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륙풍 소비에트 지도자 | ||
본명 | 펑한유(彭漢育, 팽한육) | |
한문 | 彭湃 | |
한국식 독음 | 팽배 | |
영문 | Peng Pai | |
출생 | 1896년 10월 22일 청나라 광동성 해풍현 | |
사망 | 1929년 8월 30일 중화민국 상하이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
학력 |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 | |
직업 | 정치가 | |
종교 | 무신론 |
1. 개요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가. 국민혁명에 참여하였으며 국공결렬 이후 해륙풍 소비에트를 건설하여 광동성의 농민운동을 전개했으나 국민정부에게 진압당하고 처형당했다.2. 생애
2.1. 초기 이력
1896년, 광동성 해풍현에서 대지주와 노비로 팔려온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펑파이의 집안은 매년 소작료 1600석, 고리대 이자 400석을 걷을 정도로 부유했으며 잡화점, 목재소 등을 경영하며 17~18명의 고용인을 거느렸다. 펑파이는 1909년, 해풍 제일고등소학교에 입학하면서 신학문을 접하게 되었고 1912년, 차이샤오핑(蔡小屏, 채소병)과 결혼한 후 결혼하자마자 부인의 전족을 풀어주고 같이 손을 잡고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신지식을 가르칠 정도로 깨인 인물이 되었다. 게다가 팔려온 어머니로부터 어릴 때부터 농민들의 고충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해풍현의 명가들을 방문해도 즐거워하지 않는 등 가난한 농민들에 대한 동정적인 입장을 취했다.1913년, 펑파이는 해풍중학교에 입학했다. 펑파이는 <육안자치보>를 발간하는 한편 해풍중학에 신사, 지주층의 입맛에 맞는 봉건교사를 임명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하는 반봉건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군진회(群進會)를 조직하여 민주혁명, 사회정치학설 선전, 신서적 보급운동을 벌였다. 1915년, 일본 측의 굴욕적인 21개조 요구가 이에 항의하는 기념대회를 조직하였고 광동독군 용제광의 부하인 해풍 주둔통령 임건재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동상을 만들자 이를 훼손하며 군벌에 항의하였다.
2.2. 일본 유학과 배일운동
1917년, 펑파이는 해풍에서는 충분한 지식을 습득하기 어렵다고 여기고 광저우로 떠나 광저우 중학교에 입학하여 몇달간 수학하였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학구열을 충족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그해 여름에 도일한 펑파이는 일본의 국수주의와 혐중 인종차별에 충격을 받고 <구국회>를 조직, 배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18년 5월, 돤치루이 내각이 일본 제국과 <중일육군공동방적군사협정>을 체결하자 격분하여 비밀 회의를 개최하였는데 도쿄의 중국 음식점에서 회의 도중 일본 경찰의 공격으로 구타당해 부상을 입게 되었다. 펑파이는 이에 항의하여 5월 13일, 귀국해버렸다. 그리고 광저우에서 구국회 광저우 분회 사무소를 설치하고 <유일광동학생동향회 선언서(留日廣東學生同鄕會宣言書)>를 발간하였다."중일조약은 우리나라 영토를 일본에게 주는 망국 조약이다. 큰 화가 머리 위에 닥쳤고 큰 걱정이 눈앞에 있다. (...) 모두 열심히 외치고 몸과 모든 지식을 바쳐 조약을 깨고 망국에서 중국을 구하려고 한다."
유일광동학생동향회 선언서
유일광동학생동향회 선언서
이후 고향인 해풍현으로 돌아가 배일운동을 전개하던 펑파이는 북양정부의 유학 재개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돌아가야 1918년 가을,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였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산동반도에 대한 중국의 주권이 부정되자 펑파이는 도쿄에서 열린 5.7국치일 기념대회에 참가하였다. 일본 경찰은 이를 잔인하게 진압했는데 펑파이는 체포는 되지 않았으나 부상을 입었고 정부가 정신을 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민중을 자각하여 혁명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초기에는 그 혁명의 수단으로 기독교 정신에 관심을 가지고 기독교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으나 열강에 대한 분노 때문에 사회주의로 전향하게 된다.
1919년 9월, 펑파이는 와세다대학의 사회주의 연구단체인 <건설자동맹>에 가입하였다. 건설자동맹은 생디칼리즘, 무정부주의, 길드사회주의, 소비에트 등을 연구, 학습, 토론하였고 특히 일본 통촌 문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펑파이는 이들의 주장에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20년 11월, 펑파이는 여러 유학생들과 함께 <적심사>를 조직했으며 이어 국제 사회주의 단체인 <우주사(宇宙社)>에 가입하였고 다시 일본의 공산주의 소조에 가입했다. 그의 공산주의 성향은 도쿄제국대학 사회주의 강연을 청강하면서 더욱 심화되었고 일본 경찰의 요주의 대상에 등록되었다.
