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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

파일:나무위키+유도.png   동명의 학원인에 대한 내용은 김현식(학원인)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김현식의 주요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골든디스크 시상식_로고.png
음반 대상
변진섭
<너에게로 또 다시>
(1990)
김현식
<내 사랑 내 곁에>
(1991)
신승훈
<보이지 않는 사랑>
(1992)
}}}||
파일:김현식.jpg
이름 김현식(金賢植)
출생 1958년 2월 18일[1], 서울특별시 중구
사망 1990년 11월 1일 (향년 32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적 충청남도 홍성군[2]
신체 180cm[3], 71kg,[4] A형
십이지 개띠
가족 부모님, 누나, 남동생
자녀 아들 김완제[5]
별명 사랑의 가객

1. 소개2. 어린 시절3. 가수 활동4. 사망5. 후일담6. 트리비아7. 디스코그래피8. 관련 문서

1. 소개

대한민국가수. 한국의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주류로 끌어올린 상징적 인물이자[6], 동시에 최고의 인기를 누린 대한민국 가요역사에 손에 꼽는 레전드로 평가받는다.

2. 어린 시절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집안 배경부터 범상치 않았다. 당시 아버지는 사업가로서 어느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던 분이었고 할아버지 역시 충남 홍성에서는 알아주는 유지였다. 또 외할아버지 역시 만석꾼의 아들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영문학자였다. 위로 지금은 캐나다에 이민 가 있는 누나가 있고, 여섯 살 밑으로 역시 지금 뮤직 엔지니어링을 공부하고 있는 동생이 있다. 1964년에 서울혜화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때 외가인 충청북도 옥천군에 있는 죽향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3학년 때는 서울에 있는 삼청초등학교로 전학하였다. 당시 전인권이 삼청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나 당연한 소리지만 서로 누군지 모른 채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학군제의 시행으로 5학년 때 수유초등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초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굉장히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 1970년에는 보성중학교에 전교 4등의 성적으로 입학했다.

그는 보성중학교 때 처음으로 기타를 접한다. 사촌형인 양국정이 기타를 가르치면서 음악에 빠져들기 시작했지만 음악을 알아가면서부터 중학교에서 최상위권을 유지하던 성적은 조금씩 하락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부친의 사업이 실패하자 한동안 방황을 한다.[7] 중학교 3학년 때는 열심히 공부하여 당시 명문 학교였던 경기고등학교에 지원했으나 낙방한다. 결국 1973년에 명지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명지고등학교에서도 음악 동아리에 가입하였는데 선배의 악기에 손을 댔다는 이유로 손찌검을 하자 이에 대들어 뒤엉켜 싸운 사건으로(...) 밴드부에서 탈퇴를 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그는 고등학교 생활에 흥미를 잃게 되었고 결국 1학년을 마치기 전이었던 1974년에 가족들 몰래 자퇴서를 냈다.

여담인데 1972년(당시 중3, 14세) 기타만 들고 인천 작약도로 친구인 김동환과 같이 음악 여행을 떠났고 3년 뒤에 둘이 다시 음악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자퇴 후에는 검정고시 학원을 다녔으며 1975년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더 이상 공부에 손을 대지 않았으며 계속 방황하다가 기타를 메고 종로에 있는 한 음악 다방에서 통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명동의 큰 무대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바로 이 당시에 사촌형 양국정의 소개로 종로에서 당시 인기를 끌던 음악다방에서 일하던 한 DJ를 찾아가 그의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그 DJ는 바로 당시 20대 중순이던 개그맨 전유성이었다. 전유성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면서 어린 김현식이 부른 노래에 감탄하며 "넌 음악다방같은 곳에서 노래를 부르는게 아까워. 그야말로 가수로 나가면 전설이 될거다!"라며 적극적으로 가수가 되길 권유했다.

