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6 01:23:54

나카모리 아키나



파일:나무위키+하위문서.png   하위 문서: 나카모리 아키나/음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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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모리 아키나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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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FNS 가요제 그랑프리 수상자
(FNS歌謡祭 グランプリ 受賞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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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1974년)
제2회
(1975년)
제3회
(1976년)
제4회
(1977년)
이츠키 히로시
<みれん>
후세 아키라
<シクラメンのかほり>
미야코 하루미
<北の宿から>
이시카와 사유리
<津軽海峡・冬景色>
제5회
(1978년)
제6회
(1979년)
제7회
(1980년)
제8회
(1981년)
사와다 켄지
<LOVE (抱きしめたい)>
사이조 히데키
<YOUNG MAN (Y.M.C.A.)>
이츠키 히로시
<ふたりの夜明け>
데라오 아키라
<ルビーの指環>
제9회
(1982년)
제10회
(1983년)
제11회
(1984년)
제12회
(1985년)
마츠다 세이코
<野ばらのエチュード>
호소카와 타카시
<矢切の渡し>
이츠키 히로시
<長良川艶歌>
나카모리 아키나
<ミ・アモーレ>
제13회
(1986년)
제14회
(1987년)
제15회
(1988년)
제16회
(1989년)
나카모리 아키나
<DESIRE -情熱->
콘도 마사히코
<愚か者>
나카야마 미호
히카루GENJI
<太陽がいっぱい>
제20회
(1990년)
시상 종료 시상 종료 시상 종료
B.B. QUEENS
<おどるポンポコリン>
- - -
※ 1991년 제26회 FNS 가요제부터는 그랑프리 시상을 종료하고, 콘서트 형식으로 변경하여 무대만 진행했다.
※ 일본레코드대상에 '대상'이 있듯이, FNS 가요제에는 대상 격 수상인 '그랑프리(Grand Prix, グランプリ)'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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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본레코드대상.png
일본 레코드 대상
(日本 レコード大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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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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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제3회
(1961년)
제4회
(1962년)
미즈하라 히로시
<黒い花びら>
마츠오 가즈코
와다 히로시
마히나스타즈
<誰よりも君を愛す>
프랭크 나가이
<君恋し>
하시 유키오
요시나가 사유리
<いつでも夢を>
제5회
(1963년)
제6회
(1964년)
제7회
(1965년)
제8회
(1966년)
아즈사 미치요
<こんにちは赤ちゃん>
아오야마 가즈코
<愛と死をみつめて>
미소라 히바리
<柔>
하시 유키오
<霧氷>
제9회
(1967년)
제10회
(1968년)
제11회
(1969년)
제12회
(1970년)
잭키 요시카와
블루 코멧
<ブルー・シャトウ>
마유즈미 준
<天使の誘惑>
사가라 나오미
<いいじゃないの幸せならば>
스기와라 요이치
<今日でお別れ>
제13회
(1971년)
제14회
(1972년)
제15회
(19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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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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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また逢う日まで>
치아키 나오미
<喝采>
이츠키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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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신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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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제18회
(1976년)
제19회
(1977년)
제20회
(1978년)
후세 아키라
<シクラメンのかほり>
미야코 하루미
<北の宿から>
사와다 켄지
<勝手にしやが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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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19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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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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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제2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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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の慕情>
데라오 아키라
<ルビーの指環>
호소카와 타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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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 타카시
<矢切の渡し>
이츠키 히로시
<長良川艶歌>
나카모리 아키나
<ミ・アモーレ>
나카모리 아키나
<DESIRE -情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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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회
(1989년)
제32회
(1990년)
콘도 마사히코
<愚か者>
히카루GENJI
<パラダイス銀河>
W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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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우치 타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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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QUEENS
<おどるポンポコリン(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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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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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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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제36회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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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の大地(엔카)>
KAN
<愛は勝つ(팝)>
오츠키 미야코
<白い海峡(엔카)>
코메코메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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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자이 카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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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로 나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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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사키 아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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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Child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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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ILE
EX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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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B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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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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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代目 J Soul Brothers from EXILE T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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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代目 J Soul Brothers from EXILE T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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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노 카나
<あなたの好きなところ>
노기자카46
<インフルエンサー>
노기자카46
<シンクロニシテ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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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제64회
(2022년)
미정 - - -
※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잠시 엔카 장르와 팝 장르로 나누어 대상을 시상했다.
※ 우수 작품상 수상자 중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수상자가 일본레코드대상의 '대상'을 수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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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모리 아키나
中森 明菜 | Akina Nakamori
파일:나카모리아키나.png
본명 나카모리 아키나 ([ruby(中森 明菜, ruby=なかもり あきな)], Akina Nakamori)
출생 1965년 7월 13일 (만 [age(1965-07-13)]세) | 일본 도쿄 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Flag_of_Tokyo_Prefecture.svg.png 오타 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lag_of_Ota%2C_Tokyo.svg.png
국적 일본 파일:일본 국기.png
신체 160cm | A형
직업 가수, 작곡가, 작사가, 프로듀서, 배우
학력 메이지대학 부속 나가노 고등학교 (중퇴)
데뷔 1982년 싱글 〈슬로 모션
레이블 유니버설 뮤직 재팬[1]
소속사 FAITH[2]
링크 공식 사이트
1. 소개2. 생애
2.1. 데뷔 전 (1965년 ~ 1981년)2.2. 데뷔 초 (1982년 ~ 1984년)2.3. 아티스트 노선으로 전환과 전성기 (1985년~1988년)2.4. 전성기 이후 (1989년~현재)
3. 디스코그래피4. 트리비아

