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스포츠 관련 인물에 대한 내용은 유현상(e스포츠) 문서
, 류현상에 대한 내용은 류현상 문서
참고하십시오. 유현상 柳賢相 | Yoo Hyunsang | |
<colbgcolor=#283593><colcolor=#fff> 본관 | 진주 류씨 토류계[1] |
출생 | 1954년 1월 30일 ([age(1954-01-30)]세) |
경기도 포천군 포천면 탑동리 (現 경기도 동두천시 탑동동)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동두천고등학교 (졸업) 광운대학교 (산업공학 / 학사) 광운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 석사) |
가족 | 처제 최윤정, 부인 최윤희, 아들 유동균, 유호균 |
종교 | 개신교(침례회)[2] |
데뷔 | 1976년 재즈 록밴드 사계절 |
링크 | , |
[clearfix]
1. 개요
방금 이 목소리, 쇳소리 들으셨죠? 정말 희소가치가 있는 그런 보이스입니다.
윤종신
윤종신
대한민국의 가수. 1954년생으로 트로트 가수이자 헤비메탈 밴드 백두산의 작곡가 겸 보컬리스트, 리더로 활동 중이다.
경기도 포천군 포천면 탑동리에서 태어났다. 참고로 탑동리는 1973년 동두천시로 편입이 돼 현재의 동두천시 탑동동이 됐고, 그는 현재 동두천시의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동두천에 미군부대가 있어서 어렸을 적부터 팝송을 많이 듣고 자랐다고 한다.
2. 생애
2.1. 데뷔
그 또래 음악인들이 대개 그러했듯 미8군 그리고 밤무대 출신이다. 방송에 같이 출연해서 밝힌 내용으로 인순이와 어린 시절부터 알던 사이인데 미8군 무대에도 같이 섰다고 한다.1970년대 중반 그룹 '라스트 찬스' (후기) 로 무대 데뷔를 했었으며, 1976년 사계절이라는 그룹의 기타리스트로 음반 데뷔 .[3] 사랑과 평화가 대마초 파동으로 방송이 금지되어 나이트클럽을 뛰던 시기의 멤버였으며[4], 문화방송 전속 관현악단의 기타리스트로도 활동했다.
물론 80년대 테크닉의 절정을 보여줬던 기타리스트들과의 비교는 힘들지만, 그 전세대의 기타리스트로서 유현상의 커리어도 상당한 편이다. 오히려 보컬 유현상보다는 기타리스트 유현상으로서의 평가가 더 높은 경우도 있다. 싱어송라이터로 대 히트한 트로트 곡 여자야는 물론이고, 갈테면 가라지 그리고 백두산 곡의 상당수도 그와 김도균의 합작품이다.
2.2. 백두산
1986년 KBS 2TV의 인기 프로그램 젊음의 행진에서 백두산의 리드 보컬 겸 리듬 기타로 본격 데뷔하였다.절친노트에서 유현상이 밝힌 바에 따르면, 원래 백두산에서 보컬을 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앞서 말했듯 유현상의 시작은 기타리스트였다. 그러나 보컬을 모집하다가 적당한 사람이 없어 자신이 했다고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본래는 서라벌 레코드사의 음반 기획 부장으로 활동하다가 헤비메탈 붐이 일자 사비를 털어 당시 이태원 등지에서 활동하고 솔로몬이란 밴드에서 활동하던 기타리스트 김도균을 스카웃하여 백두산을 결성하게 된 것.
부활, 시나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방송에 얼굴을 내밀면서 대한민국에 헤비 메탈 열풍을 몰고 왔는데, 후발주자인 백두산은 사운드 자체로는 가장 하드하지만, 멜로디 라인은 뽕끼가 섞인 묘한 한국적 메탈 사운드로 팬층을 확보하였다. 1집의 최고 히트곡은 "어둠 속에서" 였는데 중후한 헤비사운드에 유현상의 호소력있고 힘있는 보컬이 매력적인 수작이었다. 1집 웅비나 말할걸 같은 곡이 후기의 백두산의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였고 2집때는 주다스 프리스트의 영향을 받아 국내 헤비메탈 앨범중 걸작으로 불리는 2집 King Of Rock'N Roll을 발매하여 밴드 시기의 리즈 시절을 맞이한다.
