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이종형 李鍾馨 | |
<colbgcolor=#254170><colcolor=#fff> 본명 | 이종영(李鍾榮) |
가명 | 권수정(權守楨)[1] |
출생 | 1895년 4월 20일 |
조선 강원도 정선군 (現 대한민국 강원특별자치도 정선군) | |
사망 | 1954년 2월 15일 (향년 58세) |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시 | |
학력 | 와세다대학 (법학과 / 중퇴) |
최종 당적 | [[자유당(1951년)|]] |
배우자 | 강신상(필명: 이취성) |
의원 선수 | 1 |
의원 대수 | 2 |
비고 |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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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회의원 시절의 이종형 |
일제강점기에 관동군 촉탁 밀정을 지냈던 악질 친일반민족행위자.
인지도는 비교적 낮지만 악행의 스케일로 따지면 노덕술, 하판락 같은 악질 친일반민족행위자들도 능가하는 최악의 친일반민족행위자다.[2]
2. 생애
2.1. 젊은 시절
1895년 4월 20일 강원도 정선군에서 태어났다.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대학 법학과를 다니다가 1918년 중퇴했다고 본인 입으로 주장하였으나 와세다대학 학적 퇴학 명부에 기록이 없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다.2.2. 친일 행적
1930년 만주로 건너가 밀정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의열단에 가입하였으며 '권수정'이라는 가명을 쓴 채 일제의 주구 밀정 노릇을 하면서 초공군(剿共軍)사령부를 조직하여 고문 겸 재판관을 지냈고 둔화, 동안 일대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가장 악독하게 탄압한 장본인이다. 그가 직접 체포하여 투옥시킨 독립운동가만 250명이었고 이들 중 무려 17명을 사형장으로 보내기까지 했으며 심지어 최대치로는 무려 70명(!!!)의 독립운동가들이 그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설도 있다.1931년에는 만보산사건 오보사건이 발생하자 이 사건에 대해 보도한 당시 조선일보 장춘지국장 김이삼을 납치하여 살해했다는 설도 존재하고 있다. 심지어 독립운동가 승진을 지린 강남공원에서 암살하였고 하얼빈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남자현을 일경에 밀고하여 투옥당하게 만들었다.
1941년 다시 조선에 돌아와 조선총독부 경무국 보안과장과 조선군참모장, 헌병사령부 특고과장 등등 밑에서 일제의 주구로 활동하면서 해외에 망명 중이던 독립운동가나 가족들을 잡아가게 했으며 교회를 박해하는 데 앞잡이 노릇을 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총독부의 일경과 내통하면서 베이징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장명원, 권태석, 김만룡, 김선기, 이상훈, 박시목[3] 등을 밀고하여 투옥시킨 일화가 있다.
1942년에는 친일 단체 '총진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신토 계열의 친일 단체로 정춘수 등 기독교의 친일 인사들을 내세워 신사참배 강요 정책에 따라 신사참배를 독려하는 활동을 했다.
2.3. 해방 이후
이종형이 창간한 대동신문의 기사. |
상술한 악연 때문인지 그는 유독 여운형을 일방적으로 악의적으로 헐뜯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이종형 자신이 친일 한시를 짓고 그 한시를 여운형이 썼다고 대동신문에 대서특필하면서 게재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문사 대동신문을 앞세워서 여운형 암살 음모를 찬미하거나 암살교시하는 내용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실제로 1946년 5월 16일자에는 <민족혼을 가진 청년이여, 청년지사 박임호(朴林虎)군의 뒤를 따르라>는 제목의 논설을 통해 여운형을 피습한 박임호를 찬미하면서 대놓고 살인교사를 하자 미군정에 의해서 3주 동안 정간처분받기도 했으며, 1946년 1월 9일에는 좌익의 습격을 받아 5일 동안 휴간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극우파를 제외한 정치인 테러 활동을 뒤에서 지원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기도 하다.[5] 이러한 극우 반공 활동은 너무 극단적인 나머지 다른 우익 인사들에게도 따돌림을 당할 정도였지만 이승만에게는 반공투사라고 극찬받기도 했다. 실제로 대동신문이 여운형의 암살을 요구하는 사설을 쓴 후 대동신문 논설위원이 여운형이 연설한 집회에 수류탄을 투척하고는 대동신문이 이를 '위대한 애국행동'이라고 자화자찬했다는 기괴한 일화 속에서 이승만은 체포된 이종형에 대한 보증금으로 30만 엔(당시 화폐가치)을 내줬을 정도. 이후 이승만은 이종형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이종형을 공개적으로 칭찬했고, 자신이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조직한 네 개의 하위위원회 중 하나의 위원장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이종형은 적산 불법 처분과 수해 의연금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 수감되기도 했다. 참고자료
그리고 이종형은 대동신문의 자매지로 '가정신문'을 만들어 아내 이취성을 편집인으로 앉혔고, '청년신문' '민중신문' 등도 발행하며 언론인으로 신분을 세탁했다. 또 '한국반공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1948년 10월 서울 동대문갑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한국반공단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당연히 낙선했다. #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8년 반민특위법이 생기자 자신의 신문사 대동신문에서 "반민특위는 망민법"이라며 그들을 매우 까댔다. 그가 했던 망언들이 상당히 가관인데 다음과 같았다.
