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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pad> | |
| 본명 | 이브 앙리 도나 마티외생로랑 Yves Henri Donat Mathieu-Saint-Laurent |
| 출생 | 1936년 8월 1일 |
| 프랑스령 알제리 오랑 | |
| 사망 | 2008년 6월 1일 (향년 71세) |
| 프랑스 파리 | |
| 국적 | |
| 직업 | 패션 디자이너 |
| 학력 | 파리 의상조합학교 |
| 종교 | 가톨릭[1] |
| 연인 | 피에르 베르제 (1958~1976) |
1. 개요
S’habiller est un mode de vie.
옷을 입는 것은 삶의 방식이다.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 자신의 이름을 딴 명품 패션 브랜드 생 로랑의 공동 설립자이며, 20세기 최고의 디자이너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입생로랑’으로도 줄여서 부른다. 하지만, 프랑스어 발음은 ‘이브생로항’에 가깝다.옷을 입는 것은 삶의 방식이다.
젊은 나이로 데뷔해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당대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최초의 프레타포르테 컬렉션, 최초로 여자에게 남자 수트를 입힌 디자이너(당시에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오뜨꾸뛰르에 최초로 스페인의 짚신이었던 에스파드류를 활용, 계속해서 군복을 여성 오뜨꾸뛰르로 해석, 최초로 오뜨꾸뛰르에 레오파드 패턴을 쓰기도 하고, 패션사에서 길이 남을 이벤트였던 음악과 퍼포먼스를 반영한 최초의 패션쇼[2]를 시도하는 등등 패션사에 큰 혁신을 불러일으켰다.
2. 생애
2.1. 유년기
생 로랑은 1936년 8월 1일, 프랑스 알제리의 오랑에서 프랑스인 부모 '루시엔 안드레 마티외 생 로랑'과 '샤를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지중해의 한 별장에서 미켈레와 브리지트라는 두 여동생과 함께 자랐다. 생 로랑은 복잡한 종이 인형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10대 초반까지는 어머니와 누이들을 위한 드레스를 디자인하기도 하며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이며 성장했다.2.2. 디올 시절
1953년, 생 로랑은 국제 울 사무국이 주관하는 ‘젊은 패션 디자이너 공모전’에 3개의 스케치를 제출했고, 생 로랑은 이 공모전에서 3등을 차지했다. 이 시기에 생 로랑은 파리에서 머무는 동안 당시 프랑스 보그의 편집장이었던 미셸 브루노프를 만나게 된다. 재능있는 새로운 디자이너들을 발굴하고 잘 지원해주는 인물로 알려졌던 미셸 브루노프는 생 로랑이 가지고 온 스케치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되고 '제대로 패션 디자이너가 돼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게 된다. 생 로랑은 결국 그의 충고를 따르기로 하고 파리 의상 조합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곳에서부터 그의 디자인은 여러 사람들에게 금방 주목받게 되었으나, 몇 달 만에 그만두었다. 1954년, 다시 국제 울 사무국 주관 콘테스트에 참가해 친구였던 페르난도 산체스와 당시 독일 출신의 젊은 유학생이었던 칼 라거펠트를 제치고 1등을 차지한다.[3] 생 로랑은 우승 직후 몇 장의 스케치들을 미셸 브루노프에게 가져다주었는데, 브루노프는 크리스챤 디올이 그날 아침 자신에게 보여준 스케치와 생 로랑의 스케치 사이에 밀접한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곧바로 생 로랑을 디올과 만나게 했으며 디올은 그 자리에서 즉시 생 로랑을 고용하기에 이른다.디올은 생 로랑의 천부적인 재능을 금방 알아보긴 했으나, 생 로랑은 디올 하우스에서 직접적인 디자인보다는 스튜디오를 장식하고 액세서리를 디자인하는 등 일상적인 작업을 하며 디올의 밑에서 조수로서 1년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생 로랑은 곧 크리스챤 디올의 오트쿠튀르 컬렉션에 대한 스케치를 본격적으로 제출할 수 있게 되었고, 매 시즌이 지날 때마다, 디올은 이전보다 더 많은 생 로랑의 스케치들을 수용했다. 1957년 8월, 디올은 생 로랑의 어머니를 직접 만나 ‘나의 뒤를 이을 디자이너로 생 로랑을 선택했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이 말을 듣게 된 생 로랑의 어머니는 당시 디올이 52세에 불과했던 터라 ‘벌써 후계자를 선정한다고?’라며 의아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해 10월, 디올이 이탈리아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때 생 로랑과 그의 어머니는 충격을 금치못하게 된다.
| |
| 1957년 디올의 장례식에서의 생 로랑 |
크리스챤 디올이 사망하자 생 로랑은 21세의 젊은 나이에 디올 하우스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맡게 된다. 생 로랑의 1958년 봄 컬렉션은 크리스챤 디올이 재정적인 위험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었던 계기가 된다. 생 로랑은 이 컬렉션에서 디올의 '뉴룩'의 소프트한 버전인 "트라페즈 드레스"라는 창작물을 발표하게 되고, 이 드레스는 생 로랑을 국제적인 스타덤에 올라가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다. 이 컬렉션에 포함된 다른 드레스들은 거의 모두 어깨가 좁고 아래쪽에서 부드럽게 펄럭이는 형태의 디자인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그의 이름을 '생 로랑'으로 줄였다. 왜냐하면 국제 언론들이 자신의 이름을 철자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1958년 가을 컬렉션에서는 호블 스커트와 비트닉(Beatnik) 패션이 돋보이는 쇼를 선보였으나, 그의 첫 컬렉션과 같은 수준의 찬사를 받지는 못했으며 오히려 혹평을 받게 된다. 이 컬렉션은 의도치 않게 생 로랑에게 디올에서의 마지막 컬렉션으로 남는다.