1. 소개

‘아이돌’이라는 허상을 깨뜨린 비련의 아이돌
당신이 알아야 할 일본가수들에서의 소개 멘트.

파일:AD63F127-50C1-4352-B196-EE8606EC5715.gif

마츠다 세이코와 함께 80년대 일본 가요계를 양분하여 대표하는 전설적인 아이돌이자 아티스트[3]

일본 레코드 대상 여성 최초 2연패, 오리콘 아티스트별 토탈 세일즈 선두 횟수 역대 2위 기록(4회)을 가지고 있다 (2017년 기준)[4]. 2010년 이후, 건강 악화로 활동을 무기한 정지하였으나, 2014년 홍백가합전에서 복귀 무대를 가지고 이듬해년 1월 신규 싱글과 커버 앨범으로 완전 복귀하였다. 2017년 현재 총 판매량은 약 2566만장.

2. 생애

2.1. 데뷔 전 (1965년 ~ 1981년)

1965년 도쿄 도 오타 구에서 정육점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2남 4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으나 아버지의 정육점이 장사가 잘 되지 않아서 키요세시로 이사를 가 아버지와는 따로 자랐다. 사실상 키요세에서 자랐기 때문에 본인은 키요세를 고향으로 여기는 것 같다. 80년대의 홍백가합전에 출연했을 때를 비롯해 출신지를 키요세로 말하는 일이 많았다. 위로는 언니 둘과 오빠 둘, 아래로는 여동생 하나. 어려운 형편에도 어머니의 적극적인 지지로 언니를 따라 4살 때부터 발레를 10년 간 배웠다. 어릴 때부터 언니오빠들과 함께 TV나 라디오 등에서 노래를 들으며 가수의 꿈을 꾸게 되었다. 또한 어머니가 연예계를 동경했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도 어머니에게 많은 영향을 받으며 가수로서의 꿈을 키웠다고 밝혔다. 어릴 때부터 언니와 오빠들이 소위 일진으로 불리는 불량아들이었기 때문에, 후에 학교에 입학하면 학교 선생님들이 "네가 나카모리 동생이냐"라고 물어보는 경우도 있었다고.

데뷔 하기 전, '스타탄생'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두 번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1979년 중학교 2학년생일 때 참가한 첫 번째 오디션에는 이와사키 히로미의 <여름에 안겨>(夏に抱れて)를 불렀으나 "나이에 비해 목소리가 너무 어른스럽다"며 탈락했고, 1980년 중3때 참가한 두 번째 오디션에는 마츠다 세이코의 <푸른 산호초>(青い珊瑚礁)를 불렀으나 "노래는 잘하는데 얼굴이 너무 아기같아서 동요를 불어야 할 것 같다"는 이유로 탈락했으나, 어쩌라고 이듬해인 1981년 세 번째 오디션에서 야마구치 모모에의 몽선안내인(夢先案內人)을 불러 역대 최고의 점수로 합격했다. 스타 탄생 영상