"법이 없던 시절에 있던 일을 새 법을 만들어 잡아 들인다면 수많은 사람이 잡혀갈 것이다. 건국대업은 누가 이룰 것이냐? 이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1947년 부일협력처벌법안이 논의되자 한 말.
1947년 부일협력처벌법안이 논의되자 한 말.
"친일파 문제는 그 시대 공동의 책임이다. 합병조약같은 중대 행위자 외에는 모두 직업상 종사한 자들이다. 망민법은 그 취지를 넘어 광범위한 희생을 초래하고 민심을 어지럽힐 뿐이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반민족행위 특별처벌법 초안이 상정되자 반대하면서 한 말.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반민족행위 특별처벌법 초안이 상정되자 반대하면서 한 말.
이종형의 체포를 알리는 기사. |
친일 자본가 박흥식 다음으로 2번째로 체포되었다. 이때 반민특위 특경대가 자신의 자택을 급습하자 이종형은 “내가 무슨 죄가 있길래 잡으러 왔느냐”면서 육혈포를 품속에서 꺼내 반항하다가 형사들에게 제압당해 쇠고랑을 차게 되었다고 한다.
반민특위에 체포되면서도 그는 끝까지 특조위 사무실에서 "나는 애국자다. 나를 친일파로 몰아넣다니 이럴 수가 있느냐. 내가 풀려나는 날 한민당, 빨갱이, 회색분자를 모조리 토벌하겠다!"며 난동을 부렸고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도 "내가 감옥에 들어온 것은 빨갱이를 잡는 데 앞장섰기 때문에 사방에 정적을 만든 탓"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반민특위 재판 당시의 이종형 |
1949년 3월 29일 반민특위 법정에서도 기소문 낭독이 끝나자마자 "나는 공산당을 때려부순 애국자다! 훈장을 달아줘야지 쇠고랑을 채우다니! 공산당을 토벌했다고 나를 재판할 순 없다! 대한민국에서는 반공주의자를 처단할 수 없다!", "나는 친일파가 아닌 애국자요.", "빨갱이들이 지금 나를 친일파로 몰고있는 것이다."라고 변명했고 "자신은 만주에서 공산주의자들을 토벌했을 뿐"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독립운동의 터를 닦은 애국자"라고 떠들어댔다.[6] 심지어 그는 재판장에게 욕설까지 퍼부었다고 한다. 법정모독죄로 가중처벌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
그러나 1949년 7월 12일에 있던 2차 공판에서는 1차 공판도 능가하는 망발을 해댔다. 실제로 그는 방청석이 초만원을 이루었던 이곳에서 "당시 그곳 사람들은 나를 제갈공명의 환생이라고까지 칭송했다"는 말을 남겼으며 심지어 파렴치하게도 "반민특위가 나의 아내까지 잡아가둬 8살 난 아들이 고아가 되었다"며 방청석 맨 앞줄의 소년을 가리키고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울먹였다고 한다.[7]
그는 1949년 8월 26일에 3차 공판에 출두할 예정이었으나 병에 걸렸다며 재판에 출석하지 않아 3차 공판은 취소되었고 결국 8월 27일에 병보석 판정이 내려지면서 풀려났고 이후 반민특위가 해산되면서 그에 대한 처벌은 흐지부지해졌으며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향인 강원도 정선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당선되어 대한민국 제2대 국회에, 그것도 유권자들의 직접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으로 당당히 당선되었다.[9]
여담으로 발췌 개헌 당시 그의 대동신문은 민주국민당, 이승만 정권, 조봉암계를 모두 공격하여 '독설가의 독설 신문' 소리도 들었다는데 이는 그의 반공이 특정 신념에 입각한 게 아니라 그냥 해방 후 살아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11]
