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5 20:32:55

장국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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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
張國榮 | Leslie Cheung
파일:장국영 (1956~2003).jpg
이름 장국영(張國榮, Leslie Cheung)
국적 홍콩파일:홍콩 특별행정구기.png[1]캐나다 파일:캐나다 국기.png
출생 1956년 9월 12일
영국령 홍콩
사망 2003년 4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 (향년 만 46세)
신체 175cm, 64kg
학력 리즈대학교 섬유학 (중퇴)
데뷔 1977년 앨범 『I Like Dreamin'』
종교 무종교
1. 소개2. 전반적인 생애
2.1. 아시아의 톱스타2.2. 커밍아웃
2.2.1. 반론
3. 거짓말 같은 비보(悲報)
3.1. 의문점
4. 출연작
4.1. 드라마4.2. 영화
5. 수상내역6. 디스코그래피

1. 소개

1980~90년대에 황금기를 누렸던 홍콩영화계를 대표하는 미남 배우이자 가수. 원래 이름은 張發宗(장발종). 한자 표기는 張國榮(간자체로는 张国荣). 영어로는 Leslie Cheung(레슬리 청)이다.[2] 광동어식 예명을 살려서 Leslie Cheung Kwok-wing(레슬리 청궉윙)이라 하기도 한다. 홍콩 영화계를 빛낸 여러 스타들의 동판이 있는 홍콩 스타의 거리에는 한자와 영어 이름만 있어서, 그의 영어 이름과 한자를 모른다면 못 알아보기도 한다. 레슬리(Leslie) 이전에는 바비(Bobby)라는 예명을 썼다. 언론에서는 중국어의 표기법을 따라 장궈룽이라고도 표현하는데, 대중들은 압도적으로 이 남자를 장국영 내지는 레슬리 청이라고 부른다.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엄청난 동안이자 미중년이었으며, 실제로 설운도보다 나이가 2살 많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다. 현재 살아있다면 환갑을 넘은 [age(1956-09-12)]세다. 손석희, 유동근과 동갑.

우리나라의 전담성우는 김승준. 부드럽고 젠틀한 목소리가 딱이다. 김승준의 경우, '패왕별희' 연기가 가장 힘든 역 중 하나로 밝힌 적이 있다. 특히 거의 신인급이던 그가 대선배들 사이에서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었는데, 녹음 8시간이 넘어가고 밤 10시 경 마지막 '문화대혁명'의 자아비판씬(이 씬은 실제로 장국영이 3일 동안 찍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을 녹음할 땐, 본인도 엄청난 괴로움을 같이 느꼈을 정도라고.

세간의 인식과 다르게, 장국영은 주로 멜로나 드라마(영화 장르로 분류되는)에서 본인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스케일이 큰 상업영화나 홍콩 무협영화보다는 예술영화나 저예산의 드라마에 주로 출연하였던 것도 당시의 홍콩 영화 상황에서 굉장히 특이한 행보. 물론 왕가위나 천카이거 감독이 만들어 준 길이긴 하나, 장국영 본인의 노력과 재능으로 왕가위 시리즈의 첫 도입을 '아비정전'으로 안정감있게 이끌어 주었고, '패왕별희'를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참고로 '패왕별희'는 모든 것이 완벽했고, 연출진들, 스탭부터 경극 관련 장국영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까지 모두 신뢰할 만한 사람들로만 채워져 있어서 좋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 뒤로 북경에만 가면 패왕별희 스탭진들이 장국영의 초대로 모여 즐겁게 즐기다 갔다고 한다. 아니, 영화나 드라마를 오래 찍었으니 막내 스탭진들까지 챙기기는 힘들었을 텐데, 장국영은 그런 막내진들까지 이름을 외우고, 연락을 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고 하겠다. 대스타 임에도 특별한 대우도 받지 않고, 스탭들이 도시락을 먹고 있으면 같이 먹고 수다도 떨고 그러기도 했다.

2. 전반적인 생애

2.1. 아시아의 톱스타

장국영은 '홍콩직물왕' 아버지 밑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런데 그가 태어나기 직전 아홉째가 죽었다고. 공교롭게 생일이 같아 가족들은 그를 죽은 아홉째의 환생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말론 브란도, 히치콕도 옷감을 주문할 정도의 명성을 자랑했지만 가정을 잘 돌보지 않았고 첩도 있었다. 부모와의 나이차도 컸고 누나와 형들에게 치여 외롭게 자라면서, 유모를 친부모보다 더 많이 의지했다고. 유모와는 평생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은 이런 성장환경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영국의 리즈대학교에서 유학했으나 아버지의 건강악화로[3] 중퇴하고, 1976년부터 연예계의 문을 두드렸다. 정식 데뷔는 1977년 참가한 아시아 가요제였다. <American Pie>로 무려 2위에 오르면서 연예계에 데뷔했다. 홍콩 aTV와 계약한 후, 다양한 드라마의 조연이나 단역 등을 맡았으며, 1977, 78, 79년 한국 포함 아시아를 두루 다니며 인지도 향상을 꾀했다. 그가 치고 올라온 계기는 그를 처음 보고 잠재력을 느낀 매니저 진숙분과 의기투합한 이후이며, aTV에서 TVB로 이적하여 연기와 가수 활동 모두 주류로 올라섰다.

