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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영 국가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
장르 | 오디션 프로그램, 음악 방송 | |
채널 | 닛폰 테레비 | |
방송 시간 | 일요일 오전 11시 ~ 오전 11시 45분 | |
방영 기간 | 1971년 10월 3일 ~ 1983년 9월 25일 | |
제 작 진 | <colbgcolor=#8B433C><colcolor=#E8D48B> 감수 | 아쿠 유 |
연출 | 미야지마 아키라, 요시오카 마사토시 등 | |
구성 | 카와무라 시게루, 스즈키 슈지, 시무라 히로시, 하기모토 킨이치 등 | |
출연 | 하기모토 킨이치, 타모리, 사카모토 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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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쇼와 시대의 대표적인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닛폰 테레비에서 1971년 10월 3일부터 1983년 9월 25일까지 약 12년간에 걸쳐 총 619회를 방송했다. 제목은 영화 스타 탄생(A Star Is Born)에서 따온 것이다.
2. 특징
2.1. 프로그램 구성
'스타 탄생!'은 노래 경연대회나 음악 콩쿠르와는 달리 탤런트성이 있는 재능있는 인물을 찾아내서 데뷔시키는 스카우트 쇼 프로그램이었다. 수많은 인기 스타들을 발굴해내 쇼와 시대를 대표하는 오디션 프로그램 반열에 올랐다. 첫 회 시청률은 4.7%였지만, 다양한 출연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인기가 상승했으며, 1978년 5월에는 최고 시청률인 28.1%[1]를 기록했다.엽서 예선부터 여러 차례 예비심사를 거쳐 통과한 14개 조 안팎의 합격자들이 코라쿠엔 홀 TV 중계로 출연했다. 1회 방송에 7개 조가 출전했다. 여기서 심사위원 외에 일반 회장 심사위원도 채점에 참여했다. 아마추어의 눈으로 본 판단이 심사에 가점되어 있는 것이다. 첫 테스트는 예선을 통과한 7명이 겨루는 가창력 테스트였으며, 두 번째 테스트는 사회자 하기모토 킨이치(萩本欽一)를 상대로 탤런트성을 보는 규정 문제였다. 이 2개의 테스트에서 최고 점수를 받은 참가자가 3개월에 한 번 열리는 결전대회(결승전) 출전 권리를 획득할 수 있으며, 이 결전대회에서 최종 합격하면 스타(데뷔)의 길이 열렸다.
채점 방식은 5명의 심사위원과 회장에 있는 일반인 관객들이 각각 점수로 평가해 합계 점수가 '규정점'을 넘으면 합격했다. 심사위원은 1인당 100점, 관객 평가단은 총 500점을 보유했다. 심사위원은 5명이기 때문에 누계 500점, 관객 500점으로 총 1,000점이다. 규정점은 시기에 따라 변동됐다. 예를 들면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을 때는 250점 이상이 합격이었지만, 프로그램 말기에는 300점 이상이 합격점이었기 때문에 커트 라인이 올라간 것을 알 수 있다. 합격자에게는 닛폰 테레비 음악학원 입학 안내서와 장학금이 부상으로 증정됐다. 그 자리에서 남색 블레이저 코트를 걸치고, 마지막에는 "만세!(반자이)"를 외치고 프로그램이 종료되는 흐름이었다.
<colbgcolor=#8B433C><colcolor=#E8D48B> |
플래카드를 올려 참가자의 영입 의사를 밝히는 연예 기획사 관계자들 |
기존의 선발 형식과 달리 다수의 최종 합격자가 나올 때도 있었고, 한 명도 합격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2] 획기적이었던 것은 '결전대회 입찰제도'였다. 예선을 통과한 합격자는 최종 결승전인 결전대회에 진출하는데, 여기서 음반사와 연예기획사 스카우터들이 영입 의사를 전하는 플래카드를 올리면 데뷔 성공이었다. 마음에 드는 참가자들에게 기획사나 음반사가 플래카드를 올리는 시스템은 '사람을 가지고 경매를 한다', '인신매매적인 시스템'이라는 비판과 논란도 있었지만, 프로그램의 의도는 기획사의 관계자나 스카우터 측이 얼굴을 비춰서 이들에게도 책임을 지도록 하는 데 있었다. 또한 "빛나는 재능만 있으면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다"라는 기획으로 쇼와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들을 배출했다.
