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위 (Sinawe) 역대 참여 멤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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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 시나위 | |
2015년 멤버 김바다 • 신대철 | |
데뷔 | 1986년 |
활동연도 | 1983년 ~ 2016년 |
멤버 | 신대철(리더, 기타) 김정욱(베이스) 김바다(보컬, 기타) |
데뷔 음반 | Heavy Metal Sinawe(1986년) |
장르 | 헤비 메탈, 얼터너티브 록 |
소속사 | 에코브리드[1] |
팬덤 | 해랑사[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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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헤비 메탈[3] & 얼터너티브 록[4] 밴드. 기타리스트 신대철이 리더로 밴드를 이끌고 있다.2. 역사
2.1. 1983년~1990년
1983년 신대철이 서울고등학교 재학 중 기타에 신대철, 베이스에 안준섭, 드럼에 김정휴, 그리고 보컬에 주준석을 영입해 결성하였다. 신대철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모두 20대였지만 밴드의 리더는 고등학생 신대철이었다.[5]주준석이 군입대 한 후 AC/DC의 브라이언 존슨 스타일의 보컬리스트 진창규를 영입하며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신대철은 다시 새로운 보컬을 찾는데, 이때 영입된 보컬이 김종서였다. 그러나 팬들에겐 잘 알려졌다시피 김종서도 단 한 번의 공연을 끝으로 퇴출당했고[6], 임재범을 영입해서 1집 앨범을 녹음하게 되었다.
그래서 시나위의 첫 메이저 방송 데뷔조는 신대철, 임재범 그리고 베이스 박영배, 드럼 강종수, 키보드 김형준 이었다.
1집 타이틀곡인 '크게 라디오를 켜고'는 2000년대 영화인 라디오 스타에서도 나오듯 제법 인기를 끌었다. 타이틀 곡을 제외한 나머지 곡들은 로니 제임스 디오 재적시의 블랙사바스를 강하게 연상시키는 곡들이 많았는데, 대표적인 곡들이 '아틀란티스의 꿈', '그대 앞에 난 촛불이어라' 같은 곡들이었다.
그 후 군입대로 떠난 임재범 등 신대철 본인을 제외한 멤버를 모두 교체했고, 베이스 강기영(달파란)과 드럼 김민기, 그리고 일취월장한 실력으로 돌아온 김종서의 고음에 맞춰 사운드 변화를 시도한[7] 2집 《Down and Up》을 발표했는데, 당시로서는 쇼킹했던 김종서의 초고음을 무기로 한 타이틀곡인 '새가 되어가리', '빈 하늘', 연주곡 '연착' 등이 크게 히트했다. 1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는 2집은 한국 헤비메탈계의 최고 명반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2집 발표 전후가 헤비메탈을 구사하던 시나위의 최대 전성기로 에디 밴 헤일런을 연상시키는 신대철의 화려한 기타 솔로와, 김종서의 빈스 닐을 연상시키는 음색과 보컬레인지로 인해 완벽한 80년대 LA 헤비메탈을 구현해낼 수 있었고, 가요에 헤비메탈적인 분위기를 입혔던 라이벌 밴드들과의 확실한 차이를 보여주었다.
2집 이후 김종서와 신대철의 음악적 견해차에 의해 김종서가 다시 탈퇴하자, 시나위는 작은하늘 출신의 보컬 김성헌[8]을 투입해 3집 《Free-Man》을 발표했지만 대중의 반응은 실망스러웠다.
시나위 최고의 앨범으로 기록된 4집 《Four》는 서태지를 베이시스트로, 또 다시 돌아온 김종서를 보컬리스트로 영입해 '겨울비' 같은 히트곡을 내세웠지만, 당시 락 문화의 침체와 홍보 부족으로 인해 흥행이나 앨범 판매량으로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겨울비는 오히려 김종서가 솔로 활동한 뒤에 더 뜨게 되었다.
4집 발매 후 김종서가 서태지와 함께 동반탈퇴[9]하면서 시나위는 인원의 부재로 인해 활동중지 상태가 되었다. 이후 1991년 8월에 오랜만에 콘서트를 감행했으나 부실한 기획에서 어긋나 버렸고, 콘서트 직후 팀이 해체[10]되는 비운을 맞는다. #
2.2. 1990년대
사실상 시나위가 해체된 후 리더 신대철은 한동안 집에만 있었다고 한다.[11] 그래도 돈은 벌어야 되니 지인들 세션에 점차 참가하기 시작했는데, 재미있는게 돈은 이때 더 벌었다고. 시나위 초창기 때는 의외로 돈은 못벌었다고 한다. 허나 남의 세션에만 참가해 연주하다 어느 날 라디오를 듣는데 어떤 곡의 연주가 자기가 연주했던건지 아닌지 기억이 희미할만큼, 음악적으로 회의감이 들자 세션을 그만두고 자신의 음악을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1995년, '전사'라는 밴드 출신의 손성훈과 신대철이 얘기를 하던 중 "시나위를 다시 하고 싶다."는 신대철의 농반진반 말에 손성훈이 정한종, 신동현을 갑작스레 데리고 와 5집을 만들었다. 신대철은 당시의 상황을 "손성훈만 빼고 밴드를 하고 싶었다."고 회상했다. 앨범 발매 후 손성훈이 탈퇴하고 드러머 신동현은 당시 언더그룹 'Tomcat'의 보컬이었던 김바다를 추천, 영입했다. 덕분에 결과적으로 앨범은 손성훈이 녹음했는데 실제 공연에서는 전부 김바다가 부르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시나위는 김바다 보컬이 들어간 앨범을 급하게 녹음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5.5집 개념의 미니 앨범이다.
