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5 19:29:07

만보산사건 오보사건

일제강점기 화교배척폭동
1927년 화교배척사건 만보산사건 오보사건 1931년 화교배척사건 1931년 평양화교 학살

1. 개요2. 배경
2.1.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경쟁2.2. 조선일보의 성향과 상황
3. 호외 배포와 참여4. 결과5. 여담
5.1. 김이삼

1. 개요

일제강점기조선일보만보산 사건에 대해 조선인이 수 명 사망했다는 오보[1]를 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호외까지 날린 사건.

2. 배경

2.1.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경쟁

당시 조선에는 대표적인 두 언론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조선일보동아일보였다. 그리고 두 신문사는 경쟁 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런 경쟁 관계에서 서로 갈등을 겪기도 했다. 조선일보는 1925년 9월에 사설 '조선과 노국의 정치적관심' 때문에 무기정간을 당했다가 10월 15일에 해제됐다. 조건은 사설 집필에 직접 참여하지도 않은 사회주의자로 지목된 기자들을 면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일보에서 면직된 기자들은 9월 27일 조선일보사주 신석우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성명서를 동아일보에 실었다. 그 신문사는 당시 감정적으로 대립하고 있었고[2] 이런 관계에서 두 신문사에서 경쟁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민족 문제였다.

동아일보는 1928년 4월 1일부터 '글장님 없애기 운동'을 하였고 조선일보는 1929년 7월 14일부터 '귀향남녀학생 문자보급운동'을 시작했다. 동아일보는 1931년 여름 '브나로드 운동을 통한 문맹타파와 한글보급운동'을 대대적으로 시작하기도 했다.

두 언론사의 경쟁은 충무공의 묘소를 중심으로 일어나기도 하였다. 충무공 묘소 위토가 경매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동아일보는 충무공 유적 보존운동을 벌이면서 민족주의적 담론을 주도했다. 1930년 10월 3일부터 동아일보에 이윤재가 '성웅 이순신'을 43회 연재했고 1931년 6월 25일부터는 이광수가 장편소설 '이순신'을 연재했다. 당시 조선일보 주필이었던 안재홍 선생은 충무공의 생일만 되어도 그분에 대한 기사와 사진을 조선일보에 기재하였다. 그런데 동아일보가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담론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3]

만보산 사건 보도는 이 과정에서 나왔다.

이전에도 만주에서는 수전 개간을 둘러싼 충돌이 자주 일어났고 중국인과 조선인 사이에서 갈등이 다양하게 일어났다. 동북지역(만주)에서 중국인들이 조선인을 배척하거나 공격하는 일에 대한 보도는 1929년부터는 이미 자주 전해져서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4]

당시 조선일보는 김이삼(金利三)이라는 사람을 장춘 특파원으로 두고 있었다. 김이삼은 1920년 중반부터 장춘에 있으면서 재만 동포 관련 기사를 서울로 보낸 '재만동포문제 전문기자'였다. 1920년대부터 1931년 7월까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장춘에서 김이삼이 보낸 기사를 계속 실었다. 김이삼은 적어도 1927년 말까지는 동아일보 장춘지국 기자였고 기자연맹 통신원으로 활동했는데 언제부터 알 수 없으나 조선일보에서도 특파원을 하였다.[5]

김이삼은 장춘에서 '재만 조선인 문제 전문가'로 활동했고 '재만동포옹호동맹'을 비롯해 각종 사회운동단체에 지도적인 인물이였다.

