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1-13 00:44:38

코다 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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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레코드대상
(日本レコード大賞)
제46회
(2004년)
제47회
(2005년)
제48회
(2006년)
Mr.Children
<Sign>
코다 쿠미
<Butterfly>
히카와 키요시
<一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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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神田 來未子 (こうだ くみこ, 코다 쿠미코)
생년월일 1982년 11월 13일 (만 [age(1982-11-13)]세)
출생 일본 교토부
신체 154cm|45kg[1]A형
가족 부모님, 2녀 중 장녀 | 동생 가수 misono
배우자 KENJI03 (2011~) | 슬하 1남
데뷔 2000년 12월 6일 싱글 TAKE BACK
레이블 rhythmzone (1999~)
SNS 공식사이트 파일:트위터 아이콘.pn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png

1. 개요2. 전성기때의 인기3. 음악 인생
3.1. 2000~2003 : 데뷔와 무명 시절 3.2. 2004~2007 : 에로각코이 사회현상3.3. 2008~2011 : 실언 소동과 하락세3.4. 2011~2013 : 결혼과 출산, 그리고 복귀3.5. 2014~ 투어형 가수로서의 전환
4. 트리비아5. 음반6. 홍백가합전 출전 경력7. 투어
7.1. 정규 투어7.2. 팬클럽 투어
8. 수상
8.1. 가요제8.2. 기타 수상
9. 기록10. 링크
10.1. 공식 웹사이트10.2. 팬카페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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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다 쿠미 (倖田來未)[2]행복을 주라는 의미에서 요행 행(倖)자로 직접 바꾸어 지어줬다고.]
エロカッコイイ 에로 각코이
섹시하면서도 멋있다는 의미의 코다 쿠미가 퍼뜨린 사회 현상
- 일본의 시대별 유행어 2006년

2000년에 데뷔하여 2000년대 중반 섹시하면서도 멋있다라는 뜻의 신조어 에로각코이, 에로카와이를 만들어내며 헤이세이의 가희(歌姬)[3]로 올라섰던 아티스트.

일본에서는 드문 파워풀하고 섹시한 컨셉에 시원한 가창력과 춤 실력까지 겸비해 많은 여성팬들의 지지를 받으며 2000년대 중반 톱 아티스트로 자리했다. 대표작으로는 '큐티하니', 'Butterfly', '사랑의 노래', '사랑의 꽃봉우리' 등이 있으며, 전성기 시절 발매한 베스트 앨범 BEST~first things~BEST~second session~, Black Cherry는 3작 연속으로 밀리언 인증을 받으며 이중 베스트 두장은 연속으로 더블 밀리언 인증을 받는다. 코다 본인이 만들어낸 유행어 에로 각코이는 2006년 10대 유행어에 등재되었으며 가수 본인 최전성기였던 2006년에는 4대 가요제에서 3연패를 기록, 같은 해 일본 정치인, 연예인을 모두 포함한 유명인사 2위에 오르며 인지도의 정점을 찍었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일본의 가요 시상식에서 수차례 대상을 수상했으며, 06년과 07년 2년 연속 오리콘 연간 아티스트 세일즈 1위에 올랐고 음악 활동 외에도 베스트 네일 부문은 물론 베스트 지니스트에서 5년 연속의 수상을 얻어 명예의 전당에 오른 기록이 있다. 2007년에는 10개 기업의 CM 모델로 발탁되어 CM 모델로서도 대활약. 코다 쿠미 특유의 까만 피부와 파격적인 노브라 패션, 화려한 메이크업과 네일등이 코다 쿠미를 상징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지금이야 노브라 패션이 국내에서도 등장하지만 여전히 소극적인 반면에, 10년도 전이었던 그 당시에는 코다 쿠미는 파격 그 자체였다.

2008년을 기점으로 구설수로 인해 하락세가 시작되었지만 꾸준한 라이브 공연과 자기 관리로 2018년 현재까지 음악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고 고정팬이 꾸준히 있어서 지속적으로 활동중이다. 특히 1년의 시작과 끝을 라이브 투어를 할 정도로 투어 중독자로도 유명하다. 최근에는 TV 출연보다는 라이브 활동 위주로 활동한다.

2. 전성기때의 인기

코다 쿠미는 일본의 피지컬 음반 시장이 점점 하향세로 접어들고 디지털 시대가 막 시작되는 과도기에 인기를 끌었기에 체감 인기에 비해 더 폭발적인 판매량이 나오지 못했고(그래도 코다 쿠미의 전성기때의 앨범 두장은 연간 차트 1,2위를 다퉜다.) 디지털 시장이 막 시작되던 시절이라 시장 규모가 성장하던 시기였기에 디지털 세일즈에서도 손해를 본 바 있으나 여러가지 핸디캡 속에서도 코다 쿠미 자체로 대단한 기록을 세운것이 있다.

일본에서 전체 다운로드 누계수가 10억건을 돌파한 착우타 서비스(벨소리)에서 역대 가장 많은 판매량을 올린 솔로 아티스트가 바로 코다 쿠미였다. (전체 가수 중 2위[4]) 착우타 서비스는 2002년부터 2016~7년까지 제공되었기 때문에 2000년대 가수들의 대중성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지표 중 하나인데 따라서 일본에서 가장 많은 착우타 음원을 판매한 솔로 아티스트가 코다 쿠미였다는 것은 2000년대에 활약한 솔로 가수중에서도 압도적인 대중성을 가졌던 가수였다는 걸 증명해주고 있다.[5] 이정도의 기록이라면 00년대 중반 일본 거리에서 코다 쿠미의 노래 소리가 안울려퍼지는 핸드폰이 없었을 정도라고 설명해도 무방하다.

음반 불황 시기였지만 그 시절 일본 음악계 앨범 판매 선두를 기록함과 동시에 착우타 서비스에서의 압도적인 기록 및 가라오케에서 자주 불리는 아티스트 상위권, 디지털 판매량까지 함께 성공적으로 잡았고[6] 여기에 베스트 지니스트 명예의 전당 수상 및 전성기때 화려한 CM 활동까지 더해지면 더욱 임팩트있던 커리어다.[7]

이렇듯 전성기때의 기세와 기록을 볼때 2000년대에 코다 쿠미만큼 확실한 자기만의 시대를 가졌던 솔로 가수도 3대 디바에 이어 거의 유일한데 코다 쿠미의 경우는 묘하게 본인 구설수로 인해 망했다고 묘사되거나 혹은, 인기가 후려쳐지는 경우가 많은 가수 중 한명이기도 한데 애초에 2006년과 2007년에 일본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가수로서 등재되었기에 그 기록이 증명하고 있긴 하다. 연간 세일즈 아티스트 1위는 왠만큼 인기가 있지 않고서야 달성하기 힘든 기록이다.

코다 쿠미 보다 더 단일 음반 판매량을 많이 올린 쿠라키 마이 혹은 MISIA같은 유수의 솔로 아티스트들도 있지만[8] 코다 쿠미가 3대 디바 바로 아래로 평가받는 이유는 자신만의 아이코닉함으로 코다 쿠미 시대를 이끌었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

기록으로 볼때나 체감 인기로 볼때나 일본에서 본인만의 컨셉으로 브레이크에 성공해 자신만의 노선을 완전하게 구축한 아티스트였으며, 2000년대 데뷔했던 여성 아티스트 중에서는 가장 독보적인 인기를 끌었던 인물이다.[9]

3. 음악 인생

3.1. 2000~2003 : 데뷔와 무명 시절

코다 쿠미는 유년기때부터 일본악기의 사범이었던 조부와 일본전통 춤 센부의 명인이었던 조모, 그리고 금의 면허를 가지고 있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전통 예능을 배운 소녀였다. 그리고 상당한 가창력을 지녔다고 알려진 그의 어머니를 보면서 가수의 꿈을 키우게 됐고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오디션에 지원하기 시작하며 가수 지망생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코다는 어머니를 빼닮아 노래 실력은 좋았으나 또래 지원자들처럼 귀여운 외모는 아니어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때 오디션에서 합격하는건 모두 용모가 귀여운 아이들 뿐이었다고. 코다의 오디션 생활은 이후에도 계속됐지만 중학교때는 J-POP 붐이 불어 오디션 지원자가 급증해 서류 심사부터 떨어지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 그래서 코다는 학창시절 자신의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다고 고백했다.

고교 2학년 재학 시절에는 모닝구 무스메 3기 오디션에 지원해 괜찮은 선까지 갔었다. 하지만 현재 하로프로가 굴러가는 상황봐서는 그녀에게 있어선 그때 오디션에 떨어진게 오히려 잘된 셈. 한마디로 전화위복. 그리고 코다 쿠미까지 떨어뜨려 가면서 층쿠가 오디션에 합격시킨게 바로 모닝구 무스메 역사상 최고의 에이스멤버로 평가받는 고토 마키다.당시의 오디션 영상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10][11]이렇게 꾸준히 많은 오디션에 도전했지만 탈락이 계속됐고 어느새 코다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게 되었다. 진로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하던 코다는 선생님들과 가족과의 상의 끝에 마지막으로 도전하고 여기서도 안되면 꿈을 포기하자라는 굳은 심정으로 전국에서 수십만명을 오디션하는 대형 오디션 'avex dream 2000'에 지원하게 된다.[12]

에이벡스는 일본 음악에 관심있다면 모두가 알듯이 하마사키 아유미, 아무로 나미에등 톱 여성 아티스트들이 소속된 일본 유수의 음반 레코드사였다.[13] 이 오디션은 30초간 참가자 전원의 '노래'를 듣고 평가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코다는 탁월한 가창력을 바탕으로 오디션에 진출하는데 성공했으며 총 3차로 진행된 오디션을 거쳐 전체 준 그랑프리(2위)를 수상하고 드디어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avex dream 2000 오디션 파이널 (1999년 8월 10일)

사실 이 오디션에서도 몇차례 고비가 있었는데, 2차 오디션 전날 코다가 친구들과 함께 춤 연습을 하겠다며 새벽에 놀러나간다고 하자 당연히 어머니가 그를 붙잡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말다툼을 벌이던중 그걸 지켜보던 아버지가 옆에 벗어다둔 옷가지를 집어던져 코다의 눈에 정통으로 맞는 사고가 일어났다. 결국 2차 오디션때에는 부상당한 눈을 가리기 위해 안대를 쓰고 나왔다고 한다.[14] 이때 심사위원들은 코다의 모습에 당황했지만 노래만 심사하다는 오디션이었기에 다행히 2차 오디션을 아슬아슬하게 합격했고 이후 3차 오디션도 합격하여, 99년 8월 도쿄 롯폰기에서 열린 최종 오디션에 진출한다. 최종 오디션 전날, 노래의 표현법을 바꾸기 위해 워크맨을 들으면서 열심히 연습했으나 본방에서 노래를 실수해버려 코다는 "이번에도 합격은 무리"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심사를 봤던 마츠우라 마사토는 최종 오디션에 오른 22인을 재면접했는데 이때 잘 떠들면서 웃음을 줬던 코다가 제일 인상에 남았고 노래 실력도 그둘중 가장 출중해 그녀를 선발했다고 한다. 잘 떠드는 아이의 캐릭터가 없었다면 최종 20인에 들지 못했을거라는 얘기도 했다. 다만 준 그랑프리에 그친 이유는, 당시 오디션을 여름방학에 진행하여 그랑프리 수상자를 2000년 1월에 곧바로 데뷔시킬 계획이었으며 마츠우라는 코다를 차분히 키워내고 싶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준 그랑프리에 올렸다고 밝혔다.[15] 수년간의 도전끝에 대형 기획사에서 데뷔하는 행운을 따낸 코다는 에이벡스의 트레이닝 시스템을 무상으로 받을 권리를 받는다. 코다는 정식 데뷔에 앞서 1999년 설립된 에이벡스 산하 레이블 'rhythmzone'[16]과 계약을 체결하고 R&B를 기반으로한 아티스트로서 출발하게 됐는데, 계약을 맺기 전 관계자가 코다에게 앞으로의 음악 계획을 물어보자 당시 히트하던 DOUBLE[17]이나 m-flo같은 음악을 하고 싶다고 말했고 관계자는 "그럼 R&B를 하고 싶다는 거네?"라고 되물었지만 코다는 "R&B가 뭐죠?"라는 답변을 내놓았을 정도로 서양 음악에 대해 무지했다고 한다.

