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시량 裵時亮 | |
<colbgcolor=#94153e'><colcolor=#ffc224,#db9e00> 출생 | 1604년(선조 3) |
경상도 김천현(?) (現 경상북도 김천시) | |
사망 | 1657년(효종 8년)(향년 54세) |
전라도 장수현[1] (現 전라남도 장수군) | |
자 | 자명(子明) |
묘소 |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무건리 수좌동 |
본관 | 성주 배씨 |
부모 | 부친 - 배흥립(裵興立) 모친 - 여산 송씨 송계조(宋繼祖)의 딸 |
형제 | 큰형 - 배시망(裵時望) 작은형 - 배시준(裵時俊) |
배우자 | 영산 신씨(靈山辛氏) |
자녀 | 장남 - 배명호(裵明虎) 차남 - 배명생(裵命生) |
관직 | 숙천부사, 경상좌도우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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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후기의 무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명(子明). 아버지는 배흥립(裵興立)이다.2. 생애
27세가 되던 1630년(인조 8) 식년시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종성판관(鍾城判官) 등 여러 관직을 거쳐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에 이르렀으나 1635년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했고, 다음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민영(閔泳)의 군대에서 종군하다가, 민영이 전투에 패해 사망하자 그를 대신하여 근왕병을 이끌고 충주에 이르렀으나 호란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해산하였다.1638년(인조 16) 숙천부사, 경상좌도우후를 거쳐 양주목사로 있을 때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에 녹훈되었고, 1645년(효종 5) 공청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공청병사로 재직 중이던 1646년 공청도 이산(尼山) 등지에서 안익신 등이 주도하여 변란이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다는 지적에 따라 삭직되었다.
1649년(효종 즉위)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복직되었고, 1651년(효종 2) 경기도수군절도사·포도대장을 거쳐, 1657년(효종 8) 전라도병마절도사로 재직하며 각 고을을 순시하다가 장수현에서 세상을 떠났다.
무인이면서도 반가의 법도를 지키고 행동을 절제하였으며, 스스로 욕심을 버리고 근신하여 여러 고을을 다스리면서도 부정으로 재산을 축적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1657년 배시량이 세상을 떠나자 효종은 큰 재목을 잃었다며 슬퍼했다. 효종은 배시량에게 삼도감사열읍수령(三道監司列邑守令)을 명하여 호상하게 하였다.
[1] 장수현은 지금의 장수군 장수읍 · 천천면 · 계남면 · 장계면 · 계북면 일대 지역으로 읍치(邑治)는 장수읍 장수리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