이후 밤무대나 여러 곳을 떠돌며 통기타를 연주하며 가수로서 길을 내딛고자 노력했다. 이 때 나이를 5~6살은 올려 소개했다고[8]. 이 때부터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주목받는 신인으로 전인권, 한영애선배 보컬들 사이에서 활동하며 검은 나비, 동방의 빛, 신촌블루스 등의 그룹사운드에서 보컬로 활동했다.이때 이장희의 남동생 이승희[9]를 만나게 된다.

3. 가수 활동


1980년대 극초반 모습을 볼 수 있는 영상, 말년에 보기 힘든 가성 영역을 들을 수 있다.

1978년 본래 이장희의 주선으로 1집 앨범을 내려 했으나 이장희가 미국으로 떠나고 김현식 본인도 대마초 문제로 1집 앨범을 녹음만 해둔 채로 놔둬야 했다. 결국 1980년 자신의 이름을 건 데뷔 앨범 1집 봄여름가을겨울을 내지만 그마저도 나온 앨범이 실패해버리면서 이를 비관한 김현식은 담배에 매달리게 된다. 그후 신촌 옷가게의 여인에게 반해 1982년 결혼하고 자신의 분신이라 부르며 사랑하던 아들 김완제를 얻는다. 그리고 이때 피자가게를 하는데[10] 처음에는 잘되나 싶더니 1년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밤무대 가수로 활동하면서 1984년 발매한 2집인 <사랑했어요>가 대박을 거두면서 가수로 자리잡는데 성공했고, 마지막까지 같이 한 동아기획 레코드와 계약한다. 봄여름가을겨울과 함께 제작한 3집 <비처럼 음악처럼>도 30만장이 넘게 팔렸으며 상업적 성공과 호평을 받았건만 그 자신은 술과 담배 그리고 1987년 전인권, 故 허성욱[11]등 과 함께 다시 대마초를 피우다가 구속되며 피폐해져갔다.[12] 그리고 이때 복용한 대마초가 건강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88년 2월에 김현식은 63빌딩에서 재기 콘서트를 열었고 팬들을 실망시킨 사죄의 뜻으로 삭발을 하고 무대에 올랐다. 이때 김현식은 관중석을 꽉 채운 팬들을 보고 너무나 감격해 눈물이 앞을 가렸으며 그때의 콘서트는 잊혀지질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그 해 9월 4집 앨범을 발표한 뒤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한다.

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정에 여리고 말은 거칠어도 꽤나 섬세했었다고... 하지만 이건 일찍 요절한 것에 대한 반동으로 미화된 것이고, 실제로는 알콜 중독에 폭력을 행사하는 인간 말종이었다. 단지 과거에는 그런 연예인의 사생활이 잘 드러나지 않기에 엄청난 인기에 누가 되지 않은 것일 뿐이다.

그래도 친한 후배인 유재하1987년 11월 1일 교통사고로 죽을 때도 대성 통곡하면서 한동안 에 매달리며 슬퍼했던 걸 보면 정이 있는 사람이긴 하다. 문제는 슬픔을 잊는다고 쳐도 술이 너무 과했던 것. 오죽하면 4집을 낼 당시 친구이던 이문세함춘호 같은 지인들은 "아프면 약을 먹어야지 왜 술을 먹냐?" 걱정했음에도 그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술을 들이켜 댔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자 그의 몸은 점차 피폐해져 갔다. 1989년 영화앨범 '비 오는 날의 수채화'를 녹음할 때부터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1990년 5집 앨범을 발표할 당시 의사가 '술을 한 방울이라도 마시면 죽는다'고 경고할 정도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병원에 입원하기전 김현식은 자신의 집에서 술과 담배로 오랜시간을 밥도 먹지 않고 지냈고 그 때 김현식이 만들어낸 곡이 내사랑 내곁에 이다. 이 때 김현식 스스로가 집에서 녹음한 내 사랑 내곁에 음원이 있다. 병원에 입원 후 녹음실에서 녹음한 것도 있다.

