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11:50:19

콘도 마사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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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도 마사히코
[ruby(近藤, ruby=こんどう)] [ruby(真, ruby=まさ)][ruby(彦, ruby=ひこ)]| Masahiko Kondō
파일:콘도 마사히코(近藤 真彦).jpg
<colbgcolor=#000033><colcolor=#ffffff> 출생 <colbgcolor=#ffffff,#1f2023>1964년 7월 19일 ([age(1964-07-19)]세)
카나가와현 야마토시
국적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활동 기간 1979년 ~ 현재
가족 배우자 와다 아츠코, 슬하 1남(2007년생)
애칭 맛치(マッチ)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상세3. 활동
3.1. 데뷔 초기 (1979~1986)3.2. 일본 레코드 대상 수상 (1987)3.3. 이후
4. 사생활
4.1. 나카모리 아키나와의 관계4.2. 후쿠시마 팬더 발언4.3. 쟈니즈 후배들에 대한 꼰대짓4.4. 2020년 불륜 논란
5. 여담

[clearfix]

1. 개요

일본의 가수. 배우와 레이싱팀 감독을 겸하고 있다.

2. 상세

쟈니스 소속이였으며, 소년대 등과 함께 일본 남성 아이돌계의 레전드로 대우받고 있었다.

그러나 음치 수준의 가창력, 본인의 막 나가는 처신[1] 및 미디어와 소속사의 과도한 실드 문제로 인해 실제로 쟈니스 팬덤 내부와 안티들 사이에서 받는 취급은 최고선임보단 전역 직전에 사고를 치는 말년간부 급이었다. 그리고 쟈니스에서 쫓겨났다. 일본의 조영남 같은 캐릭터라지만 조영남은 적어도 가창력도 좋거니와 당대 음악적인 성과도 컸으니[2] 일본의 조영남 같은 소리는 조영남에게조차 실례가 되는 소리다.[3]
파일:부인.jpg
1994년 6월, 2살 연하의 유명 택시회사 자산가인 일반인 여성과 결혼했으며, 2007년 득남에 성공했다. 아들의 이름은 코스케(轟丞).

2014년 최초의 쟈니스 50대 아이돌이 되었으며, 2021년에 12월에 데뷔 41주년을 맞게 된다. 2015년에는 데뷔 35주년을 맞아 이에 맞춰 신곡 大人の流儀를 발표하였으며, 19년만에 홍백가합전 출전이 결정되었다.

레이싱이 취미이자 특기라서 직접 드라이버 겸 레이싱 팀 감독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스승은 일본에서 가장 빠른 남자인 호시노 카즈요시[4] 현재 슈퍼 GT[5]와 슈퍼 포뮬러에 참전하는 콘도 레이싱의 감독으로 재직하고 있다.

제32회(1981년)~제39회(1988년), 제47회(1996년), 제66회 NHK 홍백가합전(2015년)에 출장했다. (총 10회)

2011년 기준 총 판매량 1267만장.[6]

3. 활동

3.1. 데뷔 초기 (1979~1986)

파일:04F365B9-8098-436E-93F3-4057927426FE.jpg
<colbgcolor=#000033><colcolor=#ffffff> 콘도의 데뷔 초 시절

1979년 드라마 '3학년 B반 킨파치 선생님'에서 대중에게 처음으로 얼굴을 비췄고, 1980년 가수로 데뷔. 같은 소속사인 타하라 토시히코, 노무라 요시오와 더불어 '타노킨 트리오'[7]로 불리며, 특유의 거칠고 반항아적인 매력을 내세워 고 히로미, 사이조 히데키 등에 이은 최고의 남자 아이돌 스타로 등극했다.

남녀노소를 안가리는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맛치 컷이라는 헤어스타일을 전국적으로 유행시키기도 했으며 스니커, NIKE등을 일본에서 최초로 유행시킨 장본인이기도 하고 전국적으로 맛치 친위대가 조직적으로 결성될 정도로 1980년대 초반을 뒤흔든 그야말로 레전드.

그의 최대 히트곡은 단연 'ギンギラギンにさりげなく'(1981).[8] 일본 가요 청취가 거의 금지되다시피 했던 1980년대 대한민국에도 부산 인근을 시작으로[9] 그당시 중-고등학생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암암리에 전파되어 롤러스케이트장 등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노래였다.[10]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

3.2. 일본 레코드 대상 수상 (1987)