2.3. 군 복무
1960년에 생 로랑은 알제리 전쟁으로 인한 군복무 때문에 프랑스군에 징집되고 만다. 크리스챤 디올 하우스의 오너이자 막강한 언론계 남작이었던 마르셀 부사크가 1958년과 1959년에 생 로랑의 징집을 막기 위해 프랑스 정부에 압력을 가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으나, 생 로랑에게 비참했던 1958년 시즌 컬렉션이 끝마친 뒤 마르셀 부사크가 입대하라고 권유했다는 것이 사실로 전해진다.생 로랑은 동료 병사들과의 트러블과 군생활의 스트레스로 인해 군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한다. 그곳에서 그는 디올로부터 해고되었다는 통보를 받게 되는데, 이러한 사실은 생 로랑의 정신적 상태를 더욱 악화시켰고 발드그라스 군병원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다량의 진정제와 정신작용제를 투여받게 된다.[4] 이 사건을 계기로 생 로랑은 약물중독에 빠지게 되었고 반평생을 알코올에 의존하며 살아가게 된다.[5]
1960년 11월, 군병원에서 퇴원한 생 로랑은 디올 하우스를 계약 위반 혐의로 고소하고 이후 승소해 10만 불을 보상받았다.
2.4. YSL 창립
| |
| 입 생 로랑의 풀 네임 로고 |
생 로랑은 정신적인 회복기를 거친 후, 그의 파트너이자 기업인이었던 피에르 베르제와 함께 미국의 백만장자 ‘마크 로빈슨’으로부터 자금을 받아 그들만의 패션 하우스 이브 생 로랑(YSL)을 시작한다.[6]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입 생 로랑은 비트닉룩, 남녀를 위한 사파리 재킷, 꽉 끼는 바지, 기다란 허벅지 높이 부츠, 그리고 1966년, 가장 유명한 여성용 턱시도 슈트인 르 스모킹(Le Smoking)과 같은 패션 트렌드를 대중화시켰다. 또한, 신조형주의 화가였던 피트 몬드리안의 유명한 회화 작품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에서 영감받아 제작해 1965년에 발표한 몬드리안 드레스는 특히나 유명하다. 이처럼 생 로랑은 60년대와 70년대에 패션 산업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1967년에 생 로랑은 자신의 프레타포르테 하우스인 리브 고쉬(Rive Gauche) 라인을 오픈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는 오트쿠튀르에서 기성복으로 초점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패셔너블한 스타일을 더 많은 고객들에게 패션시장에서 좀 더 저렴하고 알맞은 가격에 제공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생 로랑이 전면적인 프레타포르테 라인을 내놓은 첫 번째 프랑스 쿠튀리에라고 알려져 있다.
프레타포르테 라인을 판매한 YSL의 리브 고쉬 매장 중 첫 번째 매장은 1966년 9월 26일, 파리 6구에 문을 열었다. 이 매장의 첫 번째 고객은 바로 카트린 드뇌브였으며, 생 로랑은 영화에 출연하는 그녀를 위해 많은 의상들을 제작해주었다.
60년대 말 생로랑은 68혁명을 비롯한 청년문화에도 영감을 받았다.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바지, 스카프, 셔츠로 무심한 듯 아름답게 멋을 낸 남녀 시위대가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라고 찬사를 보냈으며, 그해 7월 패션쇼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항의하는 의미로 올블랙 패션쇼를 선보이기도 했다. 링크
이렇듯 생로랑은 당시 청년들의 저항 문화에 그 나름의 방식으로 지지를 보냈으며, 이런 면모로 인해 강준만이 창간한 진보 성향 잡지인 인물과 사상에서 그 시절의 그를 중요하게 소개한 적이 있었다.
르 스모킹 맞춤형 턱시도 정장을 선보인 1965년 가을 컬렉션 등 그의 컬렉션 중 상당수는 팬들과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받았지만, 1940년대 패션에 영감을 받은 1971년 봄 컬렉션 등 일부 컬렉션들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링크
어떤 이는 그가 경험하지 못한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프랑스 점령기를 낭만화시켰다고 비평했고, 또 어떤 이는 당시의 매력적이지 못했던 공리주의를 되살렸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프랑스 신문 회사였던 'Soir'는 생로랑의 1971년 봄 컬렉션에 대해 비웃는듯한 기사 제목을 남기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로 치면, 일제강점기 시절 패션에 영감을 얻은 복고풍 패션으로 일제강점기 미화 논란이 이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그래도 1971년 봄 컬렉션 의상은 비앙카 재거가 믹 재거와 결혼할 때 결혼식 의상으로 선택하는 등, 유명 인사들에게 사랑받았다.