'스타 탄생!'은 테크닉이 좋고 경험이 있는 가수들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노래를 잘하는 응모자를 채용하는 기존의 일본 오디션 프로그램[3]의 방법을 취하지 않았다. 스타 탄생에서 합격해 데뷔한 가수들은 대부분 전문 훈련을 받지 않은 아마추어였다. 선발 방법이나 심사 기준은 유동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기획자 아쿠 유(阿久悠)는 "서투른 것을 선택합시다. 그것과 젊음을"이라고 주위에 이야기해 "이른바 능숙해 보이는 완제품보다 미숙해도 뭔가 느끼는 점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선택하고 있었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노래는 미숙해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신선한 친근감이 TV 시대 가수들에게는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프로그램의 디렉터 미야지마 아키라는 스타 탄생에 대해 "음, 어디까지나 탤런트가 되고 싶다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으며 #, 심사위원 나카무라 타이지는 "완성된 스타를 찾는다기보다는 보석 원석을 찾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
이 프로그램의 성공 요인은 두 가지로 꼽힌다. 하나는 '공평하고 투명한 선발 시스템'이다. 지원자는 누구나 엽서 한 장으로 응모할 수 있었으며 모든 심사 과정이 대중들에게 공개됐다. 그동안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연예계 데뷔의 길이 카메라 앞에서 공개된 의의는 매우 컸으며, 일부에 있던 '연예계는 무서운 곳'이라는 이미지를 불식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또다른 성공 요인은 '방송국의 전폭적인 지원'이었다. TV 예선대회 합격자에게는 방송국이 모든 비용을 부담하는 각종 레슨이 실시됐으며, 데뷔 후에는 닛폰 테레비 프로그램에 우선적으로 출연할 수 있게 해줬다. 절대적인 매체력을 보유하고 있던 텔레비전의 지원은 연예 기획사나 레코드 회사에게 있어서 매력적인 시스템이었다. 스타 탄생! 50년 전설 오디션 프로그램의 궤적과 공적
심사위원에는 프로그램의 기획에도 관여한 쇼와 시대를 대표하는 작사가 아쿠 유[4]가 메인을 맡았으며, 작곡가, 성악가, 드라마 각본가, 영화 감독 등 다양한 유명 인사들이 참가했다. 오바야시 노부히코, 토쿠라 슌이치[5], 제임스 미키[6]같은 거물들도 심사위원으로 등장했다. 기존 오디션 프로그램과 달리 신랄한 멘트를 섞은 까다로운 독설 심사가 화제였다. 사회자는 게닌 하기모토 킨이치를 기용했다.[7] 하기모토 하차후에는 타모리가 2대 사회자를 맡았으며, 가수 사카모토 큐가 3대 사회자를 맡았다. 사회자에게는 밝음과 재치, 그리고 참가자에게 다가서는 다정함이 요구됐다고 한다.
2.2. 쇼와 시대 아이돌의 등용문
야마구치 모모에 | 나카모리 아키나 & 코이즈미 쿄코 |
'스타 탄생!'이 아이돌 황금기를 만들었다. 어쩌면 나도 아이돌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신데렐라 환상이 세상에 생겨났다. 동시에 음반 구매층도 아래 세대로 확산되는 효과도 있었다.
사카이 마사토시 (CBS 소니 프로듀서)[8] #
사카이 마사토시 (CBS 소니 프로듀서)[8] #
'스타 탄생!'은 당대 일본을 대표하는 기라성같은 아이돌 스타들을 많이 배출했다. 그 결과 '스타 탄생!'은 10대 아이돌 가수의 공급원이 됐다. 시기별로 스타 탄생의 등장한 가수들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 제1기(1971~1973): '스타 탄생!'의 인기를 확립한 인물은 제1회 결전 대회에서 그랜드 챔피언을 수상한 모리 마사코였다. 그리고 모리와 같은 학년의 참가자인 사쿠라다 준코와 야마구치 모모에 역시 이 시기에 등장했다. 이 셋은 일명 '꽃의 중3 트리오'이라고 불리며 당시 아이돌 붐을 견인했으며, 배우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역대 최다인 25개 회사로부터 스카우트된 사쿠라다 준코는 1973년의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야마구치 모모에는 쇼와 시대를 대표하는 가희 중 한 명으로 성장했다.
- 제2기(1974~1976): 이 시기에는 모리 마사코와 동세대인 이토 사키코(伊藤咲子), 이와사키 히로미, 카타히라 나기사(片平なぎさ), 쿠로키 마유미(黒木真由美)를 발굴해내는 한편, 죠 미치루(城みちる), 와타나베 히데요시(渡辺秀吉), 니이누마 켄지(新沼謙治) 등 남성 가수도 다수 배출했다. 실력파라고 불리는 가수들이 다수 등장한 것도 제2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안방을 파고든 스타들의 친근감 어필이 성공하면서 시청자들은 아마추어가 스타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즐겼다고 한다.
- 제3기(1976~1979): 밀리언 히트를 연발해 사회현상급 인기를 누린 걸그룹 핑크 레이디를 필두로 이시노 마코, 시미즈 유키코(清水由貴子), 카나이 유코(金井夕子)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합격자다. 또한 당시 각 음악제 신인상에는 '스타 탄생!' 출신 가수들이 상을 휩쓸었다. '스타 탄생!'의 엄청난 흥행으로 제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권세를 자랑했던 와타나베 프로덕션의 입지가 흔들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여러모로 '스타 탄생!'의 최전성기였으며, 프로그램의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것도 이 시기이다.
