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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종합개발사업

한강종합개발사업
漢江綜合開發事業
<colbgcolor=#006fb9><colcolor=#fff> 기간 1982년 9월 28일 ~ 1986년 9월 10일
시행 주체 서울특별시
사업비 약 9,650억 원
1. 개요2. 추진 배경3. 사업 내용
3.1. 저수로 정비3.2. 강변 둔치 활용3.3. 하수처리장 건설3.4. 올림픽대로 신설
4. 평가5. 관련 영상6. 여담

1. 개요

1982년 9월 28일부터 1986년 9월 10일까지 약 4년 간 한강을 정비한 사업.

평가는 갈리지만, 대체로는 매우 성공한 사업으로 보는 편이다.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의 전신이라고도 볼 수 있다.

2. 추진 배경

본래 서울의 도심은 한강과는 조금 떨어진 사대문안에 있었고 서울의 남쪽 경계가 한강에 걸쳐 있었으나, 1963년에 서울이 확장되며 지금의 강남 지역을 편입하게 되었고, 한강은 서울의 허리를 지나게 되었다. 그 후로 서울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한강변에 있는 동네들도 거주 인구가 많아지고, 1970년대부터는 강남도 개발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겨울에 건조하고 여름집중호우가 내리는 한반도의 기후 특성상, 하천의 하상계수가 매우 높아 강변의 마을들은 홍수에 피해를 입기 일쑤였다. 특히 1966년의 일명 '서울 물난리'는 한강수의 역류에 의해 청계천 등 서울 도심까지 피해를 입게 되자, 이는 청와대의 관심사업으로 격상되고 1970년대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에 한강 등 남한 지역의 광역권 강 유역에 대한 치수(治水) 사업이 추진되는 한 원인이 된다.

이에 1970년대에는 한강 상류에 여러 개의 을 세우고 한강의 유로를 정비하여 홍수 피해를 줄이고자 노력하였다. 한강의 유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100여 년만의 홍수에 대응을 못한다는 판단이 내려져 밤섬이 폭파되고 여의도에 윤중제가 세워지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특히 노들길을 정비하며 생긴 수천 평의 공유수면 매립 공지는 당시 토목공사로 힘겹던 서울시의 재정에 큰 보탬이 되었다. 즉 한강 개발 결과 현재의 압구정동여의도 같은 지역이 생긴 것이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까지 한강의 홍수 문제는 좀체 나아지질 않았다. 그와 더불어 196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화로 인해 공장폐수가 한강으로 흘러들어 악취가 심각했다는 문제점이 있었고, 한강변에 난립하는 무허가 판잣촌을 정리할 필요도 있었다. 1981년 9월 30일1988 서울 올림픽의 개최가 확정됨에 따라 정부는 한강을 대대적으로 정비할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한강종합개발사업이다.

전두환 정부는 한강종합개발사업을 대대적으로 정권 홍보수단으로 사용했다. 아래 영상 문단에서 보듯 국책사업으로 엄청나게 밀어준 것을 여러 영상매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1986년부터는 뭐만 하면 매체에서 한강이 나왔을 정도였는데, 1986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김연자아침의 나라에서를 부른 것도 이 즈음이었고, 1988 서울 올림픽 개막식은 숫제 한강에서의 '강상제'를 오프닝 무대로 삼았다. 이외에도 KBS에서 제작한 1980년대 수많은 국산 애니메이션들에서는 여의도와 63빌딩, 한강공원이 클리셰처럼 등장한다. 이러한 경향은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했는데, 일례로 1999년 제작 태권왕 강태풍에도 여의도가 나온다. 이를테면 한강의 기적은 적어도 현 중장년층 세대 이상에게는 (세대별 정치관의 극렬한 보혁구도 대립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통 경험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3. 사업 내용

3.1. 저수로 정비

폭 725~1,175m, 수심 2.5m의 강으로 정비했다. 한강 바닥을 파내어 강바닥을 고르게 만들고, 그동안 쌓였던 부유물을 제거하여 수질을 정화하고자 했다.

둔치 사면에 콘크리트 블록을 쌀아 토사 유실을 막았다. 이 공사는 한강의 유로를 고정시키고 일정한 수심을 유지하면서 강폭을 확보하여 홍수를 대비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잠실과 신곡에 수중보를 설치해 유속과 저수량을 일년 내내 일정하게 하면서 하천의 경관을 살리고 밀물 때에 인천 앞바다에서 바닷물이 역류하지 않도록 했다.

