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4 14:31:42

백두산(밴드)

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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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뷔 1986년
활동 년대 1980년대 ~
활동 유형 그룹(남성)
현재 멤버 유현상(리더, 보컬, 기타), 김창식(베이스), 박찬(드럼)
데뷔 앨범 정규 1집 Too Fast! Too Loud! Too Heavy! (1986년)
소속사 백두산엔터테인먼트[2]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웹사이트 백두산 팬카페

1. 개요2. 연혁
2.1. 전성기2.2. 침체기2.3. 백두산은 다시 일어서는가2.4. 2020년대 백두산 근황
3. 나는 가수다 2 출연4. 정규 음반5. 여담6. 대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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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1세대 헤비메탈 그룹으로, 시나위, 부활과 함께 한국의 80년대 밴드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3대 밴드 중 하나, 그 중에서도 가장 과격하고 가장 헤비한 사운드를 냈던 밴드다. 보컬 유현상, 기타 김도균, 드럼 박찬, 베이스 김창식. 안타깝게도 공식적인 발표는 없지만 김도균은 탈퇴한 것으로 보인다.

2. 연혁

2.1. 전성기

1970년대 후반부터 미8군 부대를 중심으로 '라스트 찬스', '사계절', '사랑과 평화' 등의 기타리스트로[3] 활동하던 유현상은 당시에 서라벌 레코드사 음반기획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언더그라운드에서 헤비메탈 붐이 일자 사비를 털어 당시 '솔로몬'이라는 밴드의 멤버였던 기타리스트 김도균을 영입해서 밴드 백두산을 결성한다. 초기 5인조에서 세 명을 내보내고, 유현상의 옛 동료 베이시스트 김창식, 드러머 한춘근 등을 영입하여 1집 음반을 내고 데뷔한다.[4]

이 당시 이미 유현상, 김창식, 한춘근은 30대 중반이 넘어가던 베테랑 뮤지션이었고, 김도균은 20대 초반의 젊은 기타리스트였다. 이걸 보면 알겠지만, 신인의 입장에서 풋풋한 20살 갓 넘은 나이에 데뷔했던 시나위부활과는 태생부터가 달랐던 것이다.[5] 시나위, 부활을 필두로한 파고다 헤비메탈 밴드들은 밴드 생활을 헤비메탈 하드록으로 시작한 멤버들이었고, 백두산은 그들이 원했거나 말았거나, 디스코, 뽕짝 등등 여러가지 장르를 연주해야만 했던 (태생적으로 뽕필이 날 수밖에 없는) 생활형 뮤지션들로 이루어진 밴드였다.

1986년 3월, 시나위의 데뷔 앨범이 발매되고 이후 6월 백두산의 앨범이 발매된다. 데뷔 앨범 <Too Fast! Too Loud! Too Heavy!>의 적잖은 수록곡들이 기존에 발매된 유현상 특유의 트로트 성향이 짙은 솔로 앨범들에 수록된 곡들을 편곡한 것들이었으나, 김도균의 환상적인 연주 덕에 원곡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곡들로서 녹음되었다. '어둠 속에서', '말할걸', '뛰어' '웅비'와 같은 곡들은 향후 백두산이 나아가고자 하는 바를 잘 보여준 곡들이었다. 그러나 특유의 뽕필로 인해 뽕메탈이라는 비난도 피해가지 못했고 이는 당시 어린 메탈 키드들 사이에서 시나위 vs 백두산의 강력한 떡밥이 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헤비메탈 밴드가 등장했다. "백두산"이란 이름은 그들의 출신지인 것인가? 그들이 바로 얼마전 Loudness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장본인들이다.[6] 우선 이 자켓에 실린 멤버 사진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옛날 일본의 록 밴드를 서양의 음악 팬이 기이한 눈으로 봤던 것과 같은 시선으로 아마 그들을 보고 있을 게 틀림없다. 호사가들은 그들이 일본에 비해 10년이나 뒤쳐진 사운드를 낸다고 말하고 있지만, 오히려 들려주는 사운드를 들어보면, 일본의 다른 밴드보다도 진짜에 가까운 느낌을 주는 부분이 있다. 보컬의 샤우트도, 스트라토캐스터의 플레이도 그럭저럭 OK. 이 다음의 후발주자들도 기대해볼 만하다.
- 「점수: 70점」 - 죠지 아즈마 》
베이시스트가 김주현으로 바뀐 뒤, 유현상이 컬트적인 샤우팅 창법으로 선회하여 이듬해에 발매된 2집 <King Of Rock'N Roll>은 보다 헤비메탈 밴드에 근접한 백두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김도균이 작곡한 'The Moon On The Baekdoo Mountain', 'Up In The Sky', 유현상이 작곡한 'Main Charactor(주연 배우)' 등을 담고 있으며, 대중들로부터의 인기도 엄청나 밴드는 무려 500회가 넘는 순회공연을 가졌다. 일본의 BURRN!이라는 외국 잡지에 소개된 적도 있을 정도. 해외진출을 위해 '주연 배우'를 제외하면 가사가 모두 영어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기에 공연뿐 아니라 TV 쇼프로에도 자주 출연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였지만 그토록 바랬던 해외 진출은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7][8]