- 제4기(1980~1983): 이 시기를 대표하는 합격자는 나카모리 아키나, 코이즈미 쿄코, 카시와바라 요시에, 오카다 유키코 등이다. 특히 나카모리 아키나는 데뷔 이후 엄청난 활약을 해 쇼와 시대를 대표하는 가희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이 시기에 스타 탄생은 낮은 시청률로 부진을 겪었다. 연예 기획사들이 자체 오디션을 개최하기 시작했으며[9], 싱어송라이터와 뉴 뮤직의 대두 등으로 발굴 기능이 서서히 저하했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청률이 10%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결국 폐지에 이르렀다.
2.3. 응모부터 데뷔까지의 길
1971년부터 1983년까지의 방영 기간 동안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예선 신청을 했다. 그중에서 최종 합격에 성공해 데뷔한 사람은 88조 91명이다.
'스타 탄생!' 최종 합격자들의 응모부터 데뷔까지의 길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위의 표를 참고해서 요약했다. 출처
- 제1단계
- 예선대회: 예선대회는 도쿄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열렸다. 엽서로 응모한 500~700명이 참가했다. 지방 예선은 연 10회 정도 개최했다. 예선대회 시스템은 아주 간단했다. 응모자는 프로그램의 디렉터를 맡고있는 심사위원 앞에서, 가창력 심사를 받았다. 이 심사에 합격한 사람만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는데 매번 합격자는 10명 안팎이었다. 참여 인원이 많았기 때문에 불합격자에게는 4소절 가창만으로 '네 종료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 텔레비전 예선 출연: 예선대회에서 합격한 5~7명의 참가자들이 TV 예선 심사에 출연했다. 녹화가 평일이기 때문에, 출연자의 상황에 따라 부모님이나 학교 등의 출연 허가를 얻은 후 출연했다. 1차 심사에서는 이 중에서 50명까지 단번에 좁혔다. 2차 심사도 같은 방법으로 진행해 30명까지 좁혔다.
- 레슨 개시: 최종 결승전인 결전 대회를 향해서 지정 레슨 기관에서 보컬 트레이닝 등을 받았다.[10]
- (3개월 후) 미용 레슨: 기본적으로 도쿄에서 행해졌다. 프로그램이 준비한 개별 지도원에 의해 결전 대회 출전 시의 헤어 메이크업, 복장 등을 검토받아 결정했다. 또한 동시기에 '사전 답사회'를 진행했다. 연예 기획사와 레코드 회사가 참가해 결전 대회 전에 참가자를 체크하는 장소를 마련했다.
- 결전대회: 최종 심사. 남을 수 있는 인원은 규정되어 있지 않았고 시기에 따라 증감했다. 참가자는 결전대회에서 마지막 가창곡을 불러 자신의 재능을 뽐냈다. 가창이 끝난 후 연예 기획사와 음반사가 플래카드를 들어 참가자의 입찰 합격을 결정했다.
- 가계약: 이 시점에서 최종 합격자는 일단 닛폰 테레비 음악과 가계약을 맺었다.
- 제2단계
- 면접: 합격자는 자신을 입찰한 회사와 면접을 진행했다.
- 의사결정: 가족과 면담 후 연예인으로서의 취업 결정 및 결의를 다지고, 스카우트된 소속사를 선택해 희망 회사에 대한 검토를 실시했다.
- 결정: 닛테레 스타 탄생계 소속 연예 기획사와 소속 레코드 회사가 검토하여 닛테레 음악위원회에 최종 결정해 연락을 한다. 그리고 참가자는 정식으로 '합격자'가 된다.
- 제3단계
- 회합: 합격자, 연예 기획사, 레코드 회사, 닛폰 테레비에서 1차 회합을 했으며, 합격자의 상황에 따라 전학과 이사 등을 논의했다.
- 검토회: 데뷔일, 예명, 캐치프레이즈를 검토했다. 동시기에 합격자들은 연예 기획사와 고용계약을 맺었으며, 레코드 회사와 레코딩 계약을 맺었다.
- 작가 결정: 데뷔곡 제작에 종사하는 작사가와 작곡가를 면접 후 검토했다.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이자 작사가인 아쿠 유가 합격자들의 데뷔곡에 가사를 써주기도 했다.
- 데뷔 준비: 레슨과 녹음을 병행했으며, 데뷔 전 캠페인을 진행했다.
- 데뷔
3. 역대 정규 출연자
3.1. 사회자
사진의 왼쪽 인물 |
타모리(왼쪽)와 타니 하야토(오른쪽) |
이시노 마코(왼쪽)와 사카모토 큐(오른쪽) |
- 4대 진행자 요코야마 야스시·니시카와 키요시(横山やすし・西川きよし): 이 두 명은 만자이 콤비로 유명한 게닌으로, 1980년대 초의 발생한 만자이 붐으로 인해 정점에 인기를 누렸다. 1982년 1월 10일부터 진행을 맡았으며, 프로그램 종영일인 1983년 9월 25일까지 진행했다.
3.2. 심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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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초기의 심사위원들 |
- 아큐 유(阿久悠): 프로그램의 기획자이자 심사위원으로 이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이다. 70년대 일본 가요계를 평정한 인기 작사가였으며, 오디션 합격자의 데뷔곡의 가사를 작성하고 프로듀싱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핑크 레이디를 프로듀싱해 엄청난 대박 히트를 기록했다. 자수포장 수훈자다.
