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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호 | 애류(崖溜) |
본관 | 안동 권씨[1] |
출생 | 1891년 8월 7일 |
경기도 통진도호부 봉성면 석탄리 (현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석탄리)[2] | |
사망 | 1950년 10월 24일 (향년 59세) |
종교 | 대종교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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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언어학자. 201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권덕규는 1891년 8월 7일 경기도 통진도호부 봉성면 석탄리(현 김포시 하성면 석탄리)에서 아버지 권인수(權寅壽)와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이후 상경하여 1910년 휘문의숙에 입학하였고 당시 스승인 주시경 선생을 만나게 된다. 주시경 선생을 도와 최초의 한글 사전인 '말모이' 편찬작업에 참여했고 1914년 주시경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편찬작업에 몰두하였다.
1919년 12월부터 1920년 1월까지 총 8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논설 '조선어문에 취하야'을 게재했다.
1923년에는 한국어 이론서이자 교과서인 조선어문경위를 발간했다. 1926년에는 정음회를 조직하여 한글 맞춤법 확립운동을 시작했다. 1929년에는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조선어강습회의 강사로 활동했다. 조선어 강습, 대중강연, 한글 관련 좌담회 연사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1950년 3월 5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흑석동[3] 58번지 자택에서 외출한 후 실종되었고, 1950년 3월 15일자 경향신문에 권덕규의 실종을 알리는 기사가 나가기도 했다. 이후 1950년 10월 24일 별세한 것으로 사망신고되었다.
201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고, 2021년 10월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으로부터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