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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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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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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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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be673> 사로 6촌 신라 6부 성씨 시조
알천 양산촌 급량부 이씨 알평
돌산 고허촌 사량부 최씨 소벌도리
취산 진지촌 본피부 정씨 지백호
무산 대수촌 점량부 손씨 구례마
금산 가리촌 한기부 배씨 지타
명활산 고야촌 습비부 설씨 호진
삼국사기 기준.# 삼국유사에서는 돌산 고허촌(사량부) 소벌도리를 정씨로 취산 진지촌(본피부) 지백호를 최씨로 기록했다. 또한 6촌의 순서도 셋째가 무산 대수촌(점량부), 넷째가 취산 진지촌(본피부)이라고 기록했다.# }}}}}}}}}


신라 6성
星州 裵氏 (星山 裵氏)
성주 배씨 (성산 배씨)
관향 <colbgcolor=#fff,#000>경상북도 성주군
비조 지타(祗陀)
도시조 배현경(裴玄慶)
시조 배위준(裵位俊)
중시조 배인경(裵仁敬)
집성촌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도남동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송촌리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본리동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동
경상북도 금릉군 조마면 신안동
전라북도 김제시 백구면 마산리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둔마리
강원도 철원군 원남면 죽대리
함경남도 영흥군 억기면 양중리, 향하리
인구 148,672명(2015년)

1. 개요2. 분파3. 항렬자4. 인명
4.1. 고려시대4.2. 조선시대4.3. 그외 성주 배씨 인물4.4. 문과 급제자
5. 관련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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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북도 성주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성산 배씨(星山 裵氏)라고도 하는데, 성산은 성주의 옛 이름이기 때문이다.

지역별 인구 분포도는 서울 15,184명, 부산 7,466명, 대구 16,010명, 인천 3,829명, 광주 808명, 대전 3,774명, 울산 1,726명, 경기 12,950명, 강원 1,509명, 충북 3,216명, 충남 3,825명, 전북 2,441명, 전남 5,593명, 경북 6,689명, 경남 5,010명, 제주 209명이다.

성주(星州)는 경상북도 남서쪽에 위치하며 6가야연합국의 하나인 성산가야국(星山伽倻國)의 영토였다. 6세기 무렵 신라의 세력권에 들게 되어 벽진군(碧珍郡) 또는 본피현(本彼縣)이라 하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신안현(新安縣)으로 개칭하여 성산군(星山郡)에 속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 경산부(京山府)로 승격하였다가 980년(경종 6)에 광평군(廣平郡)으로 강등하여 개칭되었다. 995년(성종 14) 대주(岱州)로 바뀌어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으며 1018년(현종 9)에는 다시 경산부로 환원되었다. 1295년(충렬왕 21)에 와서는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를 두어 성주목(星州牧)으로 승격하였으나, 1310년(충선왕 2) 다시 경산부로 강등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성주목으로 승격되었다가 이후 1616년(광해군 9)에는 신안군으로, 1631년(인조 1)에는 신안현으로 개칭되어 강등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성주군이 되었고, 1896년에는 경상북도 성주군으로 개편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관할면이 성주·벽진면 등 9개면으로 폐합되었고, 1979년에 성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시조인 배위준(裵位俊)은 고려 시대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三重大匡)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올랐다.
시조 배위준(裵位俊)은 배현경(裵玄慶)의 후손으로 고려조에 삼중대광벽상공신에 올랐다. 본관을 성주로 정한 것은 그의 현손 배인경이 고려 원종 때 흥안(성산의 옛이름)군에 봉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조에 성산군에 봉해진 배천룡을 시조로 삼는다는 설도 있다. 성주는 경상북도 성주군의 지명이다.

성산배씨(星山裵氏)는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오른 배위준(位俊)을 파조(派祖)로 받들고, 그의 현손(玄孫) 배인경(仁慶)이 충선왕(忠宣王) 때 추밀원사(樞密院事)를 지낸 후 충숙왕(忠肅王) 때 흥안(興安) 부원군에 봉해진 연유로 성산(星山)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1764년(영조 40)에 편찬된 「갑신합보(甲申合普)」에는 중시조(中始祖) 배현경(玄慶)의 현손인 배사혁(斯革 : 삼중대광)의 둘째 아들 배천룡(天龍)을 파조(派祖)로 기록하고 있는데, 계대(系代) 소목(昭穆)이 미상(未詳)하므로 배위준(位俊)을 파조로 계대하는 것이 정확하다는 이론이 지배적이다.

대체로 고려 말기에서부터 위세(威勢)를 떨쳤던 성산 배씨는 흥안부원군 배인경(仁慶)의 아들 배문적(文迪)과 배무적(武迪)이 크게 현달(顯達)하여 성산 배씨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고려 말에 판추밀원사(板樞密院事)를 지낸 배문적(文迪)의 손자 배진손(晋孫 : 추밀원사 배용성의 아들)은 천품이 온후하고 기개(氣槪)와 도량(度量)이 빼어나 여말(麗末)에 문과에 올라 여러 관직을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했으며, 그의 아우 배진후(晋后)는 태종 때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세종(世宗) 때 좌사간(左司諫)에 올라 청백(淸白)함으로 명망이 높았다.

조선 세종조(世宗朝)에서 지례 현령(知禮 縣令)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배규(規)는 배진손(晋孫)의 맏아들로 이조 참의(吏曹 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을 지냈으며 탁월한 문장으로 <관서(關西)의 공자(孔子)>로 일컬어져서 쌍성 총관(雙城 摠管)을 지낸 아우 배구(矩)와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한편 사간(司諫) 배진후(晋后)의 아들 배유(裕)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응교(集賢殿 應敎)가 되어 「고려사(高慮史)」 찬집에 참여했으며,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 사육신(死六臣)이 화를 입게 되자<혈서상소(血書上疏)>로 충직을 호소하다가 청주로 유배되었다.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배무적(武迪)의 6세손 배극렴(克廉, 위위소윤 배현보의 둘째 아들)은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진주 ․ 상주의 목사(牧使)와 계림(鷄林) ․ 화령(和寧)의 부윤(府尹)을 지내고 우왕(禑王) 때 경상도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어 양백연(梁伯淵) ․ 우인렬(禹仁烈) 등과 함께 진주와 사근역(沙斤驛 : 경산부)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했으며,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위화도(威化島) 회군을 결행하고 우시중(右侍中)에 올라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워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으로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져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세조 때 무과에 급제한 배치(絺)가 울산 부사(府使)를 거쳐 경상좌도 수군총병(慶尙左道 水軍摠兵)을 지내며 정사(政事)를 공평하게 처리하고 빈민 구제에 앞장서서 향민(鄕民)이 <청덕거사비(淸德去思碑)>를 지낸 배수광(綉光)은 흉년으로 굶주린 백성 구제에 전심하여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그 외 명종(明宗) 때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만들었던 배도(壔)와 가재(家財)를 기울여 빈민을 구제하여 왕으로부터 승일(乘馹)의 은전(恩典)을 받았던 배진서(振緖)가 유명했으며,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한 배흥립(興立)은 흥양 현감(興陽 縣監)으로 전함을 많이 만들어 임진왜란에 공을 세웠고 한산도(閑山島)와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주역으로 활약하여 고향에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특히 명종(明宗) 때 언양 현감(彦陽 縣監)을 지냈던 배덕문(德文)은 형조 좌랑(刑曹 佐郞)을 거쳐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제독(提督)으로 임명되어 의병을 이끌고 성주 탈환을 성공시킴으로 원종이등공신(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되어 크게 이름을 떨쳤다.

정유재란(丁酉再亂)에 조방장(助防將)으로 한산도와 노량진 전투에 참가했던 배즙(楫)은 전장에서 순절하여 원종이등공신(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배명순(命純)은 정묘호란에 인조(仁祖)를 강화도(江華島)로 호송하여 도총부 도사(都摠府 都事)를 지내고 병자호란 때 영장(營將)으로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결전을 주장했으나 주화론자(主和論者)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밖의 인물로는 효종(孝宗) 때 전라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낸 배시량(時亮 : 배홍립의 아들)과 석학(碩學) 정 구(鄭 逑)의 고제(高弟)로 문명(文名)을 떨쳤던 배상룡(尙龍) ․ 배상호(尙虎)가 대표적이며, 비안 현감(比安 縣監) 배명전(明全)의 아들 배상유(尙瑜)는 <심성정이기(心性情理氣)>를 연구했고, 배상보(相補)는 인조(仁祖) 때 훈련원 주부(訓練院 主簿)를 거쳐 명천 현령(明川 縣令)을 역임하여, 숙종 때 승지로 필명(筆名)을 떨쳤던 배정휘(正徽), 수문장(守門將) 배문범(文範 : 壬亂功臣星州居都長武範号管堂) 정선 현감 배무화(舞和)와 함께 성산 배씨를 더욱 빛냈다.

성산복야공파(星山僕野公派)는 고려 말에 좌복야(左僕野)를 지낸 배영찬(英贊)을 기일세(起一世)로 하고 있다.

「배씨대족보(裵氏大族普)」에 의하면 그는 달성군(達城君) 배운룡(雲龍)의 10대손이며 상서좌복야(尙書左僕野)와 판추밀원사(板樞密院事)를 지낸 배천경(天慶)의 넷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관계 문헌의 고증(考證)에 따라 성산파(星山派)의 지파(支派)라는 이론이 지배적이다.

재미있는 점은 도시조 배현경[1]은 고려의 개국공신인데 후손인 배극렴은 바로 그 고려를 무너트리고 건국된 조선의 개국공신이다.[2]

배극렴은 고려 충숙왕 2년(1325년) 경북 성주읍 대황동에서 위위소윤(衛尉小尹)으로 있던 아버지 배현보와 어머니 서주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 여러 벼슬을 역임했다. 관향인 성주 관하리에 살고 있을 때 그는 근처의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를 짓게 했다. 백성들은 그의 공을 고맙게 생각해 그 곳의 땅이나 하천을 배천(裵川), 배야(裵野)라고 불렀다. 공민왕 12년(1363) 진주목사로 부임했을 때는 산에서 잣나무를 북쪽 관아에 옮겨 심었다. 진주 사람들은 배극렴을 추앙해 이 나무를 시중백(侍中栢)이라 했다.

