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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면수

파일:송면수.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없음
출생 1910년 3월 14일
강원도 회양군 난곡현(蘭谷縣) 219
사망 1950년 8월 10일
풍기지구
학력 중산대학
뤄양중앙군관학교 제1총대 통신병과 제 18기 [1]
경력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한국청년전지공작대
한국광복군 제 2지대 정훈조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부 통운과장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중앙상무위원 선전부장
OSS 독수리작전 국내정진군 황해도지방 반장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2묘역-1060호[2]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1992)


1. 개요2. 생애3. 독립운동4. 광복 이후5. 여담6.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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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초대 육군 정훈국장.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2. 생애

1910년 3월 14일 강원도(江原道) 회양군(淮陽郡) 난곡현(蘭谷縣)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김붕준(金朋濬)의 사위이며 아내 김효숙(金孝淑)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애국부인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3. 독립운동

1930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상하이로 건너가기 직전인 1929년 8월 16일부터 10월 11일까지 동아일보 회양지국에서 사진반 기자로 활동하였다.

193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에서는 분열된 여러 세력을 통합해 독립운동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통합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 결과 그 해 7월 5일 난징(南京)에서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대한인독립당(朝鮮革命黨)이 연합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 조직되었다. 이와 함께 화서지부(華西支部)와 낙양구(洛陽區)를, 그리고 화동지부(華東支部)와 천진구(天津區), 북평구(北平區), 화남지부(華南支部) 등을 설립하였다. 동시에 중앙위원 겸 조사부장 강창제(姜昌濟)를 파견하여 화남지부와 광둥구를 결성하였고, 이때 이경산(李景山)과 함께 화남지부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 광저우(廣州)의 중산대학(中山大學) 법학원에 입학하였다.

1920년대 후반 중국 광저우는 중국 혁명의 중심지로 여러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광저우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아울러 당시 중산대학은 임시정부의 보증과 추천을 통해 입학시험, 학력 증명 절차를 생략하고 입학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한인들이 입학하였다. 따라서 임시정부의 화남지부 중앙집행위원이라는 신분으로 중산대학에 입학하여 수학할 수 있었다.

1937년 7월 1일 중산대학을 졸업하고, 1939년 2월 류저우(柳州)에서 고운기(高雲起) 등이 결성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3]에서 항일 의식을 고취하는 선전 활동을 하였다. 이후 다시 나월환(羅月煥)·김동수(金東洙)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중 1940년 왕영수(王永秀, 본명:민영수(閔泳秀))와 함께 중국중앙군관학교(中央軍官學校) 제 18기 입교하였다. 중앙군관학교에서 교육받고 있을 때인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다. 이에 미국과 중국이 연달아 대일 선전포고를 하였고 이를 계기로 임시정부도 다음날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국면의 전개와 함께 임시정부는 1942년 5월, 김원봉(金元鳳)이 주도하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편입과 함께 기존의 4개 지대였던 한국광복군을 3개 지대로 개편하였다. 그 과정에서 시안(西安)의 제2지대 지대장 이범석(李範奭) 휘하의 제 2지대 정훈조장을 맡았다. 이처럼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하며 1943년 1월에 중앙군관학교 제 1총대 통신병과 18기생으로 졸업하였다.

중앙군관학교 졸업 후인 1943년 4월 2일 교통부 통운과장에 선임되어 1944년 2월 8일까지 활동하였다. 동시에 1943년 5월 8일 열린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제3차 전당대표대회에서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상무위원 선전부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44년 6월 19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선전부 편집위원회 편집위원으로 선임되어 8월 21일까지 활동하였다. 선전부 편집위원에서 물러난 후 미국 전략첩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의 후원과 협조로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할 때 국내정진군의 황해도 지방반장으로 임명되어 군사훈련을 받으며 국내 진공 명령을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5년 8월 일본의 무조건 항복선언으로 국내진공이 무산되고 광복을 맞이하였다.

4. 광복 이후

귀국 후 1946년 10월 9일 이범석을 단장으로 하여 조직된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에서 선전부장과 이사, 수원에 설치된 중앙훈련소의 부소장을 지냈다. 그리고 1948년 12월 7일 국방부 직제 개편에 따라 정훈국이 설치될 때 국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호국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예비역 육군 중령으로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전쟁 중 7월 23일 납북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공식적으로는 전사자명부의 기록에 따라 1950년 8월 10일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964년 8월 15일자 조선일보 기사에서는 6.25 동란 중 피랍 되었고, 6.25전쟁납북자협의회 납북인사DB에서는 7월 23일 납북 된 것으로 기록하였다.

5. 여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인 김붕준의 사위이다. 아내 김효숙은 중경임시정부 당시 애국부인회 부회장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아내 김효숙 여사는 송면수 지사 사후 1963년 부터 원호법에 의해 교통부 도서관에서 근무하다 가족들과 미국으로 이민하였고, 2003년 별세하였다.

2021년 김원웅광복회장의 정치편향적 발언 및 독선행위를 항의한 광복회원 김임용이 외조카이다.

6. 참고자료

송면수의 공적정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13권 93·267·483·613·696면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781·859면
자료한국독립운동(추헌수) 제1권 320면
자료한국독립운동(추헌수) 제4권 (하) 391면
필업증서(1943. 1. 1 중국육군군관학교장 장중정(蔣中正))
중국군군관학교 동학록(1949. 7월) 169면
한민족 광복투쟁사(이현희) 288∼310·315·320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6권 283·406·491·495·501·510면
필업증서(1937. 7. 1 국립중산대학교장 추노(鄒魯))
한국광복군(이현희) 120∼129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4권 946·1023면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제5권 84면
전쟁기념관 전사자 정보 검색#
김지훈, 「창군기 한국군 정훈의 기획」, 『2017년 20차 군사사 연구논문 발표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7년 9월 26일, 48쪽


[1] 1943년 1월 졸업[2] 2003년 4월 3일 안장[3] 일명 광복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