 명문대 중 하나가 되었다. 또 독일 정부는 박물관과 도서관을 짓고 알자스와 슈트라스부르크의 문화 유산을 수집, 복원, 전시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기차역 중 하나였던 슈트라스부르크 중앙역도 건설되었다. 역사 건설은 철도 수송을 중시했던 독일 참모부의 의사가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1905년 알자스-로렌의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프랑스 공화정부의 교권반대 정책에 등을 돌리고 독일 제국 내에서 알자스-로렌의 자치를 얻는 것에 눈을 돌렸다. 이후 특히 1911년 헌법이 승인됨으로써 독일화에 진전을 보였다.
그러나 1913년에 이르러 주민과 군대 간의 충돌 사건(차베른 사건[10])이 일어나고 정부에서 선처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국의 내정적 위기로까지 발전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알자스-로렌에서 친프랑스적 정당과 자치를 추구하는 정당의 지지율이 떨어졌으나, 의석수는 줄지도 늘지도 않는 편이었으며, 또 떨어진 지지율은 거의 전부가 독일 군국주의 정권의 알자스-로렌 철권 통치를 격렬하게 비판하던 독일 사회민주당으로 향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정부는 알자스-로렌에 대한 대대적인 독일화 작업에 나섰다. 그때까지 딱히 금지하지는 않았던 프랑스어 사용이나 교육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졌고[11], 프랑스어권에 속했던 메스에서는 프랑스어로 되어 있던 거리 이름을 독일어로 바꾸는 등의 작업이 이루어졌다. 한편 이 지역 청년들에 대한 징집도 이루어졌는데, 탈영 우려 때문에 서부전선보다는 동부전선이나 해군에 배치하였다.
3. 프랑스로 재합병
제1차 세계 대전 말기, 독일 내에서는 대규모 혁명이 일어났다. 알자스 로렌에서도 슈트라스부르크(스트라스부르)에서 수천명의 자유주의자와 귀환 군인들이 1918년 11월 10일 혁명을 일으켜서 슈트라스부르크의 혁명 위원회가 일시적으로 정권을 성립했다. 이들은 엘자스-로트링겐 평의회 공화국을 선포하고 "독일도 프랑스도 아니다."는 모토를 내세웠지만, 11일 뒤 프랑스군이 알자스-로렌에 진입해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1] 바랭 주 전체와 벨포르 지역을 제외한 오랭 주 전체. 벨포르는 알자스 지역에서 유일하게 프랑스어 화자가 다수인 지역었다. 또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벨포르의 프랑스군은 가장 격렬한 저항을 보여주면서 영웅적인 장소로 인식되었고 군사적 요충지 대부분을 잃은 프랑스가 벨포르를 신설된 동부 국경 상의 요충지로 인식하였기에 여기는 절대 내줄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이를 받아들였다. 프랑스는 이 지역을 벨포르 테리투아르(영토)라는 특별 행정구역으로 두었다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정식으로 테리투아르드벨포르 주를 신설하였다.[2] 최서단 브리에 지역을 제외한 모젤 주 전역과 뫼르트 주 북쪽 3분의 1 지역, 보주 주 동북쪽 끝 지역. 여기는 로렌에서도 독일어 화자가 다수인 지역이었으며 프랑스의 주요 철산지 중 하나였기에 프로이센이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프랑스는 모젤 주와 뫼르트 주를 폐지한 후 두 지역을 통합해 뫼르트에모젤 주를 신설하였다. 그런데 프랑스에 잔류한 브리에 지역에서 거대한 철광이 발견되는 바람에 비스마르크는 모젤 주 전체를 내놓으라고 하지 않은 것을 엄청 후회했다고.[3] 이때 비스마르크는 알자스-로렌을 중립국인 스위스와 영토교환을 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스위스는 이를 거절했다.[4]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은 후에 빈에서 개선식을 하거나 보헤미아 왕국의 프라하까지는 뺏어야한다고 주장했다가 비스마르크의 반대로 의사를 접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는 본인 의견을 어느정도 관철시킨 셈.[5] 비스마르크는 차선책으로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시키는 외교정책을 주선했다. 그러나 프랑스 고립정책의 중요한 열쇠이었던 삼제동맹이 파탄나고 삼제동맹의 한 축이었던 러시아 제국이 프랑스와 손을 잡아 러불동맹을 결성하게 된다. 이것이 삼국협상으로 발전하면서 결국 비스마르크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6] 사실 프로이센은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를 절충한 프로이센 연합 교회를 창설해 따로 믿을 정도로 종교적으로는 거리가 있던 나라였다.[7] 헝가리 왕국, 에르데이 대공국, 크로아티아 왕국, 슬라보니아 왕국, 달마티아 왕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부코비나 공국 등.[8] 알자스는 독일 왕국 시절부터 슈바벤 공국에 속해 있었다.[9] 알자스-로렌이 독일에 병합된 후 이 지역 주민 가운데 프랑스로의 이주를 택한 사람은 대략 25만 명으로, 결코 적지 않은 수였다.[10] 1913년 11월 알자스의 주민과 특히 이 지방 출신 징집병에 대한 장교의 모욕적인 언동에 항의하는 시위운동이 일어났을 때, 차베른 주둔 제99보병연대의 연대장이 계엄령을 실시하고 많은 주민을 병영에 감금하였다. 이 사건에 대하여 국내외에서는 정부 및 군당국이 조처를 게을리했기 때문이라고 크게 항의하였다. 제국의회에서는 보수당을 제외한 여러 정당이 일치하여 사상 최초로 제국의 재상 불신임을 압도적 찬성으로 결의(293 대 54, 기권 4)하였으나, 황제는 재상의 사임을 인정하지 않았다.[11] 당시 독일령이었던 지역 가운데는 프랑스어권임에도 자원 확보나 전략상의 이유로 할양받은 지역이 일부 있었고(1900년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알자스-로렌 전체 인구의 11.5%에 해당하는 19만 8,318명이 프랑스어를 제1언어로 사용했다), 독일어권에 속하는 지역이라도 프랑스의 영향으로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함께 사용하는 주민이 제법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