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02:21:32

고려장

1. 개요2. 설명
2.1. 한국 역사서에서 고려장의 사용례2.2. 잘못 알려진 사실
3. 논란
3.1. 그리피스의 방한 여부3.2. 일본 제국의 역사왜곡설
4. 비슷한 설화들5. 인터넷 용어6. 기타

1. 개요



고려시대에 나이 든 부모를 다른 곳에 버려 두고 오던 풍습이 있었다는 설화.

해당 설화는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나, 고려장이라는 용어가 해당 설화와 결합한 것은 19세기 말~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시기이며, 이에 따라 일본제국의 역사 왜곡설이나 단순한 루머가 확산된 것이라는 등 다양한 설이 돌고 있다. 학계에서 주류로 여겨지는 문헌학적 접근에 따른 설은 대체로 불경에 나오는 일화와 중국의 효자전에 나오는 일화가 조선에 들어와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현지화 되어 전국에 퍼졌다는 것이다.

고려장과 비슷하게 일본에서는 에도시대에 '우바스테야마(姥捨山)'라고 해서 늙고 병든 사람을 지게에 지고 산에 가서 버렸다는 설화가 세간에 알려져 있다. 이러한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나라야마 부시코이다. 이외에도 유럽,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등에서도 이런 설화들이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이런 노인 유기 설화는 아프로-유라시아 전역에 퍼진 공통 설화로 볼 수 있다. 현재에는 고고학적 탐구조사와 문헌 조사 등을 통해 해당 이야기들을 고려장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경우 실존하지 않은 풍습을 다룬, 아동 교육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민중 설화라고 보고 있다.

특히 한국의 경우 고대 문헌을 뒤져봐도 기근이나 전쟁 등 특수한 상황이 아닌 평시에 이러한 행위를 풍습처럼 일삼았다는 기록은 전혀 없기 때문에, 현재 관련 연구자들은 해당 풍습이 있었을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다. 실존하지 않는 풍습을 다룬 설화에 불과하다는 게 현대 한국 사학계의 정설이다.[1]

때문에 설화로 존재하던 이야기들이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제국에서 조선 내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제작한 조선의 동화를 다룬 동화집에도 실렸고, 이렇게 설화로 여겨지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 민중들에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설화이자 동화가 어느 순간 역사적 사실로 둔갑해 민중의 인식 속에 자리를 잡아버린 경우이다.

물론, 생존이 위험한 극한의 상황에서 부모를 버리는 일은 있었으나 풍습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조선 시대에도 경신대기근 시기에 노모를 버리고 달아난 남성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단발적 사건이며 풍습은 아니었다. 조선 조정은 부모나 조부모를 버리거나 학대한 자에 대해 강상죄를 물어 극형에 처하고, 이런 사건이 발생한 지역의 수령을 비롯한 해당 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지방관들을 엄히 징계하고 지역의 행정 등급을 강등시키는 등의 강력한 조치를 취하고는 했다.

고려시대 평균수명이 42.3세이며 자연사 확률이 극히 낮고 인구피라미드가 삼각형이였으며[2] 질병이나 사고사 확률이 매우 높아 풍습으로 남을정도로 고령인구가 유지되지 않았으므로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2. 설명

중국 <효자전孝子傳>의 원곡(原穀) 이야기가 고려장 설화의 원형으로 보이며 불경 <잡보장경雜寶藏經>의 '기로국연(棄老國緣)조의 설화'에서 기로국이 고려로 와전된 이야기가 고려장 설화의 원형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장이라는 단어 자체는 고려의 무덤 등의 뜻으로 쓰인 적이 있으며, 현대 한국인들의 인식과 달리 일본에 의해 창작되고 명명된 것이 아니다. 처음으로 고려장이라는 용어가 '늙은이를 버리는 풍속'을 뜻하는 낱말로 사용되었던 기록은 1882년도에 발간된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의 책, <은자의 나라 한국(Corea : The Hermit Nation)>이다.
(조선 왕조)이전까지는 일본에서도 오래전부터 유행하여 17세기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풍속이 한국에 성행하고 있었다. 고려장은 그 자세한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노인을 산 채로 묻어버리는 풍속이었다.(Heretofore the same rites which were so long in vogue in Japan, traces of which were noticed even down to the seventeenth century, held unchallenged sway in Corea. Ko-rai-chang, though not fully known in its details, was the habit of burying old men alive.)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한국을 실제로 여행했던 영국의 여류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쓰고 1897년 출간 된 그녀의 책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가 있다. 이사벨라가 원산에서 6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대 무덤들을 방문했을 때 고려장을 연상케 하는 전설을 들은 내용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참고
이전 왕조, 즉 5백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면 늙은이나 병자가 가족들에게 짐이 될 경우 이 고분들에 딸린 돌방에 약간의 음식과 물을 남겨둔 채로 유폐시키고는 거기에서 죽게 내버려 두는 일이 관습적으로 행해졌다고 한다.(During the last dynasty, and more than five centuries ago, it was customary, when people from age and infirmity became burdensome to their relations, to incarcerate them in the stone cells which these mounds contain, with a little food and water, and leave them there to die.)