이후 코다는 서양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 본토로 날아가 일명 무사 수행까지 완수했으며 약 1년간의 강도 높은 트레이닝을 받아 이듬해 가을 데뷔가 결정된다. 코다는 가창력을 무기로 미국 시장에서 먼저 데뷔하는데 자신의 성씨를 딴 'KODA' 명의로 발표한 'TAKE BACK'의 리믹스 싱글이 빌보드 첫등장 댄스차트 20위권에 오르며 신인가수로서 주목할만한 성과를 냈고 그에 따른 소속사의 기대도 커졌다.[18] 당시 음악 잡지에서 이 소식을 꽤 비중있게 다뤘기에 코다 본인도 "훗, 나 좀 잘 나갈지도"라는 이후 무명 시절을 생각하면 안타깝기만한 기대에 찼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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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살 데뷔 당시의 코다 쿠미. R&B 계열의 아티스트로 출발한다. (2000년)
코다 쿠미의 첫 데뷔 싱글 「TAKE BACK」 (2000년)

이후 코다 쿠미는 2000년 12월 6일, 데뷔 싱글 'TAKE BACK'을 발매하며 정식으로 데뷔한다. '미국 빌보드 차트에 진입한 실력파 가수'로 주목 받았지만 첫싱글은 오리콘 최고 59위에 그쳤으며 이후 발표한 싱글들도 잇따라 실패해 썰렁한 신인시절을 보내야 했다. 곡도 좋았고 노래도 잘 했지만 통통하고 평범한 외모가 문제였는지 소속사에서는 그동안의 소속 가수들처럼 미디어를 충분히 활용한 히트곡을 만들기 보다, 단순히 음악만을 어필하는 실력파로 가자는 전략을 펼쳐 TV 프로모션을 하지 않는 일명 '얼굴 없는 가수' 신세로 음반을 내게 했다. 프로듀서 마츠우라는 코다를 천천히 키워낼 생각이었으며 TV에서 나와달라는 요청을 받을만한 가수로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데뷔를 기대하던 코다와 가족들도 이 점은 상당히 실망했지만 코다 쿠미를 유명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었기 때문에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코다가 첫 싱글을 발표한 직후 데뷔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팔리지 않는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몸무게가 단기간에 8kg까지 늘어 결국 프로듀서에게 불려가 "그렇게 계속 살 빼지 않으면 PV(뮤직비디오) 애니메이션으로 처리해버릴꺼야!"라고 경고받기에 이른다. 실제로 그 당시 발매된 PV들을 보면 상당히 후덕한 코다를 볼 수 있다. 'COLOR OF SOUL' PV는 아예 코다의 클로즈업샷에 화면 전환만 줄창 나온다. 이때 그녀가 사무실에 인사하러 가도 아무도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프로 의식이 없는 가수로 낙인 찍혔기 때문이다. 거기에 설상 가상으로 후속 싱글도 모두 지지부진한 성과를 거두어 험난한 무명 생활이 시작된다.

2001년 겨울에는 같은 소속사에서 갓 데뷔한 보아와 함께 9.11 테러를 추모하는 'song+nation' 프로젝트에 듀엣곡 'the meaning of peace'를 수록하여 싱글로 발매하게 된다. 코무로 테츠야가 작곡한 이 싱글은 10위권 내외의 성적을 거두었고 같은 'song+nation' 프로젝트에 참여한 대형가수 팀들과 함께 일본의 최고 음악방송인 뮤직 스테이션 슈퍼 라이브 출연 기회를 얻게 된다. 당시 둘다 신인이었으며 아무나 나올수 없는 특집 방송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얼굴을 알릴수 있는 아주 큰 무대였던 셈이다. 그러나 리허설까지만 해도 평화롭던 두 가수는 본방송에서 애드립 기싸움을 시전해 방송 직후 PD한테 불려가 한소리 들었다고 한다(...). 사실 영상을 보면 코다가 한껏 오버하는데 그때 코다는 이때 아니면 다신 TV에 못나올거 같아서 그랬다고 한다. 이 방송 이후 몇개월 뒤 보아는 'LISTEN TO MY HEART'로 본격적으로 뜨기 시작했지만 코다는 이 방송 이후에 발매한 싱글들 조차 전혀 반응이 없었다.
코다 쿠미와 보아의 첫 뮤직스테이션 무대 (2001년)

이후 정규 1집 'affection'을 발매하며 평론가들과 음악 팬들 사이에서는 실력이 좋은 가수로 평가받긴 했지만 2000년대 초반 J-POP계에선 하마사키 아유미, BoA, 마츠우라 아야, 쿠라키 마이같이 스타일리쉬하고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여가수들이 각광받던 시기였으며 당시 코다는 음악외엔 파괴력이 전혀 없었다. 미국에서 싱글도 냈고, 메이저 데뷔도 했지만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예쁘고 청순하고 여리여리한 외모가 아닌탓에 계속 TV 프로모션도 못하고 밤업소에 출연하여 노래를 부르는게 활동의 전부였다. 이 시기에는 주로 새벽에 라이브하는 경우가 잦아 체력적으로 매우 힘들었고 하루는 자신의 공연을 보는 관객이 세명밖에 안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훗날 코다는 이 시절이 있었기에 라이브 실력과 정신적으로 성장할수 있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소속사인 avex에서는 매년 개최하던 여름 이벤트를 'a-nation'이라는 정식 공연으로 발전시켜 본격적인 스타트를 끊는다. 이 콘서트에는 하마사키 아유미, ELT, hitomi등의 스타 아티스트들도 함께 참여했고 선배 가수들의 무대를 지켜보던 코다도 이벤트 참여가 결정되어 '드디어 나도 이 자리에 있구나. 저 가수들처럼 무대에 임해야지'라고 생각하고 첫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코다 특유의 시원한 입담으로 관객들에게 '분위기 오르는거야~!!!'라고 말하는 순간(!) 관객이 호응을 해주지 않아 라이브 회장이 싸해졌던 일이 생겨버려(...). 그 날 관계자는 코다의 MC를 NG라고 말했고 2006년 정도까지는 a-nation에 참여할때 코다는 일명 MC 금지 규칙이 생겨 '코다 쿠미입니다. 다음 노래 들어주세요'라는 말밖에 못했다고 하는 안습한 일화가 있다.[19]

그렇게 몇년을 이렇다 할 포텐을 터뜨리지 못하고 있었던 2002년에는 여동생인 misono가 같은 기획사의 밴드 데이 애프터 투모로우의 보컬로 데뷔하게 되는데 코다와는 다르게 전폭적인 지원 아래 데뷔했고 귀여운 외모와 가창력으로 언니보다 먼저 유명세를 탄다. 한때 데이 애프터 투모로우와 코다 쿠미가 같은 날에 앨범을 발매한 적이 있었지만 여동생쪽이 이기는 상황도 있었다(...). 무명인것도 서러운데 졸지에 코다 쿠미는 'misono 언니' 정도로 소개되는 안습한 상황을 맞게 된다. 아마 이 시기가 코다 쿠미 최악의 슬럼프 시절이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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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시절의 코다 쿠미의 모습 (2002년)

끝이 보이지 않을거 같은 무명 생활과 언니로서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던 코다에게도 큰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바로 전세계에서 발매되는 인기 게임 파이널 판타지의 게임 주제곡을 불러줄것을 요청해 온것이다. 당시 게임회사쪽에서는 다른 아이돌 가수의 섭외를 원했지만 이런저런 논의끝에 에이벡스와 연락이 닿았고, 실제 코다와의 대화도 순조로워서 채택됐다고 한다.[20] 녹음에 성공한 2003년 3월, 대망의 7번째 싱글 real Emotion / 1000の言葉가 발매가 결정되면서 첫주 3만장의 판매고를 시작했지만 꾸준한 롱런끝에 28만장 이상의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고 연간 차트 23위까지 오르는 데뷔 이래 최고의 성공을 맛본다. 코다 본인은 이 싱글마저 실패하면 가수를 그만둘것이라고 고백할 정도로 의욕적이었다.
다만 'real Emotion'의 인기는 빠른 비트와 화려한 멜로디로 곡 자체의 구성이 워낙 뛰어난데다 세계적인 인기 게임 '파이널판타지 X-2'의 오프닝 테마송으로 채택된 덕택이었다. CD의 재킷에도 코다 쿠미를 대신해 게임 여주인공 캐릭터들이 등장했을 정도였으니(...) 노래는 히트했지만 역시나 TV 프로모션은 할수 없었다.
코다 쿠미의 첫 히트 싱글 「real Emotion」

7번째 싱글과 비슷한 시기 발매한 정규 2집 음반 grow into one이 오리콘 차트 8위까지 올라 선방했고 매니아 팬층도 조금씩 모으고 있었지만 이후 반년간 CD를 못내 후속 싱글 COME WITH ME가 10위 밖으로 이탈하면서 다시 침체기에 돌입했고 'real emotion' 한곡으로 반짝 인기를 누렸지만 이후 싱글들이 빛을 보지 못하며 원히트원더로 남는듯 했다.

그리고 활동을 이어가던 어느날 코다는 동생 misono의 라이브 현장에서 충격적인 모습을 목격한다. 그저 어린 여동생인줄만 알았던 misono가 직접 곡 컨셉에 맞게 잡지를 북북 찢어와 코디네이터에게 의상을 지시하고 전체적인 라이브 기획을 직접 진두지휘하는 모습을 보며 그전까지 찾아볼수 없던 프로페셔널한 모습에 할말을 잃게 된다. 자신과는 다르게 '얼굴도 귀여워서' 먼저 히트했다고 생각했던 misono의 뒷면에 이렇게 진지한 모습이 있다는 걸 알고 그만 충격을 받은것이다. 그전까지 코다는 노래만 부를수 있으면 됐었고 비쥬얼에도 역시 자신이 없어 프로 스탭들한테 모든걸 맡겼던 수동적인 아티스트의 모습이었다. 실제로 당시 케이블 TV에 중계되는 이벤트 페스티벌에서의 코다의 모습은 프로가수라기엔 너무나 평범한 모습에 그냥 노래만 부르고 있어 수많은 무명가수들에 지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음악적인 부분에서도 작사를 제외한 음반 작업도 모두 프로 제작진들에게 맡겼을 정도. 하지만 이날 이후 코다는 '코다 쿠미'라는 아티스트에 대해 발전이 없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갖게되면서 동생의 모습을 본보기로 '코다 쿠미'라는 아티스트에 대해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3.2. 2004~2007 : 에로각코이 사회현상

코다 쿠미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4년, 몸무게를 8kg을 뺀 뒤[21] 가슴선이 훤히 드러난 의상을 입고 섹시 컨셉트로 무대에 오르면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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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시 컨셉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2004년의 모습

섹시 컨셉을 시도한건 다름 아닌 한 스탭의 충고 때문이었다. 당시 여자가수들의 주된 컨셉이던 귀엽고 여성스러운 의상을 고집하던 코다에게 한 스탭이 "코다, 근데 그거 별로 귀엽지 않아"라고 돌직구조언하면서 우연히 섹시한 의상을 입어본 결과 주변 스탭이 만장일치로 섹시하다며 칭찬했고 이 아이디어가 2004년 1월 발표한 싱글 'Crazy 4 U'에 녹아들면서 섹시 가수로서의 변모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 PV에서 그가 감행한 과감한 노출과 고가의 의상들이 메스컴에서 화제가 되었고 이 시기 코다는 'TEAM KODA'를 결성해 그녀를 주축으로 여성들에게 어필될만한 의상과 아이디어를 스탭들과 의견을 교환해 곡 컨셉과 자켓 선정을 했으며 이후 발매한 3집 앨범 'feel my mind'에서는 본인이 본격적으로 음악 작업이나 컨셉에도 상당 부분 참여하면서 자신만의 색깔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코다는 곧 이어 11번째 싱글 'LOVE & HONEY'를 발매하면서 이 싱글에서 많은 변화를 시도한다. 음반의 타이틀 곡 '큐티하니'는 섹시한 여성이 자신의 매력을 자랑하는 내용의 노래로 일본 영화 '큐티하니'의 주제가로 수록됐고[22] 전면에 내세워진 파격적인 PV는 코다 쿠미의 변화된 이미지를 어필하는데 성공했으며 별다른 프로모션 없이도 오리콘 주간차트 4위에 오르며 히트한다. 'real Emotion' 이후로 1년만에 TOP 5에 진입한 것이다. 그동안 TV 프로모션이 없었지만 꾸준한 인기에 힘입어 11월, 일본 유선대상에 출연해 데뷔 4년만에 신인상을 수상하며 브라운관에서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렸고 그 여세를 몰아 뮤직 스테이션 슈퍼라이브[23]에 출연하며 여기서 파격적인 무대매너로 폭발적인 화제가 된다.
뮤직스테이션 솔로 첫 무대에서 수영복 패션이라는 파격적인 의상으로 등장한 코다 쿠미.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이 방송 단 한번으로 그동안 TV에 출연하지 못한 설움을 단번에 날려버린다. 한국에서 코다가 처음 알려질 때 가장 많이 떠돌았던 영상으로 리플 대부분이 의상이 야하긴 한데, 라이브를 잘해서 멋있다였다. 일본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컬쳐쇼크를 받았다. 이렇게 좋은 반응도 있었지만 사실 섹시 컨셉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도 있어서 대중들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던 코다는 다시 노선을 바꾸려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스탭들이 입을 모아 '코다 쿠미 아니면 할 수 없는거 아니냐'며 그녀를 지지했고, 큐티하니 이후에 발매한 싱글 'Chase'가 오리콘 10위권대 후반을 기록하는 부진을 겪으며 다시 침체될뻔하던 코다는 스탭들의 지지로 인해 섹시 컨셉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코다 쿠미는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의 응원을 져버리지 않기 위해 모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음악을 하기로 결심하고 이후 발매한 '奇跡', 'hands'등의 싱글에서 발라드 위주의 성숙한 음악을 선보여 호평을 받는다. 우연일진 몰라도 이 싱글들부터 대형 타이업 없이 다시 10위안에 드는 결과를 냈고 이후 안정궤도에 돌입하면서 2005년 2월 발매한 4집 앨범 secret은 50만장이 넘게 팔려 기존 앨범 판매고에서 3~4배까지 뛰어 올라 무명 시절을 말끔히 청산한다.
코다 쿠미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레전드 무대. (2005년)

