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알프레드 드레퓌스 Alfred Dreyfus | |
출생 | 1859년 10월 9일 |
프랑스 뮐루즈 | |
사망 | 1935년 7월 12일 (향년 75세) |
프랑스 파리 | |
배우자 | 뤼시 드레퓌스(Lucie Dreyfus)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군사 경력 | |
복무 기간 | 프랑스 육군 |
1880년 ~ 1894년 1906년 ~ 1907년 1914년 ~ 1918년 |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최종계급 | 육군 중령 |
종교 | 유대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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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군인. 드레퓌스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드레퓌스 사건 이후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참전하여 훈장을 수훈받았다.2. 생애
뮐루즈의 유대계 알자스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방직공장을 경영했다. 1870년 프랑스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알자스-로렌 지방을 상실한 뒤 그의 집안은 스위스의 바젤로 이주하였으며 그는 이곳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보냈고 나중에 파리로 이주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의 경험은 그의 삶에 영향을 주어 1877년 에콜 폴리테크니크 군사학교에 입학하는 계기가 되었다.1880년 프랑스 육군의 소위로 임관하고 퐁텐블로의 포병학교에서 포병장교로 교육을 받았다. 포병학교 졸업 후 제31포병연대, 파리 제1기병사단 소속으로 배속되었으며 1885년 중위로 진급했고 1889년 대위로 진급했다.
1891년 그는 뤼시 아마다르와 결혼하였으며 나중에 고등군사학교에 입학했고 2년 뒤인 1893년 졸업했다. 이때까지 드레퓌스는 군생활을 이어나갔으나 1894년에 벌어진 사건이 그의 인생은 물론 프랑스 정치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3. 드레퓌스 사건
1894년 10월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던 드레퓌스는 프랑스군 정보부에 의해 기밀누출 혐의를 받고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고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섬으로 유배되었다. 드레퓌스는 재판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으나 당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팽배했던 강박적인 애국주의와 반유대주의는 그의 결백을 묵살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악마섬으로 압송되는 와중에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프랑스 만세! 프랑스군 만세!"라고 외쳤다.드레퓌스가 억울한 옥살이를 하던 중인 1896년 참모본부의 정보장교인 조르주 피카르가 자체적인 조사에 나선 결과 기밀을 유출한 진범인 샤를 마리 페르디낭 발진 에스테라지(Charles Marie Ferdinand Walsin Esterhazy) 장교를 적발했다. 피카르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며 재심을 요구했지만 프랑스군 참모본부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1898년 에스테라지는 무죄로 석방되었다.
프랑스가 드레퓌스 사건으로 갈라진 가운데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J'Accuse !)>를 기고한 것을 비롯해 수많은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프랑스 정부를 비난하면서 프랑스 정부는 외교적 부담이 점점 커졌고 위베르조제프 앙리 중령이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재심파의 요구가 거세져서 결국 재심이 열렸다. 1899년 열린 재심에서 드레퓌스는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당시 에밀 루베 프랑스 대통령에 의해 사면되어 마침내 그는 악마섬에서 나올 수 있었다.
4. 드레퓌스 사건 이후
1906년 드레퓌스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으며 모든 혐의를 벗고 프랑스 육군으로 복귀하여 소령으로 승진하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를 받았지만 악마섬에서의 억울한 옥살이로 인해 건강이 쇠약해져서 결국 다음해인 1907년 퇴역했다.퇴역 이후 드레퓌스는 민간인으로 조용히 지내다가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다시 소집되어 전쟁 도중에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후방지원에 종사하며 베르됭 전투를 비롯한 굵직한 전투에 참가하였다. 종전 후에는 퇴역하여 1919년 레지옹 도뇌르 오피시에 훈장을 받았고 파리에서 살다가 1935년 7월 12일 향년 7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후 그는 몽파르나스 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