일제강점기 일본제국 측에서 펴낸 자료를 통해 확인해 보면 고려장 설화와 관련된 것으로 1919년에 발행된 <전설의 조선>이라는 책이 가장 먼저 나온다. 다만 이것이 고려장 설화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일단 현재까지 드러난 것으로는 그 시기가 제일 빠르다. 이 책의 지은이는 평양고등보통학교 교유인 미와 타마키(三輪環)로 표시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그가 조선에서 채집한 설화들을 엮은 조선의 구비전설(口碑傳說) 단원 말미에 동화 파트가 들어 있고, 해당 동화들 가운데 '불효식자(不孝息子)'라는 대목이 보인다. 그 내용은 "늙은 제 아비를 지게에다 지고 산 속에 버리려는 어떤 사내가 산에서 내려오던 길에 아들보고 그 지게가 필요 없으니 버리라고 하자, 그 아들이 하는 말이 나중에 아버지도 늙으면 필요할 텐데 또 써야 하니까 버리지 못한다고 하매 곧 크게 뉘우치고 버린 제 아비를 다시 모셔왔다"는 바로 그 얘기이다. 다만 설화의 내용은 고려장 설화와 동일하나 고려장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같은 내용의 이야기는 1924년에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동화집>에도 '부모를 버린 사내'라는 제목으로 등장하며, 곧이어 1926년에는 나카무라 료헤이(中村亮平)가 정리한 <조선동화집>에도 약간 내용을 달리하여 '부모를 버린 사내'라는 제목으로 거듭 수록되어 있다. 즉, 식민통치자들이 고려장 설화를 날조하여 널리 퍼트렸다는 인식과 달리 노인들의 증언이나 서양인 여행자/선교사들의 기록을 본다면 결국 조선 땅에서 실제로 존재하던 설화와 전설을 채집하여 수록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일제강점기의 자료를 더 보자면 조선총독부에서 <조선동화집>을 출간하여 처음으로 고려장 설화를 다룬 해인 1924년에 고려장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생계로 인해 부친을 생매장한 사건을 다룬 1924년 9월 13일자 동아일보에서 고려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후, 사위가 장인을 생매장한 사건을 다룬 1934년 6월 9일자 조선중앙일보에서도 고려장을 특정 풍속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했다. 즉, 조선총독부에서 동화책을 펴냈던 일제강점기 무렵 당시 조선 언론인들 사이에서 고려장이 지금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

이사벨라 비숍 등 조선후기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고려장 설화에 대해 꽤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고,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거나 경험한 사람들은 대개 고려장 이야기를 알고 있으며 자기 동네에 고려장했던 곳이라는 전설이 내려오는 바위나 굴이 있었다는 기억까지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적어도 1800년대 후반에는 고려장=노인을 산에 버린다는 지금과 정확히 같은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의 동화를 모은 조선 동화집같은 책을 보면 실제 여부와 상관없이 민간에서 구전될 정도로 이야기가 널리 보급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종합하면 고려장 설화는 이미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구전 설화로서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총독부에서 처음으로 고려장 설화의 내용이 담긴 동화책을 펴낼 무렵인 1920년대의 조선의 언론인들은 고려장이라는 용어를 지금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이를 고려 시대 때 실제 있었던 장례 풍습이라고 일반인들이 두루 믿고 오해하게 된 것은 대략 19세기 말~20세기 초 무렵으로 추정된다.