2집 직후 1987년, 김태원이 대마초로 잡혀가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를 계기로 락신이 죄다 초토화된다. 백두산뿐만 아니라 대다수 락계 인사들이 잡혀가고, 결국 김도균이 그만두기로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9] 가끔 유현상이 트로트로 전향하느라 해체됐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전후관계가 뒤바뀐 잘못된 이야기.

2.2. 침체기

유현상은 백두산을 그만두고 최윤희와 결혼 후에 트로트 가수로서 활동하게 된다. 여자야갈테면 가라지 같은 곡은 굉장히 히트해서 먹고 사는데 지장이 별로 없을 정도로 벌이가 되었다고 한다.[10] 하지만 이런 공백기 중에 사기사건으로 기소된 흑역사도 존재한다. 이 변절이 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사실 트로트 시절에도 유현상은 별 차이는 없었다. 유현상의 보컬은 기교가 없는 담백한 타입이었고 트로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탓인지 유현상은 2000년대 들어서 예능 프로에 나와서도 트로트를 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김도균은 실력을 갈고 닦기 위해 <Rock in Korea> 앨범에 참여하고, 1989년 임재범과 함께 영국으로 떠난 뒤 '아시아나(Asiana)'를 결성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고, 1993년 베이시스트 김창식, 새 드러머 최경섭(최소리)과 함께 다시 백두산을 재결성한 뒤 3집 <Baek Doo San III>을 발매한다. 김도균이 기타뿐만이 아니라 리드 보컬까지 함께 맡은 이 앨범은 이전 백두산의 앨범들과 달리 하드락 성향을 띤 앨범이었으며, '너를 기다리네', '사랑할거야'[11]와 같은 발라드곡이 인기를 끌었으나,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이후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면서 불명예스러운 해체를 맞이한다.

2006년 베이시스트 김창식은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출신의 드러머 이건태와 '거북선' 출신의 보컬리스트 안승배, 그리고 브루탈 데스메탈 밴드 'DOXOLOGY'의 기타리스트 문한규와 함께 백두산을 재결성하게 되고, <Savage of VIolence>를 발매한다.

김도균과 유현상이 이끌었던 기존의 헤비 메탈/하드락 성향이 강했던 초창기 백두산과 달리 김창식이 주도해 결성된 백두산의 스타일은 스래쉬 느낌이 드는 파워메탈 성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겠으나, 어쩌면 당연하게도 오리지널 백두산 팬들에게 많은 반감을 샀다.[12]

2.3. 백두산은 다시 일어서는가

2008년 유현상과 김도균이 다시 뜻을 모아 1집 활동 당시의 원년 멤버들을 불러모으면서 다시 제대로 된 의미로서의 백두산의 재결성이 이루어졌고 그해 열린 동두천 락 페스티발에서 재결성 공연을 가졌다. 그 후로도 백두산은 여러 무대에 오르며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2009년 4집 <Return of the King>을 발매하며 제대로된 백두산의 부활을 알렸다. 'Up in the Sky' 등의 이전 히트곡들을 재녹음한 건 덤. 2011년, 2집 시절처럼 영어로만 가사가 쓰여진 5집 <Rush to the world>를 발매한다.