데뷔 이후 4년여간 TV 프로모션은 일체 없었으나 엠스테 슈퍼라이브에 출연한 이후 출연요청이 쇄도해 2005년부터는 TV 프로모션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마츠우라 대표가 초창기 그녀의 미디어 활동을 제한한 이유도 코다를 TV에서 나와달라고 부탁할 정도의 가수로 만들고 싶어서였고 4년만에 드디어 그 정도 급의 가수가 된것이다. 코다는 음악 방송에 나와 훌륭한 라이브 실력을 뽐내는 것에 더해 솔직하고 당당한 입담으로 거리낌없는 털털한 모습을 보여줬고 기성세대 여가수에게선 볼수 없던 신선한 매력을 선보여 가수 인기도 가파르게 상승한다. 자신의 컴플렉스이자 수년간 가수활동의 발목을 잡았던 평범한 얼굴과 통통한 체격을 본인의 노력으로 개성있게 연출해내는 것에 성공해 미디어 노출도도 잦아지기 시작한다.

코다 쿠미가 스타 대열에 본격적으로 합류하면서 여러 다큐 프로그램에서는 그녀의 무명 시절과 정상에 오르기 까지의 힘겨웠던 시절을 방송했고 대중들은 그녀를 바닥부터 올라온 아티스트라고 재평가하기에 이르렀다. 한때 팔리지 않아서 퇴출 직전까지 갔던 아티스트가 드디어 온 국민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것이다. 이 시기 오리콘 스타일 잡지가 선정한 최고의 섹시 아티스트 1위에 오르면서 자신의 노선을 더 확실히 각인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때 대중들은 그녀를 '에로 각코이'(섹시하면서 멋진)[24], '에로 카와이'(섹시하면서도 귀여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부르기 시작하는데 이 에로 각코이라는 유행어는 일본의 시대별 유행어에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인정받았다.

2005년 여름에 발매한 16번째 싱글 'Butterfly'는 차트 2위까지 올라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고 이후 몇장의 싱글들 더 발매한후 여세를 몰아 2005년 9월에 지난 5년간의 활동을 정리하는 첫 베스트 앨범 'BEST~first things~'를 발매한다. 발매 첫주 55만장이라는 높은 판매고를 기록해 성공적인 스타트를 끊었지만 일본의 국민가수 Mr. Children와 동시발매가 되는 바람에 2위에 머물러 콩라인으로남는듯 했지만 2주차에 다시 1위로 반등했고 이 때의 에피소드가 코다 쿠미를 주인공으로한 다큐멘터리 정열대륙에서도 등장한다.

데뷔 5년만에 처음으로 1위를 달성한 코다는 스탭들과 부등켜 안으며 환호성을 질렀고 항상 2위에 머물렀던 코다가 일본 가요계 정상에 서는 순간이었다. 이 베스트 앨범은 밀리언 히트를 가뿐히 달성했고 그 해에만 12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으며 2005년 발매된 여성 아티스트 앨범 중 판매량 1위에 올라 대히트를 기록한다. 이후에도 꾸준한 롱런으로 최종 판매량 191만장을 기록했으며 출하량으로 더블 밀리언 인증을 받았고 이것은 가수 본인 최다 판매고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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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다 쿠미는 자신만의 독보적인 스타일로 데뷔 5년만에 일본 음악계 정상에 올라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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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5년만에 오리콘 1위를 차지했던 당시의 모습

이 베스트 앨범은 코다 쿠미의 디스코그라피 중 최고 명반으로 평가받으며, 베스트 앨범의 진수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베스트 앨범이 히트하면서 코다 쿠미의 인기는 더 급상승했고 비슷한 시기 개설된 모바일 팬클럽 playroom의 이용자가 10만명을 돌파하면서 젊은 세대들에게 큰 방향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베스트 앨범의 자켓사진을 보면 알수 있듯이 염색한 머리와 두터운 눈 화장 등 섹시한 '갸루'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내세웠고 하마사키 아유미의 등장으로 잠시 저물었던 까맣게 태닝 시킨 피부와 갸루 화장이 다시금 인기 몰이를 하면서 일본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25]

베스트 앨범으로 대히트를 기록한 코다 쿠미는 TV 데뷔 1년만에 각종 시상식에 초청 받기에 이르렀고 47회 TBS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영예의 대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전성기의 막을 열게 된다.[26] 이는 데뷔 5년만에 수상한 값진 대상이었으며 코다는 수상 소감을 말하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대상은 일본 가요계에 섹시 가수로서는 십여년만의 나온 대상이었으며 일본 음악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대상을 거머쥔 코다 쿠미는 2005년 오리콘 베스트 아티스트에 뽑히면서 그해 가장 뜨거운 이슈를 몰고온 올해의 가수로 평가받아 한 해를 에로 각코이 열풍으로 뜨겁게 달궜다.
2005년 제47회 일본 레코드 대상 '코다 쿠미'
언젠가 반드시 1위를 하겠다고 말해왔던 코다 쿠미.
데뷔한지 6년째,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았던 꿈을 지금 이뤘습니다.
- 제 47회 레코드 대상 「코다 쿠미」 호명 순간.

대상 수상 전후 시점부터 코다 쿠미는 세계 최초의 12주 동안 연속으로 싱글을 발매하는 일명 '12연작 프로젝트'를 도전한다. 처음 이 프로젝트를 발표했을때 대다수가 말도 안되는 마케팅이라며 비판했지만 12연작의 1탄 'you'가 발매되자마자 예상외로 좋은 곡퀄리티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고 싱글 차트에서 처음 1위를 차지하며 성공적인 스타트를 끊었다. 사실 이 12연작 곡들은 원래 차기 발매될 정규앨범 수록곡으로 이미 녹음된 곡들이었지만 코다 쿠미의 제안으로 12연작 프로젝트로 탄생되어 기획됐다고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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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다 쿠미의 성공 신화를 이끈 12연작 프로젝트.

이 12연작 싱글들은 3장을 제외하고 모두 5만장 한정 물량으로 발매됐는데, 한정판 싱글들은 발매된지 하루만에 전국에서 물량이 동나고 다음 날엔 옥션 사이트에 10만원까지 가격이 뛰어오르는 품귀 현상까지 나타났으며 그 폭발적인 반응을 입증시켰다. 결국 12개의 싱글 모두 차트 TOP 10안에 드는 오리콘 사상 최초의 결과를 내며 대다수가 실패할거라고 예견했던 프로젝트를 성공시켰고 이 중 두 장의 싱글은 주간 차트 1위에 올라 겹경사를 이루기도 했다. 음반 출하량을 다 합치면 100만장을 팔아치웠으며 과반수 이상이 한정물량이었지만 비한정 싱글의 판매량도 꽤나 상당했기 때문에 짭짤한 수익을 올릴수 있었다.

12연작 프로젝트가 끝나자마자 이 싱글들을 모두 합친 앨범을 낸다고 밝혀 또 한번 팬들을 멘붕시켰다. 이 앨범은 'BEST~second session~'라는 명칭으로 발표되어 베스트 1이 나온지 1년도 안되서 두번째 베스트가 나오는 상식밖의 스피드였다. 그러나 앨범이 발매 되자마자 첫주에만 98만장이 팔려나가는 폭발적인 판매고를 올렸고 이는 근 일본 가요계 10년 동안의 최고 초동 판매량으로 남았다. 최종적으로 오리콘 기준 180만장 이상이 팔려나가 BEST ~first things~에 이어 2작 연속 더블 밀리언(200만장) 인증을 받았으며 연간 앨범 차트 2위에 올라 대히트를 기록한다.

이 12연작 프로젝트는 코다 쿠미의 인기를 더 높여주는 큰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SOULHEAD, 이시이 테츠야등과의 콜라보레이션으로 다양한 음악 장르를 시도해 가수로서의 역량도 한껏 뽐내 코다의 인기를 일시적 붐이 아닌 하나의 톱 아티스트로서 인정받고 성공시키는 역할을 했다. 특히 싱글마다 다른 나라의 전통 의상을 입은 자켓에서 뛰어난 컨셉 소화력을 선보였고 곡 장르도 대부분이 다 다른 장르로 포진되고 있어 넓은 스펙트럼을 과시했다. 그 당시 코다 쿠미의 무서운 인기와 실력이 바탕되지 않았더라면 실패했을 프로젝트였다. 다시 말해, 그 당시 코다 쿠미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프로젝트였다는 것. 이 성공적이었던 12연작 사례는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으며 1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시도한 가수는 아직까지 그 누구도 없다.
한국 팬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던 코다 쿠미의 12연작 3번째 싱글 「D.D.D.」 (2006년)

12연작~베스트 대박 행진에 이어 봄께 발매한 싱글 '恋のつぼみ(사랑의 꽃봉우리)'가 착신음 2x밀리언 인증 및 27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싱글 판매에도 호조를 띄기 시작했고 7월에는 가수 본인 최초가 되는 4A 싱글[27]이자 여름 싱글 '4 hot wave'를 발매하는데 싱글에 수록된 네 곡 '人魚姬',' JUICY', 'I'll be there', ' With Your Smile'은 완벽한 퀄리티를 자랑하며 인기에 가속을 넣는다. 이 싱글은 코다 쿠미 역대 싱글 중 가장 고퀄리티로 평가받으며 현재까지도 팬들에게서 사랑받는다.

그리고 같은 날 싱글 연속 1위 기록을 유지하던 대형 그룹 KinKi Kids와의 동시 발매로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발매 첫주에는 킨키에 밀려 2위에 그치지만 집계 기간동안 데일리 차트에서 초반 하루이틀을 빼고 코다가 계속 1위를 차지해서 당시에는 지수도 나오던 시절이 아니라 이러다 코다가 킨키의 1위 기록도 깨버리는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까지 나왔다. 그러나 결국 3만여장의 차이로 1위 자리를 양보했지만 월간차트에서는 코다가 1위를 제패했고 총 판매량도 코다 쿠미가 추월하면서 신드롬의 절정을 찍었다. 싱글은 최종적으로 39만장을 매상해 가수 본인 최다 싱글 판매고로 남았다.[28]
가수 본인 최다 싱글 판매고를 기록했던 싱글 '4 hot wave' 수록곡 「人魚姫」

2006년 9월에는 2004년 제주도 공연 이후 두번째로 내한했었는데 이때 「아시아 송 페스티벌」참가를 비롯해 기자회견과 싸인회를 가졌었다. 아송페 공연에서는 'you', '큐티하니', '人魚姬'까지 총 세곡을 불렀지만 당시 관중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던 '人魚姬' 무대만 쏙 빼놓고 방송되어 팬들의 아쉬움을 사기도 했다. [29] 그리고 당시 아유미가 '큐티하니'를 번안해 국내에서도 코다의 관심이 상승하던 시기라 그녀의 내한이 많은 이슈가 되었는데, 이때 수십개의 인터뷰를 일방적으로 취소 했다는등, 아유미와의 비교는 사절이라고 말했다는등, 일명 톱스타 행세를 했다는 얘기가 대대적으로 보도됐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부 거짓으로 판명났다.