프레타포르테 라인은 비평가들 보다는 대중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었고 이는 곧 생 로랑과 피에르 베르제에게 오트쿠튀르 라인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수입을 벌여들어 주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 생로랑은
1976년 발레 뤼스 쇼는 패션지 WWD에서 별 다섯 개를 줄 정도로 전설적인 쇼로 손꼽히며 그의 전성기를 대표한다. 그의 삶을 다룬 영화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는 부분이다.
1978년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오피움(Opium)'이란 향수를 출시했다. 뜻은 아편(...) 여담으로, 플레이보이 카티의 레이블 명칭인 오피움도 같은 단어를 쓰는 이름이다. 물론, 향수에 아편 성분이 들어간 것은 아니며, 중국에서 영감을 받은 환상적인 분위기의 오트 쿠튀르 컬렉션에 맞춰 나온 것이다.링크 즉, 아편은 어디까지나 비유라는 것이다. 플레이보이 카티가 실제로 아편을 하지는 않듯이 말이다.
이는 훗날 디올의 화장품 콘셉트에도 영향을 주었다. 향수 이름인 쁘와종(독), 립 메이크업 제품인 어딕트(중독)는 여기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중국계 커뮤니티에서는
그러나 이런 반발이 오히려 화제성을 키워 오피움 향수는 날개 돋힌 듯 팔렸고, 심지어 중국에서도 90년대 이후에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다만 현재는 마약 미화를 이유로 중국 정부에서 판매를 금지했다.
이런 전성기와는 대조적으로, 몇 년 동안 건강이 위태로웠던 생 로랑은 매년 두 개의 오트쿠튀르와 두 개의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을 디자인해야 하는 중압감에 따라 성격이 변덕스러워졌으며, 점점 술과 마약에 의존하게 되었다. 일부 쇼에서는 쇼가 끝날 무렵 간신히 런웨이 무대를 걸을 수 있었고, 모델들의 부축을 받아야만 했다.
이 때문에 심지어 1970년대에는 그가 죽었다는 가짜 뉴스가 나돌기도 했는데, 훗날 2000년 더 가디언 인터뷰에서 본인이 이를 유머러스하게 언급했다. 링크
2.5. 말년
1983년 생 로랑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단독 전시회를 개최한 최초의 살아있는 패션 디자이너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90년대에 들어서는 기존의 스타일을 고수했고, 이것이 샤넬을 혁신시킨 칼 라거펠트와 비교되면서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다만, 30여 년 후에 이 시기의 컬렉션이 남초 여초를 막론하고 재조명되었다.[8] 특히 프랑스 월드컵 개막식에서 선보인 패션쇼는 2024년 파리 올림픽 개막식과 비교되면서 재조명되었고, 1999년 오트 쿠튀르 컬렉션에서 레티시아 카스타가 선보인 여름 신부 드레스는 여초 커뮤를 중심으로 레전드라는 찬사를 받았다.
2001년에는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2001년에는 이탈리아의 출판사인 노베첸토가 주최하는 황금장미상(Rosa d’Oro) 수상자로 선정됐다. 링크 하지만 상을 받으러 시칠리아를 방문했을 때 어깨가 부서져서 부목을 대고 시상식에 참석했다. 시상식 직후 비행기를 타고 미국인이 운영하는 병원에 가서 몇 달간 치료를 받았으나 영영 회복되지 못했으며, 나중에는 한쪽 어깨도 망가져 죽을 때까지 장애를 안고 살았다.[9]
생로랑은 2002년에 은퇴하여 점점 더 은둔 생활을 하게 되었고, 애완동물인 프렌치 불독 무지크와 함께 노르망디와 모로코에 위치해있던 그의 집에서 머물렀다.