- 마츠다 토시(松田トシ): 일본의 가수, 성악가. 쇼와 시대의 유명 가수 중 한 명이었으며, 10년동안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자수포장 수훈자다. 스타 탄생!의 참가한 나카모리 아키나에게 혹평을 날렸으며 박한 점수를 준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마츠다 토시는 아키나에게 "얼굴이 아이같기 때문에 무리네. 동요라도 노래하는 편이 좋지 않아?"라고 혹평했다. 아키나는 "스타 탄생에서는 동요를 받아들이지 않았잖아요"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 이와사키 히로미의 스승이기도 했다.
- 나카무라 타이지(中村泰士): 쇼와 시대의 유명 프로듀서이자 작사가. 심사위원 활동 당시 나카모리 아키나와 사쿠라다 준코를 발굴했다. 아키나에게 "완벽하기 때문에 100점을 주고 싶었다"라고 말했지만, 스코어 점수판이 99점까지 넘어가는 사양이었기 때문에 스타 탄생 제작진 측에 항의했다고 한다. #
- 토쿠라 슌이치(都倉俊一): 쇼와 시대의 유명 작곡가. 70년대에 아쿠 유와 콤비로 활동해 많은 히트곡을 낳았다. 일본음악저작권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2021년부터는 문화청 장관을 역임하고 있다. 일본 문화공로자 수훈자.
- 미키 타카시(三木たかし): 쇼와 시대의 유명 작곡가. 이 인물도 70년대에 아쿠 유와 콤비로 활동해 많은 히트곡을 만들었다. 날아라 호빵맨의 주제가 'アンパンマンのマーチ'를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자수포장 수훈자다.
- 모리타 코이치(森田公一): 작곡가이자 밴드 '모리타 코이치와 톱갤런트'의 멤버였다. 이 인물도 아쿠 유의 음악 파트너였다.
- 고바야시 아세이: 수많은 CM송, 애니메이션, 가요곡을 만든 작곡가.
- 제임스 미키(ジェームス三木): 드라마 각본가이자 작가. 수많은 히트 드라마를 만들어서 시청률 제조기라고 불린 인기 작가였다. 대표작은 그 유명한 독안룡 마사무네다.
- 오오모토 쿄케이(大本恭敬): 작곡가, 편곡가, 발성 지도가, 보컬 트레이너. 일본에서 최초로 보이스 트레이닝 룸을 만든 사람 중 한 명이다.
- 핫토리 카츠히사(服部克久): 작곡가.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중심으로 한 악기집을 발매해 큰 인기를 누렸다. 아버지는 국민영예상을 수상한 작곡가 핫토리 료이치(服部良一)이며, 아들은 작곡가 핫토리 타카유키다.
- 카마야츠 히로시(かまやつひろし): 60년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밴드인 더 스파이더스(ザ・スパイダース)의 멤버다. 솔로 활동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 미하시 미치야(三橋美智也): 쇼와 가요계를 대표하는 남성 가수 중 한 명. 1930년대에 절대적인 인기를 누렸다.
- 겐 테츠야(弦哲也): 작곡가. 일본작곡가협회 회장직을 역임했다.
4. 역대 최종 합격자
결전대회에서 최종 합격해 연예계에 데뷔한 가수들을 기재한다.4.1. 1970년대
데뷔일 | 합격자 | 연예 기획사 | 레코드 회사 | 데뷔곡 | 비고 |
1972.06.25. | 모리 마사코[11] | 호리프로 | 도쿠마 음악 공업 | せんせい | 제1회 결전대회 최우수상 초대 그랜드 챔피언 꽃의 중3 트리오 |
1972. 07. 25. | 미츠하시 히로코 (三橋ひろ子) | 야마토기획 | 도쿠마 음악 공업 | 私の花言葉 | 제2회 결전대회 최우수상 |
1972. 08. 20. | 코스모스[그룹][13] (コスモス) | 다이이치 공영 | CBS 소니 | 若草物語 | 제2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2. 09. 10. | 후지모토 테츠야 (藤本哲也) | 가와하라기획 | 일본 콜롬비아 | 冬の旅 | |
1973. 01. 15. | 미나미 요코 (南陽子) | 아사이 출판 | RCA 레코드 | 赤い花まつり | 제4회 결전대회 합격자 |
독수리와 매[그룹] (鷲と鷹) | 제1프로 | 워너 파이오니어 | さすらい渡り鳥 | ||
1973. 02. 25. | 사쿠라다 준코[15] | 선뮤직 | 빅터 음악 산업 | 天使も夢みる | 제4회 결전대회 최우수상 그랜드 챔피언 꽃의 중3 트리오 |
1973. 03. 25. | 나카타 타이지 (長田たいじ) | 선라이즈 기획 | 테이치쿠 | 女の未練 | |
1973. 05. 10. | 이케다 마사오미 (池田正臣) | 이시이 음악 사무소 | 워너 파이오니어 | われしのぶ | |
1973. 05. 21. | 야마구치 모모에[16] | 호리프로 | CBS 소니 | としごろ | 제5회 결전대회 준우승자 꽃의 중3 트리오 |
1973. 05. 25. | 스키야키군 (すみあきくん) | 아오야마 음악 사무소 | RCA 레코드 | 満員電車 | 제5회 결전대회 우승자 |
마츠시타 케이코 (松下恵子) | 산유프로 | 빅터 음악 산업 | 花嫁の父 | 제5회 결전대회 합격자 | |
1973. 06. 05. | 모가미 유키코 (最上由紀子) | 퀸프로 | 도시바EMI | 初恋 | |
1973. 06. 25. | 실비아 리 (シルビア・リー) | 가와하라 기획 | 도쿠마 음악 공업 | 霧のエトランゼ | 제5회 결전대회 합격자 |
미야모토 겐지 (宮本賢治) | 게이온 | 킹 레코드 | さすらい | ||
1973. 07. 25. | 후지 마사키 (藤正樹) | 호리프로 | 캐년 | 忍ぶ雨 | 제6회 결전대회 최우수상 수상자 그랜드 챔피언 |