오히려 코다는 YTN과의 인터뷰 내내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았고 인간적인 모습까지 느꼈다는 VJ의 증언이 있었다.[30] 당시 한국에서 그녀를 담당하던 SM 엔터테인먼트가 가수 관리 차원에서 아송페 기자회견 중 어느정도 질문을 가려받고 관리를 한건 일부 사실인것 같다.[31] 다만 이것은 SM측의 과실이며, 코다는 어느 나라 기자회견에 가서도 질문을 가려받거나 하질 않는다. 싸인회장에서도 관계자들은 선착순 150명만 응해줄 예정이었으나 코다가 직접 회장에 모인 구입자들에게 싸인을 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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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아시아 송 페스티벌을 위해 내한했던 코다의 모습

이후 10월에는 겨울 발라드 '夢のうた / ふたりで…(꿈의 노래/둘이서...)'[32]를 발매, 총 30만장 이상 판매고를 올리고 인기를 얻었으며 비슷한 시기 전국 투어도 개최, 홀 공연이었지만 뛰어난 공연 퀄리티로 호평을 받았다.

2006년에도 최고의 한해를 보낸 코다는 일본유선대상 및 각종 가요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했으며 2년 연속 가요계 정상에 올랐다. 전년도에 대상을 수상했던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는 야후 재팬 회원들을 대상으로한 설문에서 가장 유력한 대상 후보로 점쳐졌으나 아쉽게도 대상은 못받고 '최우수 가창상'에 올랐다. 오리콘 기준 코다 쿠미는 2006년 한해동안 음반 수입으로 127억엔을 매상해 압도적인 세일즈 1위를 기록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이 해 연예인, 정치인등을 종합한 유명인 랭킹에서 2위를 기록해 인지도도 최정점을 찍었고 당시 일본에서는 TV를 틀어도,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온통 코다 쿠미로 도배되던 최고의 황금기 시절이었다.

2006년 12월에는 2005년 2월 발매한 정규 4집 이후 약 2년만에 정규 5집 앨범 'Black Cherry'의 발매를 결정하면서 과연 베스트 앨범이 아닌 오리지널 정규 앨범도 높은 판매고를 올릴까라는 대중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이 앨범은 발매 첫주 50만장의 판매량을 올리고 4주 연속으로 주간 차트 1위를 기록했으며 2007년까지 최종 판매량 100만장을 찍어 3연속 밀리언 기록을 세우면서 당연하다는듯이 대박을 냈다.[33] 이 3연속 밀리언을 달성한 앨범들은 고작 1년 6개월안에 발매된 작품들이며 그 당시 코다 쿠미의 무서운 인기와 발매텀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해를 넘어와 2007년 코다 쿠미는 3월 발매된 싱글 'BUT / 愛証'을 통해 음악적 변신을 시도한다. 'BUT'은 동성애 테마를 잡고 일본인 작곡가 곡이 아닌 미국 현지 팝 스타일을 표방하기 시작했는데 같은 시기 에이벡스의 초유의 적자 사태가 겹치며 이 싱글과 함께 발라드와 댄스를 집합한 'BEST~BOUNCE & LOVERS~'를 동시 발매하는 병크를 저질러 너무 상업적으로 가는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으며[34][35] 실제 싱글 판매량도 12만장대로 이전보다 좋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한가지 여담으로 일본에서 코다가 발표한 노래중 반응이 그저 그랬던 노래들은 한국 팬들에게 큰 인기를 모았다. 'BUT'이나 'D.D.D. (feat. SOULHEAD)'가 대표적인 예.
코다 쿠미의 대표곡 「愛のうた」 (2007년)

판매량 하락으로 우려의 목소리가 나운 가운데 곧 이어 여름 싱글 'FREAKY'를 발매한다. 이 싱글이 2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전작 싱글의 부진을 만회하고 인기를 이어갔다. 수록곡 'girls'나 '空'도 인기를 끌어 롱런했으며 가을에 발매된 발라드 싱글 '愛のうた(사랑의 노래)'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코다 쿠미의 대표곡으로 자리매김한다. 이 노래는 발매된지 8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가라오케 차트에 등장하며 꾸준한 사랑을 받고있다. 2015년에 음원 다운로드 100만건 인증을 받으며 음원 판매도 롱 세일즈를 기록. 일본에서 가장 꾸준히 사랑받는 코다의 대표곡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11월에는 동방신기와 콜라보레이션한 싱글 'LAST ANGEL (feat. 東方神起)'을 발매하며 국내 커뮤니티에서도 활발히 언급됐다.[36]

2007년 코다는 음악 활동외에도 각종 CM 및 홍보대사 활동으로 큰 활약을 했는데, 전년도의 압도적인 인기덕에 생겨난 인지도를 바탕으로 다양한 활동을 했다. 특히 2007년 한해 동안 무려 10개 기업의 CM 모델로 발탁되어 그 해 여자 탤런트로는 2번째, 여자 솔로 가수로서는 가장 많은 CM 활동을 했다. # 음악 활동에서도 역시 73.5억엔의 CD 세일즈를 기록해 연간 아티스트 세일즈 1위에 올랐는데 이는 2년 연속의 1위 기록이었다. 12월에는 데뷔 7주년을 맞이해 가수들에게 꿈의 무대로 통하는 도쿄돔에서 투어 파이널을 장식했으며 데뷔 7주년을 기념해 티켓값을 7777엔으로 맞추어 화제가 된다. 그리고 이 공연 오프닝 무대에서 레전드 퍼포먼스를 남기는데..
코다 쿠미의 첫 도쿄돔 콘서트 오프닝이자, 그녀의 올타임 베스트 무대. (2007년)

이 무대로 인기와 함께 가수로서의 기량도 절정을 찍었다는걸 보여주고 있다. 놀랍겠지만 이 퍼포먼스를 100% 라이브로 소화했다는 점도 크게 주목할 부분이다. 가수 활동외에도 그녀의 스타일이 일본의 젊은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지지를 받아 베스트 지니스트, 네일퀸 등 다수의 상을 섭렵하며 스타일 아이콘으로도 자리매김했고 2007년 베스트 히트 가요제에서도 팝 그랑프리에 올라 대상을 수상받으며 탄탄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었다.

3.3. 2008~2011 : 실언 소동과 하락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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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제목 그대로 왕좌에 오를것만 같았던 코다 쿠미. 6집 앨범 자켓 사진 (2008년)

2008년 1월, 코다는 정규 6집 앨범 'Kingdom'을 발매하고 같은 주에 발매된 아티스트의 매상을 누르며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솔직함이 매력이었던 그녀가 1월 29일, 본인이 진행하던 라디오 방송에서 "35세가 넘은 임신부는 양수가 썩어 간다"는 망언을 했다. 매니저가 빨리 아이를 낳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한 발언이라고 본인은 해명했으나, 썩어간다는 표현은 본인 해명과 상관없는 명백한 비하발언이다. '180cm이상의 남자가 이상형이다'와 '180cm이하의 남자는 루저'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이 발언에 대해서 불임부부가 반발하고 나서는 등 그녀의 실언은 일본 사회에 겉잡을 수 없는 파문을 일으킨다. 방송 다음날 전체 신문 1면에 났고 각종 연예 뉴스에서는 말할것도 없이 도배 됐으며, 결국 열심히 새앨범을 홍보하고 있어야 할 시기에 뉴스에 출연하여 대국민 사과를 하기에 이른다. 코다는 사건이 터지자마자 기대속에서 발매된 신보 'Kingdom'의 모든 프로모션을 일제히 취소하고 출연 중이던 CM(CF)의 중단 및 전국 투어 연기 의사까지 전했으며 그야말로 최고의 기대 속에 발매된 앨범이 최악의 구설수로 끝날 위기에 놓였다.

20대 여가수가 과감한 섹시 컨셉으로 활동하는 만큼 의외로 30~40대 팬들의 지지층이 생각보다 높은 가수였는데 코다의 발언은 아주 경솔하고 어리석은 것이었다. 평소에도 털털하고 거침없는 입담을 자랑하긴 했으나 일부에서는 조금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고, 더구나 모든나라가 다 그렇듯 연예인에게 이미지 손상은 치명적인 손해였으며 심지어 본인이 자초한일이니 비판은 날이 갈수록 거셌다. 여자의 사랑을 테마로하는 가수가 불임으로 아이를 못낳는 여성들을 한번에 무시하는 발언을 해버렸으니 이건 도저히 팬들도 쉴드칠 수 없는 발언. 사실 따지고 보면 노산이 위험하긴 하다만, 저런 몰상식한 발언은 해서는 안되는 말이었다. 사람이 살다보면 실수를 할수는 있지만 발언의 정도가 지나쳤다. 더 놀라운건 그 방송이 사전녹음 방송이었다고 한다.[37]
양수 발언 사과 방송 (2008년)

당시 발매된지 얼마 안된 'Kingdom' 앨범은 4연속으로 100만장을 돌파할 것인가에 대해 연일 이슈였던 그 해 최고 화제작 중 하나였다. 거기다 수록곡 전곡의 PV를 촬영하며 정말 100만장 팔려고 작정한 앨범이었고 실제로 첫날 판매 지수를 보면 뜬구름 잡는 소리도 아니었다. 거기다 1년 가까이 공들여 작업한 앨범이라 퀄리티도 말할것 없이 최상이었던 앨범이서인지 왠지 더 원망스러웠던 그녀의 발언이었다. 거기다 문제의 발언이 발매 첫주 주말에 일어나 막판에 타격을 입고도 앨범 초동 판매량은 42만장을 기록했지만 2주차부터는 발언의 여파로 8만장까지 드랍하며 판매량이 우수수 떨어졌고 결국에는 최종 판매량 60만장에서 끝나버려 원래 아름다운 롱런으로 앨범 판매량에서 더 호조였던 코다에게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60만장은 사건이 없었다면 발매 한달~두달째에 달성하고도 남을 수치. 100만장은 무리였다고 해도 그전 앨범들의 추이로 볼때 최소 80만장 이상은 충분히 팔렸을 앨범이었다.

양수 발언의 여파로 모든 활동을 중지한 코다는 연기 의사를 전했던 투어 무대에 복귀해 다시 무대에 올랐고 무대에서 팬들에게 눈물을 보이며 다시 한번 사과했다. 그리고 6월, 4개월만에 복귀 싱글 MOON을 발매하면서 활동을 본격적으로 재개하는데 타이틀 곡 'Moon Crying'이 좋은 반응을 얻어 상당히 히트했고 여러 CM에 다시 복귀하며 재기에 성공 하는듯 보였으나 뒤 이어 발표한 싱글들이 전보다 부진한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다. 후속 싱글 TABOO가 1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첫주 기세에 비해 롱런하지 못했고 같은해 겨울 발라드 싱글 'stay with me'가 6만장대 판매고를 기록하면서 하락폭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싱글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다들 "그래도 코다 쿠미 발라드는 10만장 넘게 팔릴걸요" 했지만 결과가 저랬으니. 사실 복귀 싱글 'MOON'도 2006년부터 인연을 이어오던 팝스타 퍼기와의 수록곡 'That Ain't Cool'를 수록해 초호화 참여진을 자랑했으나 4A싱글 답지 않게 10만장대 초반 판매량을 기록하여 판매량 하락세를 예고하고 있었다.
4개월간의 자숙 기간을 끝내고 발표한 복귀 싱글 「Moon Crying」 (2008년)