생로랑 사후 피에르 베르제가 파리마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은퇴 후에는 연필을 한 번도 들지 않았다고 하는데, 은퇴 전에 당한 어깨 부상이 원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10]
또한 그는 파리에서 피에르 베르제와 함께 이브 생 로랑 하우스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피에르 베르제-이브생 로랑 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피에르 베르제 사망 후 이 재단은 생전에 이브 생로랑과 피에르 베르제가 소유했던 마조렐 정원을 관리한 미국인 조경가 매디슨 콕스[11]가 회장직을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다. 부회장은 이브 생로랑에게 영감을 준 뮤즈 중 하나인 베티 카트루의 딸 막심 카트루가 맡고 있다.[12]
2.6. 사망
생 로랑은 2008년 6월 1일, 파리에 위치한 그의 집에서 교모세포종으로 인해 사망했다.[13]생 로랑이 살 날이 1, 2주밖에 남지 않은 상태에서 말기 판정을 받자, 피에르 베르제와 의사는 생로랑에게 그의 임박한 죽음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상호 결정했다고 한다. 피에르 베르제는 이후에 "나는 생 로랑이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만큼 강하지 않은 사람인 것을 잘 알고있다"고 언급했다.[14]파리의 Église Saint-Roch에서 생 로랑의 가톨릭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의 장례식에는 이란의 전 왕비였던 파라 팔라비와 자크 시라크의 영부인 베르나데트 시라크, 카트린 드뇌브, 니콜라 사르코지와 그의 부인이었던 카를라 브루니 등이 참석했었다.[15]
그의 시신은 화장되었고 그의 유골은 1980년부터 피에르 베르제와 함께 소유했던 거주지이자 식물원이었던 모로코 마라케시에 위치한 마조렐 정원에 뿌려졌다. 이후에 피에르 베르제는 영감과 휴식이 필요할 때면 언제나 그곳을 방문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피에르 베르제는 2010년에 먼저 떠난 평생의 연인 생 로랑에게 보내는 편지인 <Lettres à Yves>를 출간했다. 피에르 베르제는 이 책을 두고 '나의 방식으로 쓴 이브 생 로랑의 전기'라고 표현했다. 한국판은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라는 제목으로 2021년에 프란츠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3. 디자인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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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디자인 철학 |
예로부터 패션을 여성인권과 연결시켜 디자인에 반영하는 브랜드로 유명했다. 미니스커트라든가, 노브라로 맨가슴을 드러내는 시스루 룩 등, 매우 파격적이고 노출도 높은 여성 패션을 선보이는 브랜드.
또한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패션을 여성용으로 재해석하는 것도 특기다. 예를 들어 최초의 여성용 정장 수트, 최초의 여성용 턱시도, 최초의 여성용 트렌치 코트 등을 선보여왔다. 그정도로 옷에 ‘최초의 여성용’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면 대체로 이 곳에서 나온 것들.
미술 작품을 패션에 접목하는 시도도 활발했다. 대표작으로 몬드리안 드레스가 있으며, 마티스, 반 고흐의 작품을 소재로 한 의상도 있었다.
4.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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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생 로랑#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생 로랑#|]] 부분을 참고하십시오.5. 기타
- 게이였다. 1991년 르 피가로 인터뷰를 통해 비로소 커밍아웃했다. 링크 어린 시절 엄격한 가톨릭 커뮤니티에서 받은 괴롭힘과 내성적 성격이 겹쳐 알제리에서 몰래 다른 동성애자 소년들과 교제했다고 한다.
- 최초로 여성을 위한 바지 정장을 만들고, 1962년에는 세계 최초로 흑인 모델인 Fidelia를 런웨이에 올렸으며, 1978년에는 오트쿠튀르 패션쇼에도 흑인을 세웠다. 링크 오트쿠튀르 패션쇼는 소수의 상류층을 고객으로 하는 옷을 선보이는 자리였기에, 저 시절에 흑인을 런웨이에 세운다는 것은 엄청난 반발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고, 실제로 현장에 있던 미국인 여기자가 도중에 나가 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최초의 오트쿠튀르 흑인 모델은 마르티니크 출신의 공항 아나운서였던 무니아로, 70~80년대에 톱 모델로 활약하여, 나오미 캠벨 등 후배 흑인 모델을 위한 길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니아는 모델을 은퇴한 후에는 화가가 되었다. 링크
나오미 캠벨은 1988년 보그 프랑스판 표지에 최초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이브 생 로랑의 공로였다며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링크
-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때 결승전 이전에 경기장 패션쇼를 기획해 선보였다. ###[16] 그리고 이 패션쇼는 다소 뜬금없게도 2024 파리 올림픽의 개회식이 진행되고 나서 재평가를 받았다. ##
- 디올시절에 발칙한 루루 (La vilaine Lulu)' 라는 동화책을 집필하게 되는데, 같은 디자이너 동료인 '장 피에르 프레르'가 일과가 끝나면 모델 의상실에 들어가 재멋대로 의상을 입고 변장하는 걸 즐기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모습을 보고 집필한 것이고, 거기에 주인공의 이름을 자신의 뮤즈인 '루루 드 라 팔래즈'의 이름을 붙였다. 디올 디자이너 시절 때의 화풍이 특징으로 패션을 전문적으로 전공한다면 한 번 보는것도 나쁘지 않지만 대놓고 인신매매라던지, 계획살인등 이 나오기 때문에 동화치곤 수위가 높다. 우리나라에서는 1999년에 번역 출간되었고, 2007년에 재출간되었지만, 2025년 기준으로 절판 상태다. 링크
- 15살 무렵에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대표작인 보바리 부인의 삽화를 그렸다. 2021년에 플로베르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이브 생로랑의 소년 시절 그림을 삽화로 넣은 보바리 부인이 출간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플로베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방미경 가톨릭대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됐다. 링크
- 골초였다. 하루에 담배를 150개비, 즉 7갑 반을 피웠다고 한다. 다만 의외로 술에는 약해서 와인 한 잔에도 취하는 체질이었으나, 우울증이 심해서 중년에는 심각한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렸다. 다만, 사업 파트너이자 평생 동반자인 피에르 베르제의 도움으로 1990년대 초에는 술을 끊었다.링크
- 그를 알코올 중독과 마약 중독으로 본격적으로 끌어들인 인물은 칼 라거펠트의 평생 연인이었던 자크 드 바셰였다고 한다. 원래 생로랑은 라거펠트와 친분이 있었고, 1973년에 라거펠트를 통해 자크를 알게 된 후 각자 연인이 있음에도 바람을 피웠다. 링크 하지만 라거펠트는 자크와는 말 그대로 플라토닉한 관계였으므로 자크가 생로랑과 바람을 피워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 라거펠트의 말에 따르면 'He was everything I could not be, would be or should be.(그는 내가 될 수 없는, 될 수 있을, 되어야 할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한다. 라거펠트는 금욕적인 성향이라 음주와 흡연도 하지 않았는데, 자신과 정반대인 자크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17]
- 칼 라거펠트와는 평생의 라이벌이었지만, 한때는 친구였다. 하지만, 생로랑이 자크와 바람을 피우다 파국을 맞은 후 라거펠트와는 멀어졌다. 베르제가 자크를 찾아가 어떤 메시지를 전하자 자크는 스스로 생로랑을 멀리하여, 6개월간 이어졌던 이들의 불륜이 종지부를 찍었다.