1973. 08. 10. | 오가타 아이 (おがた愛) | 사카에 음악 방송 | 일본 콜롬비아 | 別れのブラック・コーヒー | 제6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3. 09. 01. | 스가와라 쇼코 (菅原昭子) | 니카츠 음악 사무소 | 폴리도르 | 十七才の行進曲 | 제4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3. 11. 01. | 사카이 준코 (堺淳子) | 도쿄프로 | 도시바EMI | 祭りの思い出 | 제4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3. 11. 05. | 미도리가와 마코토 (緑川真) | 호리프로 | 빅터 음악 산업 | 高校時代 | |
1973. 12. 20. | 죠 미치루 (城みちる) | 오피스 투 원 | 도시바EMI | イルカにのった少年 | 제7회 결전대회 그랜드 챔피언 |
1974. 02. 01. | 마츠다 신타로 (松田新太郎) | 선뮤직 | 폴리도르 | 君でいっぱい | 제8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4. 04. 20. | 이토 사키코[17] (伊藤咲子) | 오피스 투 원 | 도시바EMI | ひまわり娘 | 제8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4. 05. 25. | 시노즈카 마유미 (しのづかまゆみ) | 바닝프로덕션 | 빅터 음악 산업 | パパはもうれつ | 제8회 결전대회 최우수상 수상자 그랜드 챔피언 |
1974. 06. 25. | 이시에 미치요 (石江理世) | 오자와 음악 사무소 | 캐년 | 目かくし | 제7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4. 07. 25. | 코바야시 미키 (小林美樹) | 게이에이 | NAV 레코드 | 人魚の夏 | 제9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4. 08. 01. | 요네나가 토오루 (米永透) | 올스태프 | 도쿠마 음악 공업 | あれから | 제8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4. 09. 01. | 카지 타카코 (梶たか子) | 오자와 음악 사무소 | 도쿠마 음악 공업 | 京都初雪 | 제9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4. 10. 01. | 마로 코지 (麿こうじ) | 유니언 출판 | CBS 소니 | 悲しみの湖 | 제9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4. 10. 25. | 와타나베 히데요시 (渡辺秀吉) | 호리프로 | NAV 레코드 | ぼくはもう一度恋をする | 제10회 결전대회 그랜드 챔피언 |
1974. 12. 20. | 시바 요코 (柴葉子) | 위닝 프로 | 도호 | 白い羽根 | 제1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5. 01. 20. | 카타히라 나기사[18] (片平なぎさ) | 호리프로 | 도쿄EMI | 純愛 | 제9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5. 02. 25. | 오가와 마사요 (小川真代) | 롯폰기프로 | 캐년 | それでも私は | 제10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5. 03. 25. | 쿠로키 마유미[19] (黒木真由美) | 오자와 음악 사무소 | 킹 레코드 | 好奇心 | 제11회 결전대회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자 |
1975. 04. 25. | 이와사키 히로미[20] | 게이에이 | 빅터 레코드 | 二重唱 (デュエット) | 제11회 결전대회 최우수상 수상자 |
1975. 12. 20. | 메구로 히토미 (目黒ひとみ) | 알토 기획 | 빅터 음악 산업 | 好奇心 | 제8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6. 02. 01. | 니이누마 켄지[21] (新沼謙治) | 제일 프로덕션 | 일본 콜롬비아 | おもいで岬 | |
1976. 02. 25. | 키타무라 유코 (北村優子) | 신에이 프로덕션 | 빅터 음악 산업 | 若草のデート | 제12회 결전대회 그랜드 챔피언 |
1976. 03. 25. | 진보 미키[22] (神保美喜) | 일본 포노그램 | 필립스 레코드 | はじめてのワルツ | 제15회 결전대회 최우수상 수상자 |
1976. 05. 01. | 아사다 노보루 (朝田のぼる) | 선뮤직 | 도쿠마 음악 공업 | 白いスカーフ | 제15회 결전대회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자 |
1976. 05. 21. | 요코모토 메이 (横本メイ) | 오피스 투 원 | 폴리도르 | すてきな貴方 | 제14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6. 08. 25. | 핑크 레이디[그룹][24] | T&C 뮤직 | 빅터 음악 산업 | ペッパー警部 | 제16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6. 09. 25. | 우라베 마사미 (浦部雅美) | 선뮤직 | 캐년 | 少し遠出をしてみませんか | 제15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7. 01. 21. | 칸다 히로미 (神田広美) | NP뮤직 | 폴리도르 | 人見知り | 제17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7. 03. 01. | 시미즈 유키코[25] (清水由貴子) | 게이에이 | CBS 소니 | お元気ですか | 제16회 결전대회 최우수상 수상자 그랜드 챔피언 |