만보산 사건 오보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장인 김기진의 증언에 따르면 김이삼은 김좌진 피살 사건(1930.1) 발생 당시 조선일보에 신속하고 정확히 기사를 보내 온 적이 있다. 그런 경험이 있어서 김이삼이 만보산 관련 기사를 보냈을 때 의심은 하긴 커녕 호외까지 냈다고 한다. 또 당시 김이삼은 1931년 4월부터 벌어지던 만보산 지역 사건 소식을 그때그때 조선일보에 보내 왔으며 만보산 삼성보 지역의 지도까지 그려가면서 경과를 설명하고 전망을 제시하는 기획기사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와중에 동아일보도 지속적으로 만보산 지역에서 벌어지던 일을 보도했고 제목부터 독자들을 자극하는 기획기사를 싣기도 했다. 1931년 6월 24일자 신문에는 강계 지국 기자인 오윤진이 쓴 기획기사를 실었는데 제목은 「전장 같은 만보산,부유같은 400생령(生靈)-중국 관현의 폭압 밑에 그 장래가 불안창검(槍劍)리(裏)에 안부는 여하」였다.[6]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관련 기사를 경쟁하듯이 실었다. 만보산 사건은 언론에서 계속 주목받던 사건이었다. 그러다 김이삼한테 대규모 충돌이 있었다는 소식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만보산사건 오보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민족담론과 관련해 경쟁했다는 점은 "별건곤"이나 "삼천리" 같은 잡지에서도 드러난다.[7] 더욱이 미국에서 발행되던 '신한민보'는 이 점을 좀 더 분명하게 따지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비판했다.
「재래 조선일보는 동아일보와 경쟁이 많았다. 전자 안창남 비행기 사건에 큰 감정을 맺었고 또 최근 이충무공 묘소 보존 문제도 앙앙한 가운데 홀연히 만보산 사건을 만나 큰 기회로 알고 떠들어 놓아 양국 민족 간에 대 불행을 끼쳤으니,이리로 보면 두 신문사의 경쟁이 안 씨 착오의 원인이라 한다. 동아일보는 이번 사건에 냉정한 태도를 가짐으로써 성망이 한층 더 높지만 그 성망이 능히 참극의 흘린 피를 씻을 가능이 없다 하면 당초 조선일보와 합치를 못한 것을 뉘우칠 일이라 한다. 오늘 우리 민족의 만사가 다 이러하니 당파열에 맑은 정신을 잃어버린 자는 경연히 깨달을 필요가 있다 한다. 김이삼의 사죄 성명은 왜놈의 참살을 받았으니 그는 죽어서 한국 귀신이 되리라 한다.」[8]

2.2. 조선일보의 성향과 상황

조선일보의 성격도 오보 사건의 원인 중 하나로 평가된다.

두 신문사는 정치적인 성격을 서로 달리했다. 동아일보의 김성수나 송진우는 1925년경부터 총독부 당국과 일정한 한도에 타협해서 조선의회 설치를 얻어내는 것이 "현실적"으로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인 홍명희, 안재홍, 신석우 등이 주동해 "진순한 민족당"을 만들어 대항하려고 했는데 그래서 1927년 2월에 결성된 것이 신간회였다. 신간회 결성을 주도한 안재홍, 신석우 등은 모두 조선일보 계통 사람들이다. 당시 신간회는 사회주의자까지도 포함해서 민족운동의 중심 조직이 됐다.

'현실적' 자치운동 추진과 대원칙론적 비타협주의가 대립하게 된 것이다.

신간회의 삼대강령 중 "우리는 기회주의 부인함"이 있다. 사실 원래는 다른 내용이었는데 총독부당국에 사전에 전한 원안에는 "타협주의를 부인함"이다.

동아일보는 1927년 2월 2~4일의 사설 "현하의 표면단체운동"에서 신간회를 세운 것을 "정면의 적에게 어부지리를 주는 졸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비난했다. ("정면의 적" = 일본 총독부)

조선일보는 '원칙론'적 입장에서 동족애를 따른 여론의 압력을 강조하고 동아일보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일본의 세력을 구조적으로 인식해 자제, 진정을 적극 강조했다. 민족운동에서 조선일보는 원칙론적 비타협주의, 동아일보는 현실의 구조적 인식을 내세웠다. 두 신문사의 태도에는 이런 방식이 반영됐다.[9]

사회주의자 사이의 갈등도 한 원인이 됐을 수 있다. 당시 조선일보의 비타협적 민족주의는 신간회 해소(1931.5.16) 문제로 사회주의자와 대립하기도 했다. 실제로 조선일보는 1931년 7월 4일에 사회주의 진영을 겨냥한 사설을 싣기도 했다.[10]

3. 호외 배포와 참여

조선일보 본사에서는 7월 2일 오후 9시 전후 인천 지국장 최진하(崔晋夏)에게 만보산 사건 관련 호외를 보냈으니 배포하라고 통보했다. 호외는 11시 50분 인천에 도착했고 조선일보는 곧바로 호회 300~320~350매를 배포했다. 7월 3일 새벽 2시부터 화교에 대한 공격이 시작됐다.[11]

조선일보 인천지국장 최진하(崔晋夏)는 『이미 경성 본사에서 경찰의 허가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본사의 지시가 있어서 그런 큰 사건이 일어날 것으로는 생각하지 못하고 배달시켰다.』고 말했다.[12] 실제로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에서는 조선에서 발행되던 신문에 대한 검열을 맡고 있었고 조선일보 호외도 마찬가지였다.[13]

인천에서 화교배척사건이 일어났을 때 조선일보는 과격한 시위는 반대했으나 재만동포 옹호운동은 정당하다고 보도했다. 화교배척이 평양에서까지 일어나고 과도한 살상이 일어나자 과격한 시위를 중단할 것을 호소했지만 재만동포 옹호의 정당성은 여전히 강조했다.[14]

