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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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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장기진(張基鎭)
출생 1903년 1월 20일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現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사망 1983년 2월 6일 (향년 80세)
서울특별시 양천구 목동 자택
경력 초대 헌병 사령관
초대 국방부 병무국장
제3군관구사령부 부사령관
대한전선 고문
원호처 원호위원장
광복회 부회장
서훈 건국포장 수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3. 황포군관학교 입학과 의열단 가입4. 민족혁명당 특별당원 및 감찰위원5. 8.15 광복 이후6. 여담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이자 국민혁명군 출신의 군인.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1903년 1월 20일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원당면(元堂面) 성사리(星沙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장기진(張基鎭)이다.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를 졸업하였으며, 한국청년동맹회(韓國靑年同盟會)·의열단(義烈團)·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에서 활동하였다.

1925년 2월 같은 지역 출신의 의열단원 오세덕(吳世德)과 함께 중국 상하이(上海)로 이동하였다. 상하이에서 오세덕의 권유로 조한용(趙漢用)이 이끌었던 한국청년동맹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3. 황포군관학교 입학과 의열단 가입

여운형(呂運亨)의 추천으로 신악(申岳)[1] · 안유재(安維才)[2] · 장익(張翼)[3] · 김호원(金浩元)[4] 등과 함께 황포군관학교 제 5기(1926. 11∼1927. 8)으로 입학하였다.(총 5명)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군에 입대하였다. 이와 함께 김원봉(金元鳳)의 권유로 의열단에 참여하였다. 이때 함께 참여했던 권준(權晙) 등 6명과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의열단에 참여함과 동시에 중국군 난징(南京)헌병사령부에 소속되어 독립운동가의 신변을 보호하였다.

4. 민족혁명당 특별당원 및 감찰위원

1931년 난징헌병사령부 재직 중 김성숙(金星淑), 김원봉 등이 중심이 되어 창당한 민족혁명당의 특별 당원이 되었다. 중국군에 소속된 것을 기반으로, 일본 첩자들이 수집한 정보를 탐지한 후 민족혁명당 지도부에 전달하였다.[5]이 정보를 바탕으로 민족혁명당에서는 대책을 마련할 수 있었고, 항일독립운동 활동에 장애가 되는 요인들을 제거해 나갈 수 있었다.[6]

1933년 난징에서 중국 관내 혁명 단체들을 통합하기 위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이 결성되자 이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지지하였다.

1935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민족혁명당·의열단·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미주대한인독립단(美洲大韓人獨立團) 5개 단체가 통합되어 난징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이 창설되었을 때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감찰위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1935년 5월 중국군 헌병사령부 상위(上尉)[7], 1940년 12월 헌병 제 8단 소교단(少校團), 1942년 10월 헌병 제 8단 제 2영 소교영장(少校營長)으로 근무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의 신변보호 및 재정지원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5년 지청천(池靑天)[8]의 요청을 받고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9]를 졸업한 청년들이 항일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보급품을 지원하는 활동을 펼쳤다. 1년여 동안 매월 급여 80원 중 50원을 지원하였다.
1938년 6월 18일, 주둔지 상라오(上饒)에서 차녀 계옥이 출생하여 ...(중략)... 또 때마침 이소민 동지가 조선의용대 대원 50여 명을 인솔하고 이곳에 와서 상하이쑤저우 부근에 침투하여 적군 내의 한국 출신 사병 귀순 공작에 주력한 결과 동년(1938년) 7월경에 쑤저우에 주둔한 적군 내에의 한적사병 5,000~6,000명을 집단 탈출시키다가 불행이 적군에게 발각되어 수십명이 사살당하고 40여 명만이 다행히 무사탈출하여 조선의용대에 편입 후 계속적으로 이런 귀순 공작에 활약하여 대단히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그 후 적군 측에서는 쑤저우 한적 사병 탈출 사건이 전군에 전파되자 전군 내의 한적사병을 각 분대로 2명씩 분산, 편입하여 엄중 감시하였다 한다.
본래 상라오에는 구주퉁 장군이 영도하는 제 3전구사령부가 주둔해 전구 내 총 병력이 30만 가령이나 있었으나 장비가 너무 열악하여 전투력이 박약하였다. 그러므로 언제나 적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으면 우리도 적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방어에만 치중하고 적군과 격전해 본 기회가 없었다. 또 적과 아군 간에 전략상 중요한 지역이 아닌 고로 2~3년간 전투가 없는 상태로 편안히 지내다가 1942년 여름에 돌연히 적군 대부대가 급습하여 왔다. 전구 내의 각 부대들은 졸지에 응전도 못하고 전부 퇴각하게 되어 나의 가족 세 사람이 은행 차편을 이용하여 장시성 루이진(瑞金)으로 보내고 나는 부대와 같이 한 편 저항하면서 서서히 퇴각하다 보니 어느덧 2개월 만에 루이진(瑞金)에 도착하여 가족을 만나게 되었다. 중국 군대는 수송 장비가 열악한 관계로 기동력이 부족하여 언제나 지게 된다. ...(중략)... 닝보(寧波), 진화(金華), 상라오(上饒), 샤오싱(紹興) 등 여러 요지를 빼앗기고 우리 부대는 닝두(寧都)라는 곳에 주둔하여 5~6개월을 지낸 뒤에 나는 중교[10] 대대장직으로 승진했다. 그 뒤 3개 헌병 중대를 인솔하고 장시성 임시 성도인 타이허(泰和)에 주둔하는 동시에 부대는 여러 요지에 흩어져 주둔하여 치안을 담당하게 되었다.[11]