1987년,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의 음악상 중 최고의 권위를 자랑했던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싱글 <愚か者(어리석은 자)>가 금상을 받으며 대상 후보로 올라서게 되었다[11]. 하지만 시상식 바로 직전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엄마의 유골은 내가 가지고 있으니 레코드 대상을 사퇴하지 않으면 유골을 돌려주지 않겠다'는 협박 전화를 받았고 콘도 마사히코는 충격과 고민에 빠졌으나, '여기서 포기하고 대상을 수상하지 않는다면 하늘에서 엄마가 실망할 거다'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평소 엄마가 자신의 연예 생활에 적극 지원을 했던 점을 고려해 결국 시상식에 참석했다[12]. 콘도 마사히코 측에서는 지금까지도 어머니의 유골은 돌려받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유골 사건을 제외하고 보면, 이때 수상한 싱글의 성적이 객관적으로 대상을 받을 성적은 아니었기 때문에[13] 지금까지도 여러 논란이 있다. 어쨌든 쟈니스가 지금까지도 시상식에 불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원인 중에 하나가 이 사건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쟈니스 사무소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시 쟈니스는 고 히로미가 연습생인 쟈니스 주니어들을 이끌고 바닝프로덕션으로 이적한 후 위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 데뷔해서 쟈니스 최초의 밀리언셀러[14]를 기록하고, 최초의 일본 레코드 대상 수상을 이루어냈기 때문이다.[15] 사실 데뷔 때부터, 일본 레코드 대상 최우수신인상을 타는 등 상당히 인기가 높았던 아이돌이었다. 더불어, 2010년에 동 시상식 최우수가창상까지 수상하여, '최우수신인상-최우수가창상-대상'이라는 레코드 대상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단, 이 2010년의 수상은 꽤 뜬금없는 것이라 논란이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1987년 오로카모노로 대상을 받은 것 자체부터 뜬금없는 것이기는 했지만.

3.3. 이후

레코드 대상 수상 당시에는 이미 인기가 시들해져 싱글 판매량이 15~20만장 가량에 그치는 상태였다. 수상 이후에도 3~4개월 간격으로 싱글을 발매하며 활동하지만 7년간 발매한 15개의 싱글 중 3개만이 판매량 10만장을 넘으며 소소하게 커리어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1996년 드라마 <銀狼怪奇ファイル(깅로 괴기 파일)> 의 주제곡으로 차용된 싱글 <ミッドナイト・シャッフル(미드나이트 셔플)> 이 큰 인기를 끌며 70만장 가량의 판매량을 달성해 연간 차트 34위까지 올라가는 등 잠시나마 제 2의 전성기를 누렸고 이후에는 활동이 뜸해져 평균 2~3년 주기로 싱글을 발매하며 활동하는 중.


2024년엔 MBN의 한일가왕전에 2번 출연했다. 이때 데뷔후 첫 한국방송 출연이기도 하였다. 참고로 한국은 예전에 몇번 방문했다고 한다. 이후 한일가왕전 도쿄 원정때도 심사위원으로 나왔다. #

===# 싱글 디스코그래피 #===
발매일제목순위판매량
1980.12.12スニーカーぶる~す1위 1,047,000장
1981.03.12ヨコハマ・チーク2위 521,000장
1981.06.12ブルージーンズメモリー1위 596.000장
1981.09.30ギンギラギンにさりげなく1위 816,000장
1982.01.07情熱・熱風・せれなーで1위 556,000장
1982.03.31ふられてBANZAI1위 530,000장
1982.06.30ハイティーン・ブギ1위 607,000장
1982.09.30ホレたぜ!乾杯1위 502,000장
1983.01.20ミッドナイト・ステーション1위 391,000장
1983.04.27真夏の一秒1위 344,000장
1983.07.15ためいきロ・カ・ビ・リー1위 333,000장
1983.11.01ロイヤル・ストレート・フラッシュ1위 295,000장
1984.03.01一番野郎1위 294,000장
1984.06.06ケジメなさい1위 327,000장
1984.09.13永遠に秘密さ1위 239,000장
1985.02.13ヨイショッ!1위 191,000장
1985.06.05夢絆2위 165,000장
1985.10.21大将6위 126,000장
1985.12.01夢絆(12インチ)22위 38,000장
1986.02.26純情物語6위 106,000장
1986.07.04青春7위 84,000장
1986.09.10Baby Rose6위 94,000장
1987.01.01愚か者2위 182,000장
1987.06.11さすらい4위 116,000장
1987.09.18泣いてみりゃいいじゃん1위 146,000장
1987.12.09愚か者(12インチ)18위 35,000장
1988.04.08Made in Japan3위 111,000장
1988.09.14あぁ、グッと4위 102,000장
1989.02.03夕焼けの歌7위 76,000장
1989.06.01Just For You11위 44,000장
1989.07.05いいかげん11위 62,000장
1989.11.10アンダルシアに憧れて9위 93,000장
1990.04.08気ままにWALKIN'15위 55,000장
1990.05.05気ままにWALKIN'(Song For Children)35위 18,000장
1990.07.12Ho Ho Ho・・・16위 38,000장
1990.10.24好き18위 28,000장
1991.07.19デスペラード31위 24,000장
1991.12.07無頼派40위 14,000장
1992.05.21少年のこころ40위 11,000장
1993.11.21北街角41위 113,000장
1995.07.21最後のラブ・ソング81위 4,000장
1996.02.21ミッドナイト・シャッフル4위 702,000장
1997.02.21愛はひとつ22위 108,000장
1998.05.20KING and QUEEN29위 18,000장
2005.12.14挑戦者15위 16,000장
2007.01.24上海慕情/情熱ナミダ28위 8,000장
2008.12.23BANKA ~男たちの挽歌~29위 7,000장
2009.12.13ざんばら28위 7,000장
2010.02.22Let's get all!15위 32,000장
2012.11.21ヨイショッ!’02
~日本の皆さんホメていきまショー~
21위 13,000장
2014.02.26千年戀慕22위 6,795장
2015.12.09大人の流儀15위 5,979장
2017.12.03軌跡35위