마지막 6집 앨범을 낼 때에는 그를 이전부터 아끼던 동아기획의 김영 사장을 만나서 "언젠가 술 먹다가 죽고자 했는데..."라는 식의 말을 할 정도였고 후에는 간경변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다. 입원한 동부이촌동 병원에서도 자주 탈출을 하여 술을 마셨으며 자기 몸을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하였다.
그래도 그에겐 언제나 기타가 들려 있었고 병실에서도 항상 노래소리가 끊임이 없었다.
사후 유작인 '내 사랑 내 곁에' 외 실질적 유작인 5집 앨범 '넋두리' 앨범이 바로 이때 병원에서 외출을 다녀오다시피 해서 간신히 만들어진 것이다. 김영 사장의 포기하자는 말에도 각혈을 하면서까지 엄청난 유작을 남기고 우리곁을 떠나갔다.

김현식의 음악 장르가 다양한데, 그중 <사랑했어요>을 트로트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으나 한국적 크로스오버 발라드라고 하는게 오히려 적합하다. 멜로디 라인이나 악기 구성등 전반적 곡의 흐름이 우리가 아는 트로트와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4. 사망

결국 1990년 11월 1일(공교롭게도 김현식이 그렇게나 아끼던 후배 유재하의 기일)에 마지막으로 병원에서 동아기획 김영 사장에게 "사장님, 저 괜찮으니까 오늘 퇴원해서 내일 녹음에 들어가야겠어요"라면서 밝게 전화를 했다. 전화받은 김영 사장은 '오, 잘됐다. 그래도, 몸 생각해서 쉬면서 천천히 해...'라고 편하게 답변했는데 이 전화를 끊고 겨우 2시간 뒤에 김영 사장은 그가 하늘로 떠난 것을 전화로 전해 들었다고 한다. 2010년 김현식 20주기 기념 다큐멘터리에 나온 김영 사장이 회상하길, 전화받고 믿기지 않아서 "그럴리가 없어! 겨우 두시간 전에 현식이가 밝게 전화하면서 내일이라도 녹음 들어간다고 했다고! 그런데? 현식이가 죽었단 말이야!?" 라면서 소리쳤을 정도로 충격받았다고 한다. 어쩌면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던 걸지도...

5. 후일담

그의 유작이 된 6집 <내 사랑 내 곁에>는 100만장이 넘게 팔리는 대박을 거둬들였으며 가요톱텐 1991년 12월 25일 방송분에서 골든컵을 탄 김정수의 <당신>과 같이 공동 수상을 했다. 다만,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기 때문에 수상은 그의 아들 김완제가 대리 수상하였다.[13] 대만에서도 리메이크된 바 있으며 대만에서 리메이크해 부른 가수가 바로 한국인 가수 장호철이다. 그는 개그맨 김한국과 초등학교 시절 친구라서 같이 90년대 중순 국내 방송에 나왔는데, 아버지가 중국어를 열심히 배워서 어릴 적부터 그에게도 배우게 해서 중국어를 상당히 잘했다고 한다. 그 보기로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집에 가서 이 가수가 중국어로 짜장면 달라고 하면 화교인 사장이 반가워하며 한가득 짜장면을 줘서 어린 김한국이나 다른 친구들도 실컷 배부르게 먹었다고 회고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인터넷 찾아보면 담영린(알란 탐)이 광동어로 리메이크한 노래만 나온다.

그밖에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한국계 화교(?)인 강육항(姜育恒)도 리메이크했다.