배극렴은 우시중으로 있던 1392년 조준, 정도전 등과 함께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 개국 일등공신이 되어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지고 문하좌시중이 됐다. 1392년 이성계가 세자를 책봉할 때 조준, 배극렴 등은 "평화시에는 적자가 책봉돼야 하고 난시에는 공이 많은 사람이 세자로 책봉돼야 한다.'며 이방원을 의중에 두고 주장하다가 묵살당했다. 이로 인해 조준은 사직당하고 배극렴은 불정면 삼방리로 귀양을 갔다. 이방원은 임금이 된 뒤 배극렴이 머물던 이곳의 산을 어래산(御來山), 마을을 삼방리(三訪里)라 부르게 했다.

2. 분파

  • 화당공파(花堂公派) - 배규
    • 참봉공파(參奉公派) - 배게
    • 생원공파(生員公派) - 배탄
    • 매곡공파(梅谷公派) - 배도
    • 산음공파(山陰公派) - 배철보
    • 찰방공파(察訪公派) - 배선보
    • 진사공파(進士公派) - 배윤순
    • 직장공파(直長公派) - 배윤침
    • 참판공파(參判公派) - 배윤언
    •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 - 배윤
  •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 배구
  • 진사공파(進士公派) - 배현
    • 군수공파(郡守公派) - 배영성
  • 녹야당공파(綠野堂公派) - 배유
  • 낙천공파(洛川公派) - 배신
  • 재신공파(宰臣公派) - 배경신
    • 정절공파(貞節公派) - 배극렴
    • 미은공파(薇隱公派) - 배극명

3. 항렬자

行列字 行列字 行列字
26동(東)상(相)병(秉)락(樂)27환(煥)휴(烋)찬(燦)희(熙)28효(孝)중(重)경(坰)재(在)
29호(鎬)흠(欽)종(鍾)탁(鐸)30태(泰)영(泳)한(漢)호(浩)31식(植)근(根)주(柱)표(杓)
32노(魯)용(容)연(然)병(炳)33곤(坤)규(圭)달(達)기(基)34현(鉉)용(鏞)용(鎔)진(鎭)
35원(源)해(海)담(湛)경(逕)36영(榮)정(禎)병(柄)종(棕)37현(炫)훈(熏)렬(烈)황(煌)
38규(奎)장(墇)치(埴)재(載)39석(錫)주(鑄)옥(鈺)현(鋧)40수(洙)기(淇)윤(潤)락(洛)
41환(桓)락(極)근(槿)권(權)42희(熹)돈(焞)영(煐)형(炯)43원(垣)훈(塤)준(埈)증(增)

4. 인명

4.1. 고려시대

  • 배인경(裵仁慶): 좌복야(左僕寺) 배원서(裵元舒)의 아들이다. 고려 원종조(元宗朝)에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선임되었는데, 숭문전(崇文殿)에서 임금을 모시고 숭문전 첨지(僉知) 신맹섭(申孟攝), 승선(承宣) 김구락(金九洛), 기거주(起居注) 이당진(李唐珍), 사업(司業) 박규두(朴奎斗) 등과 더불어 홍범(洪範)과 예기(禮記), 월령(月令)과 중용(中庸)을 강의(講義)하였는데 공의 해석이 매우 정밀하다하여 임금이 금 이십냥과 비단 열필을 하사하니 그때 공의 나이가 28세였다. 보문각(寶文閣) 직학사(直學士)에 올라 충렬왕(忠烈王) 어전에서 왕명(王命)으로 논어(論語)를 강독(講讀)하였다. 충선왕(忠宣王)때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이르러 공이 연로하므로 사직(辭職)하고 물러나기를 청하니 충선왕이 이르기를 “경은 누대에 걸친 공신(功臣)의 자손(子孫)이고, 또 선조(先祖)의 은혜를 입은 노신으로서 지금 어찌하여 짐을 멀리하려 하는가.” 하고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정사(政事)를 돌보게 하였다. 충숙왕이 즉위하자 공이 다시 사직하고 물러날 것을 간곡히 청하니 마지못해 이를 윤허(允許)하고 공(公)을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 흥안은 성주의 옛 지명)에 봉하였으며 이러한 연유(緣由)로 성주(성산)을 관향(貫鄕)으로 하였던 수관조(受貫祖 : 관향을 받은 조상)이다. 후손들은 재실인 흥덕재(興德齋)와 사당인 숭덕사(崇德祠)를 세워 유업(遺業)을 추모하고 있다.
  • 배문적(裵文迪-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배인경(裵仁慶)의 장남으로 태어나 고려 후기 왕명(王命)의 출납(出納), 궁궐의 경호 및 군사 기밀(軍事機密) 따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官衙)인 추밀원(樞密院)의 종2품 관직인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를 지냈다.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이다.
  • 배진손(裵晉孫)-추밀원사(樞密院事) 배용성(裵用成)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사려(士麗)이고 호는 아당(我堂)이다. 중현대부(中顯大夫) 지평해군사(知平海郡事)를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태조가 여러 번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 배규(裵規)-자는 중원(仲員)이며 공조판서(工曹判書) 배진손(晉孫)과 현감(縣監) 장중화(中和)의 따님인 정경부인(貞敬夫人) 옥산장씨(玉山張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일찍부터 성리학(性理學)을 배웠으며 양촌(陽村) 권근(權近)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고 사림(士林)들이 ‘관서부자(關西夫子)’라고 불렀다. 우왕 3년(1377년)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한 후 우왕 8년(1382년) 문과에 합격하여 지군사(知郡事)·독서당(讀書堂) 한림(翰林)·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를 거쳐 세종 때 지례 현령(知禮 縣令)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고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승진되고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3]

4.2. 조선시대

  • 배한(裵閑)-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배규(規)와 우대언(右代言) 김승득(承得)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수원김씨(水原金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종 14년(1414년) 식년(式年) 생원시(生員試)에 입격한 후 같은 해 알성시(謁聖試)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세종 1년(1419년)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세종 16년(1434년) 사헌부정언(司憲府正言)이 되어 시를 지으니 한 때에 전송(傳誦 : 입으로 전하여 욈)되었다고 한다.
院吏來傳頂玉淸(원리내전정옥청)
사간원(司諫院) 서리(胥吏)는 관리들 청렴하다 하고
鷄塒牛巷便生命(계시우항편생명)
닭장과 소 다니는 거리 밝아 오는구나
家君舍弟曾經此(가군사제증경차)
아버님과 동생도 이곳에서 벼슬하여
壁上題三父子名(벽상제삼부자명)
삼부자 이름이 벽 위에 나란하네 }}} ||
  • 배윤(裵閏)-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배규(規)와 우대언(右代言) 김승득(承得)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수원김씨(水原金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태종 11년(1411년)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경승부(敬承府)의 승(承)에 임명되었다가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태종 14년(1414년)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내고, 이듬해 이조좌랑(吏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전형(銓衡)하여 관리를 선발하는 업무을 관장할 때 김숭(金崇)를 추천한 일로 사헌부(司憲府)로부터 탄핵(彈劾)을 받았다. 그 뒤 태종 17년(1417년)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세종 4년(1422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이르렀다.

4.3. 그외 성주 배씨 인물

배인익(裵仁益) 고려조에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역임하였다.

배양쾌(裵良快) 고려 때 판전리(判典理)를 지냈다.

배원서(裵元舒) 고려 때 좌복야(左僕野)를 역임하였다.

배인경(裵仁慶) 고려 원종(元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어전(御 前)에서 신맹섭(申孟攝) ․ 김구락(金九洛) ․ 이당진(李唐珍) ․ 박 규두(朴奎斗) 등과 함께 홍범(洪範) ․ 월령(月令) ․ 중용편(中庸 篇)을 강독하였다. 28세 때 보문각 직학사(寶文閣 直學士)가 되 어 충렬왕(忠烈王)에게 논어(論語)를 강의하였으며, 충선왕(忠宣 王) 때 지추밀언사(知樞密院事)에 올랐다. 연로하여 치사(致仕) 코저 하니 왕이 만류하여 “경은 대대로 공신의 자손으로 선조 의 은총을 받은 노신인데 어찌 나를 멀리 하려 하는가”하고 궤 장(几杖)을 특사(特賜)하였다. 충숙왕(忠肅王) 즉위 후 치사(致 仕)하고 귀향하게 되자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해졌다.

배진손(裵晋孫) 자(字)는 사려(士麗), 호(號)는 아당(我堂).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판공부사(判工部事)를 지냈고 그후 여러 관직 을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 다.

배진후(裵晋后) 호는 동암(東菴). 1393년(태조 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독서당 한림(讀書堂 翰林) ․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 시강원 필선(侍講院 弼善) 등을 역 임하고 외직으로 나아가 많은 치적을 남기고 정사(政事)를 공정 히 처리하였다. 1406년(태종 6) 예문관 전한(藝文館 典翰)이 되고, 1416년(태종 16)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 右副承旨), 이 어 1420년(세종 2) 사간원 좌사간(司諫院 左司諫)에 이르렀다. 청백하기로 유명하였다.

배규(裵 規) 자는 중원(仲員), 호는 화당(花堂). 1382년(우왕 8) 문과에 급제, 독서당 한림(讀書堂 翰林) ․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 平) ․ 장령(掌令) 등을 거쳐 세종 때 지례 현령(知禮 縣令)으로 나아가 치정(治政)이 청백하였고, 그후 응교(應敎) ․ 전한(典翰) 을 거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승진되고, 사간원 대사간(司諫院 大司諫)을 역임하였다. 문장이 탁월하여 세인이 관서(關西)의 공 자(孔子)라 치하였고, 유집(遺集)으로 「실기(實記)」 한 권이 전 해온다. 삼강서원(三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배구(裵 矩) 고려 말에 무과에 급제하고 서해 안렴사(西海 安廉使)로 재직 중 김노(金虜)의 난이 일어나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가설 할 때 그 감독을 맡아 대군(大軍)의 도강(渡江)에 공이 많아 가 선대부(嘉善大夫)로 서북안렴사(西北安廉使) 겸 쌍성총관(雙城摠 管)에 승진되었다. 정사(政事)에 청백하고 공평하여 관내가 평온 하였다.