2.3. 귀국과 농촌 혁명운동
1921년 5월, 펑파이는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 졸업고사를 치르고 졸업논문을 치른 후 어머니의 간호를 위해 졸업식을 건너뛰고 귀국하여 해풍현 교육국장에 취임하였다. 펑파이는 귀국과 즉시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하였으며 고향인 해풍에서 교육혁명운동을 전개했다. 펑파이는 사회주의 청년사를 조직하고 리다자오,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저서 등을 보급, 학습, 토론하였다. 또한 펑파이는 <노동자동정회(勞動者同情會)>를 조직하고 해풍현 학생연합총회 기관지 <신해풍>에 마르크스주의 선전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노동자와 농민들은 펑파이의 운동에 거의 동조하지 않았고 해풍의 신사들의 반발만 사서 결국 1922년 5월 9일, 펑파이는 해풍현 교육국장에서 파면되었다.교육국장에서 파면된 후 펑파이는 1922년 6월, 농촌으로 들어가 뜻이 맞는 농촌청년들과 농회를 조직, 농민들에 대한 교육과 조직공작을 시작하였다. 허나 조직의 도움 없이 홀로 한 운동이라서 난항을 겪었다. 농민들은 양복을 입고 어려운 말을 떠드는 펑파이를 매우 경계하였다. 펑파이의 기록에 따르면, 펑파이는 소작료를 거두러 온 사람이나 징병을 하러 온 사람으로 오해받았고 어떤 사람은 버럭 화를 내면서 팽씨 가문이 자신들에게 소작료를 강요하는 이상 팽씨 가문 출신인 당신조차 믿을 수 없다고도 하였다. 여기에 팽씨 집안은 펑파이를 완전한 이단아로 간주하게 되어 특히 맏형은 펑파이를 죽이려고까지 했으며 그나마 다른 두 형제와 펑파이의 부인만이 그를 옹호하였다. 결국 펑파이는 이런 상황에서는 농민들에게 자신들의 진심을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토지문서를 불태우고 모든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준 후 기존의 어려운 강연을 버리고 농민들이 즐거워할만한 마술쇼, 음악회를 통해 농민들의 흥미를 끈 다음에 이들에게 농회에 가입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펑파이의 노력으로 처음에는 그를 경계하고 기피하던 농민들도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그의 농회는 1922년 10월까지 회원이 500명으로 증가하였고 1922년 12월에 5천명, 1월에 1만명으로 폭증했다. 농회는 1924년에 절정을 달려 4만명의 회원을 확보하게 된다.
1923년 태풍으로 해풍현의 농작물이 큰 피해를 입자 농민과 지주 사이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고 농회는 소작료의 70%를 인하해달라는 운동을 벌였다. 이에 8월 16일, 해풍현장 왕작신이 군대를 동원해 농회본부를 점령하고 농회간부 25명을 체포했다. 펑파이는 광동성을 지배하던 군벌 천중밍에게 농회 지도자의 석방과 농회 회복을 청원했다. 천중밍은 펑파이를 높이 평가하며 농회 지도자들을 석방할 것을 지시했으나 지주와 신사층의 압박으로 결국 농회를 완전히 분쇄하게 되었고 펑파이는 광저우로 망명하였다.