유현상의 목소리는 거칠고 터프한 매력이 있는 반면 음역대는 그리 높지 않았는데 이를 일반적으로 방송에서는 '샤우팅'으로 불리는, 특유의 창법으로 보완했다. 1집때는 이 창법을 코러스 정도로 이용했지만, 2집에서는 이 창법을 전면적으로 들고 나왔는데 초반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갈리었다.
가요적이지만 중후한 매력이 있던 보이스를 버리고 주다스 프리스트의 롭 핼포드의 영향을 받은 샤우팅 보컬로 전곡을 끌고 가는것에 대한 기존 팬들의 반감이 있었고, 1집의 가요적인 보컬보다는 카피라고 하더라도 보다 헤비메탈에 가까워진 보컬을 열렬히 선호하던 새로운 팬층들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외형과 그 와중에 본인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음악들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당대 서구의 헤비메탈 사운드를 강조하여 한국식으로 섞어내다 보니 많은 부분에서 서구 메탈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고 억지로 집어넣어서 우스꽝스럽고 작위적인 느낌도 많이 난다는 비판도 공존하였다. [5] 그렇기 때문에 2000년대 초반까지 유현상의 창법은 TV프로나 쇼 프로에서 개그 코드로 많이 쓰이곤 했다. 이건 사실 창법의 문제보다는 유현상의 90년대 초반 헤비메탈에서 트로트로의 충격적인 장르적인 변신에 대한 반향이라고 보는게 옳다고 본다. [6]
결과적으로 보자면 유현상의 이 창법과 헤비메탈에 가까워진 사운드는 당시로서는 성공적이었다는 평을 받았고, 2집에서는 주연배우, 말할걸, Up In The Sky 등이 히트 하면서 시나위 부활 등과 함께 당시 국내 3대 헤비메탈 밴드의 선두 주자에 서게 된다. 물론 전체적인 음악성은 논외로 두더라도, 갓 20대의 파고다 공연 정도의 아마추어 경력을 가지고 시작한 부활이나 시나위에 비한다면, 백두산의 멤버들은 음악적인 경험이나 소위 말하는 짬에서 넘사벽 수준의 프로들이 모인 밴드였으니, 라이브에서의 사운드, 연주력, 무대를 대하는 퍼포먼스 적인 역동성은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또한 김도균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이미 소위 미 8군 시절부터 활동한 경험이 크다보니, 방송계의 관계자도 훨씬 많이 알던 수준이였고, 당대 최고의 프로그램인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등에도 전영록과 함께 출연 하는 등 선배 대접을 많이 받은것도 사실이다. 또 앞선 문서에서는 사심이 들어간 비판적인 시각이 많았으나, 실제로 김경호, 윤도현과 같은 현재의 한국 록의 거목들이나, 김태원 또한 인터뷰에서 백두산의 연주력이나 파괴력, 유현상 특유의 샤우팅 창법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등 립서비스나 실제로 현재 록 판에서도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선구자로서의 대우도 많이 해주는 편이다.
급조된 밴드였기에 초기 5인조에서 음반 발표 당시 김도균, 유현상을 제외하고 모두 교체 되고 1집은 가요도 아니고 락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앨범이 되었다. 하지만 80년대를 살던 사람들의 평가로도 연주력은 최고로 쳐줬다. 특히 나이트클럽을 비롯한 무대 경험이 많았던 리듬섹션 멤버들 (한춘근, 김창식(고인돌), 2집의 김주현) 의 영향으로 늘상 꽉 짜여진 사운드가 나올수 있었다. 이때의 활약으로 1986년 KBS 가요대상 록그룹 부문 후보에 오르는 이변을 일으키기도 했다. 