4년 동안 한강에서 캐낸 모래와 자갈은 6,369만㎥이며 파낸 준설토는 한강변을 매립하는 데에 쓰였고, 이것이 고수부지가 된다. 나머지는 총 공사비의 약 20%인 1,962억 원은 이러한 골재를 채취하여 전국 각지의 공사장에 팔아 판매된 수익금으로 충당하였다. 그리고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자연히 이 과정에서 손에 떡고물 묻은 사람도 많다.

이 사업 당시에는 운하로서의 기능도 고려했던 듯하다. 실제로 서울 지역에 한해서는 수중보 덕에 한강 유람선이 문제없이 다니고 있다. 20년 후에는 한반도 대운하 사업이 공약으로 내세워졌으나 현실성이 없어 사업이 개편되었다.[2]

3.2. 강변 둔치 활용

한강변의 공터를 고수부지로 정비하면서 길이 총 41.5km, 면적 총 39.9㎢의 고수부지가 공원화되어 시민들의 휴양지로 개방되었다. 693㎡ 강변에는 유람선이 접안할 수 있는 선착장과, 수상 레크리에이션 활동의 지원을 위한 시설, 강변산책을 위한 정적공간을 형성하고, 제방 위에 강변도로와 고수부지 자동차진입도로, 지하보도 등 접근시설을 만들었다. 체육공원 10곳에 축구장 30, 농구장 24, 배구장 35, 정구장 28개가 마련되었고, 초지 346만 5000㎡를 조성하여 자연학습장 등으로 활용하고 잠실에는 주차장과 자전거도로가 건설되었다.

고수부지는 광나루지구, 천호지구, 잠실지구, 뚝섬지구, 성수지구, 잠원지구 등 총 13개 지구에 총면적 6.94㎢로, 자연환경지구가 3.83㎢이고 시설광장지구가 3.11㎢이며 각 지구별로 특성화된 공원이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경성의 교외 휴양지로 유명했던 뚝섬유원지를 정비하였으며, 인공섬인 서래섬이 만들어진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이 고수부지는 1992년 10월부터 13개의 지구로 나누면서 한강공원이라는 명칭으로 공식 명칭이 바뀌었지만 그 후로도 오랜 시간 동안 고수부지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이후 2000년대 초 국어 순화로 방송이 한강 둔치라는 명칭으로 순화어를 받아들였고, 현재는 한강공원이라는 말로 완전히 정착했다.

3.3. 하수처리장 건설

수질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5,427억 원을 투입하여 총 4개의 하수처리장을 짓게 되었는데, 탄천물재생센터, 중랑물재생센터, 서남물재생센터, 난지물재생센터가 이때 생긴 것이다. 이 하수처리장 건설에만 거의 60%의 돈을 투자한 셈이다.

3.4. 올림픽대로 신설

올림픽경기장이 서울종합운동장으로 확정되면서 김포공항에서 잠실까지 논스톱으로 갈 수 있는 도시고속도로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 도로는 강남의 개발과 함께 1970년대에 이미 생겨난 것이었으나, 개화IC에서 동작대교까지는 도로가 놓이지 않고 노들로-공항로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개화동에서 동작대교까지 이르는 구간에 긴 제방을 축조하고 그 위에 도로를 놓았으며, 도로의 이름은 1988 서울 올림픽을 기념하여 올림픽대로라고 지었다. 그리고 건설된 순서대로 강남1~5로로 분할되어 불리던 구간들이 모두 올림픽대로로 통합되었다. 더불어 동작대교에서 강일동까지의 기존 도로는 4차선에서 6차선으로 확장개통하게 되었다.

4. 평가

한강종합개발사업은 한강의 기적을 마무리짓고 지금의 서울 한강유역 모습을 완성시킨 사업이다. 따라서 한국사 교과서의 현대 파트의 마무리에는 한강종합개발사업 사진을 수록하는 경우가 많다.

한강을 정비하여 수질을 개선시키고 홍수를 예방한다는 점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만, 한강의 자연환경을 너무 파괴했다는 말도 있다. 이미 한강종합개발 이전에도 한강변에 택지 조성을 위해 한강의 유로를 바꾸었고 한강물은 썩을대로 썩은 상태였지만, 한강종합개발사업으로 인해 한강의 유속과 수심이 일정해지고 제방을 통해 주변 생태계와 단절되면서 자연다움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주요 비판점.