2.2. 데뷔 초 (1982년 ~ 1984년)

프로그램 우승 이후[5] 연예사무소로 켄온, 레이블로 워너 파이오니아[6]과 계약을 맺고 1982년 5월 1일에 첫 싱글인 '슬로 모션'을 발매하며 아이돌로 데뷔하였다. 원래 소속사 측에서 아키나를 '모리 아스나', '나카모리 아스나'라는 예명으로 활동시키고자 했으나 본인의 거부로 인해 본명으로 활동하게 되었다.[7] 아키나를 비롯해 코이즈미 쿄코, 하야미 유, 마츠모토 이요, 호리 치에미 등 1982년에 데뷔했던 아이돌들이 연예계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게 되자, 이들을 통틀어 꽃의 82년조라고 일컫게 되었다.

데뷔초에는 소속사가 만든 '조금 H한 밀키걸'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사용했다[8] 그런데 여아이돌이 대놓고 캐치프레이즈에 'H'란 단어를 집어넣어 버렸으니[9] 주위에서 계속 '나카모리 아키나씨는 야한가요?'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겉으로나마 '아니에요.'라고 수줍게 대답하던 아키나지만 결국 쌓이다 보니 짜증이 나서 '그래 야하다 어쩔래?'하고 반응하게 되었다고…[10]

수줍음 많은 실제 성격과는 달리 의외로 데뷔 전부터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주관을 보였다. 초창기부터 무대의상이나 소품, 메이크업 등을 본인이 하나하나 체크했으며 2번째 싱글이었던 소녀A는 가사가 자신의 이미지와 맞지 않다는 이유로 퇴짜를 놓았다가 (인기는 끌었으나 그럴만 했다. 무려 가사의 주제가 로리콘) 스태프들의 회유와 설득으로 녹음하게 되었다. 이러한 셀프 프로듀싱 또한 아키나의 인기 요인이었으며, DESIRE의 디렉터였던 후지카와는 아키나에 대해 "깜짝 놀랐다. 그 당시의 레이디 가가였다."고 회고.
아키나의 데뷔 초 불량소녀 노선을 대표하는 곡 <소녀A> (1982년)
데뷔 싱글 '슬로 모션'이 가련하고 청순한 이미지의 발라드로, 아키나 본인이 가장 애착을 가지는 곡임에도 오리콘 주간 차트 30위가 최고 성적일 정도로 반응이 대단하지는 못했다. 이 후, 츳파리(つっぱり), 즉 불량소녀 이미지가 가득한 두번째 싱글 "소녀A"를 통해 오리콘 주간 차트 5위에 오르고 '베스트 텐', '밤의 힛트 스튜디오'같은 공중파 음악 프로그램에도 첫 출연하게 되면서 대중의 관심을 얻기 시작했다. 뒤이은 세번째 싱글 "세컨드 러브"는 첫 싱글처럼 다시 가련하고 청순한 발라드로 회귀한 곡이었는데, 이 곡이 오리콘 주간 차트 6주 1위(3주 연속 1위 2회), 1983년 연간 차트 8위에 오르는 대단한 성적을 기록하고, 약 77만장을 판매해 나카모리 아키나 역대 최고의 판매실적을 올린 싱글로 남았다.[11]. 이은 네번째 싱글 "2분의 1의 신화"은 다시 츳파리 노선으로 돌아온 곡으로, 오리콘 주간 차트 6주 연속 1위를 기록하며 큰 히트를 기록했다. 이 후, "트와일라잇 -석양의 편지-" 2위, "금구" 1위, "북쪽 날개(北ウイング)"(2위), "서던 윈드"(1위)사장 윈도, 츳파리 노선의 집대성이라고 불린 "십계"(1위)까지 연속 히트를 기록했으며, 이 때부터 미디어에서는 아키나를 당시 최고의 인기 아이돌이었던 마츠다 세이코의 라이벌로 부각하기 시작한다.