구한말 외국인들의 기록이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설화라면, 최소한 일제강점기보다는 이전에 생긴 것이 분명하다. 설화나 전설은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닌 세월을 거쳐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화, 전설이 생각보다 그리 긴 역사를 지니지 않는 경우가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고 여겨지는 킬트도 알고보면 그리 오랜 전통이 아니다. 또한 18세기까지의 문헌들에는 고려장 설화와 관련된 내용들을 찾을 수 없다. 때문에 이런 고려장 설화는 19세기 세도정치 시기의 배경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세도정치 시기 민에 대한 관의 가혹한 수탈이 이뤄지고 여러 재해와 환란이 발생하여 곤궁함과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고향과 가족을 버리고 떠난 이들이 큰 문제가 되었다. 동시에 서당 교육이 좀 더 널리 이뤄지고 여러 공연과 이야기들이 전국적으로 유행하며 민의 문화적 수준이 높아졌고, 서학과 동학을 접하며 민의 자기 정체성 자각이 이뤄짐에 따라 19세기 세도정치 시기에 여러 종류의 창작 설화들이 등장하였다. 따라서 이런 시대적 배경 위에서 불경과 효자전에 나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민중 설화로 추정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설명일 것으로 보인다.

2.1. 한국 역사서에서 고려장의 사용례

조선시대 후기 기록 중 고려장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경우는 대충 아래와 같다. 해석을 보다시피, 고려가, 혹은 고려시절에 묻거나 장례를 지냈다는 뜻일뿐, 늙은 사람을 갖다버리는 악습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1654-? 회은집(晦隱集)
特深穿窟。如鑿井之形。築以小石。今往往崩毁處。稱以高麗葬者是也。
특별히 깊게 굴을 판다. 우물을 파는 모양과 같이 작은 돌로 쌓는다. 지금 왕왕 무너진 곳은 고려시대에 묻은 것이라고 한다.

1689-1756 입재유고(立齋遺稿)
山野處處。高墳大塚。俗謂之高麗葬
산야 곳곳에 고분과 대총은 속인들이 고려시대에 묻은 것이라 일컫는다.

1897 성재집(省齋集)
元主元不書葬。元世葬於漠北起輦谷。不加築爲陵。故史不書葬。 高麗葬
원주는 원래 장사지낸다고 쓰지 않는다. 원 시절에는 막북의 기연곡에 장사했는데, 능(봉분)을 만들지 않은 고로 역사서에 장사지낸다고 쓰지 않았다. 고려는 장사 지낸다.

1757 승정원일기 영조 33년
上曰, 古者以鐵爲釘耶? 曮曰, 高麗葬, 多用鐵釘矣。
주상께서 가로되, "옛 사람들은 철로 못을 만들었는가?" 묻자 엄이 대답하길, "고려가 장사 지낼 때에는 철정(쇠못)을 많이 썼습니다."

1713 연행록(燕行錄 홍대용)
且滿漢公卿。擧皆不火葬。而地室設炕。傍開通穴。守直之人。出入燃燭云。有如我東昔日高麗之葬
만족(滿族)이나 한족(漢族)으로서 공경(公卿)은 거의 화장하지 않고 광중(壙中)에 온돌을 만들며 옆에 통래(通來)하는 구멍을 뚫어서 수직하는 사람이 드나들며 촛불을 켠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옛날 고려의 장례와 같은 것이다.

고려의 무덤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했으며 그럴 경우 고려총(高麗塚), 고려산(高麗山), 고려곡(高麗谷), 고려분(高麗墳)이라고도 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 내에서 쓰이게 된 '늙고 병든 사람을 지게에 지고 산에 가서 버렸다는 고려 시대의 풍습'을 뜻하는 고려장과 다른 말이다. 마찬가지로 후술되는 고려장과 구별해야 한다.

1908년 11월 11일 <대한매일신보>의 고려장 굴총이라는 기사에도 용례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서도에서 온 사람의 말을 들은즉 근일에 일인들이 고려장을 파고 사기를 내어가는 고로 온전한 고총이 없다더라.' 무덤을 칭하는 말로 고려장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실제로 이때부터 개성 주변의 고려 고분들이 보물 사냥에 혈안이 된 도굴꾼들에 의해 대거 도굴당했다.