재결성 후에 드러머가 '미르, 사혼, 피어 잇 소울'에서 활동하던 박찬으로 바뀌었다. 또한 베이시스트도 지병인 천식으로 탈퇴한 김창식 대신 김경호 밴드와 에메랄드 캐슬 등을 거친 경호진을 새롭게 영입했다. 김도균과 함께 3집을 같이 작업했을 때 연이 닿아서 함께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아쉽게도 경호진은 탈퇴를 했고 김창식이 다시 복귀하였다. 많은 팬들이 안타까움을 나타내는중.

비록 보컬인 유현상이 예능 프로에서 망가지는 모습을 자주 보여 좀 이미지가 많이 변하긴 했지만, 무대에서의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MBC스페셜 나는 록의 전설이다를 통하여 백두산, 부활, 시나위의 음악이 재조명 받기도 했다. 이날 방송에서는 록음악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생활고를 겪었던 일을 회상하는 출연자들의 인터뷰가 화제가 되었다. 특히 기타리스트인 김도균이 혼자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은...[13]

2.4. 2020년대 백두산 근황

상단 개요에 기재되었듯이, 김도균은 2018년도 말에 백두산을 탈퇴한 것으로 보이며,[14] 소규모 공연이나 행사에 가끔씩 등장하는 백두산의 멤버 구성원이 유현상, 김창식, 한춘근인 것을 보면 다시 원년 멤버로 재구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백두산은 2011년 5집 이후 록 무대에서 이렇다 할 음악 활동을 하지 않고 있고, 김도균은 본인 나름대로 예능 프로에 종종 출연하고 있는 등 각자 다른 활동을 하고 있는걸 봐선 두 사람간의 사이가 와해된 것 같다. 또한 유현상 본인이 이제는 기타와 보컬을 병행하겠다고 할 정도면 무슨 일이 있었던 건 확실.

3. 나는 가수다 2 출연

당시 다들 나는 가수다 2를 통해서 새롭게 등장할 밴드로 체리필터[15], [16], 몽니 등 여러 밴드를 꼽고 있을 때 김영희 PD의 최고 노림수로 백두산이 섭외되었다는 기사가 떴다. #

오프닝쇼에서 5집 타이틀곡 Rush To The World, 첫 경연에서 크라잉넛의 말달리자를 불렀다. 두 번째 경연인 5월의 고별가수전에서 클론의 꿍따리 샤바라를 부르고 나는 가수다 2의 첫 번째 탈락자가 되었다. 나는 가수다에 출연했던 다른 밴드 YB자우림 모두 오래 살아남은 것[17]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라면 이례적인 일. 베테랑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수준의 유현상 보컬은 민망한 수준이었고 선곡의 문제도 있었다는 분석이다.[18]

앞으로도 계속해서 도전하는 백두산이 되겠다는 말을 남기고 하차했으며, 백두산의 뒤를 국카스텐이 이어갔다.