가수로 성공한 후, 영화배우로서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 건 1986년 오우삼 감독의 영화 《영웅본색》과 1987년 정소동 감독의 《천녀유혼》에 출연하면서였다. 《천녀유혼》에서 왕조현과 물속에서 키스를 하던 장면은 홍콩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키스 씬으로 뽑히기도 했다.

장국영이 지금까지도 탑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유는, 다른 배우들에게 기대서 성공하지 않고 본인이 홍콩 영화의 붐을 이끌었다는 데 기여가 있어서이다. 실제로 다른 스타들보다 실적에서는 밀릴지 모르나, 중화권, 그리고 아시아적으로 장국영 본인이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으로 홍콩 영화를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즐기면서 최고의 인기를 얻게 한 공신이기에 그를 인정하고, 그를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쿄 콘서트에서 천안문 6.4 항쟁에 대해서 중국 정부를 비난하는 한 편, 삼합회의 영화계 진출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발언을 한 것이 논란이 된다.[4] 한 쪽만 적으로 만들어도 위험할 판에 그는 좌충우돌하면서 큰 위기를 맞는다. 때마침 장국영의 콘서트에서 팬 중 하나가 알란 탐의 팬과 주먹다짐을 하다가 사망한다. 홍콩 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 장국영 같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연예인은 연예계를 은퇴해야 한다는 기사들을 쏟아냈다. 자기 편도 하나 없었을 뿐 더러, 이미 연예계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장국영은[5] 1990년 은퇴를 선언한다. 당시 은퇴 콘서트는 비디오로도 나와 있는데, 무대를 옮겨 다니면서 사방을 둘러싼 팬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하는 장국영을 볼 수 있다.

본래 장국영은 은퇴 콘서트 후 연예계 자체에서 발을 빼고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조용히 살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매니저인 진숙분은 장국영이 이미 화려한 연예계 생활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캐나다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 보도 자료를 배포할 때 완전 은퇴가 아닌 가수로서만 은퇴하는 내용으로 배포했고 계속 영화 스케줄을 잡아줬다고 한다. 그녀의 예상대로 장국영은 곧 아무도 자신을 몰라주는 캐나다 생활에 지루함을 느꼈다고 한다.

가수 은퇴 이후, 장국영은 아이돌 태생의 배우라는 한계를 딛고 《아비정전[6], 《동사서독》, 《패왕별희》, 《춘광사설》 등 당시 홍콩 영화들 중에서도 굵직굵직한 작품들에 출연하여 훌륭한 연기를 선보임으로써 아시아 전체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된다. 1995년에는 가수로도 다시 복귀하여 《A Thousand Dreams Of You》, 《추(追)》, 《유심인(有心人)》, 《좌우수(左右手)》, 《아(我)》 등의 히트곡을 내놓는다.

장국영은 대외적으로는 내성적이고 낯을 가렸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나 스태프들에게는 매우 친절하고 매너가 좋은데다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인격자' 그 자체로 통했다고 한다. 삼합회에 관련된 사람도 많고 각종 괴짜들이 넘쳐나는 홍콩 연예계인데, 그런 사람들조차 기를 못 펴고 착하게 굴도록 만들었던 사람이라고. 다만 둘도 없는 절친이었던 진백강[7]과는 데뷔 이후 서로 사이가 틀어져 한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촬영 당시 한 컷도 서로 같이 찍지 않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93년 진백강이 우울증으로 인한 약물 및 알콜 중독으로 고생할 때 화해했다. 이 일화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소개된 적이 있다.[8]

1989년에 오리온제과에서 나온 초콜릿 '투유' 광고에 출연해서 수많은 소녀 팬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었다. 한국에서 투유 초콜릿 광고를 촬영할 때 촬영장을 방문하는 기자들이나 관계자들에게 손수 초콜릿을 나누어 주며 연습한 한국어로 열심히 인사를 하고 일일이 챙겨주고 배려하는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다고. 당시 오리온에서는 초콜릿을 먹고 실제로 본인이 겪은 사랑의 사연을 보내주는 사람들에게 추첨을 통해 장국영의 마지막 콘서트 티켓을 주는 마케팅을 추진했는데 이로 인해 이 초콜릿은 불티나게 팔렸다. 투유 노래는 한국 한정 싱글이었지만 보통화광둥어 2가지 버전으로 발매됐다.

같은 해에 KBS 젊음의 행진에 출연해 이선희합동 공연을 했고(풀버전 영상), 당시 인기 최정상을 달리던 쟈니 윤 쇼에도 출연했다.