이런 뜻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또다른 자료로 조선총독부가 정리한 <조선보물고적 조사자료>가 있다. 발행연도가 1942년이지만, 그 내용은 1916~17년께 조사한 고적 대장의 자료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으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고려장'을 비롯하여 '고려총', '고려분', '고려산', '고려곡' 등으로 표기된 고분들이 두루 기록되어 있으며 그 수가 전국에 걸쳐 90여곳이나 된다. 그 시절에도 흔히 이름모를 무덤들을 일컬어 ‘고려장’이라고 불렀던 사실만큼은 분명히 엿볼 수 있다.

즉, '고려장'이라는 명칭은 그것의 실체가 무엇이었던지 간에 전국 곳곳에 흩어진 '이름 모를' 고분들을 대체하는 이름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라 짐작할 수 있겠다. 평안북도 지역에서는 주인 모를 무덤을 일컬어 '당장(唐葬)'이나 '호총(胡塚, 되무덤)'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했다. 접경지역답게 중국인이나 오랑캐 무덤이라고 한 것. 이런 지역을 제외하면 고려장은 전국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정말 '흔한' 용어였던 것이다. 대충 옛날 무덤이고 주인 없다 싶으면 그저 막연하게 이전 왕조인 고려 시대 무덤이라고 뭉뚱그려 칭하던 습속이 있었던 것.

2.2. 잘못 알려진 사실

조선왕조실록#에도 고려장으로 추정할 만한 풍습에 관련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는 내용이 웹상에 퍼져 있는데 이는 '외사(外舍)로 내어 두게 되니'라는 구절을 '밖에 내다버리니' 라고 오독한 것을 확대해석한 것으로 외사(外舍)는 '안채'인 내사(內舍)와 대비되어 '바깥 행랑채'를 일컫는 말이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의 기록을 참고하면 이해하기 쉽다.
칠원공(漆原公, 이언결)이 말년에 심양(心恙, 심병心病)이 있어서 외사(外舍)에 거처하게 되자, 공이 정성을 다해 보호하고 봉양을 함에 늘 문밖에서 선잠假寐을 자고 옷에 띠를 풀지 못한 것이 여러 해였고, 대고(大故)를 당하자 공의 나이 이미 60이 가까웠는데도 집상(執喪)을 예절에 지나치게 하였다.

3. 논란

3.1. 그리피스의 방한 여부

그리피스는 두 차례 방한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1차 방문시기는 밝혀지지 않았고 2차 방문 시기는 1926-27년 사이이다. 한때 학계는 그리피스의 1차 방문을 사실로 여겼다. 그러나 그 이후, 그리피스가 1871년에 신미양요가 있을 당시 조선에 방문하였다고 주장했던 정수일 교수를 포함한 학계는 최근 여러가지 연구를 하고 내용을 검토한 결과 그렇지 않다는 쪽에 무게를 싣고 있다.

이전에도 문일평이 <은자의 나라>에 실린 식탁이나 두발 모습 같은 그림들이 한국적인 것이 아니란 점을 증거로 그가 한국에 오지 않고 일본에 앉아서 쓴 것이라고 지적한 바가 있었다. 특히 <은자의 나라>에는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경우가 많다는 것도 그 신뢰성을 의심하게되는 주요 근거다. 대표적인 사례로 그리피스가 고대부터 1868년까지 부산이 대마도주의 영지였다는 잘못된 정보를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미카도의 제국 같은 저서에서는 칭기즈칸이 일본인이라는 의견을 수용하기도 하는 등, 일본의 주장에 치우친 듯한, 신뢰성에 의문을 가게 만드는 저작들도 존재한다.( Fusan has been held by the Japanese from very ancient times. Until 1868 it was a part of the fief of the daimio of Tsushima.(p.202)). 일본어 위키백과에서 칭기즈칸=요시츠네설 문서의 10번 문단 참조 #

무엇보다 그리피스는 역사학이 아니라 자연과학을 전공한 학자로 일본 정부의 초빙으로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의 전신인 도쿄가이세이학교(東京開成學校)에서 강의했으며, 일본이 주체가 되어 조선에서 미신과 전제왕권을 몰아내고 서구문명과 기독교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매우 친일적인 인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또한 개항 이전에는 조선 이상으로 서구문명과 기독교를 거부하고 있었다. 당장 존황양이파들조차 그닥 개방적인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는 조선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의 자료들에만 의존해 한국의 역사와 풍습에 대해 서술했는데, 한국에 대한 편견에 기초하여 일부 설화의 내용을 마치 역사적 사실인 양 왜곡하여 서술했다는 점에서 그의 자료는 방한 여부의 논란과 상관없이 비판적인 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아알모모] 우리가 늙은 부모님을 산에 버렸다고?