4. 사생활

4.1. 나카모리 아키나와의 관계

파일:Kondo_Akina1.jpg
1983-1989년까지 전설적인 아이돌 나카모리 아키나와 연인 관계였었다.[16] 둘다 각자 분야에서 절정을 찍은 톱스타였고, 암묵적인 연인 관계였기 때문인지, 당시 TV 프로그램들[17] 에서는 대놓고 이 두 사람을 같은 샷에 잡아주는 일이 많았고, NHK 홍백가합전에서는 총 세 번이나 콘도의 상대로 아키나를 붙여주었다.[18] 연인 시절 콩트 촬영 중 NG가 났을 때 콘도를 껴안으며 스킨십을 하는 등 유독 아키나 혼자 좋아하는 티를 많이 냈다. 아키나는 결혼하고 싶다고 티를 냈지만 콘도는 전혀 무반응이거나 불편한 표정을 그대로 드러냈다.[19]

방송에서 나란히 커플 팔찌를 차고 나오기도 했으며, 86년 집시 퀸 시절부터는 콘도에게서 받은 붉은색 루비 반지를 항상 왼쪽 약지에 착용하고 다녔다. 당시의 아키나는 노래마다 코디, 헤어스타일, 메이크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컨셉을 보여줬는데, 그 반지만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1987년에 그가 레코드 대상을 수상했을 때에는 울고 있던 아키나까지 카메라에 잡아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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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85년 콘도의 일본TV 음악 축제 그랑프리 수상 장면 87년 콘도의 일본 레코드 대상 장면
콘도에 대한 아키나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 있었는데, 아키나는 주변의 친한 사람들이나 스태프들에게 자신을 '아키낫치[20](明菜ッチ)'라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스스로도 「아키낫치는 말이죠...」라고 지칭했다. 또 아키나는 MAPC[21] 라는 사무소를 별도로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전에 콘도와 아키나가 둘이서 만든 사무소이다.[22]

둘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 85년 5월, 《노래의 톱텐(歌のトップテン)》 대기실에서 아키나가 콘도에게 가츠동을 집어던졌다고 여성 주간지 《미소(微笑)》에서 보도하였고, 8월에는 일본 유명 잡지 《여성자신(女性自身)》으로부터 결별 기사가 나기도 했다. 아키나는 89년 이전에도 이미 두 차례 자살 시도를 한 적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 시기와 겹친다.
자살 소동은 처음이 아니었다. 여태까지 두 번 정도 아키나는 자살을 시도했다.
첫 번째는 85년 4월, 아키나는 규정량 이상의 수면제를 먹었다.
이어 반년 뒤인 85년 10월, 충동적으로 손목을 면도칼로 그었다.
전 켄온 사장 하나미 아키라의 인터뷰, 주간 포스트 (2013.10.11호) #

중화권에서는 아시아의 대스타 매염방[23]과 연인 관계였던 걸로 매우 유명하다. 둘은 1985년 홍콩에서 처음 만났고 함께 듀엣으로 노래도 불렀다. 콘도는 그녀를 보자마자 "미인이시네요. 키스해도 될까요?" 하고 물었고 매염방도 이에 응하면서 불같은 사랑이 시작되었다. 1986년 교제를 시작으로 1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사랑을 했다고 매염방 7주기 추모식에서 콘도가 언급. 콘도는 그녀의 남자다운 호탕한 성격과 무엇이든 직설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형제 같은 편한 느낌이 좋았다고 한다. 커뮤니케이션은 영어와 일본어로 했다고. 또한 그는 방송 스태프나 주변 사람들에게 매염방을 여자친구라고 소개하는 등 교제 사실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매염방은 주변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콘도를 만나기 위해 홀로 일본으로 가 집을 샀지만 나중에 콘도가 양다리였다는 것을 알게 되자 충격을 받았고 그를 너무 사랑해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고민했으나 콘도가 아키나를 잊지 못하겠다고 하여 헤어진다. 그녀가 2003년 사망 직전에 살면서 가장 사랑했던 남자로, 그를 언급하며 보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콘도는 장례식 날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한다.