6. 트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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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현식 2집 커버. 가수로써 정체성은 블루스, 록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 록밴드들의 스타일이자 주류였던 백두산, 시나위 등의 가죽바지, 장발 같은 스테레오타입 록커와는 거리가 먼 보이스와 비주얼로 2집 때부터 크게 인기를 얻었다.
  • 데뷔할 때만 하더라도 굉장한 미성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에는 음색을 바꾸려는 본인의 노력과, 평소에 즐겨 하던 술담배의 영향이 겹쳐 굵은 목소리 + 쇳소리가 나는 허스키한 창법을 구사하게 되었다. 무릎팍 도사 김건모 편에서도 잠시 비교용으로 나온 적이 있는데 1집의 <봄 여름 가을 겨울>과 6집 <내 사랑 내 곁에>의 음색은 서로 다른 사람이라 생각될 정도로 1집에서는 정말 놀라울 정도의 미성이었다. 1집의 타이틀 <봄 여름 가을 겨울>, 2집의 <사랑했어요> 등에서 나타나는 그의 보컬은 특유의 미성과 가성의 능숙한 사용으로 쭉쭉 뻗어올라가는 고음을 보여준다. 2집을 내기 전인 1984년 3월, 7인치 LP판 싱글을 낸 적이 있는데 '사나이 노래' 라는 타이틀을 냈었다. 1집과는 달리 굉장히 굵지만 허스키와는 거리가 먼 창법으로 부른 적이 있었다. 다만 상업적인 느낌과는 거리가 먼 실험성이 돋보였던 앨범인지라 구하기가 매우 어렵고 고가에 거래되는 음반이 되어버렸다.[14][15]
    이후 목소리가 상당히 바뀐 3집의 <비처럼 음악처럼>을 들어보면 미성이 상당히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과는 다른 거칠거칠하면서도 애절한 음색으로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격적으로 목소리가 바뀐 것은 4집 이후로[16] 특히 유작인 <내 사랑 내 곁에>가 크게 히트하면서 대중의 인식이 거칠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고정됐다고 할 수 있다. [17]
  • 김현식은 한 때 국내 절들의 종소리를 들으러 다녔었다고 한다. 이 를 통해 소리에 대해 연구하였울 것 이라고 한다.
  • 의외로 잘 안알려진 사실인데, 싱어송라이터다. 게다가 대표곡인 봄여름가을겨울, 사랑했어요는 본인 자작곡. 라이브나 녹음에서 노래 하다가 음을 바꿔 부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음에 대해 이해가 뛰어나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라디오 스타에서 김종진이 그의 말을 인용한 것 처럼 그냥 자기 멋대로 부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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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년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비처럼 음악처럼이 개봉했지만 흥행이나 평은 그리 안 좋았다. 김형철[19]이 김현식을 맡았지만 이젠 잊힌 영화가 되어버렸다.
  • 1996년 KBS에서 방영한 드라마 머나먼 나라 초반부에서 김현식이 자주 언급되었다. 초반부는 배경이 1990년도였는데, 극중 한수(김민종)가 김현식의 광팬이어서 운하(김희선)를 데리고 김현식 콘서트에 갔고[20], 또한 한수는 김현식이랑 악수한 손을 영광으로 여겨 붕대를 감고 다녔다. 물론 김현식이 사망한 날 꽐라가 된채 노래방에서 <언제나 그대 내 곁에>만 20번 이상(...) 부르는 것도 모자라, 집에 돌아온후 울면서 깽판을 부리기도 했다. 김현식이가 죽었다구요 아버지!ㅠㅠ 어차피 드라마 오프닝 자체가 <언제나 그대 내 곁에> 리메이크 버전이고, 훗날 김민종도 따로 리메이크 버전을 불렀다.
  • 이승철이 스승으로 모시는 가수라고 한다.[21] 이승철이 이를 언급한 맥락에 따르면 직접 가르침을 사사한 적은 없지만 그의 노래에 큰 감명을 받고 즐겨 듣고 따라 부르는 것만으로도 많은 가르침을 얻었다고 여기는 듯 하다.
  • 홀연히 나타난 요한 일렉트릭 바흐라는 괴짜 일렉트로니카 아티스트가 <비처럼 음악처럼>의 "난 오늘도 이 비를 맞으며 하루를 그냥 보내요"를 샘플링 해서 white hand(...)라는 곡을 작곡했다.
  • 2002년 발매된 앨범 The Sickbed Live에 얽힌 사연이 있다. 1990년 여름 간경화가 악화되어 입원한 김현식은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면서 역시 장기 입원 중인 한 여성과 면식이 생겼는데 그녀가 병원에서 생일을 맞게 된 것을 알게 되자 아끼는 기타와 녹음기를 찾은 뒤 다른 환자와 간호사들이 둘러앉은 가운데 ‘생애 최후의 콘서트’를 열었다. 그리고 21곡을 부르고 이걸 녹음했던 테이프를 생일 선물로 주었다. 몇달 뒤 김현식은 사망했고 여성은 무사히 퇴원하였지만 들을 때 마다 계속 가슴아파하다 이민을 가면서 소중히 간직해 온 테이프를 김현식을 무지 좋아하던 후배에게 양도하였다. 10여년 동안 아끼며 듣던 후배는 TV에서 김현식 추모 방송을 보고 이걸 알리기로 결심해 세상에 나왔다. 김현식 어머니도 흔쾌히 동의하여 살려낸 17곡을 앨범으로 낼 수 있게 됐다.