훗날, 라거펠트의 주장에 따르면, 베르제는 라거펠트가 생로랑을 망치기 위해서 일부러 자크를 생로랑에게 보냈다고 의심했다고 한다.
이는 영국의 패션 저널리스트인 알리샤 드레이크가 2007년에 공개한 책을 통해 라거펠트와 자크, 생로랑과 베르제의 관계가 재조명되면서 나온 발언이다.[18] 사실, 자크의 악명은 2000년대 초반 기사에서도 언급되기는 하였으나, 구체적으로 언급된 것은 알리샤 드레이크의 책이 처음이었다. 이 책이 나오자, 라거펠트는 프랑스 법원에 '사생활 침해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나 법원은 기각했고 오히려 라거펠트가 드레이크에게 소송 비용을 물어줘야 했다. 결국 라거펠트는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기 위해 마리 오타비를 만나 인터뷰를 한 것이다.
다만, 베르제와 생로랑은 당시 일을 흑역사로 여겨 입박에 내질 않았다. 즉, 베르제가 라거펠트를 의심해 생로랑과의 관계를 차단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라거펠트의과장 섞인일방적인 주장이다.[19]
- 생로랑은 자크와 바람을 피우기 전에도 베티, 루루와 마약을 한 적이 있다.[20] 특히, 베티는 생로랑과 같이 마약으로 병원에 실려가기까지 해서 이를 베르제는 언짢게 여겼다.[21] 하지만 베르제는 이들과는 손절하지 않았으며, 베티가 중독에서 벗어나도록 돕기도 했다. 덕분에 베티는 팔순이 된 현재까지 장수 중이며, 인터뷰에서 자신의 남편과 베르제를 은인으로 언급할 정도다.[22] 따라서 단순히 자크가 약쟁이라서 베르제가 자크를 싫어한 것은 아니고, 좀 더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앞서 칼 라거펠트 인터뷰에도 나오지만, 쟈크는 BDSM 콘셉트로 문란한 파티를 열었는데, 여기서 생로랑을 옷장에 감금했다(...) 베르제가 보기엔 마약도 문제지만, SM 플레이가 생로랑의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여긴 듯하다.[23]
또한, 자크의 지인의 말에 따르면, 생로랑은 자크가 거쳐간 3만 여명의 남녀 애인 중 하나였던 반면, 생로랑은 자크에게 절실히 매달렸다고 한다. 한 마디로 자크가 갑이었다는 것.[24]
다만, 생로랑 사후 베르제는 더 이상 자크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다.[25]
- 생로랑에게 영감을 준 양대 뮤즈로는 베티 카트루와 루루 드 라 팔래즈가 손꼽힌다. 이들은 생로랑과 사적인 자리에서 늘 함께했다. 그중 베티 카트루는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양성적인 매력을 지닌 금발 여성으로, 평소 남성복을 즐겨 착용했으며, 생로랑의 디자인에도 영감을 주었다. 링크 2018년 디올 광고에도 등장했다.