사실 유명세를 얻기 이전인 1978년과 1979년에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아시아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국제가요제를 개최하였는데, 한국의 MBC 주관 국제가요제에 2년 연속 출전했던 것.


79년 <서울 송 페스티벌>은 6월 2일에 개최되었었다.

2.2. 커밍아웃

공식적으로 자신의 성적 지향을 밝힌 적은 없지만, 인터뷰 중 연예인의 양성애에 대한 질문을 받자 "만일 어떤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나도 그 상대방을 좋아한다면,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중요치 않다. 만일 남녀 모두 ok라면, 기회는 두 배가 되는데 뭐가 안 좋다는 것인가" 라고 한 발언과 2000년 《타임》지에 본인이 "나는 '양성적이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등의 발언들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커밍아웃했다.

공연을 할 때 긴 머리에 여성 전용의 긴 하이힐을 신고 나온 적이 있다. 본인은 데이비드 보위의 퍼포먼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으나, 정작 보위는 훗날 자신의 양성애가 사실 컨셉이었고 흑역사라고까지 밝혔다.

2.2.1. 반론

그는 자신의 성적 지향성에 대해서 확연하게 동성애다, 양성애다라고 확정지어 말한 적이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인류애적 사랑이 엄청나다는 점을 세간에서 상업적으로 이용했으며 그로 인해 판매부수를 늘린 찌라시 언론사가 많다는 점이다. 이는 매염방이 장국영 사후 명보와 가졌던 인터뷰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홍콩의 황색언론이 과도하게 집착하는 그의 성 지향성은 단순 가십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며, 사후에도 여전히 그에 대한 논란을 종식시키지 못하고 있다.

또한, 데이빗 보위의 퍼포먼스를 따라 한 것도 그냥 겉모습만 따라한 것일 수도 있기에 모호하다. [9] 굽 높은 빨간 하이힐은 장국영의 생각이 아니라 의상 디자이너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보위는 실제 양성애자였던 적은 있으나 젊은 시절 한때 일이고, 행적을 보면 평생 양성애자로 산 것은 아니다. 상술했듯 말년에는 심지어 "양성애는 음악 활동을 위한 컨셉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애초에 정말 장국영에게 남자 애인이 있었는지는 확인된 바가 없다. 실제로 동성애자였다고 하더라도 세간에 장국영의 동성 애인이라고 알려진 당학덕에 대해서는 장국영 스스로가 그는 자신의 동성 애인이 아니라고 부정했다.[10]

장국영이 동성 연애자인지 아닌지는 그가 사망했기에 알수 없는 일이다. 당학덕이 꾸준히 언급한 것처럼 진짜 애인이었을 수도 있다. 다만, 솔직한 성격의 장국영 본인이 "당학덕은 동성 연애 파트너가 아니다."라고 말했음에도, 그의 사후 당학덕이 "나는 그의 연인이다."이라고 꾸준히 언급하는 건 오히려 고인을 모독하는 행위로 볼 수도 있다. 애인이니, 사랑이니, 연인이니, 하는 건 모두 당학덕의 입과 손에서 나온 이야기이기 때문. 또한 기일인 4월 1일 근처만 되면 전 매니저인 진숙분과 당학덕 두 사람이 번갈아서 별로 대단치 않은 일로 '장국영 죽음의 비밀'이라고 언급하거나, 그냥 둘이 있는 것만으로 연인 사진이라며 호들갑을 떠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장국영은 항상 '당선생'은 본인이 어려울 때 모든 걸 해결해준 가장 신뢰가고, 정말 고맙고, 든든한 경제/투자 자문이자, 최고의 친구 정도로 언급했지, 연인은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장국영은 당학덕을 연인으로 인정한 적이 없으며, 동성연애는 모두 당학덕이 언급한 것들이다. 당학덕은 1983년 1월 초부터 연인관계가 시작되었다고 추도사에서 밝혔으나, 장국영은 당시 꾸준히 여자친구가 있었으며, 모순균 이외에도 프로포즈를 한 여성도 더 있었다. 장국영과 사귀다가 헤어지고 그가 본인에게 미련이 없다고 느끼자 자살시도한 배우도 있었을 정도. 은퇴하고 캐나다로 간 것도 좋아하던 이성이 캐나다에서 유학한다고 하자 그쪽에서 잘해서 결혼까지 하기 위해 따라 갔던 게 큰 이유(금옥만당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장국영이 겪은 경험이다.)이다. 아마 진숙분이 그가 연예계로 돌아올 거라고 확신한 것도, 그 여성과 장국영이 잘못될 확률이 크다, 라고 생각해서 그랬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만약 당학덕 말대로 진짜 둘이 연인관계였다고 하면, 그것은 꾸준히 장국영의 여자친구였던 사람들을 물먹이는 행위이며, 장국영을 양다리나 걸치는 쓰레기로 만드는 행위이다. 분명한 건, 당학덕과 장국영이 연인사이라는 증거 자체가 없으며, 연인 사이라고 밝힌 여러 장의 사진들은 그냥 매니저와 스타 사이의 관계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스킨쉽은 손잡고 걸어가던 단 한 장의 사진 밖에는 없었다. 손잡는 횟수나 스킨쉽으로 따지면 차라리 매염방이 더 연인관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세간에 알려진 이성 연애로는 모순균(毛舜筠)을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다. 20살 때로, 17살 그녀에게 실제로 프로포즈를 했는데 차였다고. 모순균은 장국영과 헤어진 2년 후 실업가와 처음 결혼했다가 다시 2년만에 이혼하고, 88년에 영화감독 Jeffrey Chiang(蔣家駿)과 결혼했다가 94년 이혼했다. 이듬해인 95년 영화감독 토니 오(區丁平)와 마지막으로 결혼해 2녀를 두고 있다. 장국영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모순균이 진행하는 토크쇼에 나와 '만약 그 때 당신이 나의 청혼을 받아줬다면 우리 인생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 말한 적도 있다고. 두 사람은 92년 가유희사에서 다시 부부로 만나게 된다.