  • 2013년 10월 20일, 김현식의 미공개 노래 9곡을 포함한 "김현식, 2013년 10월"이 공개되었다. "그대 빈들에"[22], "외로운 밤이면" 등의 미공개곡들과 6집 수록곡 중 김현식이 병상에서 재녹음한 11곡이 수록되었다. 죽기 직전 피를 토해내는 듯한 김현식의 노래를 확인할 수 있는 앨범. 음질은 깔끔하진 않지만 그걸 잊을 정도로 김현식의 보컬이 모든 걸 압도해 버린다.
  • 음악적 스타일이라든가 고등학교 중퇴, 젊은 날에 요절, 약물 중독, 반항적인 삶 등 일본의 오자키 유타카하고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활동 시기도 겹친다. 다만, 나이는 김현식이 더 많고 사망시기도 김현식이 더 빠르다.
  • 독일고전주의 음악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도 공통점이 많다. 고달프고 험난한 삶, 술 중독으로 인한 간경변, 삶의 의지를 내팽개쳤으나 음악에 대한 높은 열정, 생전에 남긴 수많은 명곡들 등을 들 수 있는데, 음악적 스타일과 활동 시기는 너무 차이가 나고 베토벤과는 달리 김현식은 생전에 귓병을 앓지도 않았다.
  • 사랑했어요'를 발표한 시기에 김상아'라는 가수 역시 사랑했어요'라는 음반을 발표했다. 심지어 당시 가요톱텐 순위는 김상아가 훨씬 높았다. 그러나 이후 김상아는 히트곡을 내지 못하고 소리 없이 사라진 반면 김현식의 노래는 매니아 층을 시작으로 사랑받기 시작해서 아직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7. 디스코그래피