배유(裵 裕) 호는 녹야당(綠野堂). 1446년(세종 28) 생원시(生員試) 에 합격,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필선(世子侍講院 弼善)이 되고, 1450년(세종 32) 한원(翰苑)에 뽑혔으며, 이듬해 집현전 응요(集賢殿 應敎)가 되어 왕명으로 「고려사(高麗史)」 를 찬집(纂輯)하였다. 단산축성역(湍山築城役)의 중지를 문종(文 宗)에게 상소하여 이를 실현하였고, 1453년(단종 1) 승정원 우 부승지(承政院 右副承旨)가 되고, 1455년(단종 3) 집현전 직제 학(集賢殿 直提學) ․ 지제교(知製敎)에 올랐다. 1456년 육신(六 臣)이 화를 입게 되자 혈서 상소(血書 上疏)하고 충직(忠直)으로 호소하다가 청주로 유배되어 풀리지 못하고 죽었다. 1691년(숙 종 17) 육신이 신원(伸寃)됨에 따라 그도 신원복작(伸寃復爵)되 었다. 자헌대부(資憲大夫) ․ 예조판서(禮曹判書) ․ 지의금부사(知 義禁府使)에 추증(追贈)되었다.

배한(裵 閑), 1414년(태종 14)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1419년 (세종 1) 예문관 검열(藝文館 檢閱)이 되고, 1434년(세종 16) 정언(正言)을 거쳐 성균관 직강(成均館 直講)이 되었다. 1435년 승정원 승지(承政院 承旨)가 되고 사간원 좌사간(司諫院 左司諫) 을 지냈다. 문장이 뛰어났고, 청백하기로 유명하였다.

배윤(裵 閏) 1411년(태종 11) 문과에 급제, 1423년(세종 5) 교리 (校理) ․ 응교(應敎) 등을 거쳐 1430년(세종 12) 사간원 대사간 (司諫院 大司諫)을 거쳐 집현전 직제학(集賢殿 直提學) ․ 지제교 (知製敎)에 이르렀다. 죽은 뒤 부인 손씨(孫氏)는 주자가례(朱子 家禮)에 따라 상례(喪禮)를 치르고 묘하(墓下)에 막(幕)을 짓고 삭발하여 정렬(貞烈)을 종신토록 지키니 왕이 천문(薦聞)하고 정 려(旌閭)를 명했다.

배온(裵 蘊) 자는 사옥(士玉), 호는 청산(靑山). 1417년(태종 1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청산 현감(靑山 縣監) ․ 청주 진관절 제 도위(淸州 鎭管節制 都尉)를 지냈다.

배선보(裵善輔): 자는 성원(聖元)이고 호는 회은(晦隱)이다. 성균관 직강(直講), 배윤겸(允謙)과 선략장군 최적의 따님 양천 최씨(陽川崔氏)사이에서 태어났다. 효우로 천거되어 참봉을 거쳐 성현도찰방을 지냈으며 당쟁으로 인한 화(禍)가 그치지 않아 벼슬길에 다시 나아갈 뜻을 접고 전원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었다.

배은(裵垠):자는 자호(子浩)이며 성현도찰방 배선보와 직장 송소의 따님인 야성 송씨(冶城宋氏) 사이에서 성종 14년(1483년) 태어났다. 유일로 천거되어 사직서 참봉에 제수되고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와 빙고별제(氷庫別提)를 지냈다.

배진경(裵振經): 자는 박옥(璞玉)이고 호는 막재(幕齋)이다. 사복시 주부 배은(垠)과 숙인(淑人) 밀양 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중종 5년(1510년)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인효의 지성이 있었고 부친이 돌아가시자 애훼(哀毁:슬퍼함)함이 예의에 지나쳤으며 3년을 하루처럼 하였다. 효행으로 천거(薦擧)되어 참봉을 지냈다.

배준(裵 峻) 자는 백고(伯高), 호는 묵암(黙菴). 조선 때 이홍량(李弘 量)으로부터 곽율 ․ 박이장(朴而章)과 함께 의리(義理)를 수강(受 講)하였고, 선인들의 미발안(未發案)을 많이 터득하여 사표(師表) 가 되었다. 천거(薦擧)로 훈도(訓導)가 되고 후에 안음 현감(安陰 縣監)이 되어 정사를 청백하게 처리하였다.

배극귀(裵克貴) 자는 성도(聖道), 고려 말에 사마(司馬)에 합격했으나 장차 조선(朝鮮)이 개국될 것을 알고 가야산(伽倻山)에 은거(隱 居), 세상과 인연을 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배극렴(裵克廉) 1325(충숙왕 12) ~ 1392(태조 1) 자는 양가(量可), 호는 필암(筆菴) ․ 주금당(晝錦堂), 시호는 정절(貞節). 공민왕 (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 진주(晋州) ․ 상주(尙州)의 목사(牧 使), 계림(鷄林) ․ 화령(和寧)의 부윤(府尹), 합포진 첨사(合浦鎭 僉事) 등을 역임, 1376년(우왕 2) 경상도 도순문사(都巡問使) 로 양백연(梁伯淵) ․ 우인렬(禹仁烈) 등과 진주에 쳐들어 온 왜 구를 반성현(班城縣)에서 대파하고, 1378년 삼도원수(三道元 帥)로 경산부 사근역(京山府 沙斤驛)에서 또다시 왜구를 격파했 다. 이후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서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 고 1388년(우왕 14)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위화도(威化島)에 서 이성계 등과 회군(回軍)을 결행, 구세력을 추방했고, 이듬해 평리(評理) ․ 양광도 찰리사(陽廣道 察里使) 등을 역임, 1390년 (공양왕 1) 중군총제(中軍摠制) ․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수 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랐다. 1392년 우시중(右侍中)으로 조 준(趙 浚) 등과 모의, 공양왕(恭讓王)을 폐하고 이성계(李成 桂)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이 되고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 으며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이 되었다.

배극명(裵克明) 호 미은(薇隱). 공민왕(恭愍王) 때 무과에 급제하여 벼 슬이 도총제(都摠制)에 올랐다. 이태조(李太祖)께서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왕위에 등극함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의를 지키니 이태조께서 공의 충절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다고 감탄했다.

배윤겸(裵允謙) 1454년(단종 2)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注書) ․ 교리 (校理) 등을 역임하고 1461년(세조 6) 직강(直講)이 되었으나 사임하고 귀향하여 관하리(管下里) 영하금원(嶺下琴院)에서 동 지(同志) 사우(士友)들과 춘추(春秋)를 강론(講論)하였다.

배치(裵 絺) 호는 청백(淸白). 조선 세조(世祖) 때 무과에 급제하여 수군만호(水軍萬戶) ․ 울산 부사(蔚山 府使) 등을 거쳐 경상좌도 수군총병(水軍摠兵)에 이르렀다. 정사를 공평하게 처리하였고 세 인(世人)을 교화(敎化)하였으며 백성에게 손해를 끼친 일이 없었고 빈민에게 의복과 식량을 나누어 주니 향민(鄕民)이 청덕거사 비(淸德去思碑)를 세워 송덕(頌德)하였다.

배수광(裵綉光) 자는 일약(日若), 호는 봉암(鳳菴). 조선 세조(世祖) 때 무과에 급제하여 함안 군수(咸安 郡守)를 지냈다. 재임시 정 사를 청백하게 처리하였고, 흉년이 들자 굶주린 백성 구제에 전 심(專心)하니 군민(郡民)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선정(善政)을 치하하였다.

배신(裵 紳) 1520(중종 15) ~ 1573(선조 6) 자는 경여(景餘), 호 는 낙천(洛川). 현풍(玄風) 출신. 조식(曺植) ․ 이황(李滉)의 문 인. 1561년(명종 16) 진사가 되고, 남부 참봉(南部 參奉) ․ 경 기전 참봉(慶基殿 參奉) ․ 경릉 참봉(景陵 參奉)을 지낸 후 사임 했다. 뒤에 천거를 받아 교관(敎官)이 되었다. 현풍(玄風)의 도동 서원(道東書院) 별사(別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배도(裵 壔) 자는 수옥(壽玉), 호는 매곡(梅谷). 1546년(명종 1)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태학(太學)에 있을 때 요승(妖僧) 보우 (普雨)가 세상을 현혹함으로 처참(處斬)을 소청(疏請)하였고, 이 황(李滉)으로부터 승평 교수(昇平 敎授)에 천거되어 제생(諸生) 을 훈회(訓誨)하여 재능에 따라 성취시키고 유풍(儒風)을 진흥하 였다. 정소(鄭沼) ․ 허엄(許淹) ․ 정사익(鄭思翊) 등과 이학(理學) 을 강구(講究)하니 세인이 승평사은(昇平四隱)이라 하였다. 후에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작성하였다.

배영담(裵齡聃) 자는 내익(乃益), 호는 송헌(松軒). 조선 때 시례 (詩禮)의 훈(訓)과 경국(經國)의 사(史)에 박학(博學)하였고, 특 히 정주(程朱)의 서(書)를 정구(精究)하여 「태극도(太極圖) ․ 이기설(理氣設) ․ 성리론(性理論) ․ 중화론(中和論)」등을 편저 (編著)하였다. 1576년(선조 9) 사림의 천거로 창릉 참봉(昌陵 參奉)에 임명되었다.

