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NS 가요제 그랑프리 수상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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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000><colcolor=#fff> 사이조 히데키 [ruby(西, ruby=さい)][ruby(城, ruby=じょう)] [ruby(秀, ruby=ひで)][ruby(樹, ruby=き)] | Hideki Saijo | |
| 파일:사이조 히데키.png | |
| 본명 | [ruby(木, ruby=き)][ruby(本, ruby=もと)] [ruby(龍, ruby=たつ)][ruby(雄, ruby=お)] (키모토 타츠오, Tatsuo Kimoto) |
| 출생 | 1955년 4월 13일 |
| 출신 |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
| 사망 | 2018년 5월 16일 (향년 63세) |
| 국적 | |
| 학력 | 히로시마 시립 오나가 소학교 (졸업) 히로시마 시립 후타바 중학교 (졸업) 메이지대학 부속 나카노 고등학교 (정시제 / 졸업) [1] |
| 직업 | 가수, 배우 |
| 신체 | 180cm, AB형 |
| 가족 | 배우자 키모토 미키(木本美紀)[2] 장녀 키모토 레이코(木本莉子)(2002년생) 장남 키모토 신노스케 차남 키모토 유마(木本悠天)(2005년생) 조카 타쿠미 마사노리(宅見将典)[3] |
| 소속사 | 어스 코퍼레이션 |
| 활동 기간 | 1972년 3월 25일~2018년 4월 |
| 링크 | |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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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에는 '사이조 히데키'로 기재돼 있으나, '사이죠 히데키'로 통할 때도 있다.
2. 생애
1955년 4월 13일에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신칸센'[4]이라는 파칭코 사업을 운영했다고 한다.| |
| 형(오른쪽)과 함께 아버지의 파칭코 가게 앞에 서 있는 히데키[5] |
| |
| 아버지의 파칭코 가게에 놀러 온 여성 팬들 |
3. 히트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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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K 홍백가합전에는 총 18회 출장했다. 1974년 제25회~1984년 제35회, 1994년 제45회~1995년 제46회, 1997년 제48회~2001년 제52회 NHK 홍백가합전에 출장했다.
4. 광고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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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시아에서 인기
일본에서 '원조 아시아 스타'로 불렸고, 홍콩을 비롯한 중화권에서는 '천황거성(天皇巨星)'으로 불리며 동아시아 각 국가에서 콘서트를 열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사이조가 단독 콘서트를 연 지역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홍콩: 1981년, 1982년, 1985년, 1986년, 1989년
- 중국:
- 1987년 - 베이징, 광저우
- 1998년 - 만리장성[8], 광저우, 선전, 주하이
- 태국: 1989년 - 방콕
- 싱가포르: 1985년, 1986년, 1991년
1988년 9월 16일에 열린 서울 올림픽 경축전야대축전 - 3부 아시아의 영광에 조용필(한국), 후인인[9](중국), 진백강(홍콩)과 함께 참여했다. 관련 영상 1부, 관련 영상 2부 일본 대표 가수로 참여한 이 행사에서, 무대에 등장할 때 조용필의 노래 친구여 가사의 일부를 일본어 번안 가사로 불렀다. 그리고 자신의 대표곡인 傷だらけのローラ(상처투성이 로라)[10]를 불렀다. 서울 올림픽 경축전야대축전은 KBS를 키 스테이션으로 세계 각국에 위성 중계된 행사로, 사이조는 한국 방송에서 최초로 공식 석상에서 일본어로 노래를 부른 가수가 되었다.
1994년 7월 18일에 대만 CTS 예능 종예여인국(綜藝女人國)에 출연하는 등, 사이조는 대만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다.
5.1. 홍콩에서의 인기
홍콩에서 사이조 히데키는 천황거성으로 불리며, 전성기 시절 허관걸과 알란 탐의 업적에 비견되는 아티스트로 대우를 받았다.1980년대는 홍콩에서 일본 대중문화가 유행했던 시기였다. 이에 맞춰 1980년대에 일본 대중가요 중 많은 곡들이 광동어 가요로 리메이크 되었고, 사이조 히데키의 노래도 또한 홍콩 가수들이 리메이크했다.[11] 사이조의 무대 의상, 앨범 커버 사진, 활동 콘셉트 등은 나문, 매염방, 장국영 등 홍콩 가수들의 활동에 영향을 주었다.