2009년 발표된 정규 7집 앨범 'TRICK'은 발매와 동시에 2주 연속 1위를 차지하지만 첫주 20만장대 판매고에 최종 판매량 39만장을 기록하며 'Kingdom' 초동 판매량보다 안나오는 부진을 겪는다. 3년만에 판매량이 100만장대에서 30만장대까지 줄었으니 그 하락폭이 어느정도였는지 단숨에 알 수 있겠다. 피지컬 CD 주 구입층인 20~30대 팬들이 줄어서 CD 판매량이 안나오는게 당연했고 거기다 음반 불황까지 겹쳐 설상가상이었다. 여전히 디지털이나 착신음에서는 강세이긴 했으나 이제 그녀에게 판매량 상승은 기대하기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이때 코다는 많은 라이브 활동과 굵직한 화장품 CM등에서 활약하며 아주 최악의 상황까지는 면했다. 2009년 오리콘 연간 세일즈 여자가수 부문 3위에 2009년 한해동안 가라오케(노래방)에서 가장 많이 불린 가수 2위가 코다 쿠미인것만 봐도 아직 건재했던 편. #구설수 이후에도 이정도로 유지했는데 사건이 없었다면 전성기가 더 오래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한국에서는 그녀가 양수 사건 이후로 훅갔다고 하는데 그정도는 아니다. 사실 전성기때 많은 인기를 달성해 현지인들은 크게 하락세를 못느낀다는 얘기도 있었다. 이때만 해도 여전히 코다는 미디어에 많이 나오고 있을 시기였으며 호감도는 떨어졌을지언정 인지도가 떨어진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정점을 찍어본 가수이기도 했고. 아무래도 해외 가수라 실제 체감보다는 차트나 성적에 나오는 숫자들을 가지고 얘기하다 보니 사실 한국에서의 코다 쿠미 하락세 이슈가 더 갑론을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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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의 코다 쿠미 모습.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의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개선해야만 했을 2009년에는 촌스럽고 과한 스타일링에 곡들도 커버곡 남발에 퀄리티가 급격히 안좋아져서 팬들의 아쉬움을 샀다. 그나마 나오는 오리지널 신곡들도 대부분이 전작들을 답습한 느낌이라 신선함을 느낄 수 없었다. 이때 발매한 싱글들 '3 SPLASH'와 'Alive / Physical thing'은 레이블도 팬들도 서로 달갑지 않은 기대 이하의 반응이었다. 거기다 복귀한지 얼마나 됐다고 리믹스 앨범 'Driving Hits' 시리즈가 시작되더니, 애당초 08년에 나오기로 했던 OUT WORKS & COLLABORATION BEST 베스트 앨범이 취소되지 않고 발매돼 상업적인 이미지로 이미지 소비에만 열을 가했다. 짧은 릴리즈 간격속에서도 좋은 곡을 연발하는 "믿고 듣던 가수"였던 그가 이렇게 음악 활동으로 비판받을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을 일. 안그래도 이미지 소비가 많은 가수였는데 한순간에 안좋아진 여론에 더해 이제 곡 마저도 밍밍해졌으니 하락세가 올 수 밖에 없다. 오히려 이 정도로 유지한게 신기할 정도.

이때까지는 투어 규모나 음원 성적 그리고 하락한 판매량까지 통틀어봐서도 당시 여자솔로 다섯손가락안에 들고 있었다. 구설수로 인해 20~30대 팬층이 상당수 사라지긴 했어도 그 하락한 상태에서 그나마 완만하게 하락한 편. 당시 사건을 기점으로 일본 음반 시장이 점점 축소되고 있었고 사실 2008년의 코다도 슬슬 전성기에서 내려오려던 시점이었다. 2007년부터 팝 노선을 밀기 시작하면서 음반 판매가 가수 본인 최전성기인 2006년보다는 낮아지고 있었지만 'Kingdom'의 초동 판매량을 알수 있듯이 그때 당시 여자솔로 중에 초동이 40만장 넘게 나오는 가수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조금 더 확실히 얘기하면 전성기에서 내려온다는것이 인기의 하락세보다도, 정점을 찍고 자연스레 내려오던 시기였다는 것. 당시에도 가장 잘나가는 여가수임은 확실했다. 이때 만약 사건이 없었고, 곡 퀄리티가 쭉 유지됐다면 당시 인기를 꾸준히 유지해서 전성기를 이어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후 하락세가 오는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속도가 더 빨리 찾아온것이다. 만약 전성기가 시작될 즈음인 2005년 ~ 2006년 쯤 벌어진 일이었다면 진짜 한방에 훅갔을지도 모른다.
가수 본인 투어 최다 관객 동원수를 기록했던 2010년 투어 현장.

2010년에는 10주년 버프를 받아서 전보다 나아진 곡 퀄리티와 싱글 발매텀이 조금 길어져서 안정적인 활동을 했다. 이 해엔 'Lollipop', '好きで、好きで、好きで。', 'あなただけが' 등의 곡들이 인기를 끌었는데 이중 '好きで、好きで、好きで。'는 전성기 시절 히트곡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노래로 자리 잡았다. 가을에는 고전 명곡을 재해석한 커버 앨범 'ETERNITY~Love & Songs~'을 발매해 소소한 인기를 누렸으며 빌보드 라이브 등을 시도하며 여러 방면에서 꾸준히 활동했다. 2010년에도 연간 오리콘 여성솔로 아티스트 매출 3위를 기록했으며 여름에 개최한 전국 투어는 20만명을 동원해 가수 본인 최다 동원객을 기록했다. 데뷔 10주년 하루 전날이었던 12월 5일에는 가수 본인 두번째가 되는 도쿄돔 공연을 개최해 성대한 10주년의 막을 내렸다.[38]

그리고 10주년 독점 인터뷰에서 재차 실언에 대해 사과의 말을 전한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 따윈 생각치도 못했던 경솔한 과오를 반성하고 있음을 밝혔고 그때의 자신을 돌아보면 일어날만 하니까 일어난 일인지도 모른다며 발언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자숙 기간 당시 은퇴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했었지만 주변 스탭들이 그를 지지했고 결국 팬들과 스탭들을 위해서라도 다시 열심히 달릴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발언이 코다 쿠미에게 치명타를 입히며 주홍글씨를 새겼고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코다는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통감하는 시간을 보냈다. 물론 용서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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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년을 기념하여 치뤄졌던 도쿄돔 콘서트 공연 현장

10주년 이후 2011년에도 코다는 전력으로 활동했다. 같은해 발매된 9집 앨범 'Dejavu'는 싱글라인이 상당히 히트했음에도 수록곡 평가가 좋지 못했으나 22만장 정도 판매량을 기록해 그런데로 무난한 성적을 냈고 발매 첫주에는 에이브릴 라빈과 1위 자리를 놓고 아슬아슬하게 경쟁을 펼쳐 일부 사람들에게는 "코다 쿠미 한물갔네"라며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이 해에는 홀 투어를 진행했는데 공연 일정이 매우 타이트해서 목상태가 눈에 띄게 안좋아졌다. 투어 초반 도호쿠 대지진 사태로 투어 일정을 일부 연기했다. 이후 투어는 추가 공연까지 모두 성황리에 종료됐고 홀 투어가 좋은 평가를 받는 코다 쿠미인만큼 공연 평가도 좋았다. 또 2011년에 나온 싱글들은 전성기때만큼은 아니지만 곡퀄이 상당히 좋아져서 나오는 노래마다 대체적으로 무난하게 좋은 평을 들었다. 특히 '4 TIMES' 싱글은 2006년 '4 hot wave' 싱글 이후로 가장 퀄리티가 좋은 여름 싱글로 사랑받는다. 이외에도 Love Me Back, 愛を止めないで 등의 노래가 착신음에서 선전했다.

3.4. 2011~2013 : 결혼과 출산, 그리고 복귀

그렇게 활동을 이어가던 중 어느 날 일본의 배우 오다기리 죠가 한국의 음식점에서 팬이 사인을 요청하자 본인의 이름 대신 '코다 쿠미'라고 적어서 입방아에 오른 사건이 있다. 졸지에 뜬금없이 코다 쿠미가 주목을 받는다. 이 이후에도 오다기리가 내한만 했다하면 코다가 언급된다. 2011년에는 국내 시상식 MAMA에 일본 대표로 출연해 '愛のうた', 'V. I. P', 'Bling Bling Bling' 을 불렀고 상도 받았다. 일본에 저렇게 멋있는 여자 가수가 있었냐며 꽤 호평받은 무대. [39]
2011년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즈 퍼포먼스.

이후 정규 10집 앨범 발매 결정과 함께 활발한 활동을 이어갈줄 알았던 2011년 12월 13일 2살 연하의 BACK-ON의 기타리스트 KENJI03와의 결혼과 혼전 임신을 기습발표 하면서 세간을 놀라게 한다. 임신 사실에 대해서는 초기 부정했으나 의도치 않게 먼저 기사가 나서 본인이 직접 팬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에 혼란이 있었다고 말했다. 안정기에 들어갔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은 코다는 싱글 Love Me Back의 이벤트 자리에서 팬들에게 직접 임신 사실을 전했고 이후 기자회견을 통해 공식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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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들에게 공식적으로 임신과 결혼 소식을 전하는 코다 쿠미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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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기자회견에서 공식적인 휴업과 결혼 사실을 공식화했다.

29살의 나이로 결혼을 발표한 코다는, 18살에 데뷔 이후 10여년 동안 길었던 활동을 잠시 내려놓고 출산의 이유로 활동을 휴지하게 된다. 자신의 출장 6회째가 되는 2011년 12월 31일 홍백가합전을 마지막으로 코다는 휴가를 받고 데뷔 이래 처음으로 장기간 휴식에 돌입한다.

활동 휴지 이후 2012년 1월, 예정대로 정규 10번째 앨범 'JAPONESQUE'를 발매하는데 이 앨범의 모든 수록곡을 PV로 제작하고 오랜만에 호화스러운 앨범 사양과 좋은 퀄리티로 호평받았으나 임신으로 인해 아쉽게도 모든 프로모션을 하지 못했다.[40] 비슷한 시기 몇몇 이벤트의 건강상의 이유로 캔슬하면서 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겼지만 건강이 최우선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無프로모션에 15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그럭저럭 무난한 성적을 냈다. 투어는 거듭된 회의끝에 끝내 취소된다. 티켓팅 바로 직전인 회장 예약까지 되있던 상황이라 손실이 어느정도 있지 않았을까 추측.

그리고 2012년 7월 18일, 코다는 드디어 첫 남자아이를 득남했다. 덤으로 35살 전에 아이 낳게되서 축하한다는 덕담까지.. 또 무려 3개월만에 바로 복귀 소식을 알리며 다시 한번 놀라움을 줬는데 이때 첫 복귀 스케쥴이었던 여성지 ViVi 화보에서 세미누드를 선보이는 그야말로 여전히 에로 각코이한 모습을 선보이면서 일본 여성들에게 역시 코다 쿠미 답다는 반응을 얻었다. # 이 화보의 화제 때문인지 음악 사이트 레코초쿠에서 투표한 최고의 어머니 아티스트 투표에서 아무로 나미에 등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10월에는 복귀 싱글 Go to the top을 발매해 3년만에 오리콘 주간 차트 1위에 오르며 어느정도의 건재함을 과시했으며 음악 방송에 출연해 변하지 않는 모습을 선보이며 빠르게 컴백했다.
10개월만의 뮤직스테이션 컴백 무대 (2012년)

그렇게 결혼과 출산을 하고 초스피드 속도로 복귀한 코다는 연말에 개최하지 못했던 전국 투어를 대신해 데뷔 이후 최초가 되는 무도관 라이브를 결정해 화려하게 복귀했다. 도쿄돔은 했는데 무도관은 처음이었다.응..?[41] 같은해 홍백가합전에도 출연하며 출산 후에도 전력으로 활동했다. 2012년을 마친 코다는 2013년, 커버 앨범 제 2탄 Color The Cover를 발매하며 출산 후 첫 앨범을 발표했다. 2010년 나왔던 커버 앨범 1탄이 꽤 반응이 좋아서 2탄을 기획한것이었는데 가라오케 박스에서 무작정 고전 가요를 불러댔고 이 중 괜찮다 싶은 곡들을 선곡해 앨범에 수록하는 방식이었다고.

그 후 지난 해 여름 개최될 예정이었다가 취소됐던 JAPONESQUE 투어를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다시 개최하는것으로 결정했고, 복귀 후에도 아레나 투어를 결정하며 여전한 클래스를 증명시켰다. 이 투어에서 총 15만명을 동원하며 결혼 전과 다름 없는 티켓 파워를 입증시켰고 투어 공연 자체도 많은 호평을 받았다. 화려한 영상미와 더불어 역대급 퍼포먼스가 많이 있어서 코다 쿠미 투어중에서도 유명하다. 특히 팬서비스가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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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아레나 투어에서의 코다 쿠미.

그리고 코다는 이 투어 파이널에서 예상치 못한 얘기를 팬들에게 전했는데, "결혼하면서 코다 쿠미도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은퇴를 고민했다"라는 말을 전해 팬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코다는 데뷔때부터 10년 활동하는것이 목표였고 결혼을 하면 앞으로의 활동에 제약이 있고 가정 주부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것이 아닐까하고 크게 고민했지만 남편과 가족 회의를 하면서 일을 계속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들었고 주위의 응원에 힘입어 이를 통해 나 자신도 2nd 스테이지의 스타트를 훌륭하게 끊어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가정과 일을 양립하는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꿈은 포기하면 지는 것이라고 말해 팬들을 환호시킨 코다는 2시간 반동안에 달하는 라이브를 훌륭하게 끝마쳤고 뜨거운 박수를 받는다.