3. 거짓말 같은 비보(悲報)

2003년 4월 1일, 그는 자신이 머물던 홍콩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香港文華東方酒店) 24층 객실에서 몸을 던져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났다. 이때가 향년 48세.

공교롭게도, 이날이 만우절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처음엔 거짓말로 여기고 그의 사망 소식을 믿지 않다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큰 충격에 휩싸였으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9시간 만에 홍콩에서는 6명의 팬이 그를 따라서 투신하였고 그 중 5명이 사망했다. 홍콩 본토뿐만 아니라 전 아시아권의 영화팬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 당시 유행하고 있던 전염병 사스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4월 5일에 그의 추도식에는 전 세계에서 수많은 팬들이 찾아와 그의 명복을 빌었다. 특히 그와 함께 《영웅본색》을 찍었던 주윤발은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와서 장례식에 참석했다.

국내에서도 송광사에서 49재를 치르려고 했으나 SARS 확산 우려의 이유로 무산되었으며, 5월 2일에 일산에서 국내 장국영 팬들이 모인 가운데 천도재(遷度齋)가 열렸다.

3.1. 의문점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무성한 소문들이 떠돌았는데, 삼합회에서 살해했다는 음모론부터 천안문 발언 등 공산당에 비판적이었던 탓에 중국 정부가 살해했다는 설, 그의 동성 애인이라고 알려진 당학덕(唐鶴德)이 유산을 노리고 살해했다는 이야기도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11] 실제로 캐나다 정부에서 홍콩 영화배우들을 삼합회와 연관이 있다며 이민을 거부했다는 루머가 돌 때도 장국영만은 유일하게 이민 허가가 내려졌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삼합회가 영화판에 뛰어드는 것에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12] 장국영이 삼합회에 치를 떤 이유는 그의 영화 데뷔작 《홍루춘상춘》이 중국 고전 《홍루몽》의 에로 버젼이었는데, 영화 수준도 조악했지만 삼합회 관련 스탭들이 가수로 활동하고 있던 장국영을 협박하다시피해서 영화를 찍게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13] 은퇴번복 후 처음 출연한 《가유희사》는 필름탈취를 겪기도 했고, 생전 인터뷰에서 삼합회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적도 있었다. 이 때문에 장국영이 감독 데뷔를 하려해도 삼합회와 연결되어 있는 대다수의 홍콩 영화 투자자들이 투자를 하지 않아 계속 제작에 실패했다가 죽기 직전에 겨우 중국의 사업가인 '석실'에게 투자를 받아 준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장국영의 죽음으로 그의 재산 460억을 물려받은 당학덕은 평소 삼합회의 행사에 모습을 자주 드러냈었다.