1945년에 태어난 그녀는 16세에 잠시 샤넬 모델을 했다가 2년 만에 그만 두고 20대 초반에 인테리어 디자이너 프랑수와 카트루[26]와 결혼하였는데, 비슷한 시기에 한 나이트 클럽에서 생로랑을 만나 평생 우정을 맺었다.[27] 생로랑 사후, 그의 딸인 막심 카트루가 피에르 베르제-이브 생로랑 재단의 부회장을 맡고 있다. - 생로랑의 또 다른 뮤즈인 루루 드 라 팔래즈는 입생로랑의 액세서리 디자이너였으며, 생로랑이 색채를 결정하는 것을 도왔다. 베티와는 대조적으로 화려한 색채의 여성스러운 보헤미안 스타일이었다. 입생로랑의 의상에 화려한 색채의 에스닉한 디자인이 등장하는 것은 루루의 영향이다. 베티의 말에 따르면 루루는 자기와는 반대로 모든 것을 장밋빛으로 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링크 루루는 특유의 밝은 성격으로 침울한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 주는 재능이 있었고, 늘 우울증에 빠져 있는 생로랑을 격려했다.링크
- 루루의 조카인 루시 드 라 팔래즈는 90년대에 슈퍼 모델로 활동했다. 어린 시절엔 생로랑이 루시를 위해 요정 드레스를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링크
- 모로코에 처음 마련한 집에 '다르 엘 한치(Dar el-Hanch)'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뜻은 아랍어로 뱀집이다(...) 이 문서 메인 사진 배경에도 보이듯이, 생로랑은 생전에 뱀 그림을 즐겨 그려 연하장에도 뱀이 자주 등장했는데 이곳에도 생로랑이 그렸던 뱀 그림이 많이 걸려 있다. 링크 1 링크 2
- 뱀은 무서워하지 않은 반면, 아이러니하게도 고양이와 새는 무서워했다. 상술한 르 피가로 인터뷰에 나온 얘기로, 미신을 믿은 크리스티앙 디올처럼 자기만의 미신이 있다고 밝혔는데, 고양이는
예쁘다고쓰다듬었더니 할퀴어서 자신에겐 불길함의 상징이라고 한다. 새를 불길하게 느끼는 건 히치콕의 영화와 비슷한 이유라고.
- 작가로 활동하는 조카인 마리안느 빅이 삼촌을 회고하는 책을 연달아 낸 적이 있었다. 링크 1 링크 2 작가는 자신의 어두운 집안 역사와 이에 얽힌 프랑스 근현대사를 추적하는 작품을 써 왔는데, 삼촌인 생로랑에 대한 책도 그 일환이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생로랑이 어린 시절 유복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는 이야기는 그의 어머니가 사실과 다르게 미화한 이야기이라고 한다.[28] 특히, 알제리가 식민 지배를 당하면서 형성된 백인 남성들의 폭력적인 문화로 인해, 생로랑은 성장 과정에서 많은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29] 이로 인해 생로랑은 조카인 마리안느와만 가까이 지냈으며, 피에르 베르제는 생로랑의 가족을 싫어했다고 한다.[30] 베르제의 책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에 생로랑 사후 생로랑의 어머니를 만나기로 결심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면, 베르제가 생로랑의 가족을 불편하게 여겼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31]
- 인터뷰를 매우 드물게 하는 것으로 유명해서 1년에 평균 두세 번 정도였다고 한다. 그 마저도 1년을 기다려야 성사될 정도였다.링크 이 때문인지, 피에르 베르제가 생로랑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폭군처럼 모든 것을 통제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기자들도 있었다. 다만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처럼 생애 단 한 번만 인터뷰를 한 디자이너도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판단은 알아서.
- 알제리 오랑에 있는 그의 생가를 알제리인 사업가 모하메드 아판이 복원했다. 물론 피에르 베르제를 생전에 만나 허락도 받았다. 링크 복원한 생가는 이브 생 로랑의 유년 시절 삶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알제리 창작자들을 위한 공간으로도 사용한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알베르 카뮈가 알제리에서 미움받는 것과는 달리, 이브 생 로랑에 대한 오랑시 알제리인들의 여론은 의외로 호의적이어서 현지 주민들의 협조를 얻었다고 한다.
6. 매체에서
2014년에 그의 생애를 다룬 영화가 두 편이나 개봉해 화제가 되었다. 하나는 베르트랑 보넬로가 감독하고 가스파르 울리엘이 주연을 맡은 생 로랑이고, 다른 하나는 자릴 레스페르가 감독하고 피에르 니네이가 주연을 맡은 이브 생로랑이었다.[32]그런데, 그 중에서 피에르 베르제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영화는 후자 뿐이다. 가스파르 울리엘이 주연을 맡은 생 로랑에 대해서는 격렬히 반대하여 의상 협찬을 전혀 받지 못했다.링크 그래서 의상 팀이 알아서 재현해야 하는 고충이 있었지만, 그 덕분에 세자르상 최우수 의상디자인상을 수상했다.[33] 이 영화로 가스파르 울리엘은 뤼미에르상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반대로 피에르 니네이 주연의 이브 생로랑은 피에르 베르제로부터 허락을 받은 영화였기에, 패션쇼 장면에선 실제로 이브 생 로랑이 디자인한 의상이 등장했다.