2.3. 아티스트 노선으로 전환과 전성기 (1985년~1988년)

1984년 11월에 출시한 열번째 싱글 "장식이 아니야, 눈물은"은 기존 아이돌 이미지의 틴 팝이 아닌, 본격적인 아티스트로서의 면모가 부각된 곡으로 주간 차트 1위는 물론 연간 차트에서도 6위를 기록하는 히트를 기록했다. 이 즈음부터 남성팬보다 여성팬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는데, 패션리더로서의 매력이 부각되었고 노래가사와 이미지를 통해 당당한 일본 여성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했기 때문이다. 이 후 1985년 1월에는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 "사랑 여행"이 개봉하였으며, 이 영화에 공동 주연으로 출연한 문제의 콘도 마사히코문제의교제가 시작됐다고 한다.[12]

이어 발표한 열한번째 싱글 "미 아모레"[13]는 아키나 전성기의 시작을 알린 곡이다. 차트인과 동시에 1위를 기록하며 2주 연속 1위를 기록했고, 1985년 연간 차트 2위 랭 및 66만장의 판매하면서 아키나 역대 두 번째의 높은 판매실적을 올렸으며, 무엇보다도 이 곡을 통해 1985년 일본 레코드 대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리오의 이국적인 삼바 리듬과 정열적인 카니발의 이미지를 담은 이 곡은, 원래 '붉은 새가 날아갔다' 라는 곡으로 작사되었으나 아키나가 "가사가 적극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재작사를 요청하여 재탄생한 곡. "미 아모레"의 이국적 이미지는 다음 싱글인 "SAND BEIGE -砂漠へ-"로 이어졌으며,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풍기는 발라드 "SOLITUDE" 까지 지속적으로 주간 오리콘 차트 1위를 점령하게 된다.
1985년 일본 레코드 대상 수상
그녀의 대표곡 중 하나인 <DESIRE -정열-> (1986년)
1986년 2월에 발표된 "DESIRE -情熱-"은 그녀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대표곡. 싱글 재킷의 기모노도 화제였으나, 실제 무대 의상으로 사용된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된 기모노와 보브 가발로 기존과는 완전히 달라진 아키나의 매력이 발산되었다. 실제로 아키나는 디렉터였던 후지카와에게 "TV 출연했을 때의 모습을 기대해 달라"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무슨 말인가 했던 후지카와는 실제로 아키나가 TV에 나온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지금에 와서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세련된 패션감각과 메이크업/가발과, '난데네'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투수의 투구 동작에서 본 딴 안무는 이 노래를 상징하는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하다. 이 노래를 통해 나카모리 아키나는 1985년에 이어 일본 레코드 대상을 2연패하는 업적을 쌓았다. 이 기록은 여자 싱글가수로는 최초이며, 이 후 아무로 나미에, 하마사키 아유미가 공동으로 가진 기록. 네임드만 할 수 있는 ㅎㄷㄷ한 업적 물론 하마사키 아유미 이 분은 최고 기록인 3연패까지 이뤘다. EXILE과 동률.
1986년 일본 레코드 대상 2연패
이어, "집시 퀸"과 "Fin", 위태로운 듯 치명적인 멜로디와 안무, 후렴구의 비브라토가 매우 인상적인 "TANGO NOIR"탕고 누아아아아, 에르메스 손수건으로 제작한 무대의상이 화제였던 번안곡 "BLONDE"으로 이어지는 1위곡으로 인기를 이어갔다. 이후 발표된 열 아홉번째 싱글 "난파선"은 원래 싱어송라이터인 카토 토키코가 1984년에 발표한 곡이었으나, 카토 토키코 본인이 아키나의 목소리로 불리는 것이 어울리겠다고 판단, 아키나에게 커버를 제안하여 발매된 싱글. 원래 눈물이 많고, 노래를 '연기'하는데 탁월하다는 평을 받아왔던 아키나였지만, 이 노래를 TV 방송에서 라이브로 부를 때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에 개인적 상황이 이 노래에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나왔다고 한다. 이 노래로 1987년 일본 레코드 대상 3연패도 점쳐졌으나, 아키나 본인이 이에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실제 대상 수상은 문제의콘도 마사히코가 수상했다. 수상자 발표 당시 수상자 본인보다 더 활짝 웃으며 박수치는 아키나를 보면 팬들은 가슴이 찢어진다.