1981년 홍콩 음악제에 스페셜 가수로 참가했다. 동년에 홍콩 RTV에서 사이조의 싱글 음반 勇気があれば 홍보 광고가 나올 정도로 홍콩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9월 12일에는 퀸 엘리자베스 스타디움(Queen Elizabeth Stadium)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이는 사이조의 가수 활동상 처음으로 해외에서 연 단독 콘서트였다.
1982년 8월 2일에 열린 제6회 홍콩 금창편송장전례[12] 사이조의 앨범 《사이조 히데키 베스트 28(西城秀樹ベスト28)[13]》이 '비(非) 홍콩음반' 부문에서 최고의 상인 백금창편(플래티넘 골드 디스크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홍콩에서 사이조의 음반이 많이 팔렸다. 또한 이 시상식에서 사이조는 이츠와 마유미, Air Supply, Bee Gees, Diana Ross & Lionel Richie와 함께 '가장 걸출한 외국가수상(最傑出外國歌星獎)'[14]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홍콩의 딸로 불리는 홍콩의 슈퍼스타 매염방은 10대 중후반 시절부터 사이조 히데키의 열성팬이었다. 사이조의 공연에 매년 찾아갔고, 가수로 데뷔(1982년 7월)하기 이전에 사이조 히데키 홍콩 팬클럽의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매염방은 1984년 11월 6일에 일본에서 있었던 영 아시아 가요제(ヤングアシア歌謡祭, NHK 방송)[15]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우상이었던 사이조 히데키와 같은 무대에 섰고, 자신의 음반 비약무대(飛躍舞台)를 선물하며 팬과 스타의 인연을 이어갔다.
| ▲ 1985년 홍콩 TVB 환락금소(歡樂今宵)에 출연한 사이조 히데키와 매염방 |
가수, 배우, MC로서 탑스타 자리에 있었던 매염방은 팬이자 친구의 자격으로 사이조가 콘서트 등의 스케줄로 홍콩에 찾아왔을 때 마중을 나가거나 여러 번 업무에 동행했다. 1985년에 사이조 히데키가 게스트로 출연한 TVB의 간판예능 환락금소에서 당시에 사이조의 음반이 홍콩에서 약 2만장가량이 팔려 1985년도 홍콩금창편송장전례(香港金唱片頒奬典禮)에서 금창편(골드 디스크상)을 수상했던터라, 그 상패를 매염방이 환락금소에 게스트로 출연한 사이조에게 전달하였다.
1987년에는 홍콩 영화 천사행동(天使行動, Iron Angels, 한국 개봉명: 포리스 마담)[16]에 주연 배우로 출연했다. 천사행동은 한국과 일본에서는 1989년에 개봉했다.
1989년 1월 28일에 사이조 히데키는 장국영 등과 함께 RTHK 개국 6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같은 날에 홍콩 콜리세움에서 사이조 히데키의 홍콩 콘서트가 열렸다. 매염방, 성룡, 이극근, 광미운은 사이조를 응원하기 위해 사이조의 콘서트 현장에 찾아갔다. 당시 성룡은 사이조 콘서트에 게스트 가수로 참여해 사이조와 함께 콘서트 엔딩곡으로 Sail Again[17]을 같이 불렀다.
1993년에 홍콩 TVB의 예능 방송 오락신문안(娛樂新聞眼)에도 출연하였다. 1995년에는 일본과 홍콩의 스타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고 양국의 친선을 도모하는《일본홍콩축제의 홍콩 일본 거성 대연맹(日本香港節之港日巨星大聯盟)》[18][19]에 참석했다. 이 행사에서 사이조는 자신의 노래인 갸란두와 愛が止まらない ~Turn it into love~를 불렀고, 친선 무대로 곽부성, 관숙이와 Y.M.C.A.를 불렀다.