이후 여름 싱글 Summer Trip과 가을 Dreaming Now!등을 발매하며 꾸준하게 활동했고 투어가 영상화되어 발매된 DVD와 블루레이는 오리콘 DVD 주간 음악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다. 이로써 9년 동안 매년 DVD 차트에서 1위를 섭렵하는 기록을 세운 코다는 미스치루와 동율이며 솔로 가수로는 신기록이라고 한다.[42] 이 시기 음반 판매량은 눈에 띄게 줄었으나 코다 쿠미 연차되는 여가수들 대다수가 피지컬 음반 판매량은 고정팬들만 구입하는 추세로 바뀌어서 그야말로 고정팬 장사다. 특히나 현재 일본에서는 여가수 시장이 우리나라보다도 더 암담한 상황이라 코다 쿠미 정도 음반 세일즈는 위축된 여성솔로 시장에서 그래도 팔리는편이었다.

3.5. 2014~ 투어형 가수로서의 전환

2012년 복귀 이후 코다는 2013년 싱글 'Dreaming Now!'까지 1년에 앨범 1장, 싱글 2~3장, 각종 TV 프로모션, 투어 등으로 복귀전때와 크게 다를게 없는 플랜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2014년 2월 발매한 정규 11집 'Bon Voyage' 때부터 TV 프로모션이 단한번으로 끝나더니 같은해 발매된 여름 싱글 'HOTEL' 부터는 아예 TV 프로모션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사실 미디어 노출이 전과 비슷했던 2013년과 전무했던 2014년의 싱글 판매량을 볼때 약 2만장 내외로 균일했기 때문에 이제는 TV 프로모션보다 투어에 열중하는 노선으로 바꾸기 시작한것이다.

2014년 초에 발매한 11집 'Bon Voyage'는 첫주 1위에 올랐고 2006년 5집 'Black Cherry'부터 7년 연속으로 앨범 1위 기록을 세운다. 'Bon Voyage' 투어는 홀에서 개최해 총 14만명을 동원하며 성황을 이뤘고 파이널은 대만에서 치뤘다. 대만 공연은 세번째.[43] 투어 기간 도중, 파칭코 시리즈 프로모션 일환으로 미공개 곡들이 포함된 홍보 CD FEVER KODA KUMI LEGEND LIVE가 배포되었는데 고퀄리티의 명곡과 PV가 수록되어 있어 팬들을 당황시켰다. 좋은 반응에도 이 곡들이 정식으로 발매되진 못했고[44] 아직까지도 숨겨진 코다의 명곡들로 남았다. 왜 이런 곡들을 쟁여놓는거냐 겨울에는 디지털 싱글 'Dance In The Rain'이 발매된다. [45] 코다 쿠미의 첫 디지털 싱글이었지만 정식 싱글 개수에도 카운트됐다. 이 해에는 디지털 싱글 포함해 싱글이 두장밖에 발매되지 않았고 릴리즈가 많이 줄어들어 투어를 가지 못하는 한국 팬들이 슬슬 힘들어했다. 한편 자신이 프로듀싱한 컨텍트 렌즈 'loveil'이 누적 판매개수 150만개를 돌파하며 일본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고.

심심했던 2014년이 지나가고, 2015년 3월 18일에는 정규 12번째 앨범 'WALK OF MY LIFE'의 발매가 결정되었다. 신곡은 12곡이 수록됐고, TV 프로모션도 없으며 곡 평가도 호불호가 갈렸지만 사양이 좋아서인지 다행히 5만장을 넘겼다. 첫날 판매량은 11집보다 높았다. 발매 첫주 1위를 기록. 같은해에는 아레나 투어를 개최해서 역시나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 투어에서는 그전과는 달리 흐름이 좋고 퍼포먼스도 여전히 화려한 편이었지만 가수 본인의 퍼포먼스 기량이 더 늘어난 모습이었다. 특히 투어에서 선보인 고난이도 플라잉 요가 퍼포먼스는 극찬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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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5주년 투어에서 선보인 공중곡예 퍼포먼스.

7월에는 데뷔 15주년을 기념해서 여름 히트곡들을 모은 컬렉션 앨범 'SUMMER of LOVE' 발매가 결정되었는데 트랙리스트와 자켓이 매우 허접해서 발매전부터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고 결국 판매량도 시망(...).[46] 이것도 모자라 발라드 히트곡들을 모은 컬렉션 앨범 2탄 'WINTER of LOVE'도 발매되었다. 첫날 순위는 1위였지만 위클리 차트에서는 2위를 기록했다. 그래도 명곡들이 모여진 앨범이라 3만장이 넘게 팔리며 나름 선방했다. 신곡도 일부 호평을 받았으나 역시나 프로모션은 없었다. 그래도 같은해 연말 가요제 FNS에 출연하며 오랜만에 TV에 출연했다. 굵직 굵직한 스페셜 방송에는 한두번씩 출연하는 가닥으로 잡은듯 하다.
15주년 기념 콘서트 다이제스트 영상.

자신의 데뷔 15주년이었던 2015년 12월 6일에는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15주년 기념 라이브 'THE ARTIST'를 개최해 15주년을 팬들과 현장에서 함께 보낸다. 이 날 코다는 "노래도 춤도 잘 못하는 귀여운 비쥬얼도 없던 나였지만, 음악을 좋아하는것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오게됐다", "하루라도 더 오래 노래하고 싶고, 앞으로도 모두에게 꿈과 희망을 전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가고 싶다"며 앞으로의 다짐을 맹세했고 1만 5천명의 꽉찬 객석을 바라보며 긴 세월을 느낀 코다는 몇번이나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2016년에는 3월부터 11월까지 데뷔후 처음으로 47 도도부현을 도는 대규모 투어를 진행했는데, 코다 본인이 코멘트 하기를 "교토 출신인데 교토 라이브를 한적이 없어서 전국을 리얼하게 돌고 싶다"라는 이유에서 개최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3월 하반기 예정이었던 첫 투어 일정은 인플루엔자 감염으로 인해 취소. 4월 9일에는 라이브 회장 한정 및 mu-mo샵 한정 발매 싱글 'Shhh!'가 발매되었고 mu-mo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다. B-Side에는 파칭코 무료배포 CD에 수록된 '君想い'가 수록됐는데 팬들 사이에서 묻히기 너무 아쉽다는 반응이었고 아마 이 반응을 수렴하여 수록하게 된듯. 한가지 주목할 건 벌써 59번째 싱글이라는 것이다(...). 이는 하마사키 아유미의 싱글 수보다 많다. ㅎ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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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개최한 47 도도부현 투어.

2016년 한 해 활동을 보자면 컬렉션 앨범 1장, 디지털 싱글 1장으로 2014년부터 투어 위주로 바뀐 활동 플랜이 이제 확실히 굳혀진게 눈에 띈다. 떡밥이 없어서 국내팬들은 지쳤지만(..) 그래도 투어 반응이 워낙 좋아서 처음으로 도전한 47 도도부현 투어가 역시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제 완전히 투어형 가수로 봐도 무방할 정도.

그리고 한해가 마무리 되기도 전에 2017년 전국투어 일정이 잡혔다. 2016년에 이어 2년 연속 47 도도부현을 도는 투어로 결정되었는데 내년 4월에 시작해 10월에 막을 내린다. 2016년 투어 파이널에서는 60th 싱글 스포가 있었다. 아마 내년 초 쯤 새로운 싱글과 앨범이 발매될 예정으로 보인다. 이제 과거처럼 1년 4계절을 꽉 채워서 발매됐던 싱글을 모아 싱글 콜렉션같은 정규 앨범이 발표하는게 아닌, 싱글 발매를 자제하고 앨범 제작에 더 신경을 쓰는 모습이 눈에 띈다. 실제로 음악 노선에 대한 호불호는 갈리지만 유기성 하나는 대체적으로 무난한 평을 받고 있다. 최근 코다 쿠미는 음악적으로도, 활동 반경으로도 많은 변화가 생기고 있다.

2017년 3월 8일 드디어(!!!) 13번째 앨범 W FACE ~inside~」 「W FACE ~outside~」의 발매가 결정됐다. 무려 2장의 앨범이 동시 발매되는데, 각 타이틀 앨범마다 10곡씩 수록되며 inside에는 감성적인 발라드부터 경쾌한 팝 사운드를 주로 담았으며, outside에는 힙합과 R&B 위주의 댄스 곡 위주로 수록될 예정이라고 한다. 길었던 준비 기간만큼 두 장의 앨범 곡수를 합치면 무려 20곡인데 더블 앨범이 아니라 따로 동시에 발매하는 케이스기 때문에 판매량에 악영향을 미칠거 같다는 의견이 대다수다. 그래도 본래 SPRING of LOVE의 발매썰이 돌았던터라, 베스트가 아닌것만으로도 다행인 소식.

'W FACE'의 발매 후 앨범 퀄리티가 생각보다 좋아서 여기 저기 호평 섞인 목소리가 많다. 그리고 'inside', 'outside' 두 앨범이 모두 오리콘에서 1, 2위를 차지해 여가수로는 47년만의 오리지널 앨범 1, 2위 획득이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다만 발매일을 정말 잘 잡은 영향도 상당히 컸다. 2010년대 이후 발매된 앨범이 썩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코다지만 이번 앨범은 긴 제작 기간만큼 곡 퀄리티가 좋고 오랜만에 앨범다운 앨범을 만들었다는 좋은 평가가 있어서, 앞으로의 음악 인생에 좋은 전환점이 될만한 앨범으로 주목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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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NHK 우타콘에 출연해 눈물을 보인 코다 쿠미.

그리고 오랜만의 앨범 홍보를 위해 NHK 음악 방송 '우타콘'에 출연한 코다 쿠미는 무대가 시작될때의 MC의 소개 멘트(47년만의 쾌거를 언급한 부분)와 객석에서의 응원 소리에 복받쳐 생방송 도중 눈물을 흘렸다. 영상 링크 생방송 음악 방송 도중 눈물을 흘린건 대상때 이후로 처음인데 이후 트위터를 통해 언제나 제 등을 토닥여주고 응원해주는 팬들이 있다는 생각에 눈물이 터져나왔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긴 공백 기간과 새로 나올 앨범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지만 차트에서 좋은 순위를 거두어 감정이 복받쳤던 것. 사실 판매량이 높은것도, 정말 예전처럼 앨범이 히트한건 아닐지라도 여전히 자신을 바라봐주는 팬들이 있다는 거 자체만으로도 더욱 감격스러웠던 코다 쿠미였다.
울어버렸어요
지켜봐준 모두에게 미안해요.
걱정끼쳐 버렸네(웃음)

처음에 MC 소개 멘트를 듣고
감회에 젖어버렸어요.

모두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있는거구나라고 생각하니
기쁨이 흘러넘쳐 나와버렸습니다.
결국 언제나 나를 지지해주는 것은 여러분입니다.
정말 고마워요.
- 우타콘 생방송 직후 코다 쿠미 트위터 전문

현재 코다는 4월 8일부터 시작된 1년만의 전국 47 도도부현 투어에 매진하고 있다. 벌써부터 4월 분 공연이 매진되고 있어 성황리에 개최 중.

최근에는 8월·10월·12월로 이어지는 한정 싱글 3부작을 발매하고 있다.[47] 제 1탄 LIT와 제 2탄 HUSH까지 발매되었으며, 12월에는 발라드 싱글 'NEVER ENOUGH'가 발매되었다. 그리고 12월 6일, 자신의 데뷔 17주년일에 FNS 가요제 출연이 확정되어 오랜만에 TV 가요제 시상식에 서게 된다.

2018년, 5년만에 개최되는 팬클럽 투어 'Koda Kumi Fanclub Live Tour ~And~'의 공연 일정이 결정되었다. 4월 29일부터 6월 17일까지 총 15번의 공연이고 주로 소규모 공연장에서 진행된다. 그리고 올해 2장의 앨범을 릴리즈 하는 것이 발표되었는데, 2월 28일에 제 1탄으로 발매되는 앨범 AND가 발표됐다.

2018년 여름, 여러 각국에서 서비스 되는 애플리케이션 'Tik Tok'의 광고에 코다가 불렀던 'め組のひと'가 삽입되어 10대 청소년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발매 된지 8년된 노래가 라인 뮤직과 애플 뮤직에서 역주행 했으며, 라인 뮤직에서는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이 인기에 힘입어 다시금 화제가 되어 'テレ東音楽祭(테레토음악제)'에 출연해 'め組のひと'를 다시 선보이기도 했다.