피에르 니네이는 이브 생로랑 역으로 세자르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두 영화는 피에르 니네이와 가스파르 울리엘의 연기 대결로도 화제가 되었다. 링크
[1] 평소 가족과 주변 사람을 위해 기도를 했다. 그래서 베르제는 무종교인임에도 그를 위해 사망 1주기 기념 미사를 열었다.[2] 그전까지만 해도 패션쇼라는 개념이 없고 컬렉션 프레젠테이션이라 음악 없이 모델들이 번호표를 들고 다녔다. 이것이 에디 슬리먼의 생로랑에서의 마지막 패션쇼에서 음악이 없었던 이유.[3] 참고로 칼 라거펠트는 ‘드레스’ 부문에서 2위, ‘코트’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4] 저 당시의 정신과 치료는 지금과는 달리, 위험한 약물을 무작정 때려 붓는 무식한 방식으로 이뤄졌으며, 이런 식으로 중독자를 만들어 돈벌이를 하는 악덕 의사들도 많았고 생로랑도 이로 인한 피해자였다. 생로랑 젊은 시절 키가 180cm가 넘었는데 퇴원 당시 체중이 35kg에 불과했다고 한다(...)[5] 게다가 중독 치료 과정에서 의사를 잘못 만난 것도 상황을 악화시켰다. 베르제의 회고록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를 보면 '닥터 필굿'이란 별명의 미국 의사가 암페타민 정맥 주사를 놓아서 한동안 고생했다고 나온다. 술과 약물은 1990년대 초에 겨우 벗어났지만, 대신 콜라를 25잔이나 마셨다고 한다.링크 베르제에 따르면 자신이 술과 약물을 빼앗아 가자 식탐으로 복수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이 시절 모습을 보면 후덕하다.[6] 이후 생 로랑과 피에르 베르제는 1976년에 연인 사이로는 헤어졌지만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관계는 평생 지속되었다.[7] 여담이지만, 1990년대 대한민국에서 주병진이 자신이 만든 속옷 브랜드 보디가드 티저 광고를 통해 몇 월 몇 일 벗겠습니다라고 했을 때도 대한민국이 뒤집어졌었다. 다만 실제로 공개된 것은 아기의 돌사진이었고, 티저에 낚인 대중들은 허탈해했다. 그런데 그보다 무려 20여 년 전에 브랜드 창립자 본인이 누드로 나왔던 것이다. 영화 생 로랑에서 이 장면을 가스파르 울리엘이 재연하는데, 당시 생로랑의 슬림한 몸매를 재현하기 위해 12kg을 감량했다고 한다.[8] 2010년대 후반부터 젊은 세대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패션쇼에서 기괴한 시도가 많아지다 보니, 그에 대한 반발심으로 90년대 초반 패션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클래식으로 재조명된 것이다.[9] 2000년 더 가디언 인터뷰만 보더라도 의욕적이었으나, 불과 2년 후에 은퇴한 것은 보면 이 사고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10] 여담으로 이 인터뷰를 번역한 이는 물리학자 이기진이다.[11] 피에르 베르제 문서에도 나오지만, 피에르 베르제 말년에 정식으로 혼인한 배우자였다. 이브 생로랑의 알코올 중독과 마약 중독에 지친 피에르 베르제가 생로랑과 결별 후에 만난 동성 연인이었다. 피에르 베르제가 쓴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에 따르면 처음에는 생로랑이 콕스를 질투했으나, 콕스가 자신과 베르제를 진심으로 대하는 것을 알고 콕스를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나온다.[12] 이브 생로랑은 생전에 막심 카트루의 대부 역할을 맡았고 그 인연으로 막심이 재단의 부회장직을 맡게 된 것이다.[13] 72세 생일을 딱 두 달 앞두고 사망[14] 교모세포종 문서에도 나오지만, 수술도 못하는 최악의 뇌종양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술, 담배, 마약, 폭식과는 무관한 원인 불명의 불치병으로 세상을 떴다. 폐 질환이나 간 질환, 당뇨 등의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보아 정신 건강 문제를 제외하면 금강불괴였는지도(...)[15] 참석한 여성들 대부분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는 의미에서 바지정장을 입고 참석했다.[16] 이때 흘러나온 BGM은 모리스 라벨이 작곡한 볼레로다.[17] 칼 라거펠트는 죽기 직전에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마리 오타비와 가진 인터뷰에서 자크에 대해 회고하는 말을 했는데, 단지 자크의 밝은 면만을 보고 싶어해서 굳이 사생활을 캐묻지 않았다고 한다. 링크 다만, 라거펠트는 관음증적 성향이 있어, 자크가 여는 문란한 파티에 돈을 대 주었다. 후술하겠지만, 피에르 베르제가 라거펠트를 생로랑을 망친 악의 축으로 여긴 데는 바로 이런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18] 다만 해당 저서는 당사자인 라거펠트, 생로랑과는 전혀 인터뷰를 하지 않은 채 출간된 것이라 교차 검증이 필요하다.[19] 자크와 헤어진 후에도 생로랑이 라거펠트와 같이 찍은 사진이 다수 있으며, 특히 팔로마 피카소의 결혼식에는 생로랑, 베르제, 라거펠트가 모두 하객으로 참석했는데, 라거펠트는 생로랑 옆에 앉았다. 이는 팔로마 피카소가 양쪽과 모두 친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훗날 생로랑 사후 에디 슬리먼이 생 로랑을 맡았을 때 라거펠트와 베르제가 우연히 마주쳐 같이 사진을 찍은 적은 있긴 하다.[20] 베르제의 책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를 보면, 생로랑은 70년대 초반 모로코에서 대마와 꿀을 섞어 먹어봤다고 한다. 