정규앨범
  • 1집 봄여름가을겨울/당신의 모습(1980.06.01)
트랙 제목 작사 작곡
1 봄 여름 가을 겨울김현식김현식
2 어하둥둥 내 사랑김광식김광식
3 주저하지 말아요이규형이규형[23]
4 떠나가 버렸네[24]김현식김현식
5 당신의 모습김현식김현식[25]
6 그대와 나김현식김현식
7 나는 바람김현식김현식
  • 2집 김현식 2 사랑했어요/어둠 그 별빛(1984.09.20)
트랙 제목 작사 작곡
1 사랑했어요김현식김현식
2 회상김현식김현식
3 어둠 그 별빛정성주김현식
4 떠나기전에김현식김현식
5 그대 외로워지면박두영박두영
6 바람인줄 알았는데양인자김현식
7 당신의 모습김현식김현식
8 너를 기다리며김현식김현식
9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김현식김현식
10 변덕쟁이[26]김현식김현식
  • 3집 김현식 3(1986.12.05)
트랙 제목 작사 작곡
1 빗속의 연가김현식김현식
2 가리워진 길유재하유재하
3 슬퍼하지 말아요김현식김현식
4 비오는 어느 저녁김현식김현식
5 우리 이제김현식김현식
6 떠나가 버렸네[27]김현식김현식
7 비처럼 음악처럼[28]박성식박성식
8 그대와 단둘이서장기호장기호
9 눈 내리던 겨울밤김현식김현식
10 쓸쓸한 오후김종진김종진
  • 4집 김현식 VOL.4 (1988.09.30)
트랙 제목 작사 작곡
1 언제나 그대 내 곁에김현식,송병준송병준
2 여름밤의 꿈[29]윤상윤상
3 한밤중에이정선이정선
4 이제는김현식김현식
5 우리네 인생이정선이정선
6 사랑할수 없어김현식장기호
7 그대 내 품에[30]유재하유재하
8 기다리겠소김영배김영배
9 한국사람(하모니카)
10 우리 처음 만난 날김현식김현식
  • 5집 김현식 5 KIM HYUN SIK (1990.03.01)
    김현식 생전 마지막 앨범.[31]
트랙 제목 작사 작곡
1 향기 없는 꽃이창수이창수
2 넋두리(노래) [32] 김현식김현식
3 그 거리 그 벤치강인원강인원
4 도시의 밤김효성김효성
5 거울이 되어이원재이원재
6 재회김현식김현식
7 사랑의 나눔이 있는곳김현식김현식
8 밤의 고독속에서김현식김현식
9 할렐루야[33]
  • 6집 KIM HYUN SIK VOL.6 (1991.01.26)
트랙 제목 작사 작곡
1 내 사랑 내 곁에[34]오태호오태호
2 나의 하루는김종진김종진
3 겨울바다김선욱최이철
4 사랑했어요김현식김현식
5 추억 만들기김현식김현식
6 사랑 사랑 사랑김현식김현식
7 이별의 종착역[35] 손석우손석우
100만장이 넘게 팔렸고, 골든디스크 음반 대상을 수상했다.
  • 7집 Self Portrait (1996.09.02)
트랙 제목 작사 작곡
1 김현식 Live Voice (김현식의 생전 인터뷰 모음이다)
2 다시 처음이라오[36][37]이승희이승희
3 사랑의 불씨김현식김현식
4 이 바람속에서불명
5 First Of May[38]비 지스비지스
6 RainJose FelicianoJose Feliciano
7 다시 처음이라오이승희이승희
8 사랑의 불씨김현식김현식
9 이 바람속에서불명
10 First Of May비 지스비지스
11 RainJose FelicianoJose Feliciano
위의 2번부터 6번까지는 후배들이 이어불렀다거나 후반부에 반주를 넣는 등의 수정이 된 음원들이고 7번부터 11번까지는 윗트랙과 노래는 같으나 편집을 전혀 하지 않은 원음 그대로 수록되어있다.

2002년에는 'The sickbed live (병상에서)'라는 음반이 나왔는데 유튜브에서조차 곡이 얼마 없을정도로 이제는 거의 잊혀진 음반이지만 들어보면 다 쉰 목소리가 깊은 인상을 준다.
  • 싱글 사나이 노래 (1984.3.15)
트랙 제목 작사 작곡 편곡
1 사나이 노래(GO GO)[39]홍성여이종명윤문영
2 사나이 노래(GO GO 경음악)
3 사나이 노래(Rock&Blues)
4 사나이 노래(March)
5 사나이 노래(March 경음악)

이 곡은 디스코그래피 속에서 상당히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바로 광고와 결합된 노래라는 점이다. '사나이 가슴에 불을 당긴다'는 카피로 일세를 풍미했던 '동해백주'의 삽입곡으로 쓰였는데, 상품 홍보를 위해 음원을 별도로 만드는 형태가 2000년대 이후 빈번해진 것을 감안하면 80년대에 상당히 앞선 시도를 한 셈이다.


사나이 노래 Rock&Blues


사나이 노래 GO GO


사나이 노래 March

그 외에 참여한 음반은 김정호 추모 앨범의 , 한영애 2집의 코러스, 신촌블루스 2집의 골목길, 환상, 바람인가/빗속에서, 비오는 날의 수채화의 비오는 날의 수채화, 그 거리 그 벤취, 신촌블루스 3집의 이별의 종착역이 있다. 그 외에 다른 가수에게 곡을 준 경우도 있다.