배진서(裵振緖) 자는 성옥(聲玉), 호는 송강(松岡). 조선 때 선무 랑 별좌(宣務郞 別坐)를 거쳐 황주 목사(黃州 牧使)를 지냈다. 재임시 가재(家財)를 기울여 빈민을 구제하니 백성으로부터 칭 송이 자자하였고, 왕으로부터 승일(乘馹)이 은전(恩典)을 받았다. 자부(子婦) 성산이씨(星山 李氏)는 묘실(廟室)이 화재를 당 했을 때 70세이 노령으로 입실하여 위패(位牌)를 보전하고 전 신에 화상을 입었다. 이 사실을 전문(傳聞)한 조정에서 정려(旌 閭)를 세워 포상하도록 명하였다.

배흥립(裵興立) 1546(명종 1) ~ 1608(선조 41) 자는 백기(伯起), 시호는 효숙(孝肅), 현감 인범(仁範)의 아들. 1572년(선조 5)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결성(結城) ․ 장흥(長興) ․ 흥양(興陽)의 현감(縣監), 영흥 부사(永興 府使)를 거쳐 1592 년 임진왜란 때 조방장(助防將)으로 공을 세워 가선대부(嘉善大 夫)에 승진했다. 1600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이 듬해 전라절도사(全羅節度使), 1604년 공조참판(工曹參判) ․ 충 청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등을 지내고, 1604년 총관(摠管) 으로서 영흥 대도호부(永興 大都護府)에 나갔다가 1608년 병으 로 귀경하여 죽었다. 일찍이 흥양 현감(興陽 縣監)으로 전함(戰 艦)을 많이 건조하여 임진왜란 때에 큰 도움이 되었고, 칠천도 (七川島) 싸움에서 도망한 원균(元均)의 뒤를 맡아 단선(單船) 으로 적의 진격을 지연시켰으며, 한산도 대첩(閑山島 大捷) ․ 행 주대첩(幸州 大捷) 때는 모두 선등(先登)의 공을 세웠고, 특히 이순신의 전보(戰報)에 공신으로 천거되었다. 뒤에 고향에 정문 (旌門)이 세워졌다.

배경가(裵褧可) 자는 장보(章甫), 호는 달천(達川). 일찍이 서사원 (徐思遠) ․ 손처눌(孫處訥)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만시(晩時)에 정구(鄭逑) ․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배웠 다. 임진왜란 때 서사원(徐思遠)을 이병장(義兵將)으로 천거하고 부장(副將)이 되었으나 무탁(無托)한 양친(兩親)으로 인하여 창 의(倡義)에 가담하지 못했다. 류시번(柳時蕃) ․ 류사온(柳思溫) 과 도의상교(道義相交)하였다.

배덕문(裵德文) 자는 숙회(叔晦), 호는 서암(書巖). 일찍이 김희삼 (金希參)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배워 이를 궁행실천(躬行 實踐)하였고, 1561년(명종 16) 언양 현감(彦陽 縣監)이 되었 다. 1563년(명종 18) 형조 좌랑(刑曹 佐郞)을 거쳐 한성부윤 (漢城府尹)을 지냈다. 15 72년(선조 5)에 요승(妖僧) 보우(普 雨)를 물리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김우옹(金宇顒) ․ 정구(鄭逑) 등과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하다가 본주(本州) 교관(敎官)으로 기용되어 많은 인재를 교육시켜 재능에 따라 성취시켰다.

배설(裵 楔) 1551(명종 6) ~ 1599(선조 32) 배덕문(德文)의 자. 무 과에 올라 합천군수 ․ 진주목사시 선정(善政)으로 거사비(去思碑) 를 세우고 본도 우수사(本道 右水使)를 지내고, 선산 부사(善山 府使)시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쌓고 구정칠택(九井七澤)과 혜창 (惠倉)을 설립하였다. 정유재란시 경상도 우수사(右水使)로 장작 구선(거북선)를 만들어 웅천해전, 명랑해전에서 대승하고 한산해 전에서 차전차퇴(且戰且退)하였다. 오랜 수중 생활로 수질이 악 화, 49세로 하세하였다.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자헌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 兵曹判書)에 증직되었다.

배철보(裵哲輔) 자는 성안(聖安), 벽상공신 배위준의 12세손으로 1450년에 생(生)하여 1521년에 사망하였으며 기축년에 성균 관 진사를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를 제수 받으셨고 산음 현감 (山陰 縣監)을 지내셨다. 서랑(壻郞)이 영의정(領議政) 김수동 (金壽童)이다. 자(子)는 어모장군 서생포 만호 균(均) 2子 增

배균(裵 均) 1475 ~ 1520 자는 자연(子衍), 배철보(哲輔)의 자. 무예(武藝)가 특출하여 무과 급제 후 내금위장(內禁衛將), 영국원 종공신(寧國原從功臣), 어모장군 서생포 만호(禦侮將軍 西生浦 萬戶)를 지내셨다.

배순직(裵舜直) 자는 영무(英武), 벽상공신 배위준 공의 14세손이 다. 무예(武藝)가 출중하여 일찍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 중 수문장(守門將)을 지냈으며 그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증직(贈職)되셨다. 배씨가 처음으로 거제 (巨濟)에 입도(入島)하신 분이며 그 후손들이 거제 전역에 산재 하였고, 다수가 살고 있는 배골(梨谷)이라는 곳이 생겨났으며 오늘날에는 공을 주벽으로 모시는 숭모사(崇慕詞)가 세워졌으며 지금도 후손들이 10월 15일에는 향사를 올리고 있다.

배선보(裵善輔) 자는 성원(聖元). 조선때 문과에 급제, 성현도 찰 방(省峴道 察訪)으로 있을 때 당쟁이 계속됨을 개탄하고 관직을 떠나 고령(高靈) 학동(鶴洞)에 은거, 후진양성에 힘썼다. 왕을 위한 충성의 시를 읊었으나 병화(兵火)로 소실되었다.

배몽성(裵夢星) 자는 산보(山甫). 1573년(선조 6) 무과에 급제하 여 수문장(守門將)이 되고,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자 의병을 모아 김천일(金千鎰)을 따라 진주 촉석성(晋州矗石 城)에서 참전했고, 1593년 김시민(金時敏) 등과 함께 전사했다. 병조 참의(兵曹 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시경(裵時褧) 자는 문중(文仲). 호는 소암(巢庵). 일찍이 학문에 전심하고 특히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1585년(선조 1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세상의 혼란함을 보고 과거를 포기 하고 은병산(隱屛山) 밑에 살면서 독서와 후진 교육으로 일생을 마쳤다.

배건(裵 揵) 자는 수부(守夫). 조선 때 음보(蔭補)로 선무랑(宣務 郞)에 오르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이끌고 금산(金山) 여남현(汝南峴)으로 가다가 적병을 만나 역 전끝에 전사했다.

배즙(裵 楫) 자는 통중(通衆), 호는 명암(明庵). 1590년(선조 23) 호방별과(虎榜別科)에 급제하여 사직(司直)이 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개산(開山) 등지에서 왜병(倭兵)과 싸워 많은 공을 세우고 돌아와 선무사(宣撫使)를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丁酉再亂) 때 조방장(助防將)으로 한산도(閑山島)에 출전했고, 다시 노량진(露梁津)에 이르러 혼자서 역전 끝에 적탄(敵彈)에 맞아 순사(殉死)했다. 원종이등훈(原從二等勳)에 오르고, 가선대 부(嘉善大夫) ․ 병조 참판(兵曹 參判) ․ 훈련원사(訓練院事)에 추증되었다.

배명순(裵命純) 1597(선조 30) ~ 1636(인조 14) 자는 수초(遂 初), 시호는 충숙(忠肅).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 선전관 (宣傳官)이 되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인조(仁祖)를 강화도(江華島)에 호종(扈從), 도총부 도사(都摠府 都事) 등 여 러 벼슬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영장(營將) 이 되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결전(決戰)을 주장했으나 주화 론자(主和論者)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화의가 성립된 후 철수하는 청병과 철령(澈嶺)에서 싸워 승리했고, 계속 적을 얕본 주장(主將)의 명령으로 약간 강행군을 하다가 적의 복병을 만나 역전 끝에 전사했다. 병조 판서(兵曹 判書)에 추증(追贈)되 었다.

배시량(裵時亮) 1604(선조 37) ~ 1657(효종 8) 자는 자명(子 明), 공조 참판(工曹 參判) 배흥립(興立)의 아들. 2630년 9월(인 조 8) 무과에 급제, 훈련원 첨정(訓練院 僉正)에 이르러 1635 년 모친상으로 사직, 이듬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경 상좌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민영(閔泳)의 군문에 종군, 민영 이 패사(敗死)하자 대신하여 군대를 지휘했다. 1638년 숙천 부 사(肅川 府使), 이어 경상좌도 우후(虞侯)를 거쳐 양주 목사(楊 州 牧師)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고, 1645년(인조 23) 공청 도 병마철도사(兵馬節度使)가 되어 병사했다.

배상룡(裵尙龍) 자는 자장(子章), 호는 등암(藤庵). 조선 때 정구 (鄭逑)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학문이 뛰어났으므로 제일의 고제 (高弟)로 추앙(推仰)되었다. 선조(宣祖) 때 누차 징명(徵命)이 있었으나 불취(不就)하였고, 인조(仁祖) 때 정언(正言)에 임명되 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 도천서원 (刀泉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상호(裵尙虎) 자는 계장(季章), 호는 괴재(愧齋). 조선 때 정구 (鄭逑)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문장과 도학이 출중하였고, 부모에 대한 효행과 형제의 우애가 극진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 ․ 승정원 좌승지(承政院 左承旨) ․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추증 (追贈)되었다.

배명전(裵明全) 자는 복초(復初). 조선 때 건원릉 참봉(建元陵 參 奉)을 지내고 장흥고봉사(長興庫奉事)를 거쳐 상서원 직장(尙書 院 直長)에 올랐다. 이어 장원서 별제(掌院書 別提)가 되고, 사 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을 거쳐 비안 현감(比安 縣監)을 역임하 였다.