2.4. 최후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나마 악행의 죗값을 제대로 치르게 된다. 그는 국회의원 임기 중이던 1954년 2월 2일에[12] 수원시로 지프차[13]를 타고 가다가 차가 눈에 미끄러지자 차가 뒤집히려고 할 때 살아남고자 차에서 뛰어내렸는데 이때 뒤집힌 차가 그의 가슴 위로 엎어지게 되었고 곧장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사고 40분 후에 사망했다.[14]이러한 그의 악행은 사후인 2002년에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밀정 부문에 수록되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친일인명사전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았는데 훗날 민족문제연구소의 팟캐스트에서 밝혀지길, 밀정이었기 때문에 다른 친일파들에 비해 정보가 부족했고 과거 기록보다 해방 이후의 기록만 남았기 때문에 객관적인 사료가 부족하여서 명단에 넣지 못했다고 한다. 영상 참고
3. 가족 관계
아내 이취성(李翠星, 1918~1951)의 본명은 '강신상(姜信祥)'으로, '이취성'이라는 이름은 남편이 지어준 필명이다.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공주사범학교 강습과에 들어갔다가 학비 문제로 중도 퇴학당했고 어릴 적부터 알던 그와 1941년경에 결혼하고 딸 1명과 아들 1명을 낳았다. 남편과 함께 대동신문을 경영하기도 했으며 여자국민당[15] 총무부장으로서 '반민자 처단은 시기상조'라는 성명을 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고 남편의 구명운동을 하기도 했다. 1949년 2월 8일에는 100만 원 규모의[16] 사기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구속되기도 했는데[17] 2달도 안 지난 동년 3월 26일에 무죄 석방되기도 했으며 1949년 11월 22일부터 간행되던 주간 대동신문의 사장을 역임하다가 1951년 11월 22일에 저택에서 산후급증으로 향년 33세를 일기로 요절했다.반면 그의 장인어른과 처남, 즉 이취성의 아버지와 오빠는 많은 공적을 남긴 사람들이었는데 먼저 이취성의 아버지이던 강병주(姜炳周, 1882~1955)는 조선어학회의 유일한 목사 회원으로서 '큰 사전' 편찬에 기독교용어 전문위원으로 활동하여 '한글 목사'라는 별명을 얻었고 최악의 친일파였던 사위와 그런 사위를 두둔한 딸과는 달리 독립운동에 가담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강병주는 3.1 운동에 가담했기 때문에 대구형무소에서 8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1938년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구속되기도 했다. 이취성의 오빠였던 강신명(姜信明, 1909~1985)은 연세대학교 이사장, 숭실대학교 총장, 대한기독교교육협회 회장, 서울장로회신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고 1970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은 명망 높은 목사이자 교육자였으며 친일 행위에는 전혀 가담하지 않았다.
4. 대중매체에서
- 고은 시인의 <만인보>에 해당 인물의 행적을 다룬 시가 있다.
- 1981년작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선 배우 최봉이 연기했다.
- 1990년 MBC 8.15 특집극 <반민특위>에서 배우 오지명이 연기했다.
- 1994년 2월 20일자 KBS1 <다큐멘터리극장>에선 배우 이종만이 연기했다.
- 1995년 KBS 광복 50주년 기획드라마 <김구>에서는 배우 손호균이 연기했다.
- 2003년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 79회에서도 잠시 등장했는데, 성우 신흥철이 연기했다. 이정재가 심문할 때 끝까지 친일을 부인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이정재가 그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화를 내면서 내뱉은 "그만! 그만해! 이 파렴치한 작자 같으니라고. 당신이 인간이야?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라는 대사는 야인시대 합성물에서 아주 자주 쓰이는 단골 대사 중 하나다.
