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윈난육군강무학교(雲南陸軍講武學校)는 1909년 세워진 청나라 및 중화민국 전계군벌의 사관학교이다. 소재지는 윈난성의 성도인 쿤밍시이다.2. 역사
2.1. 윈난육군강무학교
19세기 말 청나라에는 천진무비학당을 비롯한 소수의 군사학교들만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가 군제를 개편하면서 기존의 군사학교들만으로는 장교 수급이 쉽지 않자, 각 성마다 군사학교들을 세워 장교를 양성하게 하였다.청일전쟁 패전 몇 년 후부터 1904년까지 정식 사관학교인 무비학당이 일반적으로 성마다 1개씩 총 20곳이 개교하였다. 1904년에는 그동안 비체계적이었던 군사학교들의 체계를 정립하여 육군소학당-육군중학당-병관학당-육군대학당으로 이어지는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훗날 이는 본 문서에서 설명하는 윈난강무학교, 국민당의 황포군관학교와 함께 민국시대 주요 군관들을 양성하게 되는 바오딩군관학교로 이어진다.
한편 1904년부터는 무비학당들 외에도 속성 과정의 군사학교들로 분류되는 속성학당과 강무당, 학병영들 역시 각 성마다 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이 중 강무당들은 일반적으로 4개월 과정이었다. 때마침 윈난성에는 전계군벌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제19진이 설치되었는데 그 장교양성기관으로 개교한 것이 바로 윈난강무당, 즉 윈난육군강무학교였다.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이 개국하자 각 군사학교의 명칭이 강무당에서 강무학교로 전환됨에 따라 윈난강무당 역시 윈난육군강무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창설일은 1909년 9월 28일이었다. 주요 교관진들은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이들로 구성되었으며 이 중에서는 중국동맹회 가입자들로서 쑨원이 파견한 이들이 다수 존재했다.
본교는 중국 혁명사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교관으로 복무했던 차이어와 그 제자들이 윈난에서 혁명에 호응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한편 1924년에 국민당의 황포군관학교가 광저우에서 문을 열자 윈난강무학교의 교관들 다수가 파견되어 황포의 창설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국민혁명 이후 전 중국을 통일한 장제스는 1928년부로 지방 군벌들의 장교 수급처였던 각 성의 독립 사관학교들을 전부 폐쇄하고 중앙육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 예하로 귀속시켰다. 윈난강무학교 역시 1934년부로 중앙육군군관학교 제5분교로 개칭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인 1945년 9월까지 운영되다 폐교되었다.
2.2. 윈난항공학교
한편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탕지야오는 발전하는 항공력에 주목하여 관련 인재들을 수급하기 위해 윈난항공학교를 창설한다. 1922년, 현 쿤밍 우자바 국제공항 부지에 설립된 항공학교는 3명의 1차 대전 참전용사 출신의 프랑스인 교관과[1] 강무학교 17기 출신의 교관들이 주가 되어 운영되었다. 1937년 폐교되었다.3. 학제
3.1. 육군강무학교 학제
학제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매우 엄격하였다. 매일 6시간의 수업을 받고 2시간의 조과(操課)를 해야 했으며 저녁에는 야간자율학습을 실시했다. 또한 아침에는 체조와 러닝을 비롯한 체력단련을 실시하고 저녁에는 수시로 긴급집합을 걸어 생도들을 훈련시켰다.학과는 보병, 포병, 기병, 그리고 공병의 4개 병과로 나뉘었으나 학과를 선택하기 전에 보병교육은 기본으로 받았다. 군사 관련 과목으로는 군사학과 지리학, 축성학, 그리고 경리학 등이 있었으며 군사학 수업의 세부 과목으로 전술학과 병기학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일반 과목들 역시 가르쳤는데 주로 대수학과 영어, 일본어와 프랑스어 및 국문, 삼각법, 기하학 등이었다.
