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24 06:19:56

류인목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류향목(柳香睦)[1][2]
낙삼(樂三)
차산(此山)
출생 1839년[3]
경상도 상주목 중동면 우천리
(현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1102번지)[4]
사망 1900년 8월 6일 (향년 60~61세)
경상북도 상주군
묘소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5]
본관 풍산 류씨[6]
상훈 2020년 건국포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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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말기의 문신,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2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839년 경상도 상주목 중동면 우천리(현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1102번지) 수암종택(修巖宗宅)에서 아버지 류교조(柳敎祚, 1812.12.6. ~ 1881.6.12.)[7]와 어머니 밀양 박씨(1818.10.28. ~ 1886.7.13.)[8]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9]

조선 선조영의정을 지낸 류성룡의 9대손으로, 조부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 1762.8.24. ~ 1834.3.5.)[10]은 1786년(정조 10) 식년 생원시에 3등 제34인으로 입격한 뒤[11]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다. 큰아버지 낙파(洛坡) 유후조(柳厚祚, 1798.12.15. ~ 1876.1.10.)는 1837년(헌종 3) 식년 진사시에 3등 제65인으로 입격하고[12] 1858년(철종 9)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 제1인으로 급제한 뒤[13] 조선 고종좌의정을 지냈다. 아버지 류교조는 1850년(철종 1) 증광 생원시에 3등 제2인으로 입격한 뒤[14] 군자감 정(軍資監正), 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 등을 지냈다.

1865년(고종 2) 식년 생원시에 1등 제5인으로 입격하여[15] 성균관에 유생으로 입학하였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에 의해 서원 철폐가 단행되자 이만기(李晩起)·이인화(李寅華)·이승제(李承濟) 등의 남인 유생들과 함께 권당(捲堂)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당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있던 큰아버지 류후조가 장남인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 1813.8.18. ~ 1872.4.22.)과 함께 이른바 '영남 만인소'를 적극적으로 저지하고 있었고, 서원 철폐에서도 9대조 류성룡이 배향된 병산서원이 제외되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서원 철폐에 대해 반대하는 견해를 철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출사하게 된 것 또한 흥선대원군이 영남 유생들을 회유하는 방안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16]

1876년(고종 13) 경기전 참봉, 장원서 봉사(掌苑署奉事), 1880년(고종 17) 의금부 도사(都事) 등을 지냈다. 그러나 1887년(고종 24) 휘경원 직장(徽慶園直長)으로 있을 때, 금지하는 법령을 어기고 함부로 휘경원 소유의 토지를 개간하여 논을 일군 것이 드러나 투옥되었다.[17] 본래 이는 장 70대에 해당하는 죄였으나, 고종의 용서를 받아 장 70대에 해당하는 벌금을 물고 관직 임명장을 빼앗긴 뒤 석방되었다.[18]

1890년(고종 27) 다시 등용되었고, 상서원 주부(尙瑞院主簿), 사옹원 주부(司饔院主簿), 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 상의원 별제(尙衣院別提), 정릉령(貞陵令), 1892년(고종 29) 기기국 사사(機器局司事), 상서원 별제(尙瑞院別提), 1893년(고종 30) 빙고 주부(氷庫主簿), 영회원 수봉관(永懷園守奉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主事), 사헌부 감찰(監察), 동부령(東部令), 영릉령(永陵令), 예안현감(禮安縣監), 1894년(고종 31) 양산군수(梁山郡守) 등을 지냈다.

그러나 1895년 음력 8월 20일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그 이후인 9월 1일 사직하였다.[19] 1896년 대구부 지례군에서 의병을 일으키자는 통문을 돌려 의병을 모으고 의병대를 창설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지례군 관아로 가던 중 대원들이 흩어지면서 본격적인 활동은 하지 못하였다. 이후 지례군에서 여중룡(呂中龍) 등이 주도해 조직한 이기찬(李起燦) 의진과 의병대를 통합하였고, 이때 군문집례(軍門執禮)로 선임되었다. 이후 수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상주군에 주둔하던 일본 제국 육군 헌병대를 공격하는 등 전과를 올렸으나 곧 일본 제국 육군에 체포되어 상주군에서 5개월간 복역한 뒤 석방되었다.

이후 극심한 고문의 여독으로 고통받던 중 1900년 8월 6일 상주군에서 사망하였다. 유해는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202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3. 여담


[1] 독립유공자 공적정보[2] 다만, 풍산류씨세보 권4 185쪽에는 향(香)이 아니라 人 아래에 香이 붙은 한자로 기재하였는데 이 한자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없다.[3] 1865년 류인목 생원시 사마방목에는 1838년(헌종 4)에 태어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4] 이 지번에 풍산 류씨(豊山 柳氏) 우천파(愚川派) 종택인 수암종택(修巖宗宅)이 있다.[5] 증손자 유우백의 증언[6] 서애(西厓) 우천파(愚川派)-인목(寅睦)파 22세 목(睦) 항렬.[7] 자는 명가(明可).[8] 박백호(朴忄+百浩)의 딸이다.[9] 어머니 밀양 박씨는 아버지의 셋째 부인이다. 첫째 부인 선산 김씨(1810 ~ 1835.5.10.)는 딸 한 명을 낳은 후 요절하였고, 둘째 부인 진성 이씨(1814 ~ 1837.4.24.)는 슬하에 자식이 없고 이내 요절하였다.[10] 자는 상원(象遠).[11] #[12] #[13] #[14] #[15] 1865년 류인목 생원시 사마방목[16] 19세기 후반 영남유림의 정치적 동향 : 만인소를 중심으로(정진영 논문)[17] 1887년 3월 19일 승정원일기 기사[18] 1887년 5월 2일 승정원일기 기사[19] 1895년 9월 1일 승정원일기 기사[20] 유우국의 증조부 계당(溪堂) 유주목(柳疇睦, 1813.8.18. ~ 1872.4.22.)과 유원우의 증조부 유경목(柳畊睦, 1821 ~ 1870.7.17.) 모두 류인목의 4촌 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