| ▲ 1995년 홍콩에 방문한 사이조 히데키 인터뷰 |
사이조 히데키는 2007년에 IFPI 홍콩 설립 40주년 기념 이벤트에 초청받아 '傷だらけのローラ'와 'めぐり逢い'를 불렀다. 또한 사이조는 홍콩 IFPI Top Sales Music Award에서 광동 팝에 지대한 영향을 준 해외 아티스트에 선정되었다. 관련 영상
2019년 4월 14일에 열린 제38회 홍콩 영화 금상장에서는 사이조 히데키를 비롯해 사망한 아시아의 영화인들을 추모하는 의식이 있었다. 관련 영상
6. 사망
2003년 6월에 대한민국 제주도에서 디너쇼를 며칠 앞두고 뇌경색이 발견되었다. 사이조 히데키는 제주도에서 디너쇼를 마친 뒤 귀국하여 치료를 받은 뒤, 한동안 활동을 쉬고 회복에 전념했었다. 복귀하여 활동하던 중인 2011년에 뇌경색이 재발하는 위기를 겪었으나 치료를 마치고 2015년에 신곡을 포함한 기념앨범 心響 -KODOU-를 2015년 4월 13일에 발매하였다. 꾸준히 재활 치료를 받으며 2016년 데뷔 45주년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마치는 등 가수 활동의 의지를 굳건히 보여주었다.2018년 4월 19일에, 도쿄도 네리마구의 네리마 문화센터에서, 일본 가수 협회가 주최한 제23회 홍백가합전에 출전한 지인을 응원하기 위해 관객으로 참석했다. 맨 뒷좌석에 앉은 사이조를 알아본 사회자는 인터뷰를 요청했으며, 사이조는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여 자리에서 일어나 사회자의 질문에 응답했다. 이날 사이조 히데키는 그를 알아본 팬들과 같이 사진을 찍기도 했다. 결국 이 행사는 마지막으로 참여한 공식적인 활동이 되었다.
2018년 4월 25일 자택에서 저녁 식사후 갑자기 쓰러졌다. 약 3주간 투병 후, 2018년 5월 16일 오후 11시 53분에 급성 심부전으로 요코하마시에 위치한 쇼와의과대학 후지가오카 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63세.
7. 여담
7.1. 출신 및 가족
재일교포 출신이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던 인물들 중 하나였다. 재일교포들이 많이 사는 히로시마 출신이었고, 드라마 파친코에서도 보였듯이 재일교포들이 자주 운영했던 파칭코 사업 또한 히데키 아버지의 본업이었다.결정적으로 재일 조선인을 포함하는 소수민족 문제를 전문으로 하는 출판사인 '지겐샤(示現舎)'가 2018년에 자사 홈페이지에 흥미로운 포스트를 올린 적이 있다. 이 포스트는 1975년 12월 10일자 관보(일본 국립인쇄국 발행) 기사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 기사에는 '李乙龍(이을룡)'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귀화해서 '木本龍雄(키모토 타츠오)'가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 '키모토 타츠오'는 다름 아닌 사이조 히데키의 본명이다. 게다가 이 기사에는 키모토 타츠오의 출생년도(1955년 4월 13일)도 적혀 있는데 이것도 사이조 히데키의 프로필과 일치한다. 사이조 본인은 생전에 출생의 비밀이나 귀화 여부를 언급한 적이 없었지만, 워낙 증거가 뚜렷하기 때문에 실제로 일본으로 국적을 바꾼 재일조선인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어머니에 대한 정보는 부족한 편. 결혼 전 성씨도 공개된 적이 없다. 그렇지만 아버지에 비해 어머니는 상대적으로 자주 언론 매체에 모습이 공개되었다. 히데키 본인 말을 따르면, 어머니는 아들 바보여서 다 커서도 밥을 꼬박꼬박 챙겨줬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어머니 또한 개명했다고 나와 있다. 1974년도에 '토시코(トシ子)'에서 '야스코(靖子)'로 개명한 모양. 일본에서 DQN 네임이 아닌 이상 개명이 흔하지 않은데, 더군다나 쇼와 시대 초기에 태어난 사람이 '토시코'라는 일반적인 이름을 굳이 개명한 것은 특이한 행동이다. 아마도 어머니 또한 귀화를 했고, 이왕 귀화하는 김에 아예 개명까지 해버렸다는 추측이 있다. 일본 현지에서는 아버지가 한국인으로 하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상술되었듯 어머니도 귀화했다는 가정이 맞다면 순수 한국계가 된다. 히데키가 정말 순수 한국계 또는 하프라면, 현재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장남 키모토 신노스케는 한국계 하프 또는 쿼터가 된다. 신노스케는 2025년에 현역가왕 JAPAN의 톱 7에 진출하며 2025 한일가왕전에 일본팀 가수로 출연했다.7.2. 기타
- 1970~1980년대를 풍미한 전설의 아이돌 스타이며, 동년배인 고 히로미와 노구치 고로 등과 더불어 신고산케(新御三家)라 불리며 인기를 얻었다. 또한 더 베스트 텐에서 역대 최고 득점[20]으로 1위를 한 가수이기도 하다.
