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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iance franco-russe (프랑스어) Франко-русский союз (러시아어) Franco-Russian Alliance (영어) |
1. 개요
프랑스와 러시아 제국이 독일 제국에 공동으로 대항하기 위한 목적으로 1892년 맺은 동맹. 후일 체결되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 간의 삼국 협상의 모태가 된 동맹이기도 하다.[1] 20년이 넘은 1917년까지 지속되다가 11월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가 붕괴되면서 파기된다. 불러동맹, 프러동맹이라고도 한다.2. 내용
1880년대 유럽의 외교는 독일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좌우하고 있었다. 소위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불리는 이 외교체제에서 프랑스는 철저히 고립되었으며 러시아는 독일과 삼제동맹 및 재보장 조약[2]을 맺어서 다소간의 우호관계를 맺고는 있었지만, 베를린 회의에서도 드러났듯이 독일은 같은 게르만족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3]을 더욱 선호했다.이런 상황에서 독일이 재보장 조약을 갱신하지 않기로 결정하자 러시아는 프랑스와의 접촉을 시작한다. 상대적으로 노후한 러시아의 군대와 산업을 개혁하기 위해 프랑스가 거액의 저금리 차관을 제공한 데 이어서[4] 1891년에는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러시아 영토 내에서 프랑스의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가 연주되기도 하면서 양국 사이의 관계가 급진전되기 시작한다.
1891년부터 시작된 양국간의 동맹조건을 둘러싼 협상은 1894년에 최종적으로 마무리된다. 군사동맹의 성격이 짙었던 이 동맹은 프랑스나 러시아 중 하나의 국가가 삼국 동맹 중 한 국가와 전쟁을 벌일 시 자동적으로 참전할 것을 규정하고 있었다. 한편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3세가 사망하고 젊고 유약한 니콜라이 2세가 황위에 오르자 빌헬름 2세는 니콜라이의 유약한 성격을 이용해 러불동맹을 와해시키려는 시도를 펼친다. 니콜라이 2세는 이 시도에 꽤나 혹하기도 했었지만[5] 총리 세르게이 비테와 대신들이 격렬하게 반발해 빌헬름 2세의 러불동맹 파기 제안을 거절한다. 이후 그레이트 게임이 종료되고 영국이 여기에 가담하면서 러불동맹은 삼국협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1] 이 조약을 주춧돌로 영불협상, 영러협상이 추가되면서 삼국 협상이 성립된다.[2] 독일, 러시아 중 하나가 제3국과 전쟁을 벌일 경우 중립을 지킨다는 조약이다.[3] 물론 오헝제국은 엄청난 다민족 국가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독일 통일 이전에는 독일 연방의 일원이기도 했고 지배층은 독일계가 다수였다. 거기에 헝가리인들이 추가된 정도. 비록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오스트리아를 꺾어놨지만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가 전쟁 이후에도 러시아나 프랑스를 견제해 주는 동맹 역할로 남아주기를 원했다. 때문에 오스트리아에 필요 이상의 모욕을 가하는 일을 삼갔다. 대표적인 예시로 보불전쟁에서와는 달리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로부터 어떠한 영토할양 요구도 하지 않았는데 비스마르크가 국내 여론을 잠재우지 않았으면 오스트리아는 최소 주데텐란트는 떼일 각오를 해야 했다.[4] 물론 프랑스가 천사여서 그런건 아니고, 이 차관으로 철도를 깔게 했다. 전쟁이 터지면 철도로 독일 국경까지 군대를 빨리 실어나르라고(...)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졌을 때 러시아군은 프랑스의 차관으로 확충된 철도를 이용해 독일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병력을 동원해 동부전선에 군사적 압력을 가했고 이것이 슐리펜 계획이 실패하게 된 원인 중의 하나이다.[5] 니콜라이 2세가 워낙 절대왕정의 신봉주의자이기도 해서 '무엄하게도' 나폴레옹 3세를 아랫것들이 쫓아내고 세운 공화정 체제인 프랑스 제3공화국을 탐탁지 않아 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