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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4년 9월 22일 |
충청남도 청양군 비봉면 방한리 9 | |
사망 | 1964년 9월 11일 (향년 80세) |
묘소 | 산골 |
본관 | ○○ 서씨 |
호 | 연아(然我), 달경(達卿) |
며느리 | 김명자 |
경력 | 신흥무관학교 재직 |
서훈 | 대통령 표창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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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언어학자이다.2. 생애
1919년 이래 1941년까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사에서 기자와 편집부장 등을 지냈다. 1920년 12월 조선불교회의 간부로 활동했다. 1925년 11월 박은식 추도회 발기인, 1926년 4월 국수회 회원의 창덕궁 난입 사건 탄핵을 위한 전형위원 등으로 활동했다.1941년 10월 하순경부터 서울에서 리극로, 안호상과 함께 이우식 등에게 우리말 큰사전 편찬사업을 위해 조선어학회에 출자하도록 권유했다. 이우식은 1942년 1월까지 20만 원을 제공하기로 확약했다. 이 일로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었다.
1942년 12월 23일 서울에서 김양수 등과 함께 체포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로 압송되었다. 당시 일제 경찰은 사전 편찬에 직접 참여했거나 재정 지원을 한 사람 등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총 33명을 검거하였으며, 모두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송치하였다. 1943년 4월 중순경 신윤국(申允國) 등과 함께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