물론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헤비메탈 밴드가 가요대상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척박한 씬에서 큰 성과라면 성과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헤비메탈 밴드가 등장했다. "백두산"이란 이름은 그들의 출신지인 것인가? 그들이 바로 얼마전 Loudness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장본인들이다.[7] 우선 이 자켓에 실린 멤버 사진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것이다. 그 옛날 일본의 록 밴드를 서양의 음악 팬이 기이한 눈으로 봤던 것과 같은 시선으로 아마 그들을 보고 있을게 틀림없다. 호사가들은 그들이 일본에 비해 10년이나 뒤쳐진 사운드를 낸다고 말하고 있지만, 오히려 들려주는 사운드를 들어보면, 일본의 다른 밴드보다도 진짜에 가까운 느낌을 주는 부분이 있다. 보컬의 샤우트도, 스트라토캐스터의 플레이도 그럭저럭 OK. 이 다음의 후발주자들도 기대해볼만하다. - 「점수: 70점」
죠지 아즈마 (BURNN!) 편집장
죠지 아즈마 (BURNN!) 편집장
또한 앞 서술에서 저 평가를 받았다기에는 일본 BURNN!의 내용 역시 나쁘지 않다. 여러 의견은 갈리더라도 대중적으로나 인지도에서 일본 최고의 록 잡지에 손꼽히는 BURNN!에서 LOUDNESS, VOW WOW, EZO와 같은 밴드가 해외 시장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외국에 뒤지지 않는 사운드를 내며 최고의 전성시대를 열던 시절에 해외는 커녕 발조차 담그기 힘들었던 한국 밴드가 이 정도 평가를 받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2.3. 수난의 시대 그리고 음반 제작자로
신군부가 한국 록 씬에 철퇴를 내리면서 1987년 부활의 김태원이 대마초로 잡혀갈 때 유현상 역시 잡혀들어갔다. 자신은 대마초는커녕 술담배도 하지 않지만 '너는 대마초를 피웠으니까 자백하라'고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리더 유현상이 수감되어 백두산 활동을 못하자 버틸 수 없던 기타리스트 김도균이 탈퇴하면서 자연스레 밴드 백두산은 와해된다. 이후 풀려난 유현상은 기획사 사장님으로 변신하여 여성 아이돌의 원조라고 볼 수 있는 전설적인 가수 이지연의 매니저이자 제작자로 활동한다. 실제로 이지연의 히트곡이자 후대에도 많이 리메이크 되고 불리고 있는 난 사랑을 아직 몰라는 유현상이 작곡한 곡또한 시나위에서 탈퇴한 김종서를 영입해 <카리스마>라는 밴드를 만들어 슈퍼밴드를 기획하기도 했지만 밴드 결성 후 제대로 된 뒷받침을 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카리스마는 이지연의 백밴드를 하기도 했다. 결국 자존심 상한 밴드 멤버들은 밴드를 해체하겠다고 유현상을 찾아갔으나, 이미 자금이 바닥난 유현상은 말리기는커녕 악기는 두고 가라고 했다 한다. 김종서가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이 때의 앙금이 아직도 있는지 유현상이 나올 때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유현상은 진심으로 미안해한다고 한다.
당시 유현상은 아이돌 야차[8]와 같은 롤러 스케이트를 타고 나오는 아이돌을 키우는 둥 여러가지를 시도하기도 했다.
유현상은 도원경의 데뷔 앨범에서도 메인 작곡가로 활동했다. 도원경의 히트곡인 성냥갑 속 내 젊음아가 바로 유현상이 작곡한 곡. [9] 재미있는건 성냥갑 속 내 젊음아의 편곡자가 위대한 탄생의 최희선인데, 최희선은 후에 96년 자유선언 쇼케이스 라이브 버전 편곡을 다시 맡게 된다. 그때의 편곡은 후에 조용필 30주년 앨범의 나는 너 좋아에 그대로 쓰이게 된다.
그러다가 이지연의 돌연 은퇴선언[10]이 터졌고 세간에서는 당시 미혼으로 노총각 매니저였던 유현상이 이지연을 짝사랑하는 마음으로[11] 애지중지 키우다가 배신당했다라는 식의 조롱거리로 회자되기도 했으나..