실제로도 수상한 점이 상당히 많다.#
  • 경찰은 '장국영의 유서가 발견되었다'라고 밝혔지만, 이 유서는 2019년 현재까지 전문(全文)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
  • 장국영이 24층에서 투신한 호텔은 중간 부분이 튀어 나온 구조라서 정상적으로 떨어져 죽은 것이라면 호텔 앞에서 시신이 발견돼야 정상이지만 장국영의 시신은 마치 멀리뛰기라도 한 듯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아스팔트 위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이 항목의 의혹은 법의학에 대한 지식 부족 때문에 생겨난 오류이다. 각종 법의학 교양 서적들 때문에 제법 알혀진 사실인데, 자살자가 투신할 때 드라마나 영화처럼 아래를 보면서 그대로 몸을 던지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드라마나 영화와 달리 땅을 보면서 그대로 몸을 던지는 일은 엄청난 공포를 유발하기 때문에 제정신으로는 실행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대부분의 투신자살자는 추락지점 한참 뒤에서 달려와서 앞으로 점프하듯이 뛰어내리기 때문에, 이 항목에 적힌 장국영의 사례처럼 ‘마치 멀리뛰기라도 한 듯 건물에서 멀리 떨어져’ 추락사 하는 쪽이 오히려 정상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의혹이라고 할 수 없다.
  • 사람이 그 정도 높이에서 떨어지면 굉장히 큰 소리가 나야 하는데, 정작 호텔 현관 앞에서 벌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현관 도어맨은 아무 소리도 못 들어서 신원이 불분명한 행인이 시신을 최초로 발견했다.
  • 투신해서 죽은 것 치고는 혈흔이 너무 적었다. 다만 의사나 전문가들의 의견에 의하면 투신해서 죽어도 혈흔이 꼭 많지는 않다고 한다.
  • 24층 정도의 높은 높이에서 낙하하면 보통 신체에서 가장 무거운 부분인 머리로 떨어지게 되는데, 시신을 수습하는 모습이 TV에 중계되었을 때 잠시 노출된 장국영의 시신은 머리 부분에 외상이 거의 없었다. 이에 논란이 일자 당시 경찰은 기자회견에서 발부터 떨어져서 그렇다고 밝혔다.
  • 사고 당일 장국영이 막화병과 점심식사를 같이 했는데 그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고, 심지어 그날 장국영에게 두 건의 약속이 더 잡혀있다는 얘기까지 들었다고 한다.
  • 그의 매니저였던 진숙분 역시 "장국영은 사망 전 스케줄을 무리 없이 소화했다."라며 보통 자살할 사람의 행적이 아닌 평상시와 다름없는 행동을 했다고 밝혔다.
  • 또한 진숙분은 사망 당일 그가 사망하기 10분 전인 오후 6시 30분에 장국영과 통화했는데, 그는 주차장에 있었다고 한다. 만약 그 말이 맞다면 장국영은 차를 주차한 뒤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14] 계단을 이용해 24층까지 뛰어 올라간 뒤 바로 투신했다는 얘기가 된다. 실제로 장국영과 비슷한 체형을 가진 남자가 실험해봤는데, 주차장에서 지하도를 거쳐서 호텔 입구까지 오는 데만 9분이 걸렸다고 한다.
  • 사건 당일 그의 연인이자 유산상속인이었던 당학덕의 행적 또한 여러 점에서 의문을 갖게 했다. 장국영 사망 당시 당학덕은 그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장국영이 사망하던 날 그와 배드민턴을 치기로 약속했었다고 알리바이를 댔지만 그가 말한 시간은 이미 장국영과 매니저가 다른 약속을 잡아 놓고 있었던 시간이었다. 장국영이 사망하기 얼마 전에는 두 사람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았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장국영 사망 며칠 전 당학덕과 장국영이 심하게 싸우는 걸 봤다는 목격자도 나타났다.

이와 같은 여러 정황과 증거들로 보아, 어떤 법의학자는 "누군가 장국영을 둔기로 살해한 뒤, 현장에 시신을 유기했을 가능성이 크다" 라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장국영의 사망 직후 장국영의 조카 알리사가 '평소 장국영이 우울증을 앓아 왔고 우울증 때문에 자살했다' 라고 밝혔고, 장국영이 사망한 당일 점심을 함께 한 인테리어 디자이너 막화병(이 사람은 영화 '투심' 때문에 장국영과 막판에 굉장히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에게 "죽고 싶을 땐 수면제보다는 뛰어내리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다" 라는 말을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자살 이유가 우울증이었다고 하면 의외로 간단해지는데, 자살은 우울증의 대표적인 증상이며, 사람들 앞에서는 끝까지 평상시와 다름 없이 행동하려 하기 때문에 일정이나 다른 것을 자살을 대비해서 정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15] 그래서 자살 직전까지도 주위 사람이 평소 알아차리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고통스러운 일로 자살을 결심하는 사람은 주변에 자살의 위험 신호를 많이 보내지만, 만성 우울증을 앓는 사람은 다들 '원래 저런 사람인가 보다' 하는 면도 없지 않고, 또 이렇게 일상 생활을 잘 영위하다 갑자기 죽는 경우가 많다. 물론 자살의 징후가 나타나긴 하지만 주변에서 알아차릴 만큼이 못 되는 편. 국내에서도 모 대학 학생이 수업 중인 학교의 건물에서 투신자살을 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해당 학생은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자살 당일에도 학교에 수업을 받으러 왔었다.

팬들에게는 중국 대륙출신의 사업가 '석실' 이 장국영이 오랫동안 염원하던 자신의 영화 감독[16], 그리고 차기작까지 지원을 약속했으며, 중간에 갑자기 석실이 사기사건(2002년 3월 30일에 걸려 들어가서 '3.30 사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타이밍 참~기가 막히게)에 연루되어 투자를 중단하여 영화 제작이 무기한 연기되자 이에 크게 실망한 장국영이 자살을 선택했다고 결론이 모아지고 있다. 이는 당학덕이나 송소천 등 생전 장국영과 친했던 이들의 공통적인 증언이다. 다만 상술한 당학덕의 입지 상 일부 미묘한 구석이 있다.