3.2. 일본 제국의 역사왜곡설

먼저 고려장은 어디까지나 설화의 내용일 뿐이며, 실존하지 않은 풍습임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리피스의 책에서도 관련 내용은 겨우 '그런게 있다 카더라'는 짧은 언급 딱 하나뿐이다.

부경대 사학과 강인욱 교수(현 경희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한국에 부모를 버리는 풍습이 있었다는 내용은 문헌 근거가 희박하다"며 "현재 학계 다수설은 고려장은 실재하지 않았던 풍습이라는 것"'이라고 밝혔다. 부모를 버리는 풍습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게 지역 설화와 민담의 형태 외에 명시적인 기록으로 나온 건 19세기 말 이후에 외국인이 쓴 글에서만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실존하는 현상이라는 대한 문헌학적, 고고학적 증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는 고려장이라는 용어가 노인을 버리는 풍습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지 않았으나, 일제시대에 조선 내 학교에서 교육하기 위한 교재에 등장하면서 해당 용도로 활용되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고, 이런 주장에 근거해 일본 제국이 악의적으로 한국사를 왜곡했다는 인식이 현대 한국에 널리 퍼져있다.고려장은 없었다.(기사)

하지만 우선 고려장이라는 용어 자체가 일본 제국에서 만들어낸 용어가 아니다. 이미 조선 말기 정체와 신원을 알 수 없는 이전 시대의 무덤들과 매장된 시체들을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조선인들은 고려장이라고 이름 붙여 부른 바 있다. 그리고 고려장 설화의 원전은 불경의 기로국전으로 추정되고 있고, 이 "기로"가 "고려" 혹은 "고리"[3]와 음이 비슷하여 당대의 조선의 언중에게 고려로 잘못 인식됐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당시 언중에게 사용되던 단어인 "고려장"과 합쳐져 현재의 고려장 설화가 탄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상술된 항목들을 보면 알겠지만 일본 제국도 고려장 설화의 내용을 당시 조선 사회에 실존하는 혹은 과거 한국사에 실존하던 풍습이나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소개한 게 아니다. 맥락상 한반도 내에 떠돌아다니던 설화이자 동화로서 수집했을 뿐이고, 이를 조선의 동화라고 기록하고 소개했다.

이를 서양사의 사례와 비교하자면 그림 형제가 독일어권 각지의 설화들을 모아 그림 동화라는 동화책을 냈지만 이를 가지고 그림 형제가 독일사를 왜곡했다고 보지는 않듯이, 일본 제국의 학자들도 조선의 민중 사이에서 떠돌던 설화이자 동화로서 해당 내용을 수집한 후 기록하여 어린이들에게 들려주기 위한 이야기들을 엮은 동화책을 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총독부에서 고려장 설화를 다룬 책을 처음으로 출간한 시점인 1920년대 초중반부터 이미 조선 언론들에서 고려장을 현대와 같은 의미로 사용한 기록이 있었다. 즉, 일본제국이 해당 이야기를 창작하여 퍼트렸다는 것은 문헌학적인 자료에 근거해 봤을 때 잘못된 이야기인 것이다. 이 설화가 어떻게 해서 한국의 언중들에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졌는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4. 비슷한 설화들