"SAND BEIGE"에 이은 세번째 이국적인 싱글 "AL-MAUJ"와 발랄하고 경쾌하며 브로드웨이 음악을 연상케하는 "TATTOO"로 15개 연속 싱글 1위를 기록하면서 전성기를 이어가게 된다. 이 후 "I MISSED “THE SHOCK""이 아쉽게 2위를 하며 연속 1위 기록은 깨졌지만 뒤 이은 싱글 "LIAR"를 통해 1위를 되찾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2.4. 전성기 이후 (1989년~현재)

1989년 7월 11일, 일본 미나토구 롯폰기 맨션(콘도 마사히코의 저택으로 알려짐)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콘도 마사히코와의 불안정한 생활과 가족 문제가 겹쳐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흔히 알려진 콘도 마사히코와 마츠다 세이코의 찌라시 스캔들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이곳을 참조할 것.

문제의 사과 기자회견 이 후 건강을 되찾은 아키나는 1990년 7월에 그녀의 싱글 곡 중 유일하다시피한 밝은 분위기의 싱글 "Dear Friend"로 오리콘 차트 2주 연속 1위를 하였고, "물에 꽂은 꽃"으로도 1위를 차지하였으나 이후 다시는 1위곡을 배출하지 못했다.

2000년대까지도 꾸준히 음반을 발매하며 음악활동을 이어왔고 90년대에는 드라마에도 자주 출연하는 등 활동을 이어나갔으나, 2010년 건강악화로 인해 장기간 활동휴지기에 들어갔었다. 활동 휴지를 발표하기 이전부터 가뜩이나 마른 체격이 점점 더 핼쓱해지고, 라이브에서도 특기인 아키나 비브라토를 구사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이는 등 컨디션이 여러모로 좋지 못하다는게 알려졌던 상황이라 일부 팬들은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활동 휴지기동안 언론사들은 신나서 각종 병명을 줄줄이 가져다 붙였고, 결혼설을 비롯한 별의 별 찌라시도 같이 나돌았다.

이후 건강 회복에 전념하면서 점점 활동 재개 의지를 불태우던 아키나는 2014년 말, 약 4년간의 공백기를 깨고 가요계에 복귀를 선언했다. 그리고 레전드로 불리는 가희답게 복귀 무대는 바로 2014년 홍백가합전. NHK 무대가 아닌 아닌 뉴욕 스튜디오에서 이원방송으로 등장했다. 홍백 복귀 방송인데 드레스가 아닌 검은색 가죽 라이더 자켓이라는 터프한 복장이 인상적. 신곡인 'Rojo - tierra -'[14]를 부르며 여전한 카리스마와 녹슬지 않은 가창력을 보여주었다. 이때 라이벌로 불리던 마츠다 세이코도 같이 홍백에 출연해 화제가 되었다.

홍백가합전 방송 이후 곧이어 1월 9일 NHK 특별방송에 출연해 근황에 대한 이야기와 가희4 앨범에 수록되었던 커버곡들의 무대를 선보였다.

2015년 9월 30일에는 활동 복귀 이후 싱글 2탄이자 50번째 싱글(디지털 싱글 포함) 'unfixable'과 NHK에서의 출연 영상을 담은 DVD 박스가 발매되었다.

3. 디스코그래피

나카모리 아키나/음반 목록을 참조.