단순히 영화 제작 무산을 자살의 원인으로 보기엔 사실 걸리는 점이 많은데, 실제로 '투심'의 제작이 좌절되자, 연지구, 그리고 패왕별희 제작시, 다른 이들이 '존 론'[17] 을 외칠 때, 장국영을 강력히 원했고, 결국 성사시킨 이벽화 작가는 그를 '아가적여인' 의 감독으로 활동하길 바랬고, 그걸 도와주기 위해 본 시나리오를 수정하여 2003년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또한 서극 감독은 몇 번 동안 다른 시나리오 등을 수집하여 보내다가, 장국영이 1년 이상 전부터 들어오는 시나리오를 읽지도 않는 다는 걸 알고, 장국영을 위해 직접 시나리오를 호텔로 가져가서는 부인과 함께 만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결국 '투심'에 대한 상처가 있긴 하나, 그의 감독 활동이 완전히 막혔던 건 아니었던 것이다. 실질적 무명 생활을 8년이나 겪고선, 온갖 굴욕에도 당당하게 활동하던 장국영과도 캐릭터가 맞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 제작 무산의 가장 큰 이유였던 석실의 구속과(이 사건으로 석실은 2008년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와 관련된 약 20여명의 구속 및 처벌. 장국영 영화에 투자하고자 했던 자금이 실제로는 비리 사기사건의 비자금이었던 것들이 도덕적이었던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책임감으로 다가와 우울증을 확대시켰다고 보는 게 맞을 수 있다. 워낙 스케일이 큰 비리 사기사건이었는지라 아마 자살하지 않았더라면 이 상황을 전혀 몰랐던 장국영에게도 일종의 비토와 책임론이 대두되었을 가능성이 컸던 게 사실.

4. 출연작

4.1. 드라마

진하게 표시된 작품은 국내 VHS 출시 작품.
  • 홍콩 RTV[18] 작품
    • 《애정고사지(愛情故事之[十九歲])》(1977)
    • 《악어루(鱷魚淚)》(1978) - 사실 이 작품은 빅히트작이긴 한데[19] 주인공이 아니라서 묻혔다.
    • 완화세검록(浣花洗劍錄)》(1978)
    • 《한지붕 아래(屋簷下之(15,16); Teenagers)》(1978)
    • 《아가적여인(歲月山河之 "我家的女人"》(1980): 장국영이 첫 감독작으로 준비하던 영화 '투심'이 엎어지고 큰 상심과 우울증이 생기자 2002년 5월 1일에 연지구, 패왕별희를 함께 했던 작가 이벽화가 장국영을 찾아가 큰 예산이 필요없고, 당시 시카고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받을 만큼 인정받은 이 작품을 리메이크하여 감독해보는 건 어떤가 제의했고, 장국영과 약속하여 2003년 5월 1일 크랭크인을 목표로 준비 중인 작품이었다. 장국영은 장백지를 캐스팅하면 좋겠다는 말을 할 정도로 어느 정도 이 작품의 영화화를 진전시키고 있었으나, 결국 크랭크인 1달을 남기고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 정인전 (情人箭)》(1979) - 드라마에 출연은 안 했지만 타이틀 송을 불렀다. 국내에도 VHS로 출시되었지만, 홍콩에서도 재방을 많이 안 해서 자료가 거의 없는 희귀작. 다만, 2013년에 aTV에서 새로 송출을 시작한 세월류성(歲月留聲)이란 채널에서 《정인전》이 언급되었다. 즉 재방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였지만 그 전에 aTV가 망했다(...). 다행히 TVB가 판권을 사서 현재는 TVB Anywhere에서 VOD로 감상이 가능하다.
    • 《부생육겁(浮生六劫)》(1980)
    • 《소소심원(小小心願)》(1980)
    • 대내군영속집 (大內群英續集)》(1980)[20]
    • 《주해효웅(珠海梟雄》(1981)
    • 유협장삼풍(遊俠張三丰)》(1981)
    • 《대대호(對對糊》(1981)
    • 《첨첨24미(甜甜廿[21]四味》(1981)
    • 《도적고사 "사지성" (島的故事"砂之城")》(1981)
  • 홍콩 TVB 작품
    • 《여인33(女人33)(1983)
    • 《농본다정(儂本多情)》(1984)
    • 무림세가 (武林世家)》(1985)
    • 《일락파려(日落巴黎)》(1989): 음악 드라마
    • 《좌우정연(左右緣)》(1999): 음악 드라마