8. 관련 문서




[1] 네이버 같은 포털사이트 등에는 잘못 출생신고가 된 날짜인 1958년 1월 7일 생으로 되어 있다. 1월 7일 생이라면 유승민과 생년월일이 같아진다.[2] 부친의 출생지. 김현식의 할아버지는 홍성에서 알아주는 유지였다고 한다.[3] 아닐 확률이 높은 게 실제 키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래서 앨범자켓 에피소드로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당시 키가 작게 나오는 게 싫어 혼자서 몇발짝 앞에 나와 찍었다 한다.[4] 여담으로 원래는 마른 몸이였다.[5] 1982년 12월 생으로, 아빠처럼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로 초창기 김현식과 똑같은 목소리를 갖고 있다.[6] 동아기획에 소속된 뮤지션들[7] 본래 꿈은 아이스하키 선수였으나 부친의 사업 실패로 꿈을 접어야 했다고 한다.[8] 당시에는 나이가 너무 어리면 언더 가수로 받아주지 않았다.[9] 2000년 3월 10일 암 투병 중 사망하였다.[10] 김현식은 이때가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 회고했다.[11] 들국화키보디스트로 1997년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로 36세로 요절했다.[12] 김현식의 어머니가 아들의 탈선을 막기 위해 신고했다고 한다.[13] 참고로, 가요 프로그램에서 또다른 공동 1위 수상은 SBS 가요 20 1995년 8월 20일 방송분에서 R.ef의 고요 속의 외침, 솔리드이 밤의 끝을 잡고가 공동 수상을 한 적이 있다.[14] 당시 한 소주 광고로 쓰였던 곡이다.[15] 이 말은 김현식을 좋아하는 팬들 중에서도 정말 깊은 팬심을 가진 분들만이 대체적으로 앨범을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16] 허스키함에 더불어 1984년 발표곡 '사나이 노래' 의 굵은 목소리 위주로 창법을 변경했다. 그러나 4집 시절에도 변덕쟁이 라이브, 우리네 인생 등은 3집 목소리로 부르지만 술과 담배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아서인지 허스키함이 더욱 가미되어 있다. 특히 느린 템포의 곡에 있어 목소리를 굵게 내려 한 것으로 보인다.[17] 단, 내사랑 내곁에의 목소리는 김현식의 몸상태도 고려해야한다. 죽기 직전인 최악의 몸상태로 녹음을 한 노래였기에 고의적으로 허스키한 목소리를 낸 것이 아니다. 녹음된 노래에서도 곡을 다듬었음에도 음이탈이나 심하게 갈라지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넘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몇몇 부분은 절규로 느껴질 정도의 부분도 있다.[18] 나는 가수다에서 자문위원단장으로 나온 바로 그 사람이다. 당시에는 베이시스트로 활동했었다.[19] 신촌블루스의 객원 보컬로 활동했으며 뒤에 영화 노랑머리에서 남자 주인공을 맡았다. 2007년 4월 3일 급성 간암으로 사망했다.[20] 김현식이 노래 부르는 장면은 당연히 과거 영상으로 대체했다.[21] 슈퍼스타K4 에피소드 7에서 심사위원 이승철이 직접 언급.[22] 참고로 이 곡은 그가 숨지기 이틀 전에 부른 노래다.[23] 사실 이장희가 작사, 작곡 한 것인데 이장희가 대마초 문제로 활동이 금지되어서 가명을 쓴 것이다.[24] 김현식의 초기 미성을 들어볼 수 있다.[25] 1집에서는 김현라 표기 되었으나 2집에서 정정되었다[26] 이 노래는 사랑스러운 본인의 아들인 김완제의 재롱을 보며 단숨에 지은 곡이다.[27] 1집의 곡을 리메이크했다.[28] 원래 가수 문관철이 1984년에 먼저 녹음을 하였다. 