커리큘럼은 크게 갑(甲), 을(乙), 병(丙), 그리고 특수반 네 개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갑과 을반은 속성과정으로서 1년의 교육을 받고 임관하였으나 특수반은 2년 반, 병반은 3년간 교육을 받았다. 그만큼 제공되는 교육의 종류도 다양하고 수업의 질도 여타 강무학교들보다 높았다. 가령 김홍일이 졸업한 구이저우 강무학교의 경우 6개월의 입오생 과정을[2] 제외하더라도 본 수업 기간은 1년에 불과하였으나 윈난강무학교는 최장 3년간 군사학을 익힐 수 있었기에 이곳을 거쳐 배출되는 생도들의 수준은 타 학교 출신자들에 비해 매우 높았다.
속성과인 갑과 을반의 경우 군사학 수업을 위주로 교육받았으나 특별반과 병반은 일반교양 교육 역시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게 배웠다. 이는 갑과 을반의 경우 문화 수준이 비교적 높거나 생원 출신 또는 소정의 시험 합격자들을 대상으로 하였으나 병반은 그 외 무비학당 및 중등학당 출신자들이 주가 되었기 때문이다.
3.2. 항공학교 학제
윈난항공학교의 가장 특징적인 점이라면 바로 남녀공학이었다는 점이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대다수의 군사학교들은 남학교였고 여성의 입교는 금지되었으나, 탕지야오의 파격적인 결정으로 인해 여성 생도들 역시 선진기술인 조종술을 배우기 위해 윈난으로 몰려들었다.커리큘럼은 비행과와 기계과 둘로 나뉘었으며, 수업으로는 수영과 기계 제작, 목공, 발전기 실습, 군용 기계 정비, 엔진시험 실습, 그리고 가장 중요한 비행 실습 등이 있었다. 특이사항으로는 자전거를 통한 훈련이 중시되었는데, 항공기 댓수가 몇 없는 상황에서 지상에서 항공 기동과 편대 운용을 실습하기 위하여 자전거로 대체한 것이다.
4. 동문
우수한 커리큘럼에 미루어 알 수 있듯, 윈난육군강무학교의 졸업생들은 다수가 중국과 동아시아의 주요 군사지도자들로 성장하였다. 대표적으로 국민혁명군 일급상장 주페이더와 중국 인민해방군 원수 주더와 예젠잉이 이곳을 졸업하였다. 한국과 베트남 생도들도 여럿 유학을 왔는데 한국인 생도들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설명한다.4.1. 한국인 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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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와 뤄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은 엄밀히 말해 중국 국민혁명군 군사학교들의 부속기관이었으나, 교관진 등 운영위원들과 교과과정은 한국인들의 손으로 운영됨. ※ 일본육사 출신 독립운동가들은 주로 국치 이전 대한제국군의 장교로서 유학하여 일본육사에서 수학한 이들임. ※ 생시르, 구이저우, 버지니아 군사대학의 입교자는 각각 1명씩, 즉 이위종, 김홍일, 이복원임. |
▲ 생도복을 입고 있는 김종진. 금장에 윈난을 뜻하는 '云'(운남의 '雲'의 약자)와 기수를 나타내는 숫자 16이 같이 쓰여 있다.
한국인 생도들은 신규식 선생의 노력을 통하여 1918년부터 본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신규식은 우선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사 자격으로 쑨원에게 국서를 전달하여 한국인들의 중국 군관학교 입학 허가를 받아냈다. 그리고 친분이 있던 탕지야오와 만나 한국인 생도들의 윈난강무학교 입교를 약속받았다. 한국독립운동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탕지야오는 신규식에게 "한국의 군관들을 최소 두 개 사단 규모로 길러내겠다."고 화답했다.
이후 한국인 생도들은 쑨원으로부터 학비를 제공받으며 윈난육군강무학교를 비롯한 각종 군사학교들에 입학할 수 있었다. 최초의 유학생들은 12기부터 입교를 시작하였다. 한국인 생도의 총 숫자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제주대학교 배숙희 교수는 이 중 총 16명의 신원을 확인하였다. 입교하려는 한국인 생도들은 신규식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추천장을 들고 다양한 지역을 거쳐 윈난으로 들어왔다.