4.2. 영화

  • 《홍루춘상춘(紅樓春上春)》(1977)
  • 《구교구골(狗咬狗骨)》(1978)
  • 《갈채(喝采)》(1980)
  • 《실업생(失業生)》(1981)
  • 양과여소용녀(楊過與小龍女)》(1982)
  • 《충격21(衝激21)》(1982)
  • 열화청춘(烈火青春))》(1982)[22]
  • 《영몽가락(檸檬可樂)》(1982): 레몬콜라
  • 《고수(鼓手))》(1983): 드러머
  • 《첫사랑(第一次)》(1983)
  • H2O)》(1984)
  • 연분(緣扮)》(1984)
  • 《성탄쾌락(聖誕快樂)》(1984)[23]
  • 《삼문치(三文治)》(1984): 샌드위치
  • 위니종정(為你鍾情)》(1985)
  • 《용봉지다성(龍鳳智多星)》(1985)
  • 《구애반투성(求愛反斗星)》(1985): 구애대작전
  • 영웅본색(英雄本色)》(1986)
  • 우연(遇緣)》(1986)
  • 영웅본색 2(英雄本色2)》(1987)
  • 천녀유혼(倩女幽魂)》(1987)
  • 연지구(胭脂扣)》(1988)[24]
  • 살지연(殺之戀)》(1988)
  • 신최가박당(新最佳拍檔)》(1989)
  • 천녀유혼 2 인간도(倩女幽魂II人間道)》(1990)
  • 아비정전 (阿飛正傳)》(1990)[25]
  • 종횡사해(縱橫四海)》(1991)[26]
  • 호문야연(豪門夜宴)》(1991)[27]
  • 가유희사(家有喜事)》(1992)[28]
  • 시티보이즈(藍江傳之反飛組風雲)》(1992)
  • 동성서취(東成西就)》(1993)
  • 백발마녀전 1, 2(白髮魔女傳)》(1993): 2편에서는 후반에 출현
  • 패왕별희(霸王別姬)》(1993)[29]
  • 화전희사(花田囍事)》(1993) : 가유희사 2편. 천녀유혼을 패러디 하여 레슬리가 여장을 하고 나오는데 엄청 예쁘다(...).
  • 동사서독(東邪西毒)》(1994)
  • 금지옥엽(金枝玉葉)》(1994)
  • 야반가성(夜半歌聲)》(1994)
  • 《금수전정(錦繡前程)》(1994)
  • 《기득향초성숙시 2 - 초련정인(記得香蕉成熟時II初戀情人)》(1994)
  • 금옥만당(金玉滿堂)》(1995)
  • 금지옥엽 2(金枝玉葉 2)》(1996)
  • 《대삼원(大三元)》(1996)
  • 《신 상해탄(新上海灘)》(1996) - TVB 드라마 《상해탄》의 리메이크작
  • 색정남녀(色情男女)》(1996)
  • 풍월(風月)》(1996)
  • 《가유희사(97家有囍事)》: 가유희사 3편. 레슬리는 막판 1분에 나오는 카메오.
  • 춘광사설(春光乍洩)》(1997): 국내개봉명 《해피투게더》
  • 친니친니(安娜瑪德蓮娜)》(1998)
  • 《구성보희(九星報喜)》(1998)
  • 《홍색연인(紅色戀人)》(1998)
  • 《유성어(流星語)》(1999)
  • 성월동화(星月童話)》(1999)
  •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Buenos Aires Zero Degree)》(2000): 《해피투게더》 메이킹 필름
  • 《오키나와 랑데뷰(戀戰沖繩)》(2000): 성월동화 2편. 연정충승.
  • 《스피드 4초(倉王)》(2000)
  • 이도공간(異度空間)》(2002): 장국영의 최후 유작. 이 영화 결말 부분에서, 장국영에게 원한을 가진 귀신은 장국영을 빌딩 옥상에서 투신하도록 몰아넣지만, 투신시도로 그친다. 그리고 상술(上述)했다시피, 장국영은 고층 건물에서 추락사하였다. 덕분에 이 영화가 장국영의 죽음의 원인이라는 괴담이 돈 적도 있다.
  • 《동사서독 리덕스》(東邪西毒 Redux): 왕가위 감독이 언급하기를, 자신의 영화에서 레슬리의 마지막이 '해피투게더'에서 보영이 아휘가 떠난 걸 마음 아파하며 이불을 뒤집어 쓰고 마구 울부짓는 모습이라는 게 너무 맘에 걸렸다고. 결국 재촬영, 1편 때 찍은 필름 보완 등으로 동사서독 리덕스를 제작하였다.