1977. 03. 25. | 쿠키타 미야 (久木田美弥) | 호리프로 | RCA레코드 | 少女自身 | 제15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7. 06. 01. | 타니 치에코 (谷ちえ子) | T&C 뮤직 | 일본 콜럼비아 | 花の女子高数え歌 | 제18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7. 09. 20. | 모노에 카즈에 (ものえ和恵) | 에코 프로 | 도시바 EMI | 帰っちまえ | 제19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7. 09. 25. | 아즈사 마유미 (梓真由美) | 빅터 예능 | 빅터 음악 산업 | 白い猫おいで | 제18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8. 01. 10. | 이와키 토쿠에이 (岩城徳栄) | 신에이 프로덕션 | 킹 레코드 | ダウン・タウン・ベイビー | 제19회 결전대회 합격자 50번째 합격자 |
1978. 02. 01. | 시부야 텟페이[26] (渋谷哲平) | 선뮤직 | 일본 콜롬비아 | 朝日に向って | 제20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8. 03. 26. | 이시노 마코[27] | 바닝프로덕션 | 빅터 음악 산업 | 狼なんか怖くない | 제20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8. 04. 20. | 토요타 키요시 (豊田清) | 게이에이 | 도시바 EMI | 青春PART | 제20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8. 06. 01. | 오오하시 에리코 (大橋恵里子) | NP프로 | 일본 콜롬비아 | 経験シーズン | 제22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8. 06. 20. | 카나이 유코[28] (金井夕子) | 제일 프로덕션 | 캐년 | パステルラヴ | 제23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8. 06. 20. | 키타노 레이코 (北野玲子) | 롯폰기프로 | 도시바 EMI | 初恋景 | 제23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9. 02. 25. | 팝콘[그룹] (ポップコーン) | 선뮤직 | 워너 파이오니어 | ブルーロマンス薬局(ファーマシー) | |
1979. 03. 20. | 카와사키 키미아키[30] (川崎公明) | 롯폰기프로 | 도시바 EMI | ひとりにしてくれ | 제25회 결전대회 그랜드 챔피언 |
1979. 04. 21. | 스가사와 케이코 (菅沢恵子) | 롯폰기프로 | 도시바 EMI | 哀しくて哀しくて | 제25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79. 05. 25. | 이노우에 노조미 (井上望) | 제일 프로덕션 | 빅터 음악 산업 | ルフラン | 제25회 결전대회 합격자 |
4.2. 1980년대
데뷔일 | 합격자 | 연예 기획사 | 레코드 회사 | 데뷔곡 | 비고 |
1980.05. 25. | 키타하라 히로시 (北原裕) | 불명 | CBS 소니 | 愛は今か | |
1980. 06. 01. | 카시와바라 요시에 | 골든 뮤직 프로모션 | 필립스 레코드 | No.1 | 그랜드 챔피언 |
1980. 06. 21. | 카이 치에미 (甲斐智枝美) | 호리프로 | 빅터 음악 산업 | スタア | 제29회 결전대회 그랜드 챔피언 |
1980.10. 25. | 쿠지라이 유카리 (鯨井ゆかり) | 오자와 음악 사무소 | 도시바 EMI | 街はおしゃべり | 제28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80. | 스기타 아이코 (杉田愛子) | 선뮤직 | 킹 레코드 | 花吹雪 | 제31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81. 03. 21. | 야노 아코 (矢野良子) | 뉘밤부 음악 사무소 | RCA 레코드 | ちょっと好奇心 | 제32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81. 06. 21. | 미즈타니 다이스케 (水谷大輔) | 본드 기획 | CBS 소니 | 星屑海岸 | 제32회 결전대회 그랜드 챔피언 |
1981. 11. 25. | 마츠모토 야스지 (松本泰司) | 불명 | VAP | BAD BOY ON STAGE | |
1982. 03. 01. | 나카노 미키 (中野美紀) | 빅터 음악 산업 | 빅터 음악 산업 | 未経験 | 제35회 결전대회 최우수상 수상자 |
1982. 03. 21. | 코이즈미 쿄코 | 바닝프로덕션 | 빅터 음악 산업 | 私の16才 | 제35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82. 05. 01. | 나카모리 아키나[31] | 켄온 | 워너 파이오니어 | スローモーション | 제38회 결전대회 최우수상 수상자 역대 최고 점수(392점)로 합격 |
1982. 05. 21. | 미즈타니 에츠코 (水谷絵津子) | 프로덕션 오로라 | 일본 콜롬비아 | キラリ・涙 | 제39회 결전대회 그랜드 챔피언 |