김종진과 이범석 모두 상하이 조계에서 배편으로 출발하여 광저우나 영국령 홍콩을 경유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하노이로 간 후, 그곳에서부터는 육로로 국경도시 라오카이를 지나 국경을 넘어 윈난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탕지야오에게 신규식의 추천서를 제시한 후 입학했다. 가는 데만 총 2달 가량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일본이 문제삼는 것을 피하기 위해 대부분 가명을 사용하고 본적 역시 지린성으로 위장했다. 주소지는 대부분이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로 적었다.
이하 서술하는 한국인 생도들은 훗날 노선에 따라 대한민국과 북한으로 갈라졌으며, 김세준과 김훈 같이 귀국하지 못하거나 해방 전에 전사 또는 암살된 이들 역시 존재한다.
4.1.1. 12기(1917)
- 이범석 - 기병과. 북로군정서 간부, 훗날의 한국광복군 참모장, 대한민국 국방부장관 겸 국무총리
- 김세준 - 포병과. 국민위원회 대표위원, 다물단 요원, 국민혁명군 180사[3] 사단 참모장
- 배천택 - 포병과. 다물단 간부, 민족혁명당원, 선무공작가
- 최진 - 보병과. 행적 불명
- 김정 - 보병과. 행적 불명
4.1.2. 15기
가장 많은 한국인 생도들이 입교했다고 알려져 있는 기수이나, 그들에 대해서는 거의 정보가 존재하지 않는다.4.1.3. 16기(1922)
- 김훈 - 보병과. 북로군정서 간부, 황포군관학교 집중훈련처 주임, 중국공산당 홍군 75사 참모장.
- 김종진 - 보병과.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간부.
- 최용건 - 보병과. 황포군관학교 교관, 북한 민족보위상(국방장관)
- 안경근 - 학과 불명. 정의부 군사위원, 황포군관학교 교관, 뤄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교관, 김구의 측근,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상무위원, 경상북도 민족통일연맹 위원장
4.1.4. 17기(1923)
- 문일민 - 보병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광복회 부회장
- 김형동 - 기병과. 북로군정서 단원, 철혈단 단장, 광복군 예비대대 총사령
- 이검운 - 포병과. 펑위샹 국민군 제2군 교도단 교관, 황포군관학교 교관, 의열단원.
4.1.5. 18기(1926)
- 한철 - 보병과. 의열단원.
4.1.6. 19기(1928)
- 추건 - 보병과. 독립운동을 하였으나 정확한 행적은 불명. 국민혁명군 장교로 복무 중 일본에 체포됨
4.1.7. 기수 불명
- 이준식[4] - 국민부 군사위원장, 조선혁명군 참모장, 한국군인회장,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 육군사관학교 8대 교장, 제3보병사단장, 제1군단 부사령관, 제5관구사령관, 재향군인회장
- 김관오 - 한국독립당 충칭지구당 위원장, 임시정부 경무국장,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고급참모, 육군 105노무사단장, 독립동지회 상무위원장
4.1.8. 항공학교 1기(1922)
- 권기옥 - 펑위샹 서북군 항공대원, 항저우 중앙항공학교 교관, 중국 육군참모학교 교수,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군설계위원, 대한민국 국회 국방전문위원
- 장지일 - 행적 불명
- 이영무 - 국민혁명군 공군 장교, 초대 대한민국 공군비행단장
5. 기타
- 보응우옌잡이 윈난강무학교를 나왔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6. 출처
- 中國 雲南陸軍講武堂與韓籍學員-以『同學錄』的分析爲中心
- 일제 침략기 한국인의 중국 군관학교 교육과 그 의의
- 淸末 육군학당 교육의 발흥
- 풍옥상과 한국독립운동
- 독립운동인명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