1986년 11월 24일, 콘도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 콘도의 어머니가 죽고 얼마 후 아키나는 방송 내내 표정 관리가 안 될 정도로 콘도를 걱정했다. 이때 아키나가 콘도를 챙겨 준 계기로 매염방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아키나와 재결합하게 된다. 콘도는 평소 어머니를 끔찍이 여기기로 유명했는데 멘탈이 나간 콘도를 아키나가 옆에서 보듬어주어 많은 힘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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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결합 후 87년 6월 하와이에서
아키나가 난파선(1987년) 시절, 노래를 할 때마다 눈물을 흘려 사이에 이상이 있었다는 소문이 있으나 그건 아키나가 노래 가사에 너무 몰입했다거나 지난날 콘도와 헤어졌을 때의 감정이 북받쳐 나온 눈물일 수도 있다. 87년은 콘도와 재결합하여 동거를 시작했을 무렵이며, 사이가 가장 좋았었던 때이다. 아키나는 콘도를 몇 번이나 키요세의 친가에 데려왔고,[24] 아키나의 아버지는 두 사람이 곧 결혼하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전 매니저 나유키 후사노리에 따르면 아키나와 콘도가 교제할 당시, 아키나에게 들이대는 남자도 적지 않았지만 콘도 외 남자에겐 일절 눈길을 주지 않았으며 굳건하게 콘도만을 생각했다고 한다. 고집이 있고, 못말리는 아키나였지만 콘도앞에서는 순종했다고. 또 부서지기 쉬운 아키나를 아슬아슬하게 지탱한 것도 콘도였다고 한다.

워너 파이오니아의 제작 디렉터였던 '시마다 유조'가 말하길, 그렇게 녹음을 좋아하고 말이 많던 아키나가 언젠가부터 콘도를 보기 위해 얼른 일을 끝내려고 했다고 한다. 아키나의 시야에 들어 있던 것은 콘도뿐이었고, 콘도를 위해, 콘도를 보기 위해 아키나는 노래했다고.

또 아키나는 콘도와 동거 당시 콘도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현관 앞에서 담요를 뒤집어 쓰고 콘도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한다. 아키나가 얼마나 콘도를 좋아했는지 잘 알 수 있는 일화이다.

7년이나 교제했기에 방송가에서는 둘이 사귀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연예계의 대표 공식 커플이었다.

1989년 1월 23일, 콘도와 아키나는 파리에서 가구를 구입하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이후 두 사람은 하와이로 이동한 후 아키나만 홀로 귀국했고 콘도는 뉴욕으로 건너갔다. 그 무렵, 뉴욕에는 전미 데뷔 준비를 하고 있던 마츠다 세이코가 있었다.

1989년 2월, 세이코가 묵고 있던 파크레인 호텔의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일본인들이 많이 이용하지 않는 에어 프랑스 호텔에서 2, 3일에 걸쳐 이틀간 세이코와 콘도가 밀회하고 있는 것이 'FRIDAY'와 여성 주간지 '미소'[25]에 의해 포착되었다. 당시 콘도 마사히코는 나카모리 아키나와 7년째 교제 중이었고, 마츠다 세이코는 딸을 출산하여 마마돌로서 활약 중이라 세간에 큰 충격을 줬다.

1989년 6월 신곡 기자회견에서 세이코는 이 일에 대해 "콘도와는 뉴욕 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고 서로 친해서 귓속말을 주고받은 것일 뿐 그 모습을 키스하는 걸로 오해받은 것 같다"라고 해명했다. 그래서 이 논란은 26년 동안 단순 해프닝으로 종결되었으나...

그러다 한참 후 2015년, 혼다 케이라는 기자가 선 뮤직 프로덕션 전 사장으로부터 진상을 듣고 기사를 쓴 적이 있다.[26] 선 뮤직 전 사장 아이자와 히데요시가 타계 2년 전인 2011년 콘도와 세이코의 스캔들은 사실이었다고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는 것. 둘의 키스하는 연속 사진 등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은 증거가 있었으며, 본인이 직접 뉴욕으로 급히 날아가 프라이데이에 스캔들이 커지지 않도록 사진과 내용을 순화시켜 달라고 간청했고, 덕분에 섹스 스캔들이 로비에서 우연히 만난 일로 둔갑된것이라 주장했다. 출처1 출처2 이 사건의 진상에 관해 세이코의 전 여성 매니저 토미타 타카코(冨田貴子)는 「세이코 씨는 평소에 아키나 씨에게 질투하고 있었어요. 아키나 씨로부터 맛치를 빼앗고 싶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맛치에게 연정은 없었어요」라고 발언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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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뮤직 사장의 노력으로 순화된 'FRIDAY' 스캔들 사진
콘도와 아키나는 89년 1월까지만 하더라도 함께 유럽에서 가구를 사거나 하와이 여행을 하는 등 아직까지는 사이가 괜찮았던 걸로 보인다.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된 계기는 1989년 2월 마츠다 세이코와의 뉴욕 스캔들부터라 할 수 있다. 이때부터 둘의 사랑싸움이 잦아졌고, 86년부터 3년간 내내 착용하던 아키나의 왼손 약지에서 콘도가 준 반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콘도의 여성 편력을 비롯해 가정내 불화 등 갖가지 문제들로 멘탈이 끝까지 몰렸던 나카모리 아키나는 1989년 7월 11일, 콘도의 방에서 자살을 시도했다.[28] 현장으로 달려온 콘도의 통보에 의해 구급차가 왔고, 아키나는 도쿄 지케이 의대병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6시간 이상의 수술을 받았다.[29]