배상유(裵尙瑜) 1610(광해군 2) ~ 1686(숙종 12) 자는 공근(公瑾), 호는 만학당(晩學堂). 현감(縣監) 배명전(命全)의 아들. 류염(柳 淰)의 문인 1671년(현종 12) 추천을 받아 창릉 참봉(昌陵 參 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1677년(숙종 3) 사직서 참봉(社 稷署 參奉)이 되었다가 곧 사직하고 류형원(柳馨遠)의 「반계수 록(磻溪隧錄)」을 탐독, 그 취지에 의거하여 임금의 도리, 정치 의 규모, 전제(田制)에 관한 소신을 상소, 숙종(肅宗)의 가납을 받았다. 낙향 후에는 심성정이기(心性情理氣)의 설을 깊이 연구 했다.

배상보(裵尙輔) 자는 국장(國章), 호는 연정(蓮亭). 1613년(광해 군 5) 선교랑(宣敎郞)에 오르고, 이어 습독관(習讀官)으로 경연 (經筵)에 들었으며, 인조(仁祖) 때 훈련원 주부(訓練院 主簿)를 거쳐 명천 현령(明天 縣令)을 지냈다.

배정휘(裵正徽) 1645(선조) ~ 1709(숙종) 배상호(尙虎)의 손자, 미수 허목(許穆)의 제자로 문과에 급제, 무장 현감(茂長 縣監)을 거쳐 정언(正言)으로 바른 말을 잘하며 전상지호(殿上之虎)라 일컬었다. 숙종, 중종, 민비를 내쫓으려 할 때 3일간 극간 판결사(判 決事)가 되고 누찬관이 되어 바른 말, 이치에 맞는 말만 하였다. 강계무사를 지낸 후 거사비를 세웠다. 글씨를 잘 써 비표(碑表) 가 많이 남아 있다.

배문범(裵文範) 자는 군숙(君叔). 조선 때 무과에 급제하여 전력부 위(展力副尉)로 수문장(守門將)이 되어 도병(道兵)을 이끌고 도 원수(都元帥)를 따라 여러 차례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병조 참 판(兵曹 參判) ․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 副摠官)에 추증 (追贈)되었다.

배이인(裵爾仁) 자는 시효(始孝), 호는 묵암(黙庵). 모친이 질병으 로 생명이 위급할 때 손가락을 끊어 피를 받아먹여 회생케 하였 는데, 조정에서 천문(薦聞)하고 포상(褒賞)을 내렸다. 동몽교관 (童蒙敎官) ․ 지평(持平)에 추증(追贈)되었다.

배무화(裵舞和) 자는 시중(時中), 호는 묵당(黙堂). 1679년(숙종 5)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직강(成均館 直講)이 되고,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을 거쳐 성권 찰방(成權 察訪) ․ 정선 현감(旌 善 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문장이 뛰어났다.

배기종(裵奇鍾) 자는 의서(義瑞), 호는 송정(松亭). 효행이 뛰어나 향리(鄕里) ․ 사림의 천거로 1880년(고종 17) 효자 정문(旌門) 이 세워지고, 통정대부(通政大夫) ․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에 추증(追贈)되었다.

배혜(裵 惠) 호는 북청(北靑). 조선 세조조(世祖朝)에 문과에 급제, 북청 도호부사(北靑 都護府使)를 거쳐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 使)에 이르렀고 재임중에 청백한 목민관(牧民官)으로 지방민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배응경(裵應褧) 자는 회남(晦南), 호는 안촌(安村). 1573년(선조 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76년 식년문과(式年文科) 을과 (乙科)로 급제, 정랑(正郞)을 거쳐 청도 군수(淸道 郡守)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였으며 1595년(선조 28) 순천 부사(順天 府使)가 되고,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영의정(領議政)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나주 목사(羅州 牧使) 에 승진되어 금산(錦山)을 수비하다가 이순신(李舜臣)과 합세, 후진하는 적의 퇴로를 막아 분쇄하려 했으나 관찰사(觀察使) 황 신(黃愼)의 무고로 투옥당했다가 곧 심희수(沈喜壽) ․ 서경주(徐 景주)의 상소로 풀려나 1601년(선조 34) 대구부사(大邱 府使) 를 지낸 후 사직 은퇴(隱退), 김늑(金玏) ․ 김우옹(金宇顒) 등과 교유(交遊)하였고 예조참판(禮曺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인지(裵紉芷) 자(字)는 사수(士秀).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자 청도 군수(淸道 郡守)인 아버지를 도와 창의(倡義)하여 전공 (戰功)이 있어 1593년 군자감 직장(軍資監 直長)에 기용되었고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에 추증되었다.

배상익(裵尙益) 1616년(광해군 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24년 (인조 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전적(典籍) 을 거쳐 전라 ․ 황해도사(黃海道事)를 역임했다. 정묘호란(丁卯 胡亂)때 왕이 강화도(江華島)로 몽진(蒙塵)하자 호종(扈從)하여 일기주서(日記注書)가 되어 사실 기록(史實 記錄)에 힘썼다. 김창군(金昌君) ․ 류정량(柳廷亮) ․ 이식(李埴) 등과 도의교(道義 交)가 있었고 1631년(인조 9) 진주판관(判官)으로 부임도중 죽었다. 봉계서원(鳳溪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치암일고 (痴巖逸稿)」가 있다.

배유화(裵幼華) 자(字)는 화은(華隱), 호는 팔사(八斯). 1667년(현종 8) 음보(蔭補)로 찰방(察訪)이 되고, 1670년 종부사직장(宗簿 寺直長)을 거쳐 1672년 주부(主簿)에 오르고, 이듬해 의금부도 사(義禁府都事)에 이르렀으며 저서로 「팔사유고(八斯遺稿)」가 있다.

배유장(裵幼章) 자(字)는 장은(章隱), 호는 유암(楡巖). 1636년(인조 14) 대소향시(大小鄕試)에 합격하였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으 로 벼슬에 뜻이 없고 오직 학업에 전심하였으며 1655년(효종 6)에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원휘(裵遠徽) 자(字)는 혜보(惠甫), 호는 지암(枝巖). 달천공(達川 公)의 5세손이시며, 재덕을 겸비하고 일찍 경서(經書)를 연구하고 우애가 두터워 학업을 서로 권장하고 의리(義理)를 실행하여 명성을 얻었다. 갑신(甲申)년에 배씨 4파가 합보를 만들 때 일 부에서 날조함에 변정록(卞正錄)을 저술하여 의혹을 설파(說破) 하여 오류를 막았고 후일의 본보기가 됐다.

배정조(裵貞祚) 자(字)는 계경(季卿), 호는 외암(畏巖). 정재(定齋) 류 치명(柳致明)과 지헌(止軒) 최효술(崔孝述) 양선생(兩先生) 문하 에서 공부하였다. 서실(書室)에서 학도들과 성리학(性理學)을 강론(講論)하였고 사자의의(四子疑義)를 편집(編輯)하였으며 소학 도(小學圖)를 저술하였다. 가례복제도(家禮服制圖)를 보완하였고 화담(花潭)위에서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즐기니 제현(諸賢)들이 화담주인으로 추대(推戴)하였다.

배진서(裵振緖): 자는 성옥(聲玉)·경승(景承)이고 호는 송강(松岡)이다. 사복시 주부 배은(垠)과 숙인(淑人) 밀양박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효행과 학행으로 천거되어 상의원 별좌로 벼슬길에 나아가 통정대부 황주목사를 지냈다. 고을을 다스림에 청간(淸簡 : 성품이 깨끗하고 곧음)과 애민(愛民)을 우선하였다. 흉년에 곡식을 방출하여 굶주린 백성을 진휼(賑恤 : 도와줌)하니 강우(江右) 여러 고을의 가난과 굶주린 백성들이 모두 그 은혜를 입었다.

배준(裵埈): 자는 백고(伯高)·여첨(汝瞻)이고 호는 묵암(默庵)이다. 참봉 배진경과 참봉 곽당의 따님인 의인 포산곽씨 사이에서 중종 37년(1542년) 태어났다. 유일(遺逸)로 장사로 훈도를 지내고 여러 관직을 거쳐 안음현감에 이르렀다. 당대의 명사인 용재 이홍기, 예곡, 곽율, 용담 박이장(朴而章) 등과 교유하였다.

배병한(裵炳翰)초휘(初諱)는 욱(煜)이며 자는 여란(汝鸞)이고, 호는 의암(宜庵)이다. 충훈부 도사를 지낸 배영근과 최학문(翯文)의 따님인 양천최씨(陽川崔氏)와의 사이에서 고종 19년(1882년) 3월 3일 고령군 쌍림면 학동에서 태어났다. 면우 곽종석(郭鍾錫)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더 널리 배우고자 하여 대계 이승희(李承熙)와 회당 장석영(張錫英) 두 선생에게서 사사 받았다. 또 동향 출신 홍와 이두훈(李斗勳)‧송강(松岡) 김성하(金聲夏)‧만송(晩松) 한남교(韓南敎) 등과 교유하였다. 사서를 곁에 두고 밥 먹는 것도 잊고 연구에 전념하면서, 학문은 마음과 성품을 다스리기 위해 하는 것이지 사장(詞章)에 힘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1948년 9월 3일 향년 67세로 사망했다.

배규(裵規) : 1382년(고려 우왕 8년)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 태종 때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다.

배윤(裵閏) : 배규의 아들. 1411년(조선 태종 11)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배응경(裵應褧, 1544년 ~ 1602년) : 1576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배극렴: 고려 문하시중, 조선 개국공신, 조선 문하좌시중[4]

배명순(裵命純, 1597년 ~ 1637년) :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하고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배정휘(裵正徽, 1645년 ~ 1709년) : 배설의 증손. 1673년(현종 14)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평강현감을 역임하였다.