- 2012년 KBS 드라마 각시탈에서는 직접적인 등장은 없었지만, 밀정 시절 쓴 가명인 권수정을 다른 인물에 이름을 적용하였다.
- 2015년 영화 '암살'의 악역 염석진의 모티브가 이종형이라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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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밀정 활동 당시 사용한 가명.[2] 후술할 내용들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종형만큼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직접적으로 죽음으로 몰고 간 친일 경찰은 반민특위에서 유일하게 사형 선고를 받은 김덕기 정도 밖에 없다. 실제로 김덕기 항목을 보면 기가 찰 정도의 악행들로만 가득 차 있다.[3] 사망한 날이 1945년 8월 15일이다.[4] 이종형은 대동신문 편집자들에게 자기가 쓴 글에 대해 한 글자도 손을 못 대게 했다고 한다.[5] 김규식과 안재홍 등 온건 우파 세력들도 정치테러를 당했다고 한다.[6] 이종형의 말에 의하면 "나는 3.1 운동에 참여했었고 일제 경관을 2명이나 죽이고 감옥에서 10년 동안 지낸 독립운동가다!"라고 주장했는데 어떠한 자료도 없고 전혀 근거가 없는 헛소리다. 이승만과 친일파들이 반민특위를 북한과 협잡한 빨갱이 집단이라고 종북몰이했지만 북한의 김일성도 친일파를 등용한 것을 보면 모순된 헛소리에 불과하다.[7] 1977년 8월 15일자 경향신문 중[8] 특히 아무 근거도 없는 와세다대학 졸업, 독립운동가 출신 드립까지 한 것을 보면 더욱 의심이 간다.[9] 여담으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당시 매우 위축되어 있어서 14석밖에 얻지 못하였다.[10] 다만 그 시절 지역구 크기에 비해 인구가 적은 시골 같은 지역은 투표함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11] 일제강점기에 헌병으로 일했을 때부터 신념형 반공주의자였던 김창룡, 해방 후 소련군에게 잠깐 구금되었던 노덕술과 정반대로 이종형은 해방 후 반공을 내세우게 된 계기라고 할 만한 게 전혀 없다.[12] 사족으로 이로부터 약 3개월 뒤에 제3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설날 사흘을 앞두고 사냥 가던 길이었다는 말이 있다.[13] 대동신문사 정치부장이 동승했다고 한다.[14] 사실 진짜 악질 중의 악질 친일파들은 마지막에는 어느 정도 대가를 치른 모습을 보여줬다. 일단 김덕기는 6.25 전쟁 발발 직전에 산에서 실족사했고 김태석도 6.25 전쟁 무렵에 행방불명되었으며 육군 중령으로 승진하면서 잘 나가는 듯 싶었던 노덕술마저 밀수에 가담한 것이 발각되어 군에서 파면당하고 내리막길을 걷다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고 불법 흥신소를 운영하면서 검사를 미행하다가 구속 등으로 굴욕을 당하면서 쓸쓸히 사망했고 신상묵도 불법 벌목 행위에 가담한 것이 발각되어 구속되기도 했다. 심지어 반민특위 해산 후에도 반세기 가까이 사업가로 잘먹고 잘살던 하판락마저 말년에 그에게 고문당했던 독립운동가 이광우의 일생을 바친 노력 덕분에 1990년대 말에 모든 악행이 폭로당하고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드러난 것은 이미 하판락이 누릴 건 다 누린 후였기에 사실상 별 의미는 없다.[15] 우익계 여성단체로, 당수가 초대 상공부 장관이자 후에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 되는 임영신이었다.[16] 다시 말하지만 1949년 기준으로 100만 원이다. 당시 원달러 실질환율이 '1달러=900원'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환율로는 1100달러, 2024년 가치로는 14432달러(약 1732만 원) 규모 사기인 셈이다. 당시 근로자들의 월평균 임금이 7000원(당시 환율로 약 7.8달러, 2024년 가치로 102.3달러) 안팎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근로자의 11년치 봉급 수준 사기였던 셈.[17] 그녀는 구속되는 순간에도 "나를 잡는 동기는 김상돈 위원장의 지령에 의한 것이냐. 어째서 이렇게 잔인무도한 짓을 하느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