2.4. 결혼
얼마후 유현상은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와 결혼함으로써 범국민적 패닉을 부르며 질시와 부러움과 저주를 한 몸에 받는 대한민국 남성들의 공공의 적 자리에 올랐다.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3관왕,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수영 2관왕인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와의 결혼은 그야말로 쇼킹 그 자체로 백두산 이후로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다. 납치혼을 했다는 루머도 실존했다. 워낙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결혼식도 절(봉선사)에서 조용히 올렸다. 이날 이후 방송국 PD들은 유현상의 레코드 판을 깨뜨리며 절대 방송 출연이나 음악을 틀지 않겠다는 이야기도 했다고 한다.[12]당시 최윤희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으로 현재의 스포츠 스타 김연아에 맞먹는다. 최윤희가 포카리스웨트 CF를 찍었던 때 무려 광고료로 1억원을 받았다. 2020년 기준으로도 1억원이 몇년치 봉급에 해당되는 큰 돈 이지만 저때는 가지고 있으면 그야말로 인생이 역전되는 수준의 매우 큰돈이었다. 1988년 기준으로 올림픽 복권 1등 당첨금이 딱 1억원에 일반 직장인들의 십여년 어치 봉급, 최저임금받는 저임금 노동자나 알바생의 70년치 봉급이었다. 나중에 유현상이 세바퀴에 나왔을때 MC인 이휘재와 박미선이 김연아가 김구라한테 시집간 꼴이라고 비교했고, 최윤희씨도 우리동네 예체능에서 직접 언급하기를 요즘 같으면 김연아가 육중완한테 시집간 꼴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결혼식은 1991년 6월 6일에 절에서 극비리에 진행됐었다. 훗날 라디오 스타[13]에서 밝히길 하객으로는 대성기획 이호연 사장, 가수 이승철, 백민(전 BIG엔터테인먼트 대표), 작곡가 하광훈 등이 참석했다고 한다. 최윤희는 "그 분들도 결혼식인 줄 모르고 오셨다가 비밀 결혼이라고 하니까 굉장히 놀라셨다"고 밝혔다. 결혼사진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TV는 사랑을 싣고 52회에서 나와 이야기하길 최윤희와의 비밀결혼은 형처럼 여기던 이기종 기자가 도와줬다고 한다. 방송 끝에서 둘이 재회해, 이기종 기자가 비밀 결혼에 대한 뒷이야기를 밝혔는데, 처음에 유현상이 5일전 쯤 결혼 사실을 전화로 알렸을 때만 해도 정말이냐며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최윤희를 커피숍으로 데리고 오라 해서 데리고 왔는데, 사실확인 겸 '정말 이 사람과 결혼할 생각이 있느냐?'고 묻자 최윤희는 '이미 저도 결정했다'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 이건 꼭 결혼시켜야겠다고 생각해 결국엔 둘을 도와줬다고 한다. 결혼식을 지켜보면서 둘이 비밀 결혼을 하느라고 축의금을 받지 못한 게 마음이 아팠다고. 당시 최윤희의 위치가 어느정도였냐 물어보니 결혼식을 하면 대통령이 축의금을 보냈을것이다.라고 언급했다.
나이 차이(최윤희가 1967년생으로 유현상보다 14살 연하)도 꽤 나는 편인데, 행복하게 잘 사는 듯 하다. 자식들이 바라보기에는 오히려 최윤희가 유현상을 더 사랑한다.라고 한다. 둘이 결혼할 때 최윤희의 집에서 결사반대를 했는데 이 때 최윤희가 단식투쟁을 해가며 결혼하려고 노력했고 결국 이루어졌다. 정확히는 최윤희가 결혼을 허락할 때까지 집밥은 절대로 입에 대지 않고 오직 유현상이 사주는 밥만 먹었다. 둘 사이에 자녀는 아들이 두 명[14] 있으며, 둘다 유수한 미국의 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한다. 특히 큰 아들은 워싱턴 대학교 치과대학에 다닌다고 한다. 작은 아들은 전문 요리사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2.5. 솔로 활동
90년대 초 결국 그는 머리를 자르고 트로트 가수로 변신 여자야를 발표해서 락 음악 후배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음악 평론가 임진모는 한국 대중음악사상 가장 가혹하고 충격적인 변신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그 여파나 충격이 심했는데, 트로트 가수로 성공한 후에도 일요일 일요일 밤에나 다른 쇼 프로에서도 유현상의 리즈 시절을 농담 따먹기 식으로 이야기 했다. 사실 가족이 생기고 아이가 생기면서 부양의 문제가 생겼고 결국 그는 돈을 벌어야 했다고 후에 기술했다. 하지만 트로트를 한 걸 후회하진 않는다고 한다.사실, 백두산으로 복귀한 지금도 개그의 소재나 음악 프로에서 이런 걸 했었다고 자랑스럽게 부르는 것을 보면 음악에 대한 편견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여자야 외에도 갈테면 가라지같은 곡을 히트시켰다. 또한, 밴드 결성 전에 솔로 활동을 한 적이 있는데 이 시절에 이미 버젓한 트롯트에 가까운 성인가요 앨범을 낸 바가 있으니 딱히 변절이라기도 뭣하긴 하다.