- 사이조 히데키는 존경하는 선배이자 롤모델로 후세 아키라와 사와다 켄지를 언급했다. 사이조 히데키는 중학생 때 더 타이거스의 공연에서 사와다 켄지를 보고 '가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이후로 사와다를 음악 활동의 롤모델로 삼아 공부했다고 한다. 사이조가 1971년에 가수 데뷔를 위해 도쿄로 상경하기 전에 히로시마에서 밴드 활동을 할 때 별명은 '히로시마의 줄리'였다.
- 1978년 미국 여행 중에 라디오에서 빌리지 피플의 노래 YMCA를 듣고 이 노래를 리메이크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음반사에서 '외국곡을 리메이크한 노래는 성공하기 어렵다'며 강하게 반대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이조는 뚝심있게 활동곡으로 YOUNG MAN을 밀어붙였다. YOUNG MAN은 1979년에 일본 및 해외에서 대히트를 치며, 1979년에 각종 가요 시상식에서 수상을 할 정도로 사이조 히데키는 가수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 조용필과 같이 NHK '후타리노 빅쇼' 방송에 출연(1995년 12월 11일 방송)하여 공개홀 무대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일본어 가사로 부르기도 했다.
- 아이돌 가수로 데뷔했지만 소학교 4학년 때부터 아이돌 기획사로 들어가기 직전까지 밴드 활동을 하며 실력과 경험을 쌓았기에 여느 가수 못지 않은 뛰어난 가창력 및 악기 연주 실력을 지니고 있다. 사이조는 학창 시절 세계적으로 유명한 드럼 연주자가 되고자 했으며, 소속된 스쿨 밴드에서 드럼을 연주했다. 중학생때는 3살 연상인 친형과 같은 중학교에 다녔는데[21], 중학교 3학년에 재학했던 형은 기타를 연주했고 중학교 1학년에 재학중이던 사이조는 드럼을 연주했다. 드럼 연주 경력을 쌓은 뒤에 고등학생 때부터 밴드에서 보컬을 맡게 되면서 가수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렇기에 드럼 연주 실력도 뛰어나 자신의 공연에서 드럼 연주를 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장남인 키모토 신노스케가 5살이 되자 신노스케에게 드럼 연주를 사사했다. 신노스케는 만 10세때 사이조 히데키의 콘서트에 드럼 연주자로 참여해, 아버지의 노래에 맞춰 드럼 연주를 했다.
- 사이조 히데키는 일본 아이돌계에 혁명을 일으킨 존재로 추앙받고 있다. 1975년 11월 3일에 일본 솔로 가수 최초로 무도관에서 단독 공연[22]했으며, 1974년 8월 3일에는 일본 솔로 가수 최초로 야구장에서 단독 공연[23][24]을 했다. 그리고 콘서트에서 사이리움(야광봉)을 사용하고, 관객과의 야리토리(함성을 주고받음)를 최초로 사용하는 등 현대 일본의 콘서트에서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요소들은 전부 사이조 히데키가 가장 먼저 시작했다고 일컬어진다. 사이조는 자신의 콘서트 및 음반 기획을 직접할 정도로 가수 활동에 적극적이고 열정적이었다.