4. 정규 음반

5. 여담

  • 예능에서는 유현상의 기타실력이 보일 기회가 거의 없지만 유현상 본인의 기타실력도 수준급이다. 물론 국내 최고의 테크니션 중의 하나인 김도균의 테크닉과 비교는 힘들지만 미8군에서 뛰던 유현상의 기타실력은 상당히 수준급이었다고 한다.[19] 유현상이 90년대 중반, TBS 교통방송에서 황인용이 진행하던 '밤과 음악사이'에 출연하여 어쿠스틱 기타로 연주를 들려주었던 적이 있는데 이 때 DJ 황인용은 '기타의 대가'라 유현상을 지칭했었다.[20]
  • 김도균은 20년이 다되가는 오래된 국산 소형차인 구형엑센트를 타고다닌다.[21]
  • 유현상의 아내는 13살이나 연하인 1980년대 국가대표 수영선수인 최윤희다. 아시아의 인어라는 별명으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으며,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3관왕,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2관왕을 차지했다. 이 결혼은 어찌나 화제였는지 당시에 유현상이 최윤희를 납치해서 강제로 결혼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한다.[22] 그도 그럴듯이 최윤희가 현재의 김연아급이 였다고 하니 팬들의 열폭이 대단했다고... 지금으로 따지면 김구라X김연아의 폭탄선언이였다고 한다. 특히 방송국 PD들은 백두산의 빽판을 던지거나 부셔버리면서 절대 틀지않겠다!고 했을정도 였다고.. 나이가 드셔도 이런 미모이니 그 분들의 열폭이 이해가 간다
  • 김도균은 영국에서 유학 중 이모님의 고추장에 감명받아서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그 외에 김도균은 외국 여자친구들을 많이 만났다고 한다. 물론 아직 미혼이다. 얼추 밝힌 것만 해도 핀란드, 러시아, 영국, 스칸디나비아등등.
  • 멤버 김창식은 모텔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부인이 당신 밴드 하니까 기타도 칠 줄 알겠지? 나훈아 노래를 쳐줘! 라고 요구를 했는데 본인은 기타도 칠줄 모르고 노래도 못해서 맨날 구박만 당한다는 후문을 밝혔다.
  • 국내의 락/메탈밴드 중에서는 당시에는 유일하게 일본 최고의 락전문 잡지인 'BURNN!'지에서 한국의 초강력 헤비메탈 밴드가 출연했다. 라고 크게 기사화가 됐다. 실제로 2집 <King Of Rock`N Roll>은 당시의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에서 주목을 받았다.
  • 1986년 발표된 앨범에 실렸던 '애타는 마음'이라는 노래는 1990년 그룹 야차[23]의 앨범에 실린 곡으로 더 알려지게 된다.
  • 유현상은 밴드 탈퇴 후 '바람아 멈추어다오'를 부른 원조 아이돌 이지연의 프로듀서로 활동했다. 새까맣게 나이 차가 나는 이지연과도 스캔들이 났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지연이 한참 전성기를 누리던 중 급거 결혼한다며 미국으로 떠나버렸고 그 일로 유현상은 엄청난 상심에 빠졌는데, 이후 최윤희와 가까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 김종서도 키워준다고 해놓고 거의 방치를 했다. 훗날 방송에 출연해 김종서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 유현상은 현재 '유현상의 열린음악회'라는 라이브 바를 운영중이다. 무대에서의 모습과 달리 상당히 친절하다고 하다. 또한 정기적으로 팬들과 만남을 가지는듯