1982. 12. 24. | 루 핀 차우[32] (ルー・フィン・チャウ) | 프로덕션 오로라 | 폴리스타 | スター誕生 | 제42회 결전대회 그랜드 챔피언 |
1983. 01. 21. | 츠츠미 쿠미코 (堤久美子) | 아사이 기획 | 빅터 레코드 | 浜辺のマドリガル | 제31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83. 02. 21. | 미야하라 마키유코 (宮原巻由子) | 아사이 기획 | VAP | 花明り | 제30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83. 03. 21. | 마츠오 쿠미코 (松尾久美子) | 다나카 프로모션 | 포라이프 | メモワール | 제41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83. 05. 21. | 마츠모토 아키코[33] (松本明子) | 와타나베 프로덕션 | VAP | ♂×♀×Kiss | 제44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83. 06. 25. | 스이타 아스카 (吹田明日香) | 뮤즈프로 | 워너 파이오니어 | ワーナー・パイオニア | 제41회 결전대회 그랜드 챔피언 |
1983. 07. 21. | 카와카미 유키에 (河上幸恵) | 호리프로 | 일본 콜롬비아 | ブルー・エトランゼ | 제36회 결전대회 최우수상 수상자 그랜드 챔피언 |
1983. 07. 25. | 오오타 타카코[34] (太田貴子) | 빙 그란도 | 도쿠마 음악 공업 | デリケートに好きして | 제45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83. 08. 21. | 아이다 에츠코[35] (愛田悦子) | 호리프로 | 킹 레코드 | まわり道 | 승자제 시대의 그랜드 챔피언 |
1983. 11. 21. | 타카하시 미에 (高橋美枝) | 프로덕션 오기 | CBS 소니 | ひとりぼっちは嫌い | 제45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83. 11. | 타키 사토미 (滝里美) | 선뮤직 | 테이치쿠 레코드 | 東京ジンタ | 승자제 시대의 그랜드 챔피언 |
1983. | 오구라 사치코 (小椋幸子) | 롯폰기 오피스 | 빅터 레코드 | 初恋しぐれ町 | |
1984. 04. 21. | 오카다 유키코 | 선뮤직 | 캐년 레코드 | ファースト・デイト | 제46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84. 05. 01. | 타나카 사토미 (田中さとみ) | 마나세프로 | 폴리도르 | 私の神様 | 제37회 결전대회 합격자 |
1984. 07. 21. | 스즈키 유카리 (鈴木ゆかり) | 불명 | VAP | 新プロ野球小唄 中日編 | 승자제 시대의 그랜드 챔피언 |
1985. 07. 21. | 미야노 히로미 (宮野比呂美) | 이벤터 오피스 | 라디오 시티 | 横浜ジゴロ | 제46회 결전대회 합격자 |
5. 여담
- 결전대회(결승전)까지 진출했지만 최종 불합격한 유명 참가자로는 혼다 미나코, 이노우에 아즈미, 사쿠마 레이, 미즈코시 케이코(水越けいこ), 토쿠나가 히데아키 등이 있다. 예선에서 불합격한 유명 참가자로는 야나기바 토시로, 테라시마 마유미(寺島まゆみ), 히노 미카(日野美歌), 와타나베 케이코(渡辺桂子), 오에 센리(大江千里) 등이 있다. CHAGE and ASKA의 ASKA도 스타 탄생에 참가했으나 떨어졌다. 카와이 나오코는 서류 전형 단계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 오디션 프로그램으로서 이례적으로 아침 방송이었다. '스타 탄생!' 방영 이전에도 일본에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모두 골든 타임 시간대 방송이었고 시청률이 낮았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다. 아마추어를 스타로 키우려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바로 중단되어서는 의미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시청률이 크게 요구받지 않는 일요일 오전 11시라는 아침 방송 틀에서 방영했다.
- 당시 닛테레는 음악위원회를 만들어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연예 기획사나 레코드 회사를 심사했다. 닛테레가 '이 회사라면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라고 판단한 약 60개 회사에 결전 대회의 안내장을 보냈다.
- 1976년 시점에서의 오디션 참가 신청 엽서는 하루 평균 1,000통에 달했고, 그 중 어린 여성의 응모가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한다. 어린 여성의 응모가 총 90%를 차지했으며, 어린 남성으로부터의 응모는 극단적으로 적었다고 한다. '스타 탄생!' 출신 탑스타들은 대부분 여성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이었다.
- 해가 갈수록 응모자들이 점차 저연령화되어 고등학생이 등장하면 어른스러운 인상을 줄 정도였다. 가수로 데뷔했다고 해도 아이나 다름없어서, 닛테레의 스태프나 매니저들은 어린 탤런트의 부모님을 대신해 중학교 학부모 참관과 면담에도 참석했다. 이들은 어린 탤런트들을 따라다니며 학교 입시부터 졸업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 스타 탄생! 출신 탤런트와 스태프들은 '스타 탄생 패밀리'라고 불렸다.