고려장 설화를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 노인 유기 설화의 기원으로 추정되는 중국 <효자전孝子傳>의 원곡 이야기에서는 수레만 지게로 바꾼 이야기가 우리나라에는 할아버지를 버리려고 한 아버지가 아들의 재치로 뉘우친 '할아버지의 지게'라는 이야기로 교과서에 실렸을 정도로 유명하다. 은비 까비의 옛날 옛적에에서도 '귀중한 지게'라는 제목으로 나오며, 할아버지가 할머니로 치환된 것만 빼면 내용은 전부 동일하다. 거기에서는 임금이 이 광경을 우연히 보고 고려장을 전면 금지시키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고려장 자체가 실제로는 잘못 전해진 풍습임을 강조한다. 은비 까비에서는 시베리아몽골의 못된 풍습이 전해졌다는 뉘앙스로 전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칠순이 되자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지게로 업고 가서 버렸다.
그 곳에 아들이 따라가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왜 지게를 두고 가세요?”
“할아버지 고려장 다 지냈다. 지게는 버리고 가야지.”
“아버지, 제가 지게 가져갈게요.”
“지게는 가져가 무얼 하려고?”
할아버지 져다버린 지게인데 뒀다가 아버지도 여기에 져다 드려야죠.”
이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는 크게 깨닫고 반성하며 할아버지를 다시 모셔와 잘 봉양했다.

불교 경전인 잡보장경에 실려 있는 '기로국' 이야기가 있으며 위기에 빠졌던 기로국이 노인의 지혜로 위기에서 벗어났다면서 효도를 강조하는 내용이다.

줄거리는 한 나라에서 나이가 든 노인들에게 밥벌이가 안 된다고 산속으로 내쫓았는데 근처에 있던 강대국이 이 나라를 침략하기위해 재로 새끼줄을 꼬아오라는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았다. 그러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던 왕은 결국 노인들이 버려진 산속으로 들어가 지혜를 구했으며, 노인들은 새끼줄에 소금물을 적신 후 불로 태우면 된다는 간단한 해결책을 내놓아 나라를 구한 뒤 그 나라는 노인을 공경하면서 살았다는 이야기다.

이 기로국 이야기를 원형으로 한 한국의 전설이 6차 교육과정 초등학교 읽기 교과서에도 실린 적이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과서에는 가지 하나만 가지고 백 가지 나물 만들기 문제가 두께를 똑같이 깎은 나무의 뿌리와 줄기를 구분하기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판본이 존재하는 듯. 여기서의 정답은 물에 담그면 뿌리 부분이 더 잠기니 물에 띄워보는 거다.
옛날에 효성이 지극한 신하가 살았다. 이 당시에는 고려장이 법으로 제정되어 있었는데 그 신하의 어머니도 60이 거의 다 되어 산 속에 내다버려야 할 처지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냥 자신을 산 속에 버려달라고 했지만 효자 신하는 그럴 수 없다며 차라리 무거운 벌을 받겠다고 했다. 궁리 끝에 효자 신하는 어머니를 뒤채에 숨겨놓고는 일부러 어머니를 고려장 보냈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얼마 뒤, 중국에서 사신이 찾아와 지혜겨룸을 하잡시고 굉장히 어려운 3가지 문제를 냈다.
1. 구멍이 구불구불한 구슬에 명주실 꿰기
1. 똑같이 생긴 어미말과 새끼말을 손 안 대고 구분하기
1. 가지 하나만 가지고 백 가지 나물 만들기
대단히 어려운 문제들이었다. 효자 신하가 뒤채에서 어머니에게 이를 얘기했더니, 뭐라뭐라 해법을 제시했다.
다음날, 효자 신하가 그 해법대로 중국 사신 앞에서 문제를 풀어 보였다.
1. 개미 허리에 명주실을 맨다. 그리고 한쪽 구멍 근처에 꿀을 바르고 반대쪽 구멍에 개미를 넣는다. 개미가 꿀을 향해 기어가면 반대쪽 구멍으로 빠져나오게 되어 명주실이 구슬에 꿰어진다.[4]
1. 마른 풀더미를 놓고 두 말에게 동시에 먹으라고 해서, 먼저 먹는 말이 새끼말이고 나중에 먹는 말이 어미말이다.
1. 그냥 가지를 하얗게 깎은 다음 나물로 무친다. 백(白)가지 나물 완성.
그러자 중국 사신이 포기하고 돌아갔다.
임금이 어떻게 그런 지혜를 발휘할 수 있었느냐고 묻자, 효자 신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고려장을 보내지 않은 자신을 벌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임금이 노모의 지혜 덕에 위기를 모면했다면서 오히려 상을 내려야 할 일이라고 말했고 그때부터 고려장을 금지했다고 한다.

위 이야기 이설로 말의 새끼와 어미를 구분하는 것 대신에 호리병 안쪽에 종이를 바르는 문제가 있으며 닥나무 풀을 개어 호리병 안을 적신 뒤 남은 물을 비우고 말리는 해법이 전한다.