8월 22일, 2018년 제 2탄 앨범이자 16번째 정규 앨범 DNA가 발매되었으며 a-nation에 참여가 확정됐다. 그리고 9월 14일부터는 전국 투어 'KODA KUMI LIVE TOUR 2018~DNA~'를 개최했다. 이 투어에서는 처음으로 새해 카운트다운 라이브를 시도했고 성황리에 투어를 종료했다.

4. 트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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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다 쿠미의 사인 (2004년~)
  • 코다의 싸인에는 본인의 얼굴 콤플렉스인 도드라진 광대뼈와 둥근 코가 있다. 과거 싸인에는 영어 스펠링 'kumi'만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2004년에 에로 각코이 컨셉으로 브레이크 한 시점부터 'kumi' 스펠링에 자신의 얼굴을 묘사한 그림을 넣기 시작했고 코다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것으로 부터 당당함과 본연의 섹시함이 나올수 있었다"고 말하면서 그때부터 싸인에 얼굴을 넣기 시작했다고 한다.
  • 전성기 시절 노브라를 선호한다고 언론에 밝혀 코다 쿠미하면 노브라 가수로도 유명했다(...). 2006년 특집 방송에서 모 여자고등학교를 방문했는데 거기서 학생에게 받은 질문이 "지금 브라하고 있습니까?(...)" 분명 여학생이 한 질문이다
  • 같은 회사 소속이자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오오츠카 아이와 불화설이 상당히 많았는데 이는 모두 거짓이다. 오오츠카 아이가 건강악화로 라디오 방송을 중단하고 재개했을때 응원 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했고 A-nation 2007년 백스테이지에서 코다가 오오츠카의 히트곡 'CHU-LIP' 춤을 추는 모습이 나오기도 했었다.
  • 씨스타효린과 목소리가 판박이다.[48] 유튜브 댓글에서는 신지와 비슷하다는 의견도 상당히 많다.
  • 어렸을 적 DREAMS COME TRUE의 음악을 듣고 가수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 외에도 청춘 시절 아무로 나미에의 음악을 즐겨 들었고, 근본적으로 코다가 춤을 추면서 노래하게 된 것도 그녀에 대한 동경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밝혔다.
  • 한국에서는 국내 코미디언 정선희와 닮았다고 유명했다. 재밌는것은 코다 쿠미를 보면 정선희가 떠오르는데 막상 정선희를 보면 코다 쿠미가 잘 안떠오른다는 것이다! 실제로 코다 쿠미가 한참 유명했던 06년 즈음에 정선희가 진행하는 라디오에 이러한 내용의 메시지가 전해져 정선희가 코멘트 하기도 했다. 그때 정선희는 "예쁘시네요"라고 하면서 닮았다는 사실을 어느정도 인정하기도 했다.
  • 칸사이벤을 사용한다. 코다 쿠미 특유의 털털하고 말 많은(...) 이미지도 여기서 비롯된다. 실제로 수다쟁이이기도 하고 말도 엄청 빠르게 한다. 다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못한다고 한다. 진짜?
  • 무명 시절과 브레이크 이후 시점의 비쥬얼 차이가 상당해서 한때 국내에서도 당연하다는 듯이 성형 논란이 있었다.[49] 그러나 코다 자신은 성형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코다 쿠미의 거유 속성도 사실은 가슴 성형이라는 얘기가 있었지만 전혀 사실무근. 진위여부는 본인만이 알겠지만 실제로 과거 사진을 보면 현재는 살이 상당히 많이 빠졌고 코다 쿠미 특유의 화려한 메이크업이 비쥬얼 상승효과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걸 알수 있다. 사실상 다이어트의 승리. 쌍꺼풀은 어렸을때부터 쌍꺼풀 테이프나 쌍꺼풀 액을 바르면서 생겨났다고 하는데 자신을 제외한 온 가족이 두꺼운 쌍꺼풀을 가지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생겼을 가능성이 없진 않다. 사진비교
  • 데뷔때부터 거의 모든 노래를 본인이 작사하고 있다. 2016년 발매된 발라드 히트곡 컬렉션 앨범 'WINTER of LOVE' 전곡의 가사가 모두 코다 쿠미의 작품이기도 했고, 통산 1200~1300만장의 판매고와 수년간 가라오케 차트에서 상위권을 유지하기도 한 코다여서 아마 숨만 쉬고 있어도 들어오는 저작권 수입이 어마무시 할 것으로 추측된다.
  • 2005년 6월에 있었던 자신의 첫 콘서트 secret~FIRST CLASS LIMITED LIVE~에서 콘돔을 내던지는 퍼포먼스를 선보여 일부에서는 과한 연출로 지적받았다. 다만 성인콘서트 였기 때문에 문제가 더 불거지진 않았다. 그래도 상당히 파격적인 일화.
  • 일본의 유명 가수인 SMAP나카이 마사히로와 교제한 적이 있다. 2007년 열애설을 시작으로 꾸준히 기사화 됐지만 둘은 부정했고 나카이가 진행하던 우타방에 출연해 아무렇지 않게 방송도 했었다. 그러나 2008년 5월 한 주간지에서 둘이 여행을 즐기는 모습을 포착한 사진이 나오면서 결국 사실인것으로 밝혀진다. 이 이후에도 둘은 공식적으로 코멘트 한 적이 없다. 사진까지 떴는데 빼박이지 이 둘은 결혼설까지 났었으나 2010년 쯤 헤어진것으로 추정. 이후 코다가 나카이가 진행하는 방송에 나오기도 했고 나름 쿨한 행보를 보였다.
  • 홍백가합전은 2005년부터 2012년까지 8년 연속 출장했다. 2013년 낙선 이후 현재까지 출연하지 않고 있다.
  • 2001년 첫 출연이었던 일본의 대표 음악 방송 뮤직 스테이션에는 2015년까지 총 51번 출연했다. 2000년대 데뷔한 여성 솔로 아티스트로는 압도적인 출연 횟수다. 2013년부터는 투어 위주로 활동하면서 엠스테를 비롯, 음악 방송 출연을 자제하고 있다.
뮤직스테이션 히스토리 영상 (총 51회 출연, 2001~2015)
  • 현재 코다의 남편이 동생 misono의 전남친이었다는 개소문이 일본과 한국에도 은근 퍼져있는데 개구라다. misono가 남편 밴드 BACK-ON과 먼저 음악 작업을 하면서 KENJI03를 알게됐고 이후 주선을 해줬다는게 3류 찌라시에 와전된건데 아무리 철없는 자매(...)라지만 그정도로 막장은 아니다.
  • 가나가와 현에 2~3억엔 상당의 개인 소유 별장이 있다. 현지에서는 '코다 쿠미 별장'으로 유명하다고. 내부에는 수영장도 있으며 나선형 계단을 내려오면 바로 바다와 연결된다고 알려졌다. 여름이 되면 자녀를 데리고 놀러온다고 한다. 2017년 최근 이 별장을 매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도됐다. 주간지에서 인기 침체와 투어 티켓 판매 저조때문에 유지할 수 없을거라는 사족이 더 해졌는데 대부분의 반응은 "이거 팔고 더 좋은데 가려는거 아니야?"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역시나 2017년 9월, 4억엔 상당의 대저택을 새로 구입한 사실이 보도되었다. 연쓸걱 더 압권인것은, 2억엔 이상을 무려 현금으로 지불했다고 하는데(한화 20억원), 인기 저하로 이전 별장을 매각했다고 나불거린 황색 언론들을 제대로 물먹이고 있다. #
  • 미디어에서의 화끈한 섹시 디바 이미지 답게 술을 잘먹을거 같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술을 잘 못 마신다. 거기다 흡연도 안하고[50] 오히려 정작 본인은 집순이 스타일이라고. 갭모에 집에서 독서즐기는 금욕섹시미? 그건 아닐듯
  • 데뷔 시절부터 키웠던 반려견 '라무'는 다수의 PV와 버라이어티쇼에도 함께 출연해 팬들에게도 귀여움을 독차지 받았었다. '라무'는 2011년에 결국 심장병으로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당시 투어를 앞두고 있었는데 코다가 직접 보고해 아픔을 주었다. 코다는 라무외에도 그 당시 몇마리의 애완견을 더 키웠었고 현재도 새로운 반려견을 키우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에서도 라무를 유독 아꼈다.

5. 음반

코다 쿠미/음반 목록 참고.

6. 홍백가합전 출전 경력

연도출연 횟수곡명출연 순서상대
2005년코다 쿠미 스페셜 버전[51]16/29D-51
2006년2夢のうた25/27이츠키 히로시
2007년3愛のうた20/27토쿠나가 히데아키
2008년4TABOO17/26이츠키 히로시
2009년52009 홍백 KODA SPECIAL[52]21/25아라시
2010년6KODA KUMI 2010 Special Medley[53]15/22이츠키 히로시
2011년7愛を止めないで15/25동방신기
2012년8Go to the top07/25나오토 인티 레이미

7. 투어

7.1. 정규 투어

투어 기간 콘서트명 규모 동원객
2005년 10월 15일~11월 13일KODA KUMI LIVE TOUR 2005 ~first things~Zepp
9 공연
2만명(추정)[54]
2006년 10월 9일~2007년 2월 23일KODA KUMI LIVE TOUR 2006 ~second session~
45 공연
10만명
2007년 9월 28일~12월 1일KODA KUMI LIVE TOUR 2007 ~Black Cherry~홀+아레나
16 공연
도쿄돔
1 공연
18만명[55]
2008년 4월 12일~6월 1일KODA KUMI LIVE TOUR 2008 ~Kingdom~아레나
18 공연
14만명
2009년 4월 11일~6월 14일KODA KUMI LIVE TOUR 2009 ~TRICK~아레나
20 공연
18만명
2010년 4월 10일~6월 11일KODA KUMI LIVE TOUR 2010 ~UNIVERSE~아레나
19 공연
20만명[56]
2011년 4월 23일~10월 28일KODA KUMI LIVE TOUR 2011 ~Dejavu~
60 공연
15만명
2013년 3월 16일~6월 20일KODA KUMI LIVE TOUR 2013 ~JAPONESQUE~아레나
16 공연
15만명
2014년 3월 12일~7월 24일KODA KUMI LIVE TOUR 2014 ~Bon Voyage~
50 공연
13만명
2015년 4월 4일~6월 28일KODA KUMI 15th Anniverary Live Tour 2015 ~WALK OF MY LIFE~
supported by Mercedes-Benz
아레나
12 공연
11만명
2016년 4월 9일~11월 13일KODA KUMI LIVE TOUR 2016~Best Single Collection~47도도부현 홀
57 공연
14만명
2017년 4월 8일~2018년 1월 28일KODA KUMI LIVE TOUR 2017~W FACE~47도도부현 홀
59 공연
15만명(예상)
2018년 9월 14일~2018년 12월 31일KODA KUMI LIVE TOUR 2018-2019~DNA~
36 공연

7.2. 팬클럽 투어

투어 기간 콘서트명 규모 동원객
2008년 9월 22일~2008년 10월 15일Fan Club Event 2008: Let's Party Vol. 1 Zepp -
2012년 11월 7일~2012년 12월 8일Koda Kumi Premium Night ~ Love & Songs ~무도관 -
2013년 10월 27일~2013년 11월 28일Koda Kumi Fanclub Live Tour ~Let's Party Vol,2~Zepp
라이브하우스
3만명
2018년 4월 19일~2018년 6월 17일Koda Kumi Fanclub Live Tour ~And~Zepp
라이브하우스
-

8. 수상

8.1. 가요제

대상은 볼드 처리
  • 2004년 제 37회 일본 유선 대상 「신인상」 'LOVE&HONEY'
  • 2005년 제 47회 TBS 일본 레코드 대상 'Butterfly'
  • 2006년[57] 제 20회 일본 골든 디스크 대상 「아티스트 오브 더 이어」
  • 2006년 제 39회 일본 유선 대상 '夢のうた'
  • 2006년 제 48회 TBS 일본 레코드 대상 「최우수 가창상」 '夢のうた', 「특별상」'WON'T BE LONG (feat. EXILE)'
  • 2006년 베스트 히트 가요제 「팝 그랑프리」
  • 2006년 제 5회 MTV Video Music Awards Japan 「최우수 비디오 상」, 「최우수 여성 아티스트 비디오 상」 'Butterfly'
  • 2007년[58]제 21회 일본 골든 디스크 대상 「아티스트 오브 더 이어」
  • 2007년 제 49회 TBS 일본 레코드 대상 「금상」 '愛のうた'
  • 2007년 제 6회 MTV Video Music Awards Japan 「최우수 비디오 상」, 「최우수 여성 아티스트 비디오 상」 '夢のうた'
  • 2007년 베스트 히트 가요제 「팝 그랑프리」
  • 2008년 제 41회 일본 유선 대상 「유선 음악 우수상」 'Moon Crying'
  • 2008년 제 50회 TBS 일본 레코드 대상 「우수 작품상」 'Moon Crying'
  • 2008년 제 7회 MTV Video Music Awards Japan 「최우수 협력 비디오 상」 'LAST ANGEL (feat. 동방신기)'
  • 2009년 제 42회 일본 유선 대상 「유선 음악 우수상」 'Lick Me♥'
  • 2009년 제 51회 TBS 일본 레코드 대상 「우수 작품상」 'Lick Me♥'