이 사건으로 홍백가합전 및 가요대상 후보에서 아키나, 세이코, 콘도 모두 퇴출된다.
1989년 12월 31일 금병풍 기자회견 풀영상
1989년 12월 31일, 사죄 기자회견에 두 사람이 참석.[30] 이 자리에서 아키나는 자신이 "연예 활동을 지속하면서도 불미스러운 일로 걱정을 끼친 것"에 대해 눈물로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때 기자들은 콘도에게 다음해인 1990년 쯤에 결혼이나 약혼을 할 계획이 있냐고 묻자 콘도는 “결혼 계획은 절대 없다." 고 딱 잘라 말했고, 아키나와 콘도의 관계는 이 기자회견을 끝으로 완전히 종결점을 찍었다.[31] 하지만 아키나는 94년 콘도가 결혼하기 직전까지도 7년이라는 세월의 연결고리에 얽매여 그를 잊지 못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3년 후, 콘도는 아키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건이 있었던 것은 내 방인 것은 틀림없고, 그 점은 무슨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
당시 아키나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많이 지쳐있었기 때문에 그때 기댈 사람은 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키나가 그 지경까지 몰리고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고민을 듣곤 했지만, 일의 고민만 해도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듣는 이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역시 그렇게 힘이 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게 아쉬웠다.
여자아이란 것은 상상하는 것보다 약해서 부러지기 쉬운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구급차를 불렀을 때는, 이것으로 매스컴에 떠들썩하다는 것은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었지만, 매스컴 말고도 아무튼 아키나가 걱정됐다.
아키나의 모습을 보고 나는 이 아이를 백지상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래 상태로 돌려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사건에 관해서는, 매우 미묘한 문제이기 때문에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다.
단지 나는 아키나가 건강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지금은 사건에 대해 질질 끌어 얘기하고 싶지 않다. 그녀에 대해서는 응원하고 싶은 마음뿐.
이듬해 아키나의 생일에 축하를 하러 간 것도 빨리 건강하게 활약했으면 해서다.
계속 만나진 않았지만 TV에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니 좋았던 것 같고 기쁘다.
1992년 콘도 마사히코 에세이 《한 잔 더 이야기할까》

아키나 또한 콘도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5년 전 그때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 온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런 절망감으로 가득 차서...
회사도 가족도, 어쨌든 인간을 모두 믿을 수 없게 되었어요.
내가 열심히 해 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라고 생각했을 때에는, 이미 솔직히 연애에 집중할 상황이 아니었어요.
결혼이라든가 진지한 내용이 오고간 상대가 있었다면 저렇게 되지 않고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벌써 외톨이였어요.
그래서 죽으려고 했던 것도 할 수 있었을 거고. 콘도씨에 관해서 저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어요.
콘도씨에게는 소동에 휘말려 큰 폐를 끼쳐서 미안했다는 생각 뿐이었어요.
그래서 몇 달 후에 그와는 헤어졌어요. 지금 제 마음속에는 꼬리를 치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마르코폴로 1995년 1월호. 《나카모리 아키나 격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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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두 사람의 결별과정에서 금전문제 및 '쟈니스가 약혼발표라고 나카모리 아키나를 불러놓고 강제사과를 시켰다'는 의혹은[32]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자살 소동 전 연애 당시에 콘도가 매니저의 추천으로 투자 겸 아키나와 살 새집을 구입하기 위해 아키나의 돈 7천만엔을 빌렸다. 나중에 그 7천만엔이 아키나에게 되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듣고는 깜짝 놀라 스태프에게 조사를 시켰는데 그 결과 중간에서 중개를 맡았던 부동산 중개인이 자기 돈인 것 마냥 써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적당히 둘러대며 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콘도는 "나도 남자라구. 내가 돈을 만들어 볼 셈이야" 라고 했지만 아키나는 지금까지도 그 돈을 돌려받지 못했다.

요약하자면, 집주인의 사기로 7천만엔이 증발해 버렸고 콘도는 갚는다 해놓고 나몰라라 시전 중이다. 물론 콘도의 주장이니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4.2. 후쿠시마 팬더 발언

2011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벌어진 후 쟈니즈에서 발전소 인근 지역의 구호를 위해 'Marching J'라는 이름으로 모금을 실시했는데, 모금된 돈을 중국에서 팬더를 빌리는데 쓰자는 실언을 하여 일본 네티즌들로부터 비난을 많이 받았다. 드는 비용이 5년에 수십억. 팬더를 유치해 관광객을 불러모아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고자 하는 거라고 의도를 밝혔는데... 정말 답이 없다.[33]

4.3. 쟈니즈 후배들에 대한 꼰대짓

쟈니즈 후배의 고정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해 대선배라는 이유만으로 거들먹한 태도 및 갑질과 험담을 하는 등 그가 게스트로 출연한다 해도 그 팬들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대상이었다.