  • 모 케이블 방송에서 씨엔블루와 함께 출연했는데... 진행자들이 씨엔블루와 평행이론으로 닮았다는 개드립을 작렬.(...) 백두산 팬들이 알았다면 혈압이 상승했을 듯. 뭐 이 프로 자체가 컨셉이 그러니 이해해 주자. 사실 비틀즈 코드는 전혀 닮지 않은 스타를 모셔놓고 온갖 개드립으로 억지로 평행이론을 만드는게 웃음포인트다. 오히려 씨엔블루와 묶여서 출연했다는 게 이 두 밴드가 전혀 닮지 않았다는 뜻. 실제로 닮았다면 개그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후 라디오 스타에도 같이 출연했다.(...) 기타 잼을 잠깐 했는데 김도균에게 씨엔블루 멤버들이 관광당했다.
  • 모 프로그램에서 노라조와 한 무대에 섰는데 카리스마가 예술이었다. 게다가 당시 신곡이라 할 수 있는 반말마[24]도 현장에서 작렬했다.##
  • 부활의 핵심멤버인 김태원이 65년생, 이승철이 66년생, 시나위신대철이 67년생(빠른 67이다), 임재범이 63년생(62년생이라는 말도 있다.), 양쪽 모두에 걸치는 김종서가 65년생인데 비해 유현상은 54년생으로 아예 다른 세대라고 할수 있다. 실제로 데뷔 역시 10년 이상[25] 차이가 난다. 가장 어린 멤버였던 김도균 역시 64년생으로 동시대에 활동했으나 사실 이쪽은 이미 나이트클럽 미군부대등 프로물도 먹을만큼 먹어보고 산전수전 다 겪어본 베테랑이였다. 실제로 시나위에 비해서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더 강력한 사운드를 낼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 하지만 워낙에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어울리지 않는 락커 이미지 때문에, 많은 밴드들이 백두산과 한 무대에 서는걸 창피해 했다. [26]
  • 김도균은 상당히 4차원으로 유명하다. 이미 이태원에서 유명한 연주자였던 김도균은 클럽에서 연주 중 갑자기 아직 자신이 기타와 완전히 친구가 되지 못했다고 생각 다음 날 짐싸들고 산으로 가서 기타수행을 했다. 김도균 자신의 말로는 하루가 시작되면 피크를 한 음큼 집어들고 산속에 틀여박혀서 그 피크들이 못 쓰게 되고 기타줄이 녹이 슬 때까지 하루종일 기타만 연습하고 숙소로 돌아와서 잠을 잤다고 그렇게 몇 달을 연습하다가 다시 불현듯 이태원에 나타나 공연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영국 유학시절 부터 서양의 락 정신을 받아 들이려면 서양처럼 국물없는 음식만 먹어야 된다고 생각 탓에 국물 있는 음식을 일절 입에 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김도균이 워낙 라면을 좋아해서(...) 라면만은 계속 먹는다고.
  • 최근 과거의 아카이브 영상이 발굴되며 재평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특히 1987년 9월에 열린 한강종합개발사업 준공 1주년 강변 록 콘서트였던 '한강 젊은 그대여'에서 백두산의 모습을 본 젊은 세대들과 과거의 세대들이 연주력으로만 따지자면 레벨이 다른 밴드라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시나위와 부활은 20대 초반의 영건들의 밴드고, 송골매는 과격한 퍼포먼스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백두산은 좌중을 압도하는 퍼포먼스와[27] 젊은 시절 유현상[28]의 보컬 퍼포먼스가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쉼없이 몰아치는 3옥타브의 샤우트, 김도균의 현란한 무대 매너 가히 신들린 듯한 모습을 접한 어린 세대에게는 충격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는중이다.