배용순: 윤봉길의 부인

배성룡(裵成龍, 1896년 ~ 1964년) : 통일독립촉진회 조직에 참여해 상무집행위원, 조직국장 등을 지내면서 남북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현대 인물
* 배영호(裵泳鎬) : 제21대 법무부 장관
* 배정현(裵廷鉉, 1909년 ~ 1978년) : 대법관
* 배수곤(裵秀坤, 1923년 ~ 2007년) : 제5대 은행감독원장
* 배상태(裵相台) : 대한민국의 작곡가
* 배영식(裵英植) : 제18대 국회의원
* 배일도(裵一道) : 제17대 국회의원
* 배건우: 유튜버
* 배기성: 가수.
* 배다빈: 배우.
* 배진아: 트로트 가수
* 배아현: 트로트 가수
* 배수지: 가수,배우
* 배지연: 모델
* 배진아: 배우
* 배재성: 모델, 배우
* 배보람: 배우
* 배단희: 배우
* 배수현: 배우,모델
* 배강희: 배우
* 배영만: 코미디언.
* 배영식: 국회의원.
* 배영호: 법조인.
* 배용준: 배우.
* 배우희: 가수.
* 배지현: 前 아나운서.
* 배승민: 가수

4.4. 문과 급제자

《생원시》
배상룡(裵象龍)
배상익(裵尙益)
배석기(裵石麒)
배성오(裵星五)
배순명(裵順命)
배승희(裵升喜)
배영수(裵穎秀)
배윤명(裵胤命)
배응경(裵應褧)
배응곤(裵應袞)
배익휘(裵益徽)
배준민(裵俊敏)
배진강(裵振綱)
배진휘(裵晉徽)
배충범(裵忠範)
배한(裵閑)
배한룡(裵漢龍)||
《진사시》
배상익(裵尙益)
배상호(裵尙虎)
배석곤(裵錫坤)
배순룡(裵舜龍)
배신(裵紳)
배우(裵祐)
배유화(裵幼華)
배윤성(裵胤性)
배윤장(裵允章)
배윤휴(裵胤休)
배이장(裵以章)
배장환(裵章煥)
배정휘(裵正徽)
배정희(裵鼎喜)
배준수(裵俊秀)||