문관철이 녹음한 곡을 듣고 김현식이 작사 작곡가인 박성식한테 자신이 부르게 해달라고 간청했고 문관철의 앨범 발매가 미뤄진 사이 김현식이 문관철 보다 2개월 먼저 발표하게 된다. 결국 김현식을 대표하는 곡이 되었다. 훗날 김현식이 사망한 후 문관철은 "강탈당한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29] 윤상의 가요계 데뷔곡이다[30] 유재하가 사망하자 이 노래를 수록해 유재하를 추모하기 위해 수록했다.[31] 이 앨범을 내고 김현식은 정확히 8개월 뒤에 사망했다.[32] 김현식의 5집에 있는 노래이며 김현식의 처절함과 절망적인 느낌이 살아있는 곡이다. 김현식이 간경화에 걸렸을 때 불렀던 노래이며 사망 8개월 전에 5집 앨범이 나왔다. 이 노래를 리메이크해서 무대에서 불러도 원곡 자체를 소화할 수 없다는 평이 대다수인데 국카스텐하현우가 이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를 부르고 난 뒤에 떨리는 건 처음이였다고 한다. 박완규가 이 노래를 양보한 이유도 원곡 자체가 어렵다지만 원곡의 처절함과 절망적인 느낌을 잘 살라지 못할 것 같아서 였다고 한다.[33] 이 곡으로 인해 그가 개신교 신자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로 그는 무종교인이였다. 개신교 신자인 그의 아내가 김현식이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길 바라며 불러주길 원해 수록한 것이다.[34] 오태호가 신촌블루스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흥얼 거리고 있다가 김현식이 그 노래를 들은 뒤 그 노래가 뭐냐고 묻자 오태호가 본인이 작사 작곡한 노래이다.라며 김현식은 이 노래를 달라고 했고 훗날 이 노래는 김현식의 유작 앨범 타이틀 곡이 되었고 김현식하면 떠오르는 노래이다.[35] 원곡은 1960년에 손시향이 최초로 녹음했던 곡이다. 여담이지만 이 곡의 가사 중의 '푸른 달빛 아래 나는 눈물진다' 이 부분의 원래 가사는 '흐린 달빛 아래 나는 눈물진다' 다. 그러나 손시향이 최초에 녹음할때 가사를 잘못 불렀고, 이후에 이 곡을 리메이크하여 부른 가수들도 모두 가사를 잘못 불렀는데, 김현식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현식 버전의 '이별의 종착역' 은 1990년에 발표된 신촌블루스의 3집 앨범에 먼저 수록되었으며, 1991년 1월에 발표된 김현식의 솔로 6집에도 같은 곡이 수록되었다. 아마도 앨범의 곡수를 채우다보니까 수록이 된 듯...[36] 김장훈이 후반부를 녹음[37] 이 노래도 문관철의 1집 앨범에 있는 곡이다. 김현식, 전인권, 김장훈의 동명의 곡중 원곡이다. 김현식의 미완성 앨범으로 잘 알려지게 되었다. 여담으로 이 곡은 2절이 있지만 리메이크하였던 가수들이 1절만 불러서 그렇지 2절이 존재했다. 2절 자체도 들어보면 엄청 좋다 여담으로 김장훈의 오페라도 원래 문관철의 1집 앨범 곡이었다. 한마디로 문관철이 원곡자이나 김장훈이 코믹한 창법으로 불러서 그렇지 문관철이 부른 것이 엄청 좋다. 사람들은 문관철을 비운의 가수라고 평가 하는데 그럴 만도 한 것이 유재하의 그대와 영원히,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 김장훈의 오페라라는 레전드 명곡들이 앨범이 미뤄지다 보니 발표가 안됐고 그 사이에 이문세, 김현식이 가져가 버렸으니 그런 평가를 받아도 할 말 없다. 결국 문관철은 앨범을 낼 때마다 히트가 되지 않았으니 비운의 가수라고 부를 만도 하다.[38] 박정운이 후반부를 녹음[39] GO GO리듬으로 연주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