실례로 솔로 활동이 많아서 본인들도 걱정이 많던 시절의 KinKi Kids의 고정방송에 출연해 "언제 해체할 거냐"는 등의 도가 지나친 발언을 한다거나 과거 SMAPxSMAP이나 우타방같은 곳에 출연하여 나카이 마사히로를 대상으로 군기잡기나 갑질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연말 음악방송에 나와서 다른 쟈니즈 멤버들을 자기 들러리로 세우고는 혼자 시간을 다 까먹는다거나 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일부 쟈니즈 팬들에게서는 쟈맛치[34]라고 불리며 그가 게스트로 출연한다는 소식을 듣는 팬들은 한탄을 금치 못한다.
2014년 FNS 가요제에서 후배를 병풍으로 세우는 쟈맛치
2014년 연말 FNS가요제로 쟈니즈 전 팀이 모이는 기적같은 특방이 잡혔지만, 정체는 콘도 데뷔 35주년 기념 스페셜 메들리로, 콘도 노래만 7곡 완창에 25분동안 줄창 콘도 노래만 부를 계획이라는게 발표되어 타 그룹 팬들을 분노케 했다. 회사 입장에서야 콘도를 밀어줄 수 있다지만, 사실상 콘도 디너쇼를 위해서 후배들을 모조리 들러리 세우는 격이니...[35]

2015년 데뷔 35주년 기념으로 신곡 발표 및 홍백가합전에도 출전하게 되면서 12월 들어 쟈니스 후배들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그야말로 모두 투어 중이다. 이 기세로 새해 1월 1일 새벽 쟈니스 카운트다운 콘서트도 '또' 접수하러 올 가능성이 높다는 루머가 돌고 있어 쟈니스 팬들은 단체로 멘붕하는 중.

그리고 2020년에도 데뷔 40주년을 맞아 FNS가요제 출연이 예정되어 팬들이 멘붕했으나 아래 불륜 사건으로 인하여 소속사에서 무기한 정지처분이 내려지고 출연 자체가 취소되었다. 콘도의 40주년의 빈자리는 쟈니스 후배그룹과 방탄소년단이 채웠다.

4.4. 2020년 불륜 논란

2020년 11월 11일 기어이 사건이 터졌는데 자신보다 25살 연하인 31세 여성과 5년간 불륜 관계를 이어왔으며 10월 말에 두 사람이 오키나와 골프 여행을 다녀왔고 6월에도 도쿄 크루즈를 즐겼다는 의혹 기사가 터졌다. 심지어 대다수 미디어가 이에 대해 보도하지 않아 손타쿠 논란으로까지 번지는 중. #1 #2

이전부터 불륜이 탄로 날까 봐 두려웠던 A양에게 콘도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불륜 기사를 무마할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다."

콘도의 불륜 의혹이 기사화되자, 과거 업보 및 억지 푸쉬, 와타베 켄, 히가시데 마사히로에 비해 과한 미디어 쉴드 논란까지 겹쳐서 쉴드여론이 없다.[36] 쟈니스 팬들은 물론 네티즌들도 얼른 쟈니스에서 짐 싸서 꺼지라는 반응. 어쩌면 퇴물일지도

11월 17일 쟈니스 사무소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불륜을 인정하며 무기한 활동 중단을 발표했으며, 연예인 이외의 카레이싱 관련 활동[37]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1 #2 #3

게다가, 그간 든든한 방패 역할을 해왔던 후지사와 메리 야스코 명예회장[38]에게 "맛치답게 책임을 져라"라고 들은 걸 보면 사실상 이번 활동중단은 정리해고에 준하는 조치라고 봐도 된다. 실제로도 2019년 이후 오래 소속사에 있었지만 성과를 못 낸 연예인들이 퇴사하고 있다.

결국 2021년 4월 30일 공지를 통해 40년간 몸담은 쟈니스 사무소에서 나와 새로운 길로 나아간다고 발표했다. # 대중과 쟈니스 팬들은 진작에 콘도같은 월급도둑이 나갔어야 했다는 반응을 표했다.

출사(社) 이후로는 정신을 차렸는지 성격이 많이 유해진 모양이라, 게스트에 대한 악담은 삼가고 있다.

음모론(?)이지만 이 사건 이후로 오리엔탈 바이오[39]가 스폰서를 맡은 팀에게 뭔가 사건 사고가 터진 사례가 속출했다.[40][41]
일본 레이스 프로모션 이사회 의장 취임 기자회견
그러나 쟈니 키타가와 연습생 성착취 파문이 공론화하면서 콘도 마사히코는 이미 쫓겨나서 불똥이 튀지 아니 하여 전화위복이 되었다. 기자회견에서 기자가 묻자 남일인 마냥 대답한 게 다다.