미니 앨범답게 곡은 총 5곡이 녹음 되어 있는데 A면에는 죽은 나무와 서커스, B면에는 고기 덩어리와 크게 라디오를 켜고, 매맞는 아이 라이브 버전이 실려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매맞는 아이 라이브 버전이 들어가 있는 버전과 없는 버전이 출시되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매맞는 아이가 들어있는 버전의 앨범을 구매한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참고로 이 앨범이 출시되던 당시는 90년 중반 즈음인데 이 때 한국에도 서서히 언더그라운드 혹은 인디음악의 문화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시기였다. 특히나 서울의 홍대 앞 거리에 있는 드럭 레스토랑이라는 클럽에서 크라잉넛, 노브레인 등을 필두로 타카피, 와이낫 등의 펑크 밴드들이 젊은 대학생들 사이에서 이름을 조금씩 알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헤비메탈 밴드들도 있었지만 너바나의 영향 때문인지 메탈 스타일보다는 얼터너티브 성향의 팀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기타 신대철, 드럼 신동현, 베이스 정한종 보컬 김바다 의 라인업은 헤비메탈이 아닌 얼터너티브 록으로 변신한 시나위 제2기의 라인업이다.
5집 후 상황이 상황인 만큼 새로운 보컬을 알리기 위해 미니앨범인 《Circus》를 발매하는데, 이게 예상외로 대단한 판매량을 보여주면서 시나위 부활의 신호탄이 되었다. 게다가 미니앨범에만 포함된 재편곡버전 '크게 라디오를 켜고' 역시 대단한 인기를 누리며 이 여파로 노래방에 추가됐을 정도였다.
미니앨범 발매 후 시나위는 얼터너티브 록으로 변신한 6집 《은퇴선언》을 발매했다. 25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는데, 당시 시궁창에 가까웠던 락 씬의 상황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수치였고 가요차트에서도 중위권에 들 정도로 선전했다. 이 앨범에서 시나위는 더 이상 기존의 헤비메탈, 하드 록을 추구하지 않고 완벽하게 얼터너티브로 음악적 변화를 성공시켰다. 단, 리더 신대철은 인터뷰에서 얼터너티브로의 변화는 자의적인 것이 아닌 밴드를 지속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베이스가 김경원으로 바뀌고 7집 《Psychedelos》을 발매했으며, 이 앨범의 타이틀곡인 '희망가'는 시나위 곡 중에서 최초로 뮤직비디오가 제작되어 케이블 방송인 Mnet과 MTV 방송까지 탔다.
김바다는 이 앨범 발매 후 얼마 동안 공연하다가 1999년에 탈퇴한다.
2.3. 2000년대
이후 하드 록 밴드 출신 보컬 김용을 영입하면서 미니 앨범 발매 후 8집 《Cheerleading Fan》을 발매했다.8집의 경우 본 앨범인 8집과 예전의 곡[12]들의 영어 버전을 함께 포함해 발매했지만 흥행에는 실패하였다. 김바다 시절은 메인 스트림에서 김경호가 크게 히트한 덕을 봤지만, 김용 때는 대세가 SG워너비의 소몰이창법을 필두로 한 발라드 쪽으로 흘러갔기 때문.
8집 발매 5년 후인 2006년, 리더인 신대철을 제외하고 전부 뉴 페이스로 바꿔서 9집인 《Reason of Dead Bugs》를 발매하지만 성적은 저조했다. 그나마 윤도현의 러브레터에 출연했지만 큰 성과는 이루지 못했다.
2.4. 2010년대
2012년 9월, 시나위가 재결성되어 나는 가수다 2에 출연했다. 멤버는 기타에 신대철,보컬에 김바다, 드럼에 남궁연, 베이스에 김정욱. 신시사이저를 담당한 칵스의 숀이 세션 멤버로 함께했다.첫 무대에서 이장희의 '그건 너'를 얼터너티브 락으로 편곡해 신대철의 강렬한 기타 리프를 중심으로 내세웠지만 아쉽게도 하위권에 머물렀다. 다만 넷상에서는 시나위가 왜 하위권인지 모르겠다는 반응들. 이 후의 경연들은 1, 2위를 하는 등 좋은 성적을 얻었다. 기타 리프 대신 멜로딕한 신스음을 중심으로 배치시키고 김바다의 쇳소리도 많이 절제되었다. 나가수 2 경연 후반 즈음 남궁연이 개인적 사정으로 나갔고 그 자리에 피아의 드러머 양혜승이 들어왔다.