2.4. 국민혁명 참여
펑파이가 광저우로 망명했던 1924년은 1차 국공합작이 성립된 직후였다. 1차 전국대표대회 이후 국민당 산하에는 중앙농민부가 설치되었는데 농민운동 전문가의 부재로 제대로 된 활동이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농회 지도자 펑파이의 망명은 대단한 환영을 받았고 펑파이는 탄핑샨의 추천으로 농민부 비서에 임명되어 실질적인 농민부의 수장으로 활동했다. 펑파이는 농민부 비서로 재직하면서 농민운동강습소를 개설하고 강습소의 초대와 5대 주임을 맡아 학생들을 지도하였는데 그의 후임 중에는 마오쩌둥도 있었다. 또한 국민당의 지원을 얻어 광동의 농촌에 농회를 설치하여 농민들의 쟁의권을 보장했으며 1924년 광저우 상단 사건이 발생하자 강습소 2기 학생 200명을 광동농민자위군으로 편성하여 상단군과 교전하였다. 펑파이의 중국공산당 입당 시점은 다소 불명확한데 1921년 가입설도 있으나 1924년 가입설이 주설로 자리잡은 상태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농민 문제를 하찮은 문제로 간주하고 니콜라이 부하린으로부터 정책의 핵심 사안은 농촌 문제라는 교시가 내려오기 전까지는 신경쓰지 않았다. 당시 펑파이의 거의 유일한 동지는 호남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마오쩌둥 정도였다.1925년 국민당의 1차 동정이 거행되자 이에 참가하여 농민들을 무장시켜 국민혁명군의 원정을 도왔고 1925년 객군 반란을 진압한 후 강경하게 국민당의 2차 동정을 주장하여 10월에 고향인 해풍현을 점령하였다. 해풍현에서 펑파이는 이오감조, 농만자위군 조직 등을 주도하였고 악질지주, 신사를 조사하고 처벌하였다. 그리고 아편, 축첩, 뇌물, 지주에 대한 선물을 금지하고 도로개수, 경찰정비 등 개혁조치를 행했다. 그리고 1926년에 들어 40감조를 실시하여 이오감조 때보다도 소작료를 인하하였다. 하지만 농민운동이 과격화되면서 현정부는 유명무실해지고 농민들이 관리나 지주를 구타하고 불법행위를 자행하는 등의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국 공산당은 국공합작을 위해 국민정부에 복종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펑파이는 이를 무시하고 정치투쟁을 계속하였다. 이 반발한 우익 민병대가 농회를 공격하는 등 좌우파 갈등이 심각해졌고 펑파이는 이 때문에 차차 국민당과 국민정부에 대한 불만을 키워나갔다.
1925년 11월, 펑파이는 중국 국민당 광동성당부 농민부장에 임명되었는데 쑨원 사후 국민당의 좌우파 갈등은 더욱 격렬해져서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서산회의 개최, 중산함 사건으로 폭발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광동성 각지에서 농민운동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는데 중공중앙은 농민운동의 좌경화를 비판하면서 토지혁명의 유보를 지시하였다. 하지만 펑파이는 중앙의 지시에 반대하면서 농민문제 해결을 위한 토지개혁을 주장하였다. 1926년 11월, 중국 공산당은 농민운동위원회를 조직하고 펑파이, 마오쩌둥 등에게 농민 운동을 전개하도록 지시했다. 1927년 3월, 펑파이는 우한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5전대회에 참석하여 마오쩌둥과 의견을 교환하였고 5전대회에서 마오쩌둥, 펑파이는 강경한 토지혁명론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월 30일, 중국 공산당은 상악감예 4성연성 농민회의를 개최하고 펑파이를 중화전국농민협회 임시집행위원회 집행위원으로 선출했다. 그 직후, 4.12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하였고 이어 광동군벌 리지선의 주도로 4.15 광저우 쿠데타가 일어나 공산당원들이 대대적으로 살해되고 농민 협회가 해산당했다. 중국 공산당 광동위원회는 펑파이, 양스훈, 장산밍 등 7명에게 동강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동강의 당정군 사업을 영도하도록 하였다. 펑파이는 4월에 형 펑한위안(彭漢垣, 팽한원)을 해풍현에 파견하여 1차 폭동을 조직하였으며 7월, 광동성의 여러 농촌에서 2차 무장폭동을 조직했다. 중국 공산당은 반혁명파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니 추가적인 폭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실질적으론 소득을 얻진 못했다.
이어 7월 국공결렬이 일어나면서 국공합작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펑파이는 1927년 7월 27일 전적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어 허룽, 예팅, 주더 등과 함께 난창 폭동에 참여하였으나 국부군의 반격으로 패퇴하여 예팅과 함께 육풍현으로 퇴각해야 했다. 이후 8.7 긴급회의에서 중국 공산당 임시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긴급회의 후인 10월 30일, 펑파이는 <토지혁명>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다음과 같은 혁명강령을 제시하였다.
- 1. 토호, 열신, 대지주, 탐관오리 및 군벌을 정화할 것.
- 2. 노농계급을 무장하여 훈련된 군대를 확대하며 토지혁명의 승리를 보장할 것.
- 3. 일체의 토지를 농민과 혁명군의 가정에 분배하여 경작하게 할 것.
- 4. 일체의 토지계약서, 채권을 불태워 버릴 것.
- 5. 일체의 정권은 모두 공농병 대표대회에 귀속시킬 것.
2.5. 해륙풍 소비에트
"일체의 토지를 지주가 강점하여 사유화하였는데 (...) 농민은 연연세세(年年世世) 고생하여 좋은 곡식을 지주집에 보내고 자신의 부모자식은 기아선상에서 헤매이고 있다."