쑤저우(蘇州)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에 소속된 성동준(成東濬)·김수남(金壽男)·정희섭(鄭熙燮) 등 수십 명을 탈출시키는 계획을 실행하였고, 이들이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되는 데 기여하였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 제 3전구 지역 중국군 재직하면서 포로관리, 한적사병 분리 수용 업무를 담당하면서, 한적사병을 한국광복군 제 1지대 제 2구대[12]편입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5. 8.15 광복 이후

1945년 8월 광복 직후 지청천의 요청으로 한국 북부와 동북지역 공산당 점령구역 내 중국공산당과 북한지역 공산당 활동 및 소련군의 동태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1946년 10월 6일 저장성(浙江省) 주장(九江) 지역에 설치된 한국광복군 강남독립지대 지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당시 중국에 강제 이주된 한인교포와 항복한 일본군 내 한국인 청년들을 보호하고 한국광복군으로 편입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지청천이 이끄는 대동청년단 훈련단장 등을 맡으며 정치단체에 몸담다가 김관오 등과 함께 육군사관학교 특별 7기로 임관했다. 임관 후 초대 헌병사령관을 지냈다.

백범 김구 암살 사건이 발생하자 진상조사를 꾸리던 중 전봉덕에게 헌병사령관 직을 넘겼다. 이후 특무부대장인 김창룡에게 소환되어서 왜 안두희를 영창에 보내려 했는지와 한국독립당과의 관계를 추궁받았으며, 1960년 8월 김구 암살 사건 재조사 과정에서 이를 증언하였다.#

헌병사령관에서 물러난 후 경남병사구사령관[13], 전남병사구사령관을 지내다가 1953년 준장으로 진급했다. 장성 진급 직후 국방부 초대 병무국장[14]을 맡았고 1956년 제3군관구사령부 부사령관, 1958년 육군 군사감을 역임하다가 1959년 4월 예비역 소장으로 진급 후 전역했다.

1960년 8월 백범 김구 암살 사건 재조사에 증인으로 참석했고, 대한전선 고문 등 기업체 자문을 역임했다. 1966년 원호처 원호위원장을 맡아 1972년 까지 22만 원호대상자들의 예우 및 지위 향상 등의 기초 법규를 제정, 시행하는데 기여했다. 1972년 부터 광복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1977년 건국포장을 받아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았다. 1983년 2월 6일 서울특별시 양천구 목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6. 여담

  • 1975년 둘째 아들이 소집영장을 받고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가출하자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고 아들을 전과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 10여 일간 추격 끝에 찾아 경기도 지방병무청에 데려다주고 입영시켰다.#
  • 1969년 예비역 장성 29명과 울릉도, 독도 경비요원위문단을 편성해 한 트럭 분의 위문품을 싣고 울릉도, 독도를 방문, 경비요원들에게 위문품을 전달하였다.#
  • 2025년 1월에 장흥 회고록 『전격 교체된 초대헌병사령관 장흥 자서전: 백범 김구 암살의 전말』한울, 2025이 재출간되었다.


[1] 의열단, 한국혁명군 간부양성훈련반 교육주임, 한국광복군 제 1부지대장[2] 평양, 의열단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의열단 기관지 '우리 길' 발행, 조선박람회 사건 가담.[3] 보병과 2학생대[4] 조선일보 강계지국 기자[5] 민족혁명당 나무위키 문서 8.2. 특무부의 정보수집 활동 참조[6] 민족혁명당 공식적인 창당일은 1935년 7월 5일이었기 때문에 의열단 활동 시기였다고 본다[7] 우리나라 대위에 해당되는 계급으로 중대장, 부영장 정도 할 수 있는 계급이다.[8] 지청천민족혁명당 탈당 전[9] 황포군관학교후신으로 중앙육군군관학교로 개칭[10] 우리나라 중령[11] 장흥 저자 · 한홍구 해제, 『전격 교체된 초대헌병사령관 장흥 자서전: 백범 김구 암살의 전말』한울, 2025, 70~72쪽[12] 구대장 이소민[13] 현재 경상남도 병무청장[14]병무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