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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우

파일:유원우(독립유공자).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낙보(洛甫)
출생 1902년 3월 13일
경상북도 상주군 장천면 송촌리
(현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상촌리 송촌마을 883번지)
사망 1938년 2월 24일[1] (향년 35세)
경상북도 안동군
묘소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낙동리
본관 풍산 류씨(豊山 柳氏)[2]
학력 상산제일학교[3] (졸업)
대구고등보통학교[4] (퇴학)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정치경제과 / 졸업)
상훈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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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902년 3월 13일 경상북도 상주군 장천면 송촌리(현 상주시 낙동면 상촌리 송촌마을 883번지)에서 아버지 유관식(柳寬植, 1880.9.19. ~ 1965.7.22.)[5]과 어머니 진주 정씨 정동곽(鄭東郭, 1879.6.17. ~ 1933.10.28.)[6] 사이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7] 친고조부 낙파(洛坡) 유후조(柳厚祚, 1798.12.15. ~ 1876.1.10.)[8]조선 고종좌의정을 지냈고, 증조부 유경목(柳畊睦, 1821 ~ 1870.7.17.)은 고종 때 동몽교관(童蒙敎官), 세자익위사 섭부솔(世子翊衛司攝副率)을 지냈다.

상산제일학교[9] 졸업 후 대구고등보통학교[10]에 진학했으나 1920년 일본인 순사의 부당한 폭력에 항거하는 항일 동맹휴학을 주도한 혐의로 대구경찰서에 체포되어 3개월간 구금되었고, 학교로부터 퇴학 통보를 받았다. 이후 상경해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전학해 졸업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했다. 1926년 6월 협동조합운동사의 재무부 임원을 맡았고, 1927년 2월 재동경조선인단체협의회가 창립되자 실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7년 4월에는 상주협동조합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7년 5월에는 신간회 도쿄지회가 창립되자 초대 총무간사로 선임되어 도쿄도에 유학 중이던 조헌영·전진한 등과 함께 반일사상을 고취하고 지하조직을 통한 항일운동의 선봉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여름방학 때는 협동조합운동사 선전단의 일원으로 조선 순회강연에 참여하여 충청남도 공주군 등지에서 '협동조합의 사적고찰과 세계적 대세', '협동조합의 이론과 실제' 등을 강연하였다. 1928년 여름방학 때는 경상북도 상주군에서 열린 유학생 강연회에서 '변증법에 대하여'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였다.

1929년 도쿄도에서 유학하는 조선인 유학생의 모임인 학우회(學友會)의 대표로 선출되어 일제의 조선에 대한 폭정을 비판, 폭로하였다. 또한 일본 전국에 신간회의 지회를 조직하고자 하였으나, 경시청에 체포되어 3개월간 구금되었다. 이후 보석으로 방면되었으나 요시찰 인물로 낙인찍혀 항상 일본 제국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1931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뒤 귀국했으나, 이미 조선총독부 경찰국의 요시찰 인물로 지정되어 있는 상태였기에 행동 제한을 받아야 했다. 1932년 고려국제무역회사 지배인을 지냈다. 1935년 상주군 상주읍 서곡리 도곡서당(道谷書堂)의 재산을 이용해 상주교육협회를 조직하고 유치원을 설립하여 이사로 취임하였다. 또한 같은 해 전진한·김한옥(金漢玉) 등과 함께 영남지방의 농민들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상주군 함창협동조합[11]을 창립하였고, 책임지배인인 이사로 선출되었다. 이후 농민수탈기관인 금융조합 및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맞서 농민의 권익을 보호하고 농촌 경제를 개선하는 활동을 전개하였고, 상주군 각지를 돌아다니며 강연 활동을 통해 농민 계몽에 힘썼다.

1938년 2월 24일 경상북도 안동군에서 안동농민회의 주최로 열린 강연회에 참석하여 농민 계몽을 위해 강연하던 중 뇌출혈로 기절하였고,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곧 사망했다. 장례는 안동군민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상주군 낙동면 낙동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198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3. 여담


[1] 음력 1월 25일[2] 서애(西厓) 우천파(愚川派)-경목(畊睦)파 25세 우(佑) 항렬.[3]상주초등학교[4]경북고등학교[5] 자는 이율(而栗).[6] 정원묵(鄭原默)의 딸이다.[7] 어머니 진주 정씨는 아버지의 첫째 부인이며, 아버지는 이후 둘째 부인 성주 배씨 배점아기(裵占兒基, 1900.8.24. ~ 1964.12.12.)와 재혼하여 아들 2명을 더 두었다.[8] 족보상 고조부는 유후조의 쌍둥이 남동생 유효조(柳孝祚, 1798.12.15. ~ 1857.12.5.)이다. 그러나 유효조는 자식이 없어 유후조의 차남인 유경목(柳畊睦, 1821 ~ 1870.7.17.)이 유효조의 양자로 입적되었는데, 유경목이 바로 유원우의 증조부이다. 따라서 친고조부는 유후조가 맞다.[9]상주초등학교[10]경북고등학교[11] 한국 농민협동조합체의 효시라 할 수 있다.[12] 유원우의 증조부 유경목(柳畊睦, 1821 ~ 1870.7.17.)의 4촌 동생이다.[13] 자는 구목(驅牧).[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