4. 트리비아

  • 80년대 최고 인기 가요순위 프로그램인 ' 더 베스트 텐' 에서 역대 최다인 69주간 1위 기록을 가지고 있어서 '베스트텐의 여왕' 이라는 호칭을 가지게 되었다. 최다 2위 기록 역시 아키나가 보유하고 있다.
  • 동세대 여성 가수중에 가장 화려한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최고 권위인 레코드 대상 2회 수상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제1회 골드디스크 그랑프리등 주요 가요제에서 무려 15회나 대상(그랑프리)을 수상하였다. 특히 최전성기인 86년에는 거의 모든 메이져 시상식의 대상을 독식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참고로 라이벌인 마츠다 세이코는 2회의 대상 수상 경력을 보유하고 있다.
  • 활동 초기에는 데뷔곡인 슬로우 모션을 비롯한 청순가련한 발라드와 소녀A, 십계 등으로 대표되는 츳파리(つっぱり), 즉 불량소녀 계열의 노래를 주력으로 활동했다. 이후 다른 아이돌들보다 빠르게 음악성에 비중을 둔 아티스트 노선으로 전환하였고, '미 아모레'등의 이국적인 분위기의 노래들을 발표해 히트시켰다.
  • 활동기간이 겹치고, 서로 상반된 이미지가 두드러졌던 마츠다 세이코라이벌로 꼽힌다. 당시 두 사람의 노선에 빗대 나카모리 아키나는 달의 아이돌, 마츠다 세이코는 해의 아이돌로 불렸다[15]. 모든 라이벌들이 그러하듯 세이코와 아키나 또한 서로 사이가 나쁘다는 소문이 꾸준히 돌았지만, 정작 두 사람은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야기를 나누는 등 그리 사이가 나쁘지 않다. 오히려 아키나가 본인은 마츠다 세이코의 팬이라고 이야기했고, 세이코의 명곡 중 하나인 <유리색의 지구>를 커버하기도 했다.
  • 왕조현을 단숨에 톱스타로 등극시킨 80년대 홍콩 무비의 레전드 '천녀유혼의 여주인공 '섭소천' 역이 원래는 나카모리 아키나를 No.1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서극 감독의 인터뷰 기사가 최근 전해져 화제가 된 바 있다.
  • 여성 가수로서는 최초로 2년 연속 레코드 대상을 수상하는 업적을 이룬 바 있다. 누적 음반 판매량 또한 2500만장 이상으로 말 그대로 레전드라 불리기 부족함이 없다.
  • 가사의 음절 뒷부분을 중저음 비브라토와 함께 길게 끌어내는, 일명 '아키나 비브라토'라는 고유의 창법으로도 유명하다. 아키나의 대표곡으로 꼽히는 Desire가 이러한 아키나 비브라토를 십분 활용한 곡으로, 도입부를 아키나 비브라토로 시작해서 노래의 끝도 아키나 비브라토로 마무리한다.
  • 나카모리 아키나가 재일교포라는 설이 유독 한국에서만 돌고 있지만, 이유 없이 재일설이 나도는 다른 유명 일본 연예인들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근거는 없다.
  • 무대에서는 관객들과 카메라를 씹어먹을 듯한 강렬한 눈빛, 빼어난 성량을 자랑하지만 무대에서 내려오면 수줍음 타는 소녀가 되는 갭 모에를 지니고 있다. 2014년 복귀 무대였던 홍백가합전에서도 작고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인터뷰를 하다가 갑자기 돌변해서 열창을 하고, 노래가 끝나자 다시 카메라를 향해 수줍게 웃으며 인사하는 귀여운 모습을 보였다.
  • 애연가에 애주가이다. 그녀가 과거에 피웠던 담배는 이브 생로랑 제품. 현재는 확인되어 있지 않다.
  • 82년조 데뷔 동기들 중에는 동년배인 코이즈미 쿄코와 가장 사이가 좋았다. 쿄코가 아키나를 일컬어 '다정한 언니 같은 존재'라고 칭하기도.
  • 한국에는 일명 '아키나 폭로집'의 내용이 정설인 양 떠돌아다니는데, 이 폭로집은 본토에서도 아키나 측에 고소당해 패소한 찌라시다. 국내에 정설처럼 퍼져 있는 콘도 마사히코마츠다 세이코 삼각관계 스캔들은 당시 스탭들과 함께 간 뉴욕에서 식당에 앉아 있다가 사진을 찍힌 것이었고 무엇보다 당시 세이코는 배우 칸다 마사키와의 결혼 생활 중이었다(...).[16] 아키나의 자살 기도는 스캔들이 터지고 난 6개월 뒤에 일어났는데 마사히코와의 관계 및 가족 관계 때문이었으며, 세이코와는 상관이 없다. 실제로 마츠다 세이코와 나카모리 아키나는 2010년대인 현재도 그리 사이가 나쁘지 않다. 아키나는 마츠다 세이코의 전 앨범을 다 가지고 있다고 방송에서 말하였으며, 리메이크도 할 정도로 세이코의 팬이다. 활동 시기가 상당히 예전이기 때문에, 이미 루머라고 밝혀진 것들마저 부풀려지는 듯.
  • 2013년 즈음 아키나가 1995년에 어머니가 사망한 이후 나머지 가족들 모두와 절연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가족들이 아키나가 가수가 되어 활동을 하며 벌어온 돈을 탕진하는건 기본이고 찌라시에 사생활을 팔아 넘기거나 거짓 인터뷰를 하는가 하면 동생인 나카모리 아키호는 아키나의 허락 없이 1988년에 누드 사진집을 발매하고 아버지라는 인간은 자신의 여자 문제 때문에 아내를 핍박하는 등 문제란 문제는 다 일으켰기 때문이다. 현재까지도 아키나의 친부라는 사람은 주간지에 아키나 이름을 팔며 '새 음반이 나온다는데 가족들은 소식도 모른다'며 피해자 행세를 하며 인터뷰를 하고있다.
  • AKB48 출신이자 지금은 솔로 가수로 활동하는 인기 멤버 다카하시 미나미가 아키나의 광팬이다. "여린 분이었기에 상처가 많으셨던 것 아닐까"라며 아키나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가수로서의 롤모델로도 아키나를 자주 언급하는 편.