5. 여담

  • 어렸을때엿던 20대 시절은 꽤 훈남이다. 사실 맛치의 전성기 시대엔 선이 굵은 상이 호감상이었다.
  • 가수인데 데뷔초때는 가창력이 매우 정말 안 좋았다. ギンギラギンにさりげなく를 보면 막 부른 느낌이 든다. 그나마 나이 먹고나서는 젊은 시절에 비해 나아진 편.
  • 안잣슈코지마 카즈야가 쟈니스에 원서를 내게 한 명분을 만들어줬다.[42] 그런데 코지마는 2020년에 불륜 스캔들이 터진 연예인과 모두 관련이 있었다는 것. 와타베 켄은 코지마의 파트너고, 히가시데 마사히로는 코지마와 같이 광고를 찍었다. 코지마 본인도 다른 사람들의 불륜 사건 때문에 광고가 강판되었다며 "혹시 내가 불륜남들을 끌어들이는 사람인건가?"라며 어이없어했는데, 연말에 동경했던 아이돌이 또 터졌다.
  • 의외로 바이올리니스트 하카세 타로가 그의 팬인데, 2023년 샤베쿠리007에 나와서 하카세가 콘도의 밴드 세션을 선 적이 있다고 밝혔다. 둘이 서로의 헤어스타일을 따라한 적이 있다고 한다.
  • 2023년 4월 1일부로 나카지마 사토루의 후임으로 일본 레이스 프로모션[43]의 이사회 의장으로 취임했다. 선임 결의가 이뤄진 날은 2023년 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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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성에 논란이 많은거랑 별개로 여전히 일본 가요계의 레전드로 취급받고 있다. 불륜사건이후 2024년에 한국방송에 출연할정도.