하지만, 이런 행동의 반작용으로 여자야를 부르던중 백두산의 팬들이 그에게 실망하여[15] 유현상을 질타하며 물병을 투척하거나, 얼마 줄테니깐 백두산 노래 부르라고 하는 둥 개인적으로 수난도 상당했다고 한다. 원래 유현상의 뿌리는 미8군과 나이트클럽이므로 트로트, 디스코, 혹은 록의 장르 구분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트로트 가수로써의 유현상도 독특했는데 상상플러스에서 김영호는 '백두산에서 하던 대로 부르는 거 같다'라고 평할 정도로 일반적인 트로트의 이미지와는 달랐다. 오히려 굳이 장르를 붙이자면 본인 스스로 말하는 '트로트가 아니라 미디움템포다'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여자야' 이후 2003년에 "갈테면 가라지" 를 발표한 바 있으며, 이로부터 12년이 지난 2015년에 새로운 트로트 앨범 "고삐" 를 발매하였다. 이건우 작사 유현상 작곡으로, 기존의 창법보다 좀 더 트로트에 가깝게 변화된 모습이 보인다.
2019년 유현상은 MBC충북과의 인터뷰에서 트로트로 전향한 이유에 대해 자세하게 술회하였는데,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트로트를 하게 되었다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록을 하면서도 지속적으로 트로트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었고 언젠가는 그런 장르를 해보고 싶었었다고 한다. 트로트 데뷔 첫 히트곡이었던 여자야도 단순히 상업적 흥행을 염두에 두고 쓴 노래가 아닌 아내를 위해 진심을 담아 작사, 작곡한 노래였다고. 더불어 장르의 다양화에 대해 여러 영화 장르를 도전하는 연기자에 비유하고 음악에 대한 차별은 인종차별보다 위험한 것이라며 록과 트로트 중 어느 장르에도 우위를 두지 않는 자신의 음악적 철학을 내비쳤다.
여담으로 이 일화를 이야기할때 부활의 김태원이 라디오 스타에 출연하여 음악은 거대한 바다와 같다. 락이 트로트보다 우위에 있는 음악이냐며 유현상을 두둔한 적있다.
2020년에는 대구TBN의 시장가요 프로젝트에서 칠성시장 주제가를 담당했다. 2021년 9월경부터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칠성시장역 진입 시에[16] 차내 방송으로 노래 일부가 송출된다.
2.6. 백두산 재결성
2008년 김도균 등과 동두천 락 페스티벌에서 백두산을 오리지널 멤버로 재결성히여 활동하고 있다. 환갑이 넘은 나이지만 아직도 쌩쌩히 활동하고 있다. 트로트 가수로 변신한 시절에도 헤비메탈이 하고 싶어 철저히 목 관리를 해왔다고 한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보컬의 기량은 많이 쇠퇴하였지만, 그 시절의 곡을 원키로 그대로 소화하며, 누구보다도 메탈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는 모습에서만큼은 귀감이 된다.지금은 폐지된 세바퀴에 고정 출연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케이블 프로같은 데서 망가지는 것도 불사하는 탓에, 유현상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공연장에서의 카리스마에 놀라는 경우가 적지않다. 하지만 고정출연 후 자신을 개그맨으로 인식하는 젊은 층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세바퀴에서 하차하고 예능 활동을 거의 접다시피 했다.[17] 이 시기에 유재석, 김원희의 공감토크쇼 놀러와에서 부활과 함께 출연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고, 라디오 스타에서 씨엔블루와 함께 출연하여 레전드편을 하나 만들어내기도 했다. 내용도 좋으며, 재미도 있으며, 백두산의 유현상, 김도균의 개인적인 모습을 보고 싶다면 추천해 줄수 있는 편이다.
2.7. 나는 가수다
나는 가수다 2에 백두산 이름을 걸고 밴드로 출연하는 것이 확정되었다. 졸지에 좀 더 젊은 층의 밴드 가수들이 나올거라 예상했던 사람들에게 훼이크를 날린 셈이 되었다. 출연 당시에는 가장 큰 화제를 몰고 왔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실망스러운 수준의 편곡과 곡들이였고, 백두산이란 이름에 맞지 않게 첫 라운드에서 하차했다. 이때의 쿵따리 샤바라는 나가수 사상 적우의 나홀로 뜰 앞에, 장윤정의 Never Ending Story, 장혜진의 미스터와 함께 최악의 곡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한다. 그나마 회자가 되었던것이라면 박미경의 국어책 리액션과 함께 나왔던 백수단 선배님정도. 그리고 곡 선정, 편곡에선 아쉬웠다지만 김도균의 미친 솔로 독주만큼은 호평을 받았다.나는 가수다 2 초기의 생방송 체제의 음향 문제가 심각했기때문에 밴드가 피해를 본 것도 있었다. 첫 방송때부터 소리가 잘 들리지 않거나 묻히는 경우가 많았고 유현상의 창법과 더불어 썩 좋은 환경을 만들진 못했다.