1927년 10월 30일, 펑파이의 논문 <토지혁명>
1927년 10월 30일, 펑파이의 논문 <토지혁명>
난창 폭동의 실패 이후 중국 공산당 총서기 취추바이는 추가적인 폭동을 조직할 것을 지시했고 이에 따라 각지의 공산당원은 추수폭동을 일으켰다. 중국 공산당 동강특위는 전술한 바와 같이 펑파이를 중심으로 해륙풍 지역에서 2차례 폭동을 조직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10월 30일, 난창 폭동에 동원되었던 잔여 부대와 농민들로 조직한 노농혁명군 제2사단을 동원, 3차 폭동을 일으켜 해륙풍 지역과 후이양, 쯔진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펑파이는 동강 특별위원회 서기 겸 광동성위원회 특파원의 자격으로 11월 중순, 해륙풍 지역에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하였다. 또한 산웨이, 가오탄 등지에도 구급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고 토지혁명을 실시하였다. 11월 13일, 펑파이는 육풍현에서 노농병대표대회를 개최하여 토지몰수안을 통과시키고 1928년 1월 14일까지 해풍현에서만 지주의 땅문서 4만 7118장, 지대 장부 5만 8027권을 압수하여 소각했다. 2월까지 펑파이는 해풍의 토지 80%, 육풍의 토지 40%를 몰수하였다. 허나 이 토지개혁은 매우 과격한 성격이라서 지주가 아니라 부농, 중농의 토지도 닥치는 대로 압수하였고 자본가와 지주들을 박멸할 것을 주장하여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많은 원성을 사서 공산당으로부터도 좌경 오류를 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펑파이는 해륙풍 소비에트에 최소 4만명의 반혁명분자가 숨어 있으니 이들을 모두 찾아내어 죽이지 않으면 국민혁명군에 내응하여 자신들을 학살할 것이라면서 소비에트 휘하의 적위군에게 반혁명분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지시했다. 이러한 숙청 사업은 사형집행원들에게 은 2원을 지급하면서 매우 적극적으로 실시되었고 역시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는데 훗날 마오쩌둥이 일으킨 부전사변과 정풍운동,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떼죽음 당한 민생단 사건이 유사사례를 본다면 무고한 인명도 무수히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펑파이는 토지 매매를 일절 금지하고 자작농의 토지도 모조리 압수하여 소지주들의 불만을 샀다. 한국인 공산주의자 김산도 이 시기의 모습을 아리랑을 통해 숙청이 가혹했다고 회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상품의 유통을 담당하던 지주와 상인들을 쓸어버렸으니 해륙풍 소비에트의 경제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물자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펑파이는 국민당의 반격에 대하여 군중을 동원하여 대부대와는 결전을 피하고 소부대는 급습하며 지형과 청야작전을 이용한 방어전을 실시하겠다는 계획을 짰지만 정권기반은 취약하였고 군사력은 빈약했으며 해륙풍 소비에트 지도부의 군사 지휘력이 형편없이 자신들이 입안한 작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1928년 2월 28일, 국민혁명군의 총반격이 실시되자 해륙풍 소비에트는 수립 1년 남짓만에 붕괴되었다. 펑파이는 임시당중앙이 위치한 상하이로 도주했다.
2.6. 최후
1928년 6월 18일부터 7월 1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샹중파, 쑤자오정, 저우언라이, 리리싼, 장궈타오, 취추바이 등 23명과 함께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이어 열린 중국 공산당 6기 1중전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펑파이는 중앙농업위원회 서기 겸 강소성 군사위원회 서기 등을 맡았다. 1928년 11월 정치국회의에서 리리싼, 양인과 함께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였다.하지만 1929년 8월 30일, 비서였던 바이신(白鑫, 백흠)의 배신으로 상하이 공공조계지에서 체포되었으며 국민정부로 신병이 인도되었다. 저우언라이가 영도하고 있던 중공중앙은 펑파이의 구출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펑파이는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총살당했다. 저우언라이는 구슌장(顾顺章, 구순장)에게 지시하여 바이신을 처단함으로 펑파이의 복수를 하였다.[1]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중공은 펑파이를 혁명열사로 추서하였다.
3. 기타
아내가 2명이었고 아들 셋을 두었다. 장남 펑장런은 국민당의 감옥에서 고문을 당했고 공산당 요원들이 겨우 구출했지만 10세에 사망했다. 2남 펑스루는 원자력발전 전문가로서 중국공정원 원사이다. 3남 펑홍은 하이펑현 현장을 지냈다.4. 참고문헌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레빈, 민음사.
-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彭湃와 海陸豊 農民運動(1922-1928), 김문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팽배와 해륙풍 농민운동(1922~1928), 김문희, 역사와경계 31권, 경남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