- 이 프로그램의 기획자 아쿠 유는 스타 탄생!의 공적을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스타 탄생! 이후의 일본 아이돌이 어딘가 같은 색조,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것에 비해, '스타 탄생'은 모리 마사코이며 사쿠라다 준코이며 야마구치 모모에이고 이토 사키코이며 이와사키 히로미이며 핑크 레이디이며 코이즈미 쿄코이며 나카모리 아키나이다. 공통되는 것은 데뷔 때의 나이 정도로 훌륭하게 다색 인쇄라고 자부하고 있다" #
- 일본 연예계에 상당한 파급력을 끼친 방송이다. 이 프로그램이 시작된 1970년대 초반 일본 TV계에서는 하나 하지메와 크레이지 캣츠, 더 드리프터즈, 더 피너츠, 사와다 켄지, 캔디스 등을 거느리고 있던 와타나베 프로덕션이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다. '스타 탄생!'은 당시 와타나베 프로와 사이가 안좋았던 닛테레가 대책으로 세운 방송이다. 닛테레는 신흥 연예기획사로 설립된 호리프로, 선 뮤직 프로덕션 등과의 관계를 강화해 '스타 탄생!'으로 데뷔한 신인 가수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 결과 와타나베 프로덕션의 권력이 저하되면서 호리프로, 선뮤직 등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번영의 지반을 구축하게 됐다. 닛테레와 와타나베 프로는 1980년대부터 화해했다.
- 프로그램의 제목은 방송의 수석 프로듀서인 이케다 후미오(田文雄)가 만들었다.
- 전성기 당시에는 응모자가 너무 많아서, 예선 대회에 참가하는데 1년 대기를 했다고 한다. 나카모리 아키나에게 스타 탄생 예선대회의 안내가 도착한 것은, 응모 엽서를 투함하고 나서 약 1년이 경과했을 무렵이었다고 한다. #
- 1980년에는 '스타 탄생!'의 자매 프로그램인 '오와라이 스타 탄생!!(お笑いスター誕生!!)'이 방영됐다. 노기자카46의 칸무리방송 '乃木坂スター誕生!'도 스타 탄생!의 오마주다.
- 2011년에는 프로그램의 궤적을 통째로 수록한 DVD 박스셋이 발매됐다. #
- 약칭은 스타탄(スタ誕)이다.
6. 관련 문서
7. 외부 링크
[1] 이 시청률은 1977년 이후 방송된 모든 일본의 음악 방송 시청률을 통틀어서 8위의 기록이다. (NHK 홍백가합전같은 특별 프로그램은 제외) #[2] 합격자가 나오지 않았던 회차는 '오늘은 만세(반자이) 없어!'라고 사회자 하기모토가 외치고 종료했다.[3] 스타 탄생! 이전에도 일본에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많이 있었다. # 스타 탄생!은 기존의 일본 오디션의 형식을 따르지 않았고, 차별화하는 방법을 취해서 인기를 누렸다.[4] 아쿠 유는 이 프로그램에 기획서 작성 단계부터 참여했으며 프로그램 구성 심사에서부터 합격자를 스타로 만드는 프로듀서 역할까지 도맡았다.[5] 작곡가.[6] NHK 대하드라마 시리즈를 대표하는 각본가[7] '나에게는 무리인 프로그램입니다'라고 말하며 마지못해 하는 하기모토를 '아마추어의 편이 되어 줘'라고 방송국 측에서 설득했다고 한다.[8] 7~80년대 쇼와 시대 가요계를 대표하는 프로듀서 중 한 명. 무려 300여명의 아티스트를 배출했다. 일본 문화공로자 수훈자.[9] 대표적으로 호리프로는 호리프로 탤런트 스카우트 캐러밴을 출범했다.[10] 이 레슨비는 닛테레가 부담했다.[11] 13개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그룹] [13] 아이돌이라기보다는 코러스 그룹이었다고 한다.[그룹] [15] 프로그램 사상 최다인 25개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16] 20개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17] 17개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18] 배우로 전업해서 가수보다 배우로 더 유명하다.[19] 18개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20] 8개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21] 남성 참가자로서 프로그램 최다인 17개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참고로 예선에서 4번 불합격했는데, 5수끝에 합격했다.[22] 1개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스타 탄생! 사상 가장 적은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참가자.[그룹] [24] 8개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25] 14개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26] 18개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27] 16개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28] 첫 출전에서는 불합격했지만, 두번째 출전에서 합격했다.[그룹] [30] 후일 카가와 아키라라고 예명을 바꾼다.[31] 11개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참고로 8번째 도전만에 합격했다.[32] 중국계 베트남인이다.[33] 아이돌 데뷔 이후에는 버라이어티 노선으로 전환해 인기 버라돌로 활약했다.[34] 마법의 천사 크리미마미에 주제가를 불렀으며, 성우로도 데뷔했다.[35] 이 방송에서는 이례적으로 20대 후반의 나이로 오디션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