2.8. 근황
현재는 백두산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자 제작자로 다시 부활하였다. 백두산의 성인가요 활동이 어느정도 마무리 되면 그 후에는 다시 백두산 쪽의 일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하며 현재는 앨범 작업 중이라고 한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유현상의 열린 음악회라는 바를 운영했지만, 문을 닫았다. 실제로는 상당히 젠틀하며 자상하다고 한다. 매너도 좋고. 현재 장윤정 못지 않게 행사를 많이 뛰고 있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그러던중 2020년 11월 4일 라디오 스타에 게스트로 출연해 오랜만에 방송출연을 했다.[18]
2022년 8월 19일 이십세기 힛-트쏭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Up in the sky를 열창하였다.
3. 평가
전체적으로는 한국 헤비메탈 1세대로서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3.1. 보컬리스트로서
보컬리스트로서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리는데, 성인가요나 트로트를 하던 사람이 억지로 메탈스러운 흉내를 낸다는 평가와 한국 헤비메탈의 저변을 한 단계 넓힌 명 보컬이라는 평가로 나뉜다. 다만 좋은 평이건 나쁜 평이건 유현상의 헤비메탈 보컬의 아이덴티디라고 할 수 있는 샤우트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다. 편견이나 음악성을 논외로 두고 봤을때 전성기때의 유현상의 보컬은 철금성 같은 날카로운 샤우팅이 정점에 달했으며, 시나위나 부활에 비해 이미 오랜 시간 프로로 활동을 했기 때문에 라이브에서의 기복도 크게 보이지 않았다. 전성기 시절 그가 샤우팅 창법으로 지른 최고음역은 3옥타브 후반에 이른다. 또한 기괴하고 역동적인 퍼포먼스는 후대에 윤도현, 김경호 등 후발주자들에게 정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19] 메탈 밴드로서의 정체성을 보면 당시에도 부활, 시나위보다 백두산이 대중들에게 훨씬 많이 알려져있었다. 샤우트 창법을 사용하는 보컬들에게 따라오는 숙명처럼 그도 결국 세월의 한계를 이겨내지 못하고 과거와 같이 공명감 있고, 내지르는 시원한 샤우트 창법이 아닌 스크리밍에 가까운 긁는 소리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원키로 노래를 소화하는 모습은 많은 음악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20]과거의 공연들이 디지털 화가 되며 유투브 등지에서 복각되어 나오는 현재에는 과거 쇼 스튜디오 A, 젊음의 행진, 토토즐과 같은 프로에서 라이브 했던 유현상의 모습이 소개되며 너무나도 저평가된 한국 헤비메탈사의 위대한 보컬리스트로 재평가 받고 있다.[21] 예능에 출연하며 소모된 웃기고 괴상한 이미지 때문에 적잖게 피해를 본 케이스.
3.2. 작곡가로서
작곡가로서도 히트곡 메이커로 본인의 히트곡인 <여자야>, <갈테면 가라지>, <고삐>와 같은 성인 가요는 물론 백두산 시절의 최대의 히트곡 <어둠속에서>, <주연배우>, <말할걸> 도원경의 <성냥갑 속 내 젊음아>, 이지연의 <난 사랑을 아직 몰라> 등 본인 및 많은 가수들에게 히트 악곡을 제공한 바 있으나, 태생적인 한계로 인해 기본적인 멜로디 라인의 진행이나 코드가 성인 가요나 트로트에 가깝고, 그러한 모습은 백두산에서의 자신의 히트곡인 <주연배우> 등에서도 강하게 드러난다. 또한 자신의 작품을 재사용이나 돌려막기가 자주 있었다는 흠결은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작곡가로서의 능력이 절하되지는 않는다. 다만 한국을 한정으로 본다면 활동했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때, 멜로디 메이킹 자체는 속칭 한국식 트로트에 특화 된 <뽕끼>와 대중가요에 가까우며 중독성이 있기 때문에 기억나는 노래가 무엇인가를 물어봤을땐 유현상이 작곡한 곡들이 꼽히는 곡들이 다수.3.3. 기타리스트로서
유현상 씨는 우리나라에서 기타치는 모든 사람들의 꿈이였다. 지미 헨드릭스의 <The Winds Cries Mary>를 연주했는데, 와우! 현상씨의 음악들이 나에게 파고 들었다. 내 몸이 얼어 붙는 줄 알았다. 엄청난 실력이였다. 곳곳에 지미 헨드릭스가 살아 있는 듯 차분하면서도 영혼이 느껴지는 그 곡은 현상씨를 너무나 멋지게 만들었다. 아니 지미 헨드릭스보다 더 잘하는거 같았다.