5. 관련 유적지

  • 고금 성산배씨삼강문(古今 星山裵氏三剛門)은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 농상리에 있는 삼강문이다. 2014년 12월 24일 완도군의 향토문화유산 제18호로 지정되었다.충신 배득세(裵得世), 효자 배응규(裵應奎)·배환규(裵煥奎), 효자 배성규(裵性奎)·열녀 《창녕성씨》(昌寧成氏, 배성규의 처) 등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1871년(고종8)에 충신·효자·열녀에 대해 추증교지가 내려지고, 1872년(고종 9) 정려가 내려진 후 삼강문이 건립되었다.
  • 성주배씨지려비(星州裵氏之閭碑)1764년(영조40년)에 태어나 1788년(정조 12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효부이면서 열녀였던 성주 배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밀양 박씨인 남편 박후성(朴厚成)에게 시집을 갔으나 남편인 박후성이 병에 걸리자 보다 못한 그녀는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선혈을 남편 입안으로 떨어드려 얼마동안 원기를 회복하도록 하였다.그녀는 남편이 죽은 뒤에 80세가 넘은 시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러나 시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남편 대신에 3년 시묘를 하고 그해 남편 제삿날에 제사를 지낸 뒤 스스로 남편의 뒤를 좇아 자결하였다.배부인의 뛰어난 효행과 열행을 조정에서도 알게 되어 정려가 내려와 1910년(융희4년) 4월 27일 후손들이 비를 세웠다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옥성리 산72-3에 경상북도 기념물 성주 옥성리 의열각(星州玉星里義烈閣)이 있다. 독립운동을 하다 죽은 이경환의 아내,《성주 배씨》 배순희(裵순희, 1902. 4. 23 ~ 1902. 6. 11)의 충절(忠節)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흥안재(興安齋)의 소재지는 경북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이며 성산배씨 시조(始祖) 배위준(位俊:壁上功臣)의 현손(玄孫)인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배인경(仁慶)이 고려 원종(元宗:1260~1274) 때 문망이 뛰어나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보문각 직학사(普文閣直學士) 등을 역임하면서 크게 활약하고 년로하여 고향으로 떠나니 충숙왕(忠肅王:1314~1330)이 궤장(机杖:책상과 지팡이)을 내리며 흥안부원군에 봉했다. 흥안재는 그 유업을 추모하는 재각(齋閣)이다.
  • 숭덕사(崇德祠)의 소재지는 경북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흥안재 내로 성산배씨 시조 삼중공(三重公:壁上功臣.三重大匡:諱 位俊)공과, 公의 현손(玄孫)인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諱 仁慶)을 향사하는 사당이다. ※양 5월 5일 재향을 올린다.
  • 흥안부원군 유허비(興安府院君 遺墟碑)의 소재지는 경북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흥인재 내로 흥안부원군 성산배공(興安府院君 星山裵公 諱 仁慶) 유허비(遺墟碑)이다.
  • 모도재(慕道齋)의 소재지는 경북 성주군 용암면 계상리(조실) 157번지로 시조 벽상공신 삼중대광 배위준(位俊)의 7代孫인 자헌대부 공조판서(資憲大夫工曹判書) 배진손(晋孫) 이하 후대 재실이다. ※ 향사일은 음력 10월 2일이다.
  • 공조판서 아당공 신도비(工曹判書 我堂公 神道碑)의 소재지는 경북 성주군 용암면 계상리(조실) 157번지 모도재 내로 성산배씨 8세 자헌대부 공조판서(資憲大夫工曹判書) 배진손(晋孫)의 신도비이다.
  • 대사간 화당공 신도비(大司諫 花堂公 神道碑)의 소재지는경북 성주군 용암면 계상리(조실) 157번지 모도재 내로 자헌대부 공조판서(諱 晋孫)공의 長子. 가의대부 사간원대사간(嘉義大夫司諫院大司諫) 화당(花堂) 諱 규(規)공의 신도비이다.
  • 평암정(平巖亭)의 소재지는 경북 성주군 수륜면 계정1리(당목)으로 화당공의 현손(玄孫) 참봉(諱 게(土+自)공의 5대손 평암(平巖) 배순상(舜裳)을 추모하는 정자이다. ※평암선생 문집 3권 1책의 목판이 보관되어있다.
  • 죽남재(竹南齋)의 소재지는 경남 거창군 남하면 지산리(장전)으로 참봉(諱 게(土+自)공의 10대손 증 호조판서(贈戶曹判書) 배두필(斗必.일명 斗弼)과 증가선대부(贈嘉善大夫) 배두원(斗元)의 재실이다.
  • 충의사(忠義祠)의 소재지는 경남 거창군 남하면 지산리(장전)리로 참봉(諱 게(土+自)공의 10대손 증 호조판서(贈戶曹判書) 배두필(斗必.일명 斗弼:양무원종1등공신)과 증 가선대부(贈嘉善大夫) 배두원(斗元)을 모신 사당이다.  ※향사일은 청명날 아침과  음 9월 9일 아침이다.
  • 영사재(永思齋)의 소재지는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 474번지로 참봉(諱 게(土+自)공의 10대손 모재공(慕齋公) 배석봉(錫鳳:黃金洞 入鄕祖)의 재실이다.
  • 경모재(景慕齋)의 소재지는 경북 성주군 선남면 명포1리(금계)리로 화당(諱 規)공의 현손(玄孫) 생원(生員 휘 탄(坦)공과 公의 次子 참봉공(參奉公) 배진기(振紀)의 재실이다. ※향사일은 음력 10월 4일이다.
  • 친목당(親睦堂)의 소재지는 대구시 동구 봉무동 389번지(단산)>으로 생원(諱 坦)공의 8대손 배원갑(遠甲)의 재실이다. 원갑의 형 단구공(丹邱公) 배원중(遠中)이 단산(丹山)에 단구(丹邱)라는 정자를 지어 아우인 원갑과 더불어 강론하며 저서를 해 왔는데, 화재로 모두 소실되어 그 후 원갑의 후손들이 다시 세웠다.
  • 이강재(离岡齋)의 소재지는 경북 청도군 풍각면 안산2리(안태)으로 생원(諱 坦)공의 6대손 승사랑(承仕郞) 배명선(命善)의 재실이다. ※현판은 오세창(吳世昌)선생의 친필이다.
  • 낙유재(樂裕齋)의 소재지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옥화2리(杏村)로 생원(諱 坦)공의 7대손으로 옥화리 입향조인 옥담공(玉潭公) 배이도(爾度)와, 公의 子 통훈대부(通訓大夫) 배중상(重尙), 손(孫) 배적(籍) 등 3위를 모시는 재실이다. ※향사일은 음력 10월 14일이다.
  • 미강서원(美岡書院).명덕사(明德祠)의 소재지는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대리로 화당(諱 規)공의 현손(玄孫) 매곡공(梅谷公) 배 도(璹)의 위패를 명덕사에 봉안하여 유림향사(儒林享祀)하는 서원이다. ※향사일은 음력 2월 19일과 8월 19일니다.
  • 모의재(慕義齋)의 소재지는 경북 고령군 덕곡면 본2리(승암동)으로 매곡(諱 璹)공의 손자(孫子) 서암공(棲岩公) 배번(藩:勝岩 入鄕祖) 이하 후손의 재실이다. ※향사일은 음력 10월 15일이다.
  • 경귀재(景歸齋)의 소재지는 경북 성주군 월항면 보암리로 매곡(諱 璹)공의 6대손 귀암공(歸巖公) 배근상(根商:甫岩 入鄕祖)의 재실이다.
  • 한천재(寒泉齋)의 소재지는 전북 무주군 설천면 두길리(벌한)으로 화당(諱 規)공의 증손(曾孫:諱 哲輔:山蔭縣監)의 6대손이며, 무주 설천 입향조인 한천재(寒泉齋) 배치무(峙武)의 재실이다.
  • 성산배씨 3세 4현 유적비(星山裵氏三世四賢遺蹟碑)로 소재지는 경북 고령군 쌍림면 하거1리로 화당(諱 規)공의 증손(曾孫) 성현도찰방(省峴都察訪) 휘 선보(善輔), 子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배은(垠), 孫 모재공(慕齋公) 배진경(振經), 송강공(松岡公) 배진서(振緖)의 4賢 유적비이다.
  • 회은정(晦隱亭)의 소재지는 경북 고령군 쌍림면 하거1리로 화당(諱 規)공의 증손(曾孫) 성현도찰방(省峴都察訪) 배선보(善輔)의 호(號:晦隱)를 따라 지은 정자이다.
  • 용계정(龍溪亭)의 소재지는 경남 합천군 야로면 청계리 송골로 화당(諱 規)공의 증손(曾孫)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 배선보(善輔)의 재실이다.
  • 효열부 성산이씨 정려각(孝烈婦星山李氏旌閭閣)로 소재지는 경북 고령군 쌍림면 하거1리로 찰방공(察訪公 諱 善輔)의 증손(曾孫) 통덕랑 배두(山+斗)의 배위 성산이씨(星山李氏)가 집에 화재가 나자 사당에 모셔진 시부모와 부군의 신주를 내 오려다 불더미 속에서 신주를 안은채 절명하였다. 나라에서 이 사실을 알고 효열정려(孝烈旌閭)를 내렸다.
  • 배흥립 3대 삼강정려각(裵興立三代三綱旌閭閣)의 소재지는 경북 김천시 조마면 신안3리로 화당(諱 規)공의 孫子, 진사(進士 允詢)공의 증손(曾孫), 증 좌찬성(贈左贊成) 배인범(仁範)의 배위 증 정경부인 경주김씨(慶州金氏)의 열(烈), 公의子 효숙공(孝肅公) 배흥립(興立)의 효(孝), 公의 曾孫 충숙공(忠肅公) 배명순(命純)의 충(忠)을 으뜸의 비리[綱]로 삼아 모범이 되었을 때 내리는 정려이다.
  • 삼강정려각(三綱旌閭閣)의 소재지는 전북 정읍시 정우면 수금리 금복>. 위 烈.孝.忠의 정려각이 정읍에도 모셔졌다.
  • 배흥립 장군(裵興立將軍)의 사우(祠宇)의 소재지는 경북 김천시 구성동 광명리로 진사(諱 允詢)공의 현손(玄孫) 효숙공(孝肅公) 배흥립(興立:贈左贊成.宣武原從1等功臣)의 사우이다.
  • 배흥립 장군 충현비(裵興立將軍忠顯碑)의 소재지는 전라남도 고흥군 과역면 공원 내로 배흥립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흥양(고흥)현감으로 이순신 장군의 전라좌수영함대에 소속되어 옥포, 당포, 한산도, 부산해전 등 전공을 기리는 충현비이다.
  • 효숙공(孝肅公) 배흥립 시도비(裵興立神道碑)의 소재지는 경북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대방으로 효숙공(孝肅公) 휘 흥립(興立:贈左贊成.宣武原從1等功臣)의 신도비이다.
  • 충숙공 묘비(忠肅公墓碑)의 소재지는 경북 성주군 용암면 계상동으로 효숙공(諱 興立)의 손자 충숙공(忠肅公) 후(諱) 명순(命純:贈兵曹判書.井邑入鄕祖)의 묘비.
  • 모선재(慕先齋)의 소재지는 충남 공주시 반포면 마암리1구로 진사(諱 允詢)공의 5대손이며 공주 입향조인 초정공(草亭公) 배 천우(天佑)이하 후손의 재실이다.
  • 첨모재(瞻慕齋)의 소재지는 대구시 달성군 옥포면 송촌리로 증병조참판 배문범(文範) 이하 후손의 재실이다.
  • 모원재(慕遠齋)의 소재지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옥련리 상삼으로 화당(諱 規)공의 次子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배윤(閏:上三入鄕祖)의 재실이다.
  • 열부 정부인 수성나씨 정려각(烈婦貞夫人壽城羅氏旌閭閣)의 소재지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옥련리 상삼으로 직제학공 諱 윤(閏)의 배위 수성나씨(壽城羅氏)가 부군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예에 따라 단발(斷髮)하고 수묘(守墓)하였다. 정부인의 열행(烈行)에 나라에서 정문(旌門)을 내렸다.
  • 안렴사공 유허비각(按廉使公遺墟碑閣)의 소재지는 충북 영동군 용산면 시금리 구비대로 공조판서(諱 晋孫)공의 次子, 서도안렴사(西道按廉使) 배구(矩:9세)의 묘소는 함경도 영흥에 있으나, 후손들이 이 자리에 유허비각을 모셨다.  ※시제일은 음력 10월 1일이다.
  • 원모재(遠慕齋)의 소재지는 충북 영동군 용산면 시금리 구비대로 안렴사(諱 矩)공의 子, 청산현감공(靑山縣監公) 배온(蘊:永同入鄕祖.10세) 이하 후손의 재실이다.  ※시제일은 음력 10월 1일이다.
  • 경림재(敬臨齋)의 소재지는 충북 영동군 양강면 구강리로 청산현감(諱 蘊)공의 현손(玄孫), 경릉참봉(敬陵參奉) 배서(敘:14세손)의 재실이다.
  • 추원재(追遠齋)의 소재지는 충북 영동군 심천면 기호리로 청산현감(諱 蘊)공의 10대손, 증통정대부 예조참의 배여일(汝一:17세손) 이하 후손의 재실이다.
  • 추모재(追慕齋)의 소재지는 충북 영동군 양산면 죽산리 오정동으로 청산현감(諱 蘊)공의 8대손, 증가선대부 병조참판 회봉공(晦峰公) 배후도(後度:18세손), 배종도(宗度), 회의공(晦義公) 배시도(時度) 이하 후손의 재실이다.
  • 모의당(慕義堂)의 소재지는 충북 영동군 심천면 기호리로 증가선대부 병조참판(贈嘉善大夫兵曹參判) 배후도(後度)공이 수학하던 곳이다.
  • 회봉공 신도비(晦峰公神道碑)의 소재지는 충북 영동군 양산면 죽산리 오정동으로 증가선대부 병조참판(贈嘉善大夫兵曹參判) 배후도(後度:호 晦峰)의 신도비이다.