[1] 애초부터 연예인에는 관심도 없었다. 실제로 연습생 시절에 한 달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했으니 말 다했다.[2] 적어도 조영남은 한양대 성악과 중퇴, 서울대 성악과 중퇴라는 학력만으로도 음악성을 우습게 보긴 힘들고 거기다 소속사는 커녕 미군부대 공연을 하며 바닥에서부터 직접 성공한 케이스다.[3] 다만 이것도 음악적 성과만 따진거지 막 나가는 처신에 한해서는 이 놈이나 조영남이나 도찐개찐이다.[4] F3000 데뷔 당시 소속된 팀인 NAVI CONNECTION RACING TEAM의 감독은 배우 이시하라 프로모션의 배우인 타치 히로시였다.[5] GT500과 GT300 양 클래스에 모두 나가는 팀이다.[6] 뮤직스테이션 2011년 1월 14일 방송 '사상 최강 아이돌 BEST 50' 참고.[7] 3인의 이름 앞글자를 따서 '타노킨'이다. 콘도의 近은 원음이 '킨'이라서..[8] 읽으면 '긴기라긴니 사리게나쿠'. 대충 '화려하고 은근하게' 정도의 뜻이다. 후에 혼성 그룹 큐빅이 '기나긴'이라는 이름으로 리메이크를 하였다.[9] 지금도 그렇지만 부산은 일본과 가장 가까운 대도시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타 지역에 비해 일본의 미디어를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었다.[10] 기막힌 외출 시즌 1에서 김준호가 대전롤러장 출신이라고 언급하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11] 금상 수상곡 중 대상이 결정된다[12] 대상 수상까지는 이 같은 사실을 알리지 않았기에 대중은 이를 모르고 있었다.[13] 최종 판매량 21만장으로 연간 35위에 그쳤다.[14] 데뷔작 '스니커 블루스'[15] 그가 수상한 이듬해인 1988년에도 쟈니스의 히카루GENJI가 대상을 수상.[16] 1986년에 매염방과 양다리를 걸치면서 잠시 헤어진 시기도 있었다.[17] 특히 콩트 부분에서.[18] 83년, 84년, 88년[19] 1987년 7월 더 베스트텐에서 지금 가장 바라는 소원으로 ‘빨리 신부가 되고 싶어요’ 라고 엽서에 써,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인 반면, 뒤에 앉아있던 콘도는 정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또한 콘도는 선배 가수 사이죠 히데키에게 "아키나짱은 결혼할 여자는 아니야"라고 밝힌 바가 있다.[20] 아키나+맛치의 합친말[21] 「Masahiko ・Akina ・Private ・Company」의 약칭.[22] 자살미수 사건이 있은 후 콘도는 여기서 발을 뺐다.[23] 난파선을 포함한 아키나의 여러 노래를 커버했었다(...)[24] 둘이서 차를 타고 와서 떨어진 곳에 있는 주차장에 주차하고, 거기서 아키나의 오빠가 차로 마중을 나갔다고 한다.[25] 당시 스포츠 신문이나 다른 여성 주간지는 쟈니스 사무소의 압력이 두려워 콘도와 아키나의 교제를 쉬쉬하고 있었지만, '미소'만은 집요하게 취재를 계속했고, 그 흐름으로 콘도의 뉴욕에서의 행동을 파악하고 있었다.[26] NHK 홍백가합전 오오토리(맨 마지막 무대)로 콘도 마사히코와 마츠다 세이코가 결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장난하는가? 홍백 직원은 양심도 없는 건가?"하며 귀를 의심했다고 한다. 혼다는 이러한 NHK의 결정이 그 사건에 트라우마가 있는 아키나를 다시금 정신적으로 몰아넣는 건 아닐까 우려했다.[27] 여담으로 당시 세이코의 음악 프로듀서 '사카이 마사토시'에 따르면 세이코는 아키나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앨범 판매량부터 출연 프로그램까지 아키나에 관한 거라면 뭐든지 알고 싶어 했다고 한다. # #[28] 아키나의 자살미수 원인이 가족과 회사보다 콘도와의 문제에 더 무게를 실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선 아키나의 가족들은 본디 망나니였으며, 뉴욕 스캔들 이후 아키나의 체중이 36kg까지 감소한 것, 손에서 콘도가 준 반지가 사라진 것, 콘도의 방에서 자살 기도를 한 것, 95년 아키나의 인터뷰에서 "결혼이라든가 진지한 내용이 오고 간 상대가 있었다면 저렇게 되지 않고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르지만"이라고 언급한 것,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모든 원인은 콘도이며, 아키나가 콘도에게 너무 집착해서 자살 소동까지 간 것이라 추측해 본다.[29] 팔꿈치 안쪽을 너무 깊게 긋는 바람에 왼손 약지의 신경 손상으로 지금도 움직임이 부자연스럽다.[30] 원래는 아키나의 단독 기자회견이었는데 아키나의 부탁으로 콘도도 참석했다.[31] 콘도는 기자회견에서 아키나가 안정을 취할 때까지 지원을 해주겠다는 말을 했는데, 그 연유로 이듬해 아키나의 생일 파티에 축하를 하러 가기도 했다.[32] 아키나는 이미 자살소동에 대한 기자회견을 한 바 있었고, 회견장에는 사과발표가 아니라 약혼식 등 경사스러운 일에 쓰는 금병풍이 설치되어 있었다.[33] 이게 지역 주민들 입장에선 황당한 소리일 수밖에 없는 게, 일본에서 90년대 버블경제 붕괴 이후 수많은 기초자치단체와 지역기업을 재정위기로 몰고 간 게 쓸데없는 대규모 테마파크, 박물관, 리조트의 건설이다.[34] 방해된다라는 뜻의 일본어인 '쟈마(邪魔-じゃま)'와 그의 애칭인 '맛치(マッチ)'를 합쳐 부르는 명칭이다.[35] 그래서 이 디너쇼의 말미에 히라이 켄인도인 분장을 하고 인도인 백댄서들과 함께 공연하면서 씬 스틸러스러운 모습을 보이자 시청자들이 대환영했을 정도다. 당연히 본인 띄우려고 이런 꼰대짓을 벌인 콘도의 공연은 깔끔히 묻혔다. 그야말로 죽쒀서 개 준 꼴이 된 것이다.[36] 이에 쟈니스 팬들은 본사 부사장으로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줄줄이 사고치는 소속 연예인들 때문에 고통받는 타키자와 히데아키의 멘탈을 걱정했다.[37] 사실 이게 본업이라, 카레이싱 관련 활동중단 발표가 나오기 전까지의 반응이 눈가리고 아웅한다였다.[38] 쟈니스 연예인 중 콘도를 원픽 수준으로 매우 아꼈던 인물이다. 쟈니스팬들에게 공공연히 알려져 있을 정도로 그녀의 콘도 편애는 유명했다. 심지어 그녀의 딸인 현 쟈니스의 수장 후지시마 쥬리 케이코와 결혼시키려고 했다는 말도 돌 정도였다.[39] 라피네 브랜드를 소유한 일본의 건강식품 회사[40] 음모론이라고 하기엔 좀 황당한 것이 2020년 당시 그가 감독으로 있는 콘도 레이싱의 스폰서 중 하나가 오리엔탈 바이오였고 슈퍼 포뮬러는 아예 라피네 컬러링으로 참전했었다.[41] 이후 이 불똥은 야나기다 마사타카에게 튀어서 2022년에는 슈퍼 GT에 참전하던 드라고 코르세의 타이틀 스폰서인 부소의 자금 횡령 사건, 2023년에는 슈퍼 다이큐에 타이어를 납품하던 한국타이어대전 공장에 화재 사건이 발생하면서 오피셜 타이어 브랜드가 바뀌고, 시즌 중, 팀 제로원의 드라이버가 음주운전후 음주측정을 거부하는 사건으로 인해 계약 해지를 하는 일이 벌어졌다.[42] 코지마는 콘도를 동경했다고 한다. 롤모델로 삼은 듯.[43] 슈퍼 포뮬러를 운영하는 법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