전인권 - 자서전 걱정말아요 그대에서
당대의 음악인들에게는 작곡가나 보컬리스트로서의 유현상보다는 기타리스트로서의 유현상의 평가가 훨씬 높은데, 미디어에서 비춰진 왜곡된 이미지 메이킹, 같은 팀의 김도균이라는 국내 최고 레벨의 기타리스트가 있었기 때문에 기타리스트로서의 유현상은 생각보다 훨씬 평가절하 되는 편이다. 그 시대의 음악인 답게 지미 헨드릭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으며, 실제 공연에서도 자주 연주한다. 어떤 면에서는 국내의 기라성 같은 기타리스트들보다도 훨씬 맛을 잘 살리는 부분도 있으며, 블루지하고 끊어내는 맛을 제대로 살리는 명 기타리스트라는 평이 대다수다. 본인은 속주 기타리스트는 아니지만 어느정도의 속주 또한 가능하며, 현재에도 꾸준히 친 덕분인지 나이로 인해 노쇠화도 보이지 않는다. 여튼 종합적으로 기타리스트로서의 유현상은 대가의 반열에 들어도 될 정도로 훌륭한 기타리스트이다.전인권 - 자서전 걱정말아요 그대에서
4. 여담
- 거친 락커 이미지와는 다르게 술, 담배를 전혀 안 한다고. 그래서인지 나이에 비해 피부가 매우 좋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어린왕자 정도는 아니지만 나이에 비해 굉장한 동안이다.
- 조카인 가수 유한솔이 현 MBN의 "그" 아나운서와 동명이인이다.
- 이지연의 매니저 시절 1989년 이지연의 방송 출연을 위해 당시 모 KBS PD에게 뇌물을 준 것이 발각된 적이 있는데 유현상 본인은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기록이 없다..#
- 2006년 억대의 돈을 빌리고 갚지 않은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되었다.# 이후 판결은 불명.
- 2011년경 롤러코스터 홍대정태에 출연하였다.
락커 답게홍대 락밴드 클럽 주인 역할로 나온다.
[1] 진주 류씨 토류계 29세손 '相'자 항렬이다.[2] #[3] 당시 같은 팀에 있던 가수가 윤시내.[4] 이 시기의 사랑과 평화는 유현상 말고도 수많은 멤버들이 거쳐갔다.[5] 그러나 곡의 형식미나 사운드의 질적인 면 등에서 당대 한국의 여느 록 밴드들보다 서구의 수준에 가까이 육박했던 위대한 밴드라는 것이 전반적인 중론이다.[6] 실제로 유현상의 모습은 공익광고에 쓰이기도 하였다.[7] 아마 부활의 1집 속지에 실린 문구를 착각한 듯.[8] 일본 그룹 히카루GENJI의 컨셉을 모방한 그룹. 뒤에 ZAM에서 리더를 맡는 조진수가 팀의 리더였고, '맨발의 청춘'이라는 곡으로 유명한 듀엣 벅에서 활동하는 김병수도 이 때의 멤버였다. 이들이 발표한 '애타는 마음'은 원래 '백두산'의 음반에 실린 곡이었다.[9] 본래 본인의 솔로 앨범에 있는 사랑 위해 흘린 눈물이 원곡이다.[10] 이지연이 사랑에 빠진 게 원인이었다고 한다. 이지연의 갑작스러운 미국행과 현지에서의 결혼, 그리고 일방적인 은퇴선언은 매니저로서 당시까지 이지연의 활동에 거의 지원과 투자만 하고 이렇다 할 수익도 가져보지 못한 유현상에게는 인간적 배신감과 함께 금전적 손실도 컸던 사건이었다.[11] 실제로 불금쇼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냐구 물으니까 부정은 못하면서 정말 아름다웠지...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사귄건 아니지만 적어도 마음은 있었던듯. 다만 그런 마음 먹은것 때문에 이지연이 피해 본 것도 없고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게 조롱당할 일도 아니니 진짜라고 해도 비난할 일은 전혀 아니다. 참고로 이지연의 은퇴 얼마 후 이지연도 유현상도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상대와 결혼을 했으니 나이많은 남자가 징그럽게 나이어린 여자에에게 딴 마음을 품었네 운운하기에도 좀 뭐한 상황이고...