이는 사실 한국보다 먼저 앞서서 전 국토를 소위 '콘크리트 하천'으로 개조했던 일본이나 유럽에서 톡톡히 겪은 부작용이다. 한국의 경우 오히려 이들보다 늦었기 때문에 한강종합개발사업 이후 빨리 방향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제방 문서 참조. 이것 때문에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에서는 한강을 자연하천으로 다시 개조하고자 했는데, 현재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네덜란드의 수리·하천 전문 연구기관인 델타레스나, 일본의 국토교통연구센터(JICE) 등도 한국을 방문하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현장 방문해서 연구하는 곳이 바로 한강종합개발사업 결과물들이다.

5. 관련 영상


한강종합개발계획 개념설명을 대한뉴스에서 다룬 모습.


1983년 대한뉴스에서는 좀 더 진척된 모습이 담겼다.


사업 시작 전, 당시 홍릉 KIST 옆에 있었던 국립건설연구소에 실제 모형을 지어놓고 시뮬레이션했다.(영상 7초부터)

6. 여담

  • 2020 도쿄 올림픽도쿄만, 그리고 2024 파리 올림픽에서의 센강 수질 논란으로 한강종합개발사업이 소소하게 재조명을 받고 있다. 일례로 프랑스 정부 및 파리시는 약 2조 원의 예산을 지출하고도 센강 수질 개선에 실패하여 개회 전부터 우려되던 트라이애슬론 경기의 파행과 참가 선수들의 건강 문제[3]를 낳은 반면, 예산의 60%를 하수처리장과 별도의 분리식 하수관거 시스템 건설에 쏟아부은 한강종합개발사업은 한강 수질 개선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4] 과거 오물이 그대로 합류하는 '합류식' 하수관거를 가진 도쿄나 파리와는 달리 '분리식'인 서울의 경우 1급수는 못 되더라도 수영 횡단 행사가 가끔 펼쳐지고, 심지어 하류인 강서구에서 일산신도시의 수돗물 취수를 할 정도로 무난한 수질 관리가 이뤄지고 있다.
    물론 서울 올림픽 당시에는 트라이애슬론 경기가 없었고[5], 강에서 펼쳐진 유일한 경기인 조정 역시 서울의 상류인 미사경정공원에서 펼쳐진 만큼 동일한 비교는 어렵지만, 적어도 수도를 흐르는 강에서 스포츠 이벤트 개최가 가능할 정도로 수질 확보를 성공한 경험이 있는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그것을 실패한 프랑스의 사례는 반면교사가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오다이바에서 이미 트라이애슬론 경기가 문제를 일으켰던 2021년의 일본의 사례[6]를 목도하고서도 그대로 추진했던 파리 조직위원회는 안일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 6.25 전쟁 당시 미군, 튀르키예군, 영국군, 프랑스군 등 UN군 소속 참전용사들이 노령의 나이에도 한국을 기념 방문하는 경우에 높은 확률로 한강종합개발사업으로 말끔해진 한강을 올림픽대로 안을 달리는 차량으로 바라보며 소회에 젖는 장면이 등장한다. #예시 실제로 이들은 발전한 서울의 모습, 특히 한강의 모습을 보며 PTSD가 확연히 개선되는 효과를 본다고 한다. 발전된 한강의 풍경을 보며 자신이 젊은 시절 목숨바쳐 싸웠던 결과가 마치 보상받은 듯한 심리적 안정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1] 김현옥 시장 후임 양택식 시장은 숫제 여의도 땅 팔아서 지하철 건설부채를 갚았다고 할 정도다. 이는 손정목 당시 서울시 건설과장의 회고담이다.[2] 이후 소위 4대강 사업으로 재편되었는데, 이 사업 중 유의미한 성공을 거둔 것은 바로 아래 서술한 자전거 길 정비사업 정도다. 자세한 내용 및 비판은 해당 항목들 참조.[3] 양 대회 모두 참가 선수들이 수영 후 구토를 할 정도였다.[4] 이 당시 한강 꼴을 보려면 1980년대 연재 만화인 아기공룡 둘리따개비 한문 숙어의 아무 회차나 봐도 된다. 동네 풍경으로 악취가 풍기는 하천과 석축이 그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악취나는 폐수들이 1970년대에는 그대로 한강으로 흘러들었다.[5] 트라이애슬론이 정식종목이 된 것은 2000 시드니 올림픽부터다.[6] 오다이바는 하천이 아닌 바다지만 합류식 하수관거에 의한 문제 유발이라는 점에서는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