사법처리를 받은 조선인 중 신문기자는 7명이었는데 그 중 5명이 조선일보 기자였다.[15]

최진하는 7월 4일 오후 8시 반경부터 군중에 가담했고 시위 중 최삼성(崔三成), 금형원(金炯源), 백창현(白昌鉉), 최동규(崔東珪), 김용백(金容白), 김맹렬(金孟烈) 같은 학생들과 만났다. 거기서 최진하는 '경찰당국이 너무 중국인을 보호하고, 조선인에게 압박을 가한 것이 원이니 중국인의 집에 돌을 던지지말고 경찰관에게 돌을 던저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오늘밤부터 다음날까리 계속하여 폭행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하면서 선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인천 화교 공격에 직접 가담해서 체포된 인물 중에는 전명준(田明俊)이란 사람이 있는데 전명준은 인천 신간지회 간부였으며 좌익 계열인 권충일(權忠一)과도 관련이 있었다.[16]

평양 부근 한천에선 흑우회 간부 전창섭(全昌涉)이 다른 사람들과 공모해서 자유노동조합과 한천 청년회원들에게 시위를 벌이게 했다. 전창섭 역시 조선일보 한천지국장이었다.[17]

4. 결과

이 사건을 계기로 1931년 화교배척사건이 일어났다.

5. 여담

5.1. 김이삼

한국에 최초로 오보(誤報)를 전했던 조선일보 장춘지국장(長春支局長) 김이삼(金利三)은 독립운동 진영에게 밀정 혐의를 받아 7월 15일 길림에서 사살됐다고 한다.[18] 그러나 길림한교만보산사건토구위원회(吉林韓僑萬寶山事件討究委員會)라는 단체는 다른 주장을 했는네 김이삼을 죽인 건 일본이란 주장이었다. 7월 15일 상오 12시에 영사관 한인 순사인 박창하와 다른 한 수명을 파견해서 원동여관에 묵고 있던 김이삼에게 총을 7, 8발 쏴서 죽였다는 주장이었다.[19] 또 일부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김이삼은 일본의 지시를 받고 일부러 오보를 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을 증명할 근거는 없다. 김이삼은 죽기 전 신문에 사죄서(謝罪書)를 올렸는데 거기에도 일본에 대한 언급이 없다. 또 김이삼이 죽은 건 김이삼 자신이 자살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20] 김이삼이 죽은 이유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1] 실제로는 사망자는 없었다.[2] 민두기, 萬寶山事件(1931)과 韓國言論의 對應- 相異한 民族主義的視角, 동양사학연구 65, 1999.1, 169~170[3] 이상경, 1931년의 ‘배화(排華)사건’과 민족주의 담론, 만주연구 11, 2011.6, 95~96[4] 김승욱, 20세기 초(1910~1931) 인천 화교의 이주 네트워크와 사회적 공간, 중국근현대사연구 47, 2010.9, 41; 이상경, 1931년의 ‘배화(排華)사건’과 민족주의 담론, 만주연구 11, 2011.6, 88)[5] 동아일보 장춘지국장이면서도 X지 지국장까지 했다는 증언이 있는데 이 X지가 조선일보로 추측된다.[6] 이상경, 1931년의 ‘배화(排華)사건’과 민족주의 담론, 만주연구 11, 2011.6, 93~94[7] 이상경, 1931년의 ‘배화(排華)사건’과 민족주의 담론, 만주연구 11, 2011.6, 95~96[8] 거북선,「평지 풍파를 일으킨 만보산 사건의 배경, 조선일보 특파원 김이삼의 사죄 =김이삼은 유혹에서 참살로 결과」 신한민보」,1931.8.20., 이상경, 1931년의 ‘배화(排華)사건’과 민족주의 담론, 만주연구 11, 2011.6, 96~97에서 재인용[9] 민두기, 萬寶山事件(1931)과 韓國言論의 對應- 相異한 民族主義的視角, 동양사학연구 65, 1999.1, 170~171[10] 이상경, 1931년의 ‘배화(排華)사건’과 민족주의 담론, 만주연구 11, 2011.6, 97~98[11] 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01쪽; 박정현, 1931년 화교배척사건과 조선 민족주의운동,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244~245[12] 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12쪽[13] 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12~313쪽[14] 박정현, 1931년 화교배척사건과 조선 민족주의운동,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259쪽[15] 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19쪽[16] 박정현, 1931년 화교배척사건과 조선 민족주의운동,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246[17] 박정현, 1931년 화교배척사건과 조선 민족주의운동,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247[18]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14[19]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22[20] 석사학위논문 - 최효명, 만보산사건(1931) 직후 화교배척사건과 배일운동의 성격, 2015,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