[12] 소문이 아니라 팩트다. 유현상이 방송에서 직접 말했다. 심지어 유현상보다 나이 많은 PD 간부 한명은 다른 젊은 PD들에게 CD를 나눠주던 유현상에게 "어이 유현상씨, 그거 나도 줘 봐요."라고 해서 유현상이 주자, 다른 후배 PD들에게 "야, 그 (유현상한테) 음반 받은 거 다 갖고 와."라고 하더니 레코드를 전부다 모아서 유현상 면전에서 그 많은 걸 하나하나 다 부수는 퍼포먼스(?)를 보였다고 한다. 유현상이 충격을 받아, 마음의 상처가 심했다고. 유현상이 직접 한 표현으로는, "지 것만 부수지, 왜 다른 PD것들까지 다 부숴가지고 말야..."[13] 2011년 5월 18일자 방송[14] 동균, 호균[15] 사실 굉장히 안 좋은 현상이긴 하지만 당시 한국의 락/메탈 팬들은 대중들이 질색하는 메탈을 자기만 이해하고 듣는다는, 이른바 부심이 좀 있는 경우가 많았다. 시나위의 보컬이었던 임재범이 대중가요로 빠지자 욕을 먹은 것도 이 때문. 그런데 그냥 대중가요도 아니고, 촌스럽다고 여겨지던 트로트를 하니 충격인 것. 지금에 와서는 좀 나아졌지만 아직도 이런 메탈부심이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음악 장르 자체에 대한 편견을 갖는 것 자체가 웃기는 것이다. 만약 유현상의 트로트 가수로서 "실력"을 비평했으면 몰라도 이들은 "메탈 보컬"인 유현상이 "트로트"를 한단 사실 자체를 욕했기 때문.[16] 역명 안내방송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17] 사실 "80년대 락스타"가 그대로 늙은 듯한 외양, 이에 대비되는 수더분한 성격과 최신 예능 트렌드에 적응못해 어버버하는 모습 등 예능에서 유현상의 캐릭터가 워낙 독특해서 웃음을 자아낸 거지, 유현상 본인의 예능에서 모습을 보면 의도적으로 개그를 치는 건 적다. 본인은 스스로를 아직도 뮤지션으로만 생각하고 있는데 "웃기는 아재"라고만 여기니...[18] 라디오스타는 2011년에도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다.[19] 김경호는 최근 로또싱어에서 말할걸을 선곡했다. 또한 평소에도 백두산의 팬임을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인증한 바가 있는데, 1집과 2집의 수록곡들을 모두 외우고 있기도 하며, 가장 좋아하는 곡은 The Moon On The Baekdoomountain이라고 한다.[20] 2020년에 들어 원키로 소화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김도균의 탈퇴로 인한 전체적인 음악성의 변화와 나이를 무시할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2021년 전주 KBS에서 방영하는 'Song큐멘터리 백투더뮤직' 37화 에서 편곡하여 선보인 'Up In The Sky'에선 원키로 소화하였다.[21] 유현상뿐만 아니라 백두산이라는 밴드 자체가 흔히 말하는 부활, 시나위로 대표되는 3대 밴드중 적어도 동시대의 라이브 퍼포먼스로만 따진다면 레벨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밴드로 평가받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시나위와 부활은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험도 일천한 아마추어 냄새가 짙은 신인 밴드였다면, 백두산은 김도균을 제외하면 이미 미8군, 나이트 클럽등으로 경험이 쌓일대로 쌓인 프로 연주자들로 구성돼있었기 때문이다. 유현상 역시 30대 초반으로 절정기의 기량을 유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