[1] 정확히는 UMJ의 레이블 중 하나인 "UNIVERSAL J" 산하 본인의 개인 레이블 "UTAHIME RECORDS"에 소속.[2] 1인 사무소이다.[3] 쇼와 시대(1989년 1월 7일까지)의 가수별 판매량이 2천만장을 넘은 사람은 마츠다 세이코와 나카모리 아키나 단 둘 뿐이었다.[4] 1위는 아라시로 6회.[5] 음악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당시 다니고 있던 메이지 대학 부속 나카노 고등학교에 휴학계를 제출하고 곧 중퇴하였다.[6] 現 워너 뮤직 재팬[7] 이후 출간한 에세이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고, 남이 시키는대로 해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을 때 '그 때의 나는 사실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며 궁시렁대는 뒷말을 하거나 생각하게 되는 쪽이 더 싫었다."[8] 원문은 ちょっとエッチなミルキーっこ[9] 소속사는 H(エッチ)란 뜻이 음란하다는 의미가 아닌, 곧 어른으로 발돋움할 성숙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 이러한 캐치프레이즈를 붙였다고 설명했다. 일부러 노렸잖아[10] 비슷한 맥락으로 데뷔 초부터 수영복 촬영을 하기 싫다고 공공연하게 밝혀왔다. 때문에 히트곡이 늘고 아키나의 입김이 강해지면서부터는 불필요하고 자극적인 수영복 화보를 일체 찍지 않았으며, 이후 하와이 체류기간을 담은 사진집에 수영복 사진이 실렸으나 이는 매우 호쾌한 사진 셀렉팅이 인상적(...)이다. 수영복을 입었으나 성적인 암시를 담지 않은 편안한 사진.[11] 2위가 1985년 싱글 미 아모레[12] 일부 인터넷 설에는 1982년 아키나가 데뷔했을 때부터, 콘도가 아키나를 점찍어서 아무도 대쉬하지 못하게 했다고는 하는데, 아시는 분은 추가바람[13] 최초 발표했을 때 작사가는 '내 사랑'이라는 의도로 "Mi Amore"로 제목을 정하였으나, Mi는 스페인어, Amore는 이탈리아어였기 때문에 다소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포르투갈어인 "Meu amor é"로 중간에 표기를 변경했으나 이번엔 뜻이 '내 사랑'이 아니어서 문제. 영어 외의 언어에 대해 무지했던 당시 일본 가요계 풍조를 볼 수 있는 사례로 꼽힌다.[14] 보도 자료에서는 '아프리카풍 EDM'이라고 소개되었다. 웅장한 드럼 비트로 시작해 일렉 반주가 오버랩되는 강렬한 노래로 속도감 있는 드럼 비트와 상반되는 애절한 보컬이 특징. 이 싱글은 오랜만에 오리콘 10위 안에 입성하는 성과를 냈다.[15] 혹은 '빛의 마츠다 세이코'와 '어둠의 나카모리 아키나'. 왠지 빌리 헤링턴반 다크홈의 구도 같다.[16] 1997년도에 이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