- 쿠와타 케이스케와 친분이 있었다. 팬들에게 깜짝 이벤트를 보여주고 싶다는 쿠와타 케이스케의 제안을 받아들여 사잔 올 스타즈의 1995년 요코하마 미나토미라이 콘서트에서 오프닝 가수로 Y.M.C.A.를 불렀는데 그 반응은 영상에 의하면 사잔 올 스타즈 콘서트인지 히데키 콘서트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쿠와타 케이스케는 이후 자신의 솔로 활동에서 메들리로 사이죠 히데키 버전의 Y.M.C.A.를 안무를 곁들여 부르기도 했고 AAA 2013 혼자서 홍백가합전 콘서트에서는 사이죠 히데키의 대표곡 중 하나인 傷だらけのローラ를 리메이크하기도 했다.[25][26]
- 일본 속어로 '가슴털~배털~음모 라인이 수북한 사람'을 의미하는 '갸란두(ギャランドゥ)'의 유래이기도 하다. 사이조 히데키의 44번째 싱글인 갸란두에서 유래되었는데, 마츠토야 유미가 사이조 히데키의 배털이 수북한 것을 보고 개런드라고 멋대로 지칭한 것이 속어로서 굳은 것.
- 치비 마루코짱 2007년판 드라마 20화에서 특별출연했는데, 극중 배경이 바로 자신의 전성기였던 1974년이다! 물론 드라마 촬영 시점에는 중년이었던지라 마루코가 사는 동네 인근 상점가의 생선가게 장수로 나오는데,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자신의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주변 상인들이 그걸 어설프게 따라하자 "너네 뭐야! 히데키의 이미지랑 다르잖아! 실례야!"라면서 버럭 화내다가 나중에는 "이미지가 다르다고! 전혀 달라! 히데키가 불쌍해!!"라고 흐느끼는 개그 컷이 있었으며[27] 막판에는 히데키를 따라한답시고 왕년의 자기 노래를 열창하는 장면이 나온다. 애니메이션의 성우는 ??? / 이주승(대원방송)
- 가수들의 가수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아티스트들이 높이 평가한다. LUNA SEA의 보컬 카와무라 류이치는 데뷔 전부터 사이조 히데키의 노래와 연예계 활동을 지켜봤을 정도로 팬이었고, 각트는 1997년에 傷だらけのローラ를 커버한 것을 계기로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
- 매염방은 생전에 자신의 삶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친 사람 중에 한 명으로 사이조 히데키를 꼽았다. 매염방은 만 16~17세 쯤에 가수의 꿈을 포기할 정도로 슬럼프를 겪어 가수의 꿈을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1981년 9월에 열린 사이조의 홍콩 콘서트를 보고 사이조의 무대 매너에 깊이 영감을 받아 자신의 우상인 사이조와 같은 걸출한 가수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985년에 매염방은 사이조 히데키가 Careless Whisper를 일본어 가사로 번안한 抱きしめてジルバ을 좋아했던터라 소속된 음반사에 Careless Whisper의 광동어 판권을 사올 것을 요청했고, 광동어 가사로 구성된 몽환적포옹(夢幻的擁抱)[28]으로 리메이크했다. 게다가 매염방은 몽환적포옹 뮤직비디오에서 사이조 히데키가 영 아시아 가요제에서 抱きしめてジルバ를 불렀을 때 입은 의상까지 오마주했다. 사이조는 1986년 홍콩 콘서트에서 抱きしめてジルバ를 부를 때 자신을 찾아준 홍콩 팬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노래의 도입부를 몽환적포옹 버전으로 불렀다. 이 뿐만이 아니라 사이조 히데키는 매염방에게 무대 공연 등에 대해 의견을 주었으며,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등 연예계 선배로서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 사이조는 1999년 1월 29일에 열린 제21회 홍콩 십대중문금곡시상식(RTHK 방송)에서 매염방이 금침상을 받게 되자 영상 편지로 축하의 메시지를 전했다.