나가수 2 출연 종료 이후 시나위의 2013년 활동을 함께 할 보컬을 오디션으로 모집하였다.
2013년 7월 10집 MirrorView를 발매했고, 새 보컬과 전국 투어와 방송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당시 기타리스트 이자 에코브리드 수석프로듀서 였던 제이크장 이 녹음과 투어 기타리스트로 참여 하였다. 그후 새보컬은 여러가지 부족한면을 드러내며 단 한장의 EP 앨범을 발표하고 통보없이 전격 해고 된다
2014년 3월에 싱글 '밤이 늦었어'를 발매했다. 매우 개성있는 곡이었지만 보컬의 능력 부족과 홍보 부족으로 많이 알려지지않았다.
2015년 7월 17일, 브이홀에서 시나위 컴백을 기념하는 공연을 열었다. 공연 제목은 '완전체' 그러나 제대로 된 음반 발표 없이 시나위는 김바다와 다시 결별한다.
3. 음반 목록
자세한 내용은 시나위(밴드)/디스코그래피 문서 참고하십시오.4. 나는 가수다 2에서 불렀던 곡들
경연 | 노래 | 순위 |
9월 A조 | 그건 너 - 이장희 | 6위 |
고별가수전 | 나 어떡해 - 샌드페블즈 | 1위 |
10월 A조 | 강남스타일 - 싸이 | 2위 |
10월의 가수전 | 제발 - 들국화 | 5위 |
11월의 가수전 예선전 | 세상만사 - 송골매 | 11월 가수전 진출 |
11월의 가수전 |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 산울림 | 하차 |
[1] 신대철 대표이사.[2] 신중현과 엽전들의 곡 나는 너를 사랑해의 가사 "해랑사 를너 는나"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3] 주로 1980년대.[4] 1990년대 이후.[5] 이는 신대철이 한국록의 대부라 불리는 신중현 선생의 장남으로 이미 주변에선 유명세가 좀 있었기 때문도 있어보인다.[6] 해당 공연 때 음정 나가는 줄도 모르고 지 맛에 신나서 부르다 단번에 잘렸다고 한다. (다만 신대철은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자를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땐 어려서 자기도 좀 꼰대였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이후 김종서는 자신의 보컬에 실망하고 노래 연습을 하며 절치부심하다 부활 1대 보컬로 스카웃되었다 몇달 후 그만두고 시나위 2집 보컬에 참여한다. 다만 올드팬들에 의하면 김종서가 잘리기 전 '그대 앞에 난 촛불이어라'와 같은 시나위 초기곡들의 데모 버젼도 녹음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7] 1집과 2집은 서로 다른 밴드로 보일 정도로 사운드의 변화가 컸다. 헤비메탈 밴드로서의 시나위의 특징은 보컬이 바뀔때마다 신대철의 기타 사운드 자체도 달라졌다는 것 이다.[8] 아이러니하게도 작은하늘의 초대 보컬이 바로 김종서다.[9] 이때 김종서와 서태지는 <무궁화밴드>라는 이름으로 나이트클럽에서 공연을 하고 다녔다. 이렇게 밤무대를 뛰던 와중에 어느날 서태지는 우연히 자신의 다음 순서였던 <박남정과 친구들>의 공연을 보고 댄스뮤직에 빠져들게 되고, 곧바로 춤을 배우고 싶다며 박남정의 백댄서였던 양현석을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약 2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서태지와 아이들로 팀이 이어지게 된다.[10] 해체 후 1992년에 서태지가 서태지와 아이들로 데뷔하고 김종서도 솔로 데뷔를 하여 성공을 거두자 젊음의 행진에서 특별 공연을 가지게 되었다. 드럼은 4집 멤버 오경환이 아닌 2집과 3집의 멤버였던 김민기가 연주했다. #[11] 비슷한 시기 3대 기타리스트로 불리던 김태원, 김도균 역시 팀이 공중분해되며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는데, 예능 놀러와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어느 날 길을 걷다 신대철과 김태원이 우연히 마주쳤는데, 말로는 서로의 안부 정도를 간단히 묻고 헤어졌지만, 표정에서 서로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는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시기 김태원은 대마초 흡연으로 감방도 들락거리던 시기였다.) 또 김도균도 메이저 무대에서 기타 치다가 한순간에 이태원 클럽 등지에서 외국인 상대로 기타 치는 자신이 좀 처량했는지 공연 중 우는 모습을 신대철이 목격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12] 저작권 문제 때문인지 5집 이후의 곡들만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