  • 수양당 효행비(滫養堂孝行碑)의 소재지는 충북 영동군 심천면 명천리로 청산현감(諱 蘊)공의 10대손, 수양당(滫養堂) 배성오(星五:20세손)가 모부인(母夫人) 병환에 단지(斷指)하였고, 부친의 상(喪)에 여묘(廬墓)했다.
  • 수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壽嘉善大夫同知中樞府使) 배용당(龍唐)의 유적비(遺蹟碑)의 소재지는 충북 영동군 양강면 구강리로 청산현감(諱 蘊)공의 11대손, 수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휘 용당(龍唐:21세손)의 유적비이다.
  • 효자 정려각(孝子旌閭閣)의 소재지는 충북 영동군 용산면 율리 전주동으로 청산현감(諱 蘊)공의 11세손, 증호조참판 이이당(怡怡堂) 배흥당(興唐:21세손)과 公의 子 통덕랑 병와공(病窩公) 배 진호(鎭浩)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각이다.
  • 성균진사공(成均進士公) 배현(俔)의 단의 소재지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 뒷개(後浦)로 공조판서(諱 晋孫)공의 3子이며, 성균진사(成均進士) 배현(俔:9세손)의 보사단비(報祀壇碑)이다.  ※향사일은 음력 10월 14일이다.
  • 증 이조판서 서암공(贈吏曹判書書巖公) 신도비(神道碑)의 소재지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 뒷개(後浦). 숭조대(崇祖臺) 內는 성균진사(諱 俔)공의 7대손,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서암(書巖) 배덕문(德文:義兵長, 宣武原從2等功臣:後浦入鄕祖)의 신도비이다. ※향사일은 음력 10월 15일이다.
  •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 諱 楔)공 신도비(神道碑)의 소재지는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 뒷개(後浦)숭조대(崇祖臺) 內로 증 이조판서(諱 德文)공의 長子,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된 서강(西岡) 배설(薛:宣武原從1等功臣)의 신도비이다. ※향사일은 음련 10월 15일이다.
  • 금오산성 사적비(金烏山城事蹟碑)의 소재지는 경북 구미시 금오산 도립공원 내로 임진왜란 때 선산부사(善山府使)였던 배설(裵楔)장군이 성을 중수(重修)하였으며, 성안(內)에 구정칠택(九井七澤)을 팠다는 사적비이다
  • 증병조참의(贈兵曹參議 諱 楗)공 유허비(遺墟碑)의 소재지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 뒷개(後浦). 숭조대(崇祖臺) 內로 증 이조판서(諱 德文)공의 次子, 의병장으로 여남현전투에서 순절한 고암(高巖) 배건(楗:贈兵曹參議)의 유허비(遺墟碑)이다. ※향사일은 음력 10월 15일이다.
  • 증병조참판(贈兵曹參判 諱 楫)공 유허비(遺墟碑)의 소재지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 뒷개(後浦). 숭조대(崇祖臺) 內로 증 이조판서(諱 德文)공의 三子, 선무사(宣撫使)를 거쳐 가선대부 병조참판(嘉善大夫兵曹參判)에 증직된 명암(明庵) 배즙(楫:宣武原從2等功臣)의 유허비이다. ※향사일.음10월 15일.
  • 숭정처사(崇禎處士 諱 尙龍)공 유허비(遺墟碑)의 소재지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 뒷개(後浦). 숭조대(崇祖臺) 內로 증 병조판서(諱 楔)공의 長子, 한강(寒岡:鄭逑)문인, 숭정처사 등암(藤菴) 배상룡(尙龍:道川書院配享)의 유허비이다. ※향사일은 음력 10월 15일이다.
  • 증 승정원 좌승지(贈承政院左承旨 諱 尙虎)공 유허비(遺墟碑)의 소재지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 뒷개(後浦). 숭조대(崇祖臺) 內로 증 병조판서(諱 楔)공의 次子, 한강(寒岡:鄭逑)문인, 승정원좌승지에 증직된 괴재(愧齋) 배상호(尙虎:道川書院配享)의 유허비이다. ※향사일은 음력 10월 15일이다.
  • 등암 영각(藤菴影閣)의 소재지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 뒷개(後浦)로 숭정처사(崇禎處士) 등암(藤菴) 배상룡(尙龍)의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 도남재(道南齋)의 소재지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 뒷개(後浦)로 등암공(藤菴公) 뱌상룡(尙龍)과 괴재공(愧齋公) 배상호(尙虎) 형제분의 재실이다. ※양공(兩公)의 문집 목판이 소장되어 있다.
  • 인산서당(仁山書堂)의 소재지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 (全仁)로 증승정원좌승지 괴재공(愧齋公) 배상호(尙虎)가 학문을 익히던 곳이다.
  • 좌승지 고촌공 묘비(左承旨孤村公墓碑)의 소재지는 경북 성주군 성주읍 금산리 지남동으로 증승정원 좌승지(諱 尙虎)공의 손자, 좌승지(左承旨) 고촌(孤村) 배정휘(正徽)의 묘비이다.
  • 식호정(式好亭)의 소재지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1리 (全仁)로 괴재(愧齋 諱 尙虎)공의 孫子, 좌승지 고촌(孤村) 배정휘(正徽:眉叟文人)가 학문을 닦았던 곳이다.
  • 충효각(忠孝閣)의 소재지는 대구시 동구 동내1동으로 증병조판서(諱 楔)공의 三子이며, 안심(安心) 입향조인 괴암(槐庵 諱 尙藻)공의 曾孫子, 증 예조참판(贈禮曹參判) 배이인(爾仁)이 부모의 병환에 단지주혈(斷指注血)하였고, 국상(國喪)에 설단망곡(設壇望哭)하는 등 公의 충(忠)과 효(孝)를 기려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내렸다.
  • 만모재(晩慕齋)의 소재지는 경북 고령군 덕곡면 노2리 명곡(서우재)로 증 이조판서(諱 德文)공의 三子이며, 명곡(서우재)입향조인 명암(明庵 諱 楫:贈兵曹參判.宣武原從2等功臣)이하 후손의 재실이다.
  • 성산배씨 4현 유지비(星山裵氏四賢遺址碑)의 소재지는 경북 고령군 덕곡면 노2리 명곡(서우재)로 명곡 입향조인 명암(明庵 諱 楫 贈兵曹參判)이하, 公의 子 군자감정(軍資監正 諱 泰海), 公의 子 명곡공(明谷公 諱 世逸), 公의 子 성심재(省心齋 諱 振鐸) 등 4현의 행적을 기리는 유지비이다.
  • 문성재(文星齋)의 소재지는 경남 하동군 북천면 서황리 서황으로 성균진사(諱 俔)공의 7대손 처사공(處士公) 배희문(希文:河東入鄕祖)의 재실이다.
  • 성산배씨 제단 사적비(星山裵氏祭壇事蹟碑)의 소재지는 전남 순천시 해룡면 선월리 선월로 성균진사(諱 俔)공의 次子, 영암군수(靈巖郡守) 배영성(永成:順天入鄕祖)이하, 장흥부사(長興府使) 배을유(乙儒), 병마사(兵馬使) 배극귀(克貴), 학생공 휘 극검(克儉), 군수공 배용해(龍海), 학생공 배용봉(龍鳳), 학생공 배진선(震線) 등을 제향하는 단비(壇碑)이다.
  • 장산재(長山齋)의 소재지는 전남 순천시 해룡면 선월리 선월로 영암군수(諱 永成)공의 현손(玄孫), 배억련(億璉:通政大夫) 이하 후손들의 재실이다.
  • 월림정(月林亭)의 소재지는 전남 순천시 해룡면 선월리 선월로 영암군수(諱 永成)공의 13대손인, 돈암공 배양진(亮珍)이 학문 하던 곳이다.
  • 효열부 숙인 창원정씨 정려비(孝烈婦淑人昌原丁氏旌閭碑)의 소재지는 전남 순천시 해룡면 선우리 선월로 영암군수(諱 永成)공의 14대손인, 농은공(農隱公) 배갑종(甲鍾)의 배위, 창원정씨(昌原丁氏)의 효열비(孝烈碑)이다.
  • 녹야당 묘비(綠野堂墓碑)의 소재지는 충북 청원군 남이면 척산리 척산으로 동암(東庵:諱 晋后.8세)공의 子이며, 녹야당공파의 파조(派祖)인 집현전직제학 증자헌대부 예조판서(集賢殿直提學 贈資憲大夫禮曹判書) 녹야당(綠野堂) 배유(裕)의 묘비(墓碑)이다.
  • 정절공 극렴묘(貞節公克廉墓)의 소재지는 충북 괴산군 증평읍 송산리 송오로 조선개국1등공신 정절공(貞節公) 배극렴(克廉: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星山伯.星山裵氏 7世)의 墓.
  • 경절재(景節齋)의 소재지는 충북 괴산군 증평읍 송산리 송오로 조선개국1등공신 성산백(星山伯) 정절공(貞節公:諱 克廉:領議政)의 재실이다.
  • 정절공 신도비(貞節公神道碑)의 소재지는 충북 괴산군 증평읍 송산리 송오로 조선개국1등공신 성산백(星山伯) 정절공(貞節公:諱 克廉:領議政)의 신도비(神道碑)이다.
  • 정절공 부조묘(貞節公不祧廟)의 소재지는 전북 김제시 백구면 마전리 2구로 조선개국1등공신 성산백(星山伯) 정절공(貞節公:諱 克廉:領議政)의 불천위(不遷位) 사당(祠堂)이다.  ※향사일은 양력 4월 1일이다.
  • 경절사(景節祠)의 소재지는 경북 성주군 성주읍 대황2리로 정절공(貞節公 諱 克廉)과 배위(配位) 정경부인 순흥안씨(順興安氏), 季配 정경부인 김해김씨(金海金氏)를 모신 사당(祠堂)이다.
  • 영모재(永慕齋)와 정절공 신도비(神道碑)의 소재지는 경북 성주군 성주읍 대황2리로 조선개국1등공신 성산백(星山伯) 정절공(貞節公 諱 克廉)의 재실과 신도비이다.
  • 합포성지(合浦城址)의 소재지는 경남 마산시 회원구 합성동으로 경상우도 병영성(兵營城)으로 당시 부원수 배극렴(裵克廉)이 왜구를 막을 목적으로 우왕 4년(1378) 9월부터 11월까지 3개월에 걸쳐 쌓았다. ※경남 유형문화재 제153호이다.
  • 덕숭재(德崇齋)의 소재지는 전북 완주군 화산면 춘산리 덕동으로 성산배씨 24세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 배욱훈(稶勳)의 재실이다.
  • 배문술 효자 정려각(裵文述孝子旌閭閣)의 소재지는 경북 문경시 가은면 하괴리로 성산배씨 27세손, 증병조참판(贈兵曹參判) 배문술(文述)의 효자정려각(孝子旌閭閣)이다.
  • 성산배씨 삼강문(星山裵氏三綱門)의 소재지는 전남 완도군 고금면 농상리로 성산배씨 20세손, 황명(皇明 得世)공의 충(忠), 公의 8대손 석하(石下 應奎)공 균암(均庵 煥奎)공의 효(孝), 재암(齋庵 性奎)공의 배위 昌寧成氏의 효열(孝烈)로 나라에서 정문을 내림.
  • 고금도 4진 설립기념비(古今島四津設立記念碑)의 소재지는 전남 완도군 고금면 가교리로 성산배씨 26세손, 용양위대호군 해수(海叟) 경룡(熲龍)이 완도 네곳에 도선장 설치 기념비.
  • 송암공충절추모비(松菴公忠節追慕碑)의 소재지는 전남 고흥군 동강면 청송리 하송으로 성산배씨 19세손, 송암(松菴 應祿:敦寧府主簿.宣武原從2等功臣)충절을 추모하는 비(碑)이다.
  • 장동재(壯洞齋)의 소재지는 전남 보성군 벌교읍 대포리 장동으로 성산배씨 26세손, 증병조판서 배중곤(重袞)의 재실이다. 시재일은 음 10월 15일이다.
  • 배씨정(裵氏井)의 소재지는 경북 성주군 성주읍 예산3리 입구로 미은(薇隱 克明:7세)공의 7대손, 증예조참판 백헌(栢軒) 배현복(玄福)의 딸이 임진왜란 중 왜적에게 잡혀가다가 신례동 우물에서 물을 먹는척 하며 몸을 던져 정절을 지킨 우물이다.
  • 관당공 묘비(管堂公墓碑)의 소재지는 경북 성주군 성주읍 학산리로 미은(薇隱 克明:7세)공의 8대손, 호분위좌부장(虎賁衛左部長) 관당(管堂) 배무범(武範)의 묘비이다.
흥안재(興安齋)
  • 성주 배씨 사당 흥안재 - 배위준과 배인경의 위패를 봉안해 매년 5월 5일 향사를 올리고 있다.


[1] 배현경에 대해서는 경주 배씨의 중시조라고도 한다.[2] 고려 개국공신의 후예 배문裵門의 일부에서는 끝까지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추종을 거부했다. 배문우裵文祐(고려 직제학直提學)·배상지裵尙志(고려 판복시사判僕寺事)는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고 학자 배을서裵乙瑞도 왕자(방원芳遠)의 사부를 삼겠다고 이성계가 여러 차례 부르는데도 나아가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켰다.[3] 관서부자(關西夫子)는 원래 중국 후한(後漢) 때의 양진(楊震)을 가리킨다. 양진은 성품이 몹시 청렴결백하고,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여러 서책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경전에 특히 밝아서 당시의 선비들이 ‘관서공자(關西孔子)’라고 칭하였다. 배규(裵規)를 양진(楊震)에 빗대어 관서부자(關西夫子)라고 불렀다.[4] 문하좌시중은 문하좌정승을 거쳐 좌의정으로 변한다. 이런 점에서 태조 때 문화좌시중을 지낸 배극렴은 초대 좌의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영의정은 태종 때에 가서야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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