6. 대표곡


1987년 9월 13일 당시 KBS에서 방송한 한강! 젊은 그대여!라는 특집방송의 한 부분이다. 참가팀은 송골매, 김승진, 시나위, 전영록과 돌풍, 백두산. 리즈 시절의 백두산,

당시 최고의 프로그램인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약칭 토토즐)에서 당대 최고의 인기를 자랑한 전영록과의 듀엣. 둘은 친구 사이다.


[1] 2009년 당시 멤버 좌측부터 유현상, 김창식, 김도균, 박찬[2] 유현상이 대표 이사를 맡고 있다.[3] 비록 오리지널 멤버는 아니고 후에 참여하였지만 라스트 찬스와 사랑과 평화의 멤버였다는 것은 당시로서도 연주력을 인정 받았다는 것을 증명한다.[4] 김도균을 제외한 3인은 미8군, 그리고 밤무대 출신으로 가요계에서 활동한 마지막 세대다. 1980년대 조용필 이후 가요계가 급팽창하면서 음악에 재능있는 젊은이들이 미8군 대신 가요계로 직행하게 된다.[5] 심지어 유현상은 1976년에 기타리스트로서 음반 데뷔를 했고, 1985년 <사랑의 강>이라는 버젓한 가요 앨범도 낸 바가 있었다.[6] 아마 부활의 1집 속지에 실린 문구를 착각한 듯.[7] 당시 가요계는 용광로처럼 마구 들끓던 상황으로, 이제 막 '음악 산업'이라 할 수 있는 판이 만들어지고 있던 시점이었다. 우리 대중음악의 르네상스로 불리는 90년대조차도 해외 진출은 극히 일부 슈퍼스타들의 이벤트 정도로 여길 때였다는 것을 생각해보자.[8] 후에 김도균이 임재범과 '사랑'이라는 그룹을 만들어 영국에서 활동하고, 이 때의 경험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슈퍼밴드 '아시아나'를 결성하여 다시 해외 진출을 노렸으나 실패했다. 훗날 김도균은 레코드 사의 도산, 갖춰지지 않은 인프라를 언급하며 음악 인생 중 가장 아쉬웠던 순간이었다고 회고하기도.[9] 멤버 중에 김도균은 가장 어렸다. 김도균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모두 이미 30 중반에 접어든 나이였다.[10] 한 번은 한 소속사 사장이 유현상에게 "저기, 유현상 씨. 일단 계약금은 이 정도로 하고 나중에 더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계약서를 들이밀었는데, 유현상이 그 '이 정도'에 깜짝 놀라 잠깐 얘기를 멈추고 건물 옥상에 올라가 숨을 고른 후에 얘기를 계속한 적이 있다고 한다.[11] 이 발라드 넘버들에서 김도균의 흉성을 이용한 보컬이 의외로 상당히 잘 어울린다. 세월이 흐른 뒤 예능에 나오던 김도균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12] 결국 그때문에 밴드명도 '파워 백두산'으로 변경되었으며, 오리지널 백두산 팬들은 현재 이 파워 백두산을 '백두산과 연관없는 전혀 다른 밴드'로 인식하고 있다. 현재 원년 멤버들로 백두산이 다시 활동하게 되면서 더더욱 그렇게 되어버린 듯 일종의 흑역사.[13] 단 당사자들은 이 방송 편집 모습을 보고 굉장히 화를 냈다고 한다.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이나 소형차를 끌고 다니는 모습은 그냥 개인적으로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었는데 마치 락씬 전체가 '락하면 거지 된다'는 식으로 편집되었기 때문.[14] 드러머 박찬의 인터뷰에 따르면 김도균이 솔로 선언을 한 상태라고 한다.[15] 시즌 3에 결국 섭외되었으나...[16] 섭외는 갔으나 앨범 준비 때문에 거절했다고 한다.[17] YB는 명예졸업 직전인 7라운드에서 탈락했고 자우림은 명예졸업 할 정도로 훌륭한 무대를 많이 선보였다.[18] 보컬도 문제였지만 밴드와 맞지 않는 선곡 문제가 심각했다. 말달리자, 쿵따리 샤바라는 전형적인 펑크록 스타일 편곡이 어울리는 곡들이지만 백두산은 헤비메탈 밴드이다. 첫 경연 때 선곡했던 Rush To The World가 비교적 현장 반응이 좋았던 점을 상기하면 안타까운 부분이다.[19] 라스에 출연해서 약간 보여주었다.[20] 황인용은 아나운서 출신이지만, 단순히 음악 틀고 진행만 하는 DJ가 아니다. TBC 출신으로신 군부 방송 통합 이후에 낯선 분야인 KBS 라디오 팝 음악방송 DJ가 되었는데, 팝, 하드록, 클래식 음악과 오디오를 매우 열심히 공부하여 하이파이 오디오와 음악에 대해서 평론가 수준이 된 인물이다. 은퇴 후에도 고전 음악감상실(클래식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당시에도 높은 안목을 지녔었고 괜한 칭찬을 할 사람은 아니다.[21] 현재는 대우 토스카로 차를 바꾼상태.[22] 실제로도 언론이 두려워서 절에서 비밀 결혼식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더 골때리는 문제는 결혼식 관련 영상 같은 것이 없다는 점인데 당시 비디오 카메라를 친구에게 맡겼더니 이 친구가 다른 절로 갔었다는 이야기를 유현상 본인이 방송에서 했다.[23] 일본 그룹 히카루GENJI의 컨셉을 모방한 그룹. 뒤에 ZAM에서 리더를 맡는 조진수가 팀의 리더였고, '맨발의 청춘'이라는 곡으로 유명한 듀엣 에서 활동하는 김병수도 이 때의 멤버였다.[24] 2008년에 발표한 곡[25] 미8군 밴드까지 포함하면 거의 15년[26] 1999년 음악평론가 박준흠이 펴낸 '이 땅에서 음악을 한다는 것은' 이란 책에서 작은하늘카리스마의 기타리스트 이근형은 유현상과 백두산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백두산은 우리 쪽도 부활쪽도 다 무시했다. 배 쫙내놓고 라이브 하는 것을 보고 뒤에서 "정말 엉터리야"라고 수근거렸다. 메이저급으로 올라가기 위해 트로트를 했다가 헤비메탈 붐이 일어나니깐 자기 돈 들여 헤비메탈 음반을 제작하고 작곡도 한 것이다. 내가 볼때는 좀 웃기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대단한 사람이다."[27] 백두산은 유독 무대 위에서 퍼포먼스가 강렬했던 밴드이기도 했다.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방송에서는 용접기로 철문을 뚫다가 유현상이 철문을 발로 쾅 걷어차고 나오며 무대에 등장한다던가 하는 퍼포먼스를 곧잘 했다. 앞에서 언급한 '한강 젊은 그대여' 콘서트에서도 난데없이 무대 앞 객석으로 뛰어가기도 했다.[28] 물론 이 당시에도 유현상은 만 33세였기에 결코 어린 편은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