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BF3333><colcolor=#fbe673> 배명순 裵命純 | |||
출생 | 1597년 | ||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 | |||
사망 | 1636년 | ||
묘소 |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계상리 | ||
관직 | 절충장군 함경북도병마우후 덕원도호부사 | ||
가족관계 | 조부:배흥립(裵興立) | ||
부친: 배시망(裵時望) | |||
처가: 의성 김씨(義城金氏) | |||
자녀: 배상경(裵尙瓊), 배상행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BF3333><colcolor=#fbe673> 본관 | 성주 배씨 | |
자 | 수초(遂初) | ||
시호 | 충숙(忠肅)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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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 김천 출신의 무신. 본관은 성산. 자는 수초(遂初). 할아버지는 효숙공(孝肅公) 배흥립(裵興立)이고, 아버지는 배시망(裵時望)이다.2. 생애
배명순은 1597년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에서 배시망(裵時望)의 아들로 태어났다.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청의 선전관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발생하여 인조가 강화도에 후금을 치려 했다. 이에 배명순은 안릉(安陵)에서 후금 군인 300명의 목을 베는 공적을 세워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에 승진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발생하고 왕이 40여 일간 남한산성에 포위되었다.
배명순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철수하는 청나라 군대를 철령에서 맞아 싸워 크게 이겼다. [1]
남산역(南山驛)까지 추격하였으나 피로에 치진 배명순의 병사들이 매복한 청나라 병사들의 기습을 받아 패하였고, 선봉에서 맹렬히 맞선 배명순도 병사들과 청나라 군대에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