또한 해외 기사를 보면 루루의 두 번째 남편도 비슷한 증언을 한다. 다만 저 때는 중독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21] 루루는 아무리 밤늦게까지 놀아도 아침 일찍 출근해 업무에 임하는 직업 윤리가 철저한 사람이었다.링크 반면 베티는 노는 데 거침이 없었고, 그 점을 베르제가 언짢게 여긴 것이다.[22] 아이러니하게도 마약을 덜했던 루루는 폐암으로 베티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23] 생로랑은 학창 시절 화장실에 감금당하기도 했던 학폭 피해자였다.링크 베르제의 책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를 보면, 이 사실을 라거펠트도 알았던 모양이다. 책에서 K로 지칭된 라거펠트는 생로랑이 자크에게 보낸 편지를 갖고 있다면서 베르제에게 연락했고, 편지에 묘사된 (자크의) 가학적 행위에 경악했다면서 진작에 없애 버렸어야 할 편지였으나 협박용으로 갖고 있었다고 베르제에게 전했다 한다. 이에 베르제는 K에게 '맘대로 하라'는 반응을 보였고, 결국 편지는 끝내 공개되지 않았다. 라거펠트 성격상 자신이 죽기 전에 이미 태워 버렸을 가능성이 높다.[24] 그 3만여 명 중에는 성직자, 벌금을 깎아 준 경찰도 포함되었다(...) 자크가 생로랑을 유혹한 것은 일종의 정복 욕구였다고 자크의 친구는 주장했다.링크[25] 후술할 생로랑의 조카의 인터뷰에 언급되는 내용이지만, 생로랑의 할머니와 어머니는 모두 성폭력 피해자였다. 이 때문에 생로랑의 어머니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외도를 저질렀고, 어린 생로랑이 이를 목격하며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데, 결국은 불행이 대물림되어 생로랑도 자학적인 심리에서 문란한 생활에 빠졌다는 것이다. 생로랑의 어머니가 외도에 빠져 생로랑을 돌보지 않은 것은 베르제도 이미 아는 사실이었으나, 연인의 자존감을 위해 비밀에 부쳤는데, 깐깐한 베르제도 생로랑의 조카가 삼촌 사후에 이런 내용의 책을 내는 것을 대놓고 반대하진 않은 것으로 보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즉, 생로랑의 아픈 사연을 알고 있는 베르제가 보기엔, 자크가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을 이용하는 것으로 보였을 법하다. 그러나 비극의 근원이 가족이다 보니 결국은 자크를 원망할 이유를 못 찾았을 것이다.[26] 프랑수와 카트루는 프랑스 장군의 후손이며, 상류층 고객을 상대로 인테리어 디자인을 했다. 링크[27] 공교롭게도 프랑수와 카트루는 이브 생로랑의 고등학교 시절 친구였다. 베티와는 평생 해로했으며 2020년에 향년 83세로 사망했다. 링크[28] 다만 알제리 출신 프랑스 백인들인 피에 누아르가 워낙 무시를 당했기 때문에 베르제는 연인의 자존감을 위해 굳이 반박을 안 했고, 오히려 마케팅에 이용했다고 한다. '사랑받고 자란 소년이 어머니를 기쁘게 하려고 옷을 연구하다가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었다'라는 서사를 지어낸 것인데, 실제로는 사랑받으려는 욕구에서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되었고, 어머니는 아들이 유명해진 후에야 아들에게 관심을 주었다고 한다.링크[29] 위키피디아 프랑스어판을 보면 생로랑의 어머니가 성폭력으로 태어났다고 나오는데, 조카인 마리안느의 책을 인용한 것이다. 이는 생로랑의 어머니가 손주인 마리안느에게만 털어 놓은 것으로, 생로랑은 이러한 가족사를 전혀 몰랐으나, 어머니가 외도를 하는 것은 알았다고 한다. 다만 어머니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를 알 수가 없어서 불안을 느꼈다는 것이다. 조카의 주장이 사실이면, 생로랑을 평생 괴롭힌 우울증의 근원이 천재성이 아니라 가족사에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의도도 삼촌이 이런 환경을 극복했다는 점에 중점을 둔 것이지 천재성 찬양이 아니라고 한다.[30] 생로랑의 여동생인 브리지트는 이혼 후 7살 난 딸 마리안느를 생로랑에게 맡겨 버리고 방치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생로랑과 베르제가 마리안느를 양육하다시피 했는데도, 브리지트는 자신의 오빠와 오빠의 애인을 게이라고 비하했다고 한다. 생로랑은 조카인 마리안느의 결혼식을 위한 드레스를 만들어 줄 정도로 관계가 각별했다. 마리안느는 베르제의 영향으로 다양한 예술을 접했고, 베르제가 삼촌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31] 베르제는 70년대 말에 생로랑과 연인 관계를 끝냈음에도 생로랑 말년에 시민결합을 했다. 이는 유산 정리를 위한 것이라 하는데, 실제로 친조카는 인터뷰에서 생전에 불편했던 친모와 친누이들에게 유산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베르제와 시민 결합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32] 일단 출연 배우만 보면 전자가 더 화려하다. 루루 드 라 팔레즈 역은 레아 세두가 맡았고, 생로랑을 나락으로 몰아 넣는 옴므 파탈인 자크 역할로는 몽상가들의 테오 역으로 인상을 남긴 루이 가렐이 나온다.[33] 강아지 관련 에피소드 등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썰이 포함되어 있어서 관람 시 주의를 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