5. 수상내역

수상 연도 시상식 부문 작품
1991년 제 10회 홍콩금상장영화제 남우주연상 아비정전
1992년 제 30회 금마장 주제가상 백발마녀전

6. 디스코그래피

국어앨범은 (國語), 영어앨범은 (英語) 표시이다. 정선집 (베스트 앨범)은 제외.
  • I Like Dreaming (英語, 1977)
  • Day Dreamin' (英語, 1978)
  • 情人箭 (1979)
  • 風繼續吹 (1983)
  • 一片痴 (1983)
  • Leslie (1984)
  • 為你鍾情 (1985)
  • Stand Up (1986)
  • 愛火 (1986)
  • 英雄本色當年情 (國語, 1986)
  • 愛慕 (國語 + 粤語, 1987)
  • Summer Romance (1987)
  • 拒絕再玩 (國語 + 粤語, 1987)
  • Virgin Snow (1988)
  • Hot Summer (1988)
  • Leslie 側面 (1989)
  • 兜風心情 (國語, 1989)
  • Salute (1989)
  • Final Encounter (1989)
  • 寵愛 (國語 + 粤語) (1995)
  • 紅 (1996)
  • 這些年來 (1998)
  • Printemps (國語, 1998)
  • 陪你倒數 (1999)
  • Untitled (2000)
  • 大熱 (2000)
  • Cross over (2002, 황요명과 공동 작업한 앨범이다.)

[1] 1956년 이므로 정확히는 영국령 홍콩이다.[2]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애슐리 역으로 출연했던 배우 레슬리 하워드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3] 술을 마시다가 반신마비가 되버렸다고 한다.[4] 원래부터 장국영의 성격은 매우 솔직한 편이었다. 그와 함께 작업했던 영화감독 진숙분의 말에 따르면, 그는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편이라 많은 오해와 적지 않은 문제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로인해 매스컴과도 사이가 안 좋았다.[5] 언론이 자신을 건드리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가족과 친구 등을 건드리는 짓에 대해서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6] 장국영의 가수 은퇴 발표와 함께 개봉된 영화이다.[7] 진백강 역시 장국영 못지않게 여리여리한 미남이었으며 데뷔도 먼저 했다. 이후 장국영의 인기가 넘사벽이 되다 보니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그저 안습하다. 그러나 진백강은 10년 전인 1993년에 약물 과다복용으로 35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8] 이 장면에서 흐르는 피아노 곡은 '추'의 멜로디이다.[9] 데이빗 보위 특유의 인터섹슈얼한 이미지는 장국영뿐만 아니라 일본의 사와다 켄지도 시도한 적 있었다.[10] 당학덕이 장국영의 동성 애인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절친한 친구였는지 혹은 채무 관계여서 협박하는 사이(!)였는데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사후에 장국영의 동성 애인이라고 주장한 것이었는지는 장국영 본인이 사망해 버렸으니 알 수가 없다.[11] 생전의 장국영은 당학덕에 대해서만큼은 자신이 어려울 때 늘 도움을 준 전우라고만 말하며 자신의 동성 애인이라는 설을 꾸준하게 부인하였다.[12] 삼합회와의 연계를 의심하여 홍콩 배우들의 이민이 캐나다에서 거부되었다는 것은 이후 사실무근임이 드러났다.[13] 홍콩영화 항목에도 있지만, 히트한 홍콩영화의 아류작이 수없이 나온 배경에는 이러한 삼합회의 압박이 있었다.[14] 엘리베이터 CCTV에는 그의 모습이 찍히지 않았다.[15] 평상시처럼 행동하는 것은 스스로 자살 염려가 없어서가 아니고, 우울증을 이겨내고 살아 나갈 거라고 희망을 가지고 끝까지 버티려 했다는 증거가 된다.[16] 장국영은 홍콩 정부의 지원으로 매염방과 함께 출연한 '연비연멸'이라는 금연 홍보 영화의 감독을 맡은 적이 있다.[17] 마지막 황제, M.버터플라이 등의 출연작이 있다.[18] 현재의 aTV.[19] 이래봬도 2006년에 리메이크하려다 aTV가 돈이 없어서 취소될 정도로 인지도가 높은 작품.[20] 소생(蘇生) 감독, 이혜민(李惠民) 연출. 《무협풍운》이란 부제로 출시되었다.[21] 스물 이.[22] 제 2회 홍콩 금상장 남우주연상에 지명되었다. 수상에는 실패했지만.[23] 그 해 홍콩 흥행 1위. 여기서는 조연으로, 이려진과 커플로 나옴.[24] 우리나라에서 VHS 출시 때 한자 변환을 잘못해서인지, 《인지구》로 나왔다. 그러나, 홍콩영화를 무수히 소개하던 월간지 로드쇼조차도 1989년 소개 당시 인지구라고 소개했다.하지만 1998년 KBS 추석특선영화 방영시 에는 제목 그대로 《연지구》로 방영했다.[25] 장국영의 은퇴 발표와 함께 개봉된 영화이다.[26] 장국영이 은퇴 발표 직전 주윤발, 종초홍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출연한 작품이다. 영화 자체는 은퇴 후 개봉되었다.[27] 1959년에 개봉한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홍콩 수제민을 돕기 위해서 제작되었다.[28] 장국영이 은퇴 번복 후 처음 출연한 영화로 촬영은 1991년에 이루어졌다.[29] 영화사상 최초로 중국 본토에서 제작된 영화에(홍콩 영화와는 다르다) 홍콩 배우가 주연으로 출연한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