8.2. 기타 수상

  • 2006년 ~ 2010년 베스트 지니스트 명예의 전당
  • 2006년 ~ 2008년 네일퀸 아티스트 부문 명예의 전당
  • 2006년 DIME 트렌드 대상 「화제의 인물상」
  • 2007년 일본 쥬얼리 베스트 드레서 상 「20대 부문」

9. 기록

  • 역대 여성 솔로 아티스트 싱글 TOP 10 진입 랭크 2위 (총 46작품)[59]
  • 역대 여성 솔로 아티스트 판매량 18위
  • 음악 DVD 1위 획득 역대 1위 (통산 7주)
  • 음악 DVD 솔로 아티스트 역대 판매량 2위 (secret~FIRST CLASS LIMITED LIVE~)[60]
  • 2006년 ~ 2007년 2년 연속 CD 세일즈 아티스트 1위
  • 2006년 ~ 2007년 2년 연속 가라오케 인기가수 1위 (산케이 신문)[61]
  • 2002년 ~ 2016년 15년간 일본 대형 음원사이트 레코쵸쿠 휴대폰 착신음 다운로드[62] 랭킹 아티스트 역대 2위 (여자 아티스트 1위)

10. 링크

10.1. 공식 웹사이트

10.2. 팬카페


[1] 2010년 오피셜 북 '倖田歴 (코다 레키)' 中 발췌.[2] 본명은 코다 쿠미코(神田 來未子, こうだ くみこ)이다. 활동 예명 코다 쿠미(倖田來未)는 어머니가 사람들에게[3] 헤이세이 시대를 풍미한 여자 아티스트를 호칭하는 별명으로, 우타히메라고도 불린다.[4] 1위는 그 유명한 EXILE[5] 헤이세이 시대가 끝나면서 여러 결산 차트가 등장하고 있는 가운데, 여러 기록에서 스믈 스믈 코다 쿠미의 이름이 상위권에 자주 나오고 있는것도 그의 인기를 반증하고 있는 사례.[6] 코다 쿠미는 디지털 판매량도 만만치 않다. 골드 인증을 받은 곡 목록은 너무 많아서 일부 곡만 기재되고 그 외 22곡이라고 표현될 정도. 그에 비해 밀리언 인증 곡은 '아이노우타' 한곡이라서 디지털 쪽은 2010년대에 전성기를 맞은 니시노 카나가 단단하게 잡고 있다.[7] 혼다의 기업 광고를 비롯해 유명 화장품 비세(화장품) 모델 및 각종 주류, 뷰티, 스낵류, 쥬얼리 CM까지 했다.[8] 다만 이들은 음반 시장 호황기였던 90년대 후반에 데뷔해 00년대 초반에 세운 기록들이기도 하다.[9] 1990년대는 그 유명한 헤이세이의 3대 가희 아무로 나미에, 2010년대에는 니시노 카나가 여성 아티스트 중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10] 이 영상 외에도 과거 오디션에 굉장히 많이 지원해서 코다의 오디션 영상은 꽤나 많이 남아있다.[11] 어렸을때 코다의 모습은 상당히 성숙하고 노안에 가까운 모습이지만 가창력만큼은 이때부터 출중했다.[12] 모무스 오디션과 시기가 겹치는데, 당시 일었던 노스트라다무스의 1999년 지구 종말론을 코다가 심각하게 믿고 있어서, 이 시기 오디션을 무지막지하게 지원했다고 한다.[13] 이후 오오츠카 아이, BoA, 코다 쿠미등을 배출하면서 에이벡스하면 여가수라는 이미지가 있다.[14] 코다는 당시를 회상하기를 가족 모두가 이 오디션에 많은걸 걸고있다는 걸 느꼈다고.[15] 당시 그랑프리에 오른 세명의 소녀들은 Dream이라는 여성 트리오로 먼저 데뷔시켰다. 원래는 그랑프리에 한명이 입상할 예정이었지만 참가자의 수준이 좋아 최종 세명이 그랑프리를 수상했다고 한다. 사실상 이 오디션에서 제작기획까지 이미 마쳤던 상황. 코다의 데뷔곡 'TAKE BACK'도 당시 오디션 현장에서 공개됐다고 한다.[16] R&B이나 힙합 장르를 주로 제작하는 레이블로 탄생했으나 이후 상황을 보면 그냥 크게 다를거 없는 에이벡스다. 애초에 산하 레이블이기도 하고. 다만 한가지 확실히 다른건, 리듬존 계열 가수들은 바닝프로덕션 계열 가수라는게 가장 큰 차이점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동방신기가 소속되있는 레이블이기도 하다. BoA는 정통 avex trax 레이블.[17] 일본의 2인조 알앤비 자매 듀오, 그러나 멤버가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나 현재는 솔로로 활동하고 있다.[18] 근데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까지 잘된 편은 아니다(...). 조금 과장해서 그냥 클럽DJ들한테 프로모션CD만 열라 돌리면 개나소나 다 올라가는 그런 차트다. 그래도 당시 코다가 7번째로 빌보드에 진입한 일본 가수로 어느정도 화제가 됐다.[19] 이후 코다는 투어에서 MC 시간만 1시간을 훌쩍 넘겨 본인의 한을 완벽하게 풀었다.[20] 실제로 코다 쿠미가 직접 게임상의 캐릭터 모션캡쳐에 참여하였고, 극중 주요인물의 성우를 맡기도 하였다. 한때 이 주제가의 원래 내정자가 보아였다는 루머가 있는데 전혀 근거 없는 루머다. 'real Emotion'이 보아의 초기 히트곡을 작곡한 하라 카즈히로였기 때문에 나온 소문인듯.[21] 식사는 오로지 마른오징어와 물만 먹었고, 저녁 6시 이후로는 완전금식. 이건 지금도 계속 하는 식이요법이라고 한다. 8kg도 적은 감량은 아니지만 코다 쿠미는 키가 154cm의 단신이라 더 다이어트 하기가 어려운 조건이었다.[22] 엄밀하게 따지자면 나가이 고 원작의 유명 애니메이션 시리즈 큐티하니의 최신버젼 곡을 부른 것이다. 이 곡 자체는 초기부터 멜로디와 가사를 거의 바꾸지 않으면서 부른 사람에 따라서 방식만 바꿔서 각 시리즈마다 불러왔고, 코다 쿠미가 부른 것은 가이낙스가 제작한 OVA <Re 큐티하니>의 OP였다. 코다 쿠미의 싱글은 타이업으로 같이 나온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유명 시리즈물에 편승한 것이다.[23] 크리스마스에 하는 대형 스페셜 방송이다.[24] 여담으로, 당시 엠넷에서 일본의 아티스트 프로그램을 일부 수입해서 방송하고는 했는데 이때 코다 쿠미를 다루는 편에서 '에로'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저 말을 그대로 번역하기는 그랬는지 '섹시쿨' 같은 정체불명의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25] 하마사키 아유미는 태닝 갸루와 대비되는 일명 히메 갸루를 전파시켜 일본 여성들의 스타일을 모조리 바꿔버린 바 있다.[26] 체감 인기에 비해 싱글 판매량이 저조해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 노래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TBS 일본 레코드 대상'의 경우는 작곡가들이 주는 상이고 'NHK 일본 레코드 대상'과 달리 판매량이 수상 기준이 아니었다.[27] 4곡이 전부 A면(타이틀)인 싱글.[28] 킨키의 1위 기록이 깨질뻔한 한 주로, 킨키 팬들한테도 기억에 남는 주간이 됐다.[29] 방송에 송출되진 않았지만 직캠이 떠돌아다니긴 한다. 무대가 끝나고 관중들과 MC가 놀라워하는 목소리가 압권.[30] 이외에도 채널 V 인터뷰에도 성실이 임했으며 슈가의 CD까지 샀다고 말했다.[31] 더구나 아유미 역시 당시 SM 소속이었고 아유미를 보호하기 위한 차원이기도 했을거다.[32] 다만 이 곡은 표절시비에 휘말려 곤혹을 치루기도 했다.[33] 이 음반 신곡들의 퀄리티는 싱글 퀄리티에 못미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34] BEST ~Second Session~이 나온지 불과 1년도 안된 시기에 또 다시 베스트를 발매하는건 누가봐도 무리수였다.[35] 비슷한 시기 같은 소속사의 오오츠카 아이 베스트 앨범 삽질 사건을 볼 때 이 회사는 가수가 뜨면 뽕 뽑을 대로 뽑는 기획사임은 분명하다.[36] 이때의 인연으로 코다 쿠미와 동방신기는 최근까지도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37] 이 후 해당 방송 책임자가 사임됐다고 한다.[38] 돔구장은 여가수들 중에서도 정말 최정상자리에 간 사람만이 채울 수 있는 콘서트장이다. 게다가 도쿄돔은 다른 돔 콘서트장들과 비교해도 좌석수가 5만명 이상으로 허들이 꽤 높기 떄문에 더욱 힘든면이 있다. 지금은 허들이 많이 낮아졌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걸 감안하더라도 여전히 난이도가 높다.[39] 이후 몇번 더 MAMA에 출연한다는 카더라가 있었는데 모두 모 사이트의 찌질이의 소행으로 밝혀졌다.[40] 이때 상당한 곡들이 발매 연기가 되었다고 한다.[41] 코다 쿠미의 경우, 천천히 인지도를 쌓은 케이스긴 하나, 전성기가 정말 말그대로 대브레이크였기 때문에 도쿄돔 입성이 더 빨랐으며 대부분 가수들이 정상 궤도에 진입하면 시도하는 무도관 라이브는 생각보다 늦어진 특이한 케이스다.[42] 영상쪽에서는 꽤나 우세한 기록이 많다. 역대 솔로가수 DVD 판매량 1위도 코다 쿠미다.[43] 코다 남편 어머니의 고향이 대만이기도 하다.[44] '君想い'는 제외. 이 곡은 반응이 워낙 좋아서 2016년 싱글 Shhh! B면으로 들어갔다.[45] 피지컬 CD는 FC 한정으로만 출시.[46] 전년도에 발매된 여름 싱글이 2만장대였고 이 앨범이 비슷한 수치를 기록했는데, 사실 컬렉션 앨범이 가격이 더 비싸서 투자 비용대비 에이벡스한테 이득이 된건 맞다. 머리 잘 썼네[47] 정식으로 발매되지 않고 팬클럽과 라이브 회장 한정판으로만 발매된다.[48] 목소리 뿐만 아니라 스타일이나 무대 퍼포먼스 스타일도 꽤 닮았다는 얘기가 전부터 많았다. 또 효린의 데뷔 초창기 시절 인터뷰에서도 주변인들에게 코다 쿠미 닮았다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다고 말한적도 있다. #[49] 비슷한 케이스로 하마사키 아유미도 국내에서 "음악적인 변신을 위해 성형을 강행했다"라고 밝혔다는 루머가 기정사실화 되기도 했는데 하마사키도 그렇게 말한적 단 한번도 없다.[50] 임신 당시에 흡연실에서 봤다는 찌라시 기사가 국내에 보도 된적이 있는데 역시나 구라다.[51] 큐티 하니와 Butterfly를 메들리[52] Lick Me♥와 It's all Love!를 메들리[53] 좋아서, 좋아서, 좋아서와 Lollipop을 메들리[54] Zepp 평균 2000석+α x 공연횟수 총 9번[55] 아레나로는 총 13만명 동원, 파이널 도쿄돔까지 포함해서 18만명이다.[56] 가수 본인 최고 기록이다.[57] 수상 기준은 2005년.[58] 수상 기준은 2006년.[59] 1위는 하마사키 아유미[60] 2018년까지 코다가 1위 기록이었지만 아무로 나미에의 고별 투어 DVD/BD 판매량이 이 분야를 갱신하는 것은 물론, 역대 일본 음악 영상물에서 최초로 100만장을 돌파했다.[61] 2008년 ~ 2009년은 전체 아티스트 2위[62] 전체 누계 다운로드 수가 10억을 돌파한 대규모 서비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