[1] 1971년 4년제 정시제 과정으로 편입, 1976년 졸업[2] 2001년 6월 결혼[3] 타쿠미 마사노리(활동명: Masa Takumi, 1978년~)는 사이조 히데키 누나의 아들로, 2023년 제65회 그래미 어워드 베스트 글로벌 음악 앨범상(Best Global Music Album)을 수상한 일본의 작곡가다. 관련기사[4] 흔히 고속 철도로 알려져 있는 그 이름과 동일하다.[5] 당시 가업은 아버지보단 주로 형이 운영한다고 적혀 있다.[6] 팔로 알파벳 'Y', 'M', 'C', 'A'를 그리는 안무는 사이조 히데키가 아이디어를 내고 안무가 겸 연출가인 이치노미야 하지메(一の宮 はじめ)가 만들었다. 이 안무는 애니메이션 크레용 신짱에서 노하라 히로시가 YOUNG MAN을 부르며 팔로 'Y', 'M', 'C', 'A'를 그리는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올 정도로 20세기에 일본을 비롯한 각 국가에서 히트를 친 안무였다. 원조 가수인 빌리지 피플도 후에 이 안무를 사용하기도 했다.[7] 유달리 유행어 패러디가 많았던 러키스타 6화에서 코나타가 해변의 식당의 카레를 먹으면서 말한 "코나타 칸게키"는 이 캐치프레이즈의 패러디다.[8] 중일우호조약 체결 2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만리장성에서 외국인 아티스트 최초로 야외 콘서트를 진행했다.[9] 胡寅寅, 1962년~2023년[10] 傷だらけのローラ의 앞부분은 프랑스어 가사로, 뒷부분은 일본어 가사로 불렀다. KBS 방송에서는 '로라'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11] 나문, 장국영, 유덕화 등이 사이조 히데키의 노래를 리메이크했다. 임자상, 견니, 구서강, 매염방 등은 사이조 히데키가 번안한 노래를 리메이크했으며 번안곡까지 포함하면 홍콩 가요계에선 사이조 히데키의 노래 중에 약 20여곡 이상이 리메이크 되었다고 한다.[12] 香港金唱片頒獎典禮, 영문: 6th Hong Kong Gold Disc Award Presentation[13] 광동어 표기: 西城秀樹精選28首[14] 이츠와 마유미가 수상했다.[15] 한국의 김수철, 정수라, 일본의 사이조 히데키, 타하라 토시히코, 마츠다 세이코, 체커스, 소년대, 홍콩의 매염방, 싱가포르 남성 가수 1명이 참석[16] 이새봉, 황정리, 오시마 유카리, 강대위 등이 출연한 액션 영화[17] 사이조 히데키가 작곡한 곡이다.[18] 일본: 타니무라 신지, 사이조 히데키, 나카모리 아키나 참석. 홍콩: 나문, 알란 탐, 엽천문, 여명, 곽부성, 관숙이 참석[19] MC: 진미령(일본 활동명: 아그네스 찬), 진백상[20] 9999점.[21] 사이조 히데키는 4월생이지만 소학교를 1년 일찍 입학했기에, 형과 같은 시기에 중학교에 재학할 수 있었다. 밴드 활동도 형의 권유로 시작한 것이었다.[22] 1975년부터 1985년까지 11년 연속 공연[23] 오사카 구장에서 공연. 사이조 히데키는 오사카 구장에서 1974년부터 1983년까지 10년 연속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24] 일본 가수중에서 최초는 더 타이거스로 1968년 8월 12일에 고라쿠엔 스타디움에서 콘서트를 열었다.[25] 2001년에 쿠와타 케이스케의 온가쿠 토라상이란 프로그램에서 쿠와타 케이스케 VS 사쿠라이 카즈토시(미스터 칠드런의 보컬) 노래방 PRIDE 대결에서도 선곡한 적이 있다.[26] 지난 1997년에도 말리스 미제르에 있었던 각트가 커버하기도 했다.[27] 이 장면에서 다른 배우 1명이 히데키의 안무 횟수를 착각해서 NG가 난 상황이었는데, 히데키가 불쌍하네 어쩌네 하는 대사가 이어지는 바람에 죄다 웃음을 참는 모습이 보인다.[28] 1984년 영 아시아 가요제에서 매염방은 자신의 우상인 사이조 히데키와 함께 사이조 히데키의 노래인 갸란두(ギャランドゥ)를 불렀고, 이 경험은 매염방에게 잊을 수 없는 꿈같은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몽환적포옹은 매염방의 경험담을 들은 작사가 정국강이 광동어 가사로 지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