말의 새끼와 어미를 구분하는 문제가 마지막에 나오는 경우도 있는데, 이럴 경우 임금이 상으로 뭘 원하냐 물었을때 "짐승이나 사람이나 부모가 자식을 아끼는 마음은 똑같습니다. 그러니 그러한 부모를 버려야 하는 고려장을 없에주십시오."라는 부탁을 하고, 감명을 받은 임금은 수락한다.

속초 지명의 어원이 된 이야기로 동일한 전설이 울산바위에도 있는데 울산에서 울산바위에 지세를 걷으려는 것을 거부하자 울산에서 재로 꼰 새끼로 바위를 묶으면 가져가겠다고 했고, 그 다음은 이와 동일. 또한 몽골에도 착한 청년과 슬기로운 노인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며 위의 이야기와 거의 유사하다.

그밖에 유사한 이야기로 삼국유사에는 가난 때문에 사람을 묻으려 하던 신라 때의 '손순 설화'가 남아있는데, '어머니를 굶길 수는 없으니 차라리 애를 묻읍시다.'라고 하다가 돌종을 발견하자 이게 하늘이 내려준 거라 생각하고 아이 묻기를 취소했으며, 그 이야기가 알려지자 임금이 그 부부에게 도움을 주어 구원을 받은 이야기다. 또한 곽거도 가난 때문에 아이를 묻으려다가 금솥을 얻은 이야기가 있다.

현대인의 윤리적 기준으로 보았을 때, 백제 계백 장군의 가족 살해가 '비뚤어진 충(忠)의 강조'라는 비판이 있듯이, '아이는 더 낳을 수 있어도 부모님은 한 분'이라는 논리는 '비뚤어진 효(孝)의 강조'라는 비판이 있다. 물론 결말은 좋았지만...사실 손순 설화는 늙은 부모를 잘 모시려고 아이를 희생하는 이야기니 고려장과 반대되는 경우다.

한편 일본에는 시즈오카 현 후지노미야 시에 있는 밤바 구멍(バンバ穴) 설화가 있다. 이 구멍은 입구의 크기는 1~2m 정도로 별로 크지 않지만 깊이가 20m에 달해 한 번 빠지면 자력구제가 불가능하다. 먼 옛날에는 늙은 부모를 이 구멍에다 유기하고 도망가는 사건이 많았고, 자식에게 버림받아 죽은 노파의 영혼은 밤중에 구슬프게 울거나,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을 구멍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고 한다. 밤바 구멍에 대한 소문은 무성하지만 공식적으로 '부모를 버렸다'고 확언된 기록은 없고, 탐사 결과 유해 등의 해당 이야기에 나오는 풍습이 실존했음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 또한 발견되지 않았기에 일본에서는 한국의 고려장 같은 도시전설로 여긴다.

현대에는 일본 호러 스팟 매니아들이 찾는 성지순례지 중 하나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우바스테야마(姥捨て山)' 설화도 있다. 이름부터가 할머니 모/ 버릴 사/ 뫼 산으로서, 우바스테야마(또는 오바스테야마, 姥捨山)라는 이름으로 실제 나가노현에 존재하는 산에, 고령의 노부모를 버리는 풍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판 고려장 설화를 다룬 일본 영화가 있는데 나라야마 부시코라는 영화다. 이마무라 쇼헤이가 1983년 제작한 영화로, 극도로 가난한 산간마을에서 식량을 아끼기 위해 노모를 버려야 하는 아들의 이야기다. 다만 고려장처럼 문헌학적/고고학적인 증거는 없으며, 20세기에 이뤄진 탐문 조사에서도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라는 결론이 나온 바 있다. 때문에 현재는 일본에서도 이를 어디까지나 설화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현대 한국에서 독거 노인 문제와 노인 자살 문제를 고려장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듯이, 일본에서도 현대에 발생하는 '유령 고령자' 문제를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楢山節考)'에 비유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Why]고려장은 일본문화? 日 주간지 '유령 고령자' 문제 부모 버리는 풍습에 비유

이러한 노인 유기 풍습이나 관련 설화는 동아시아 문화권 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도의 타밀나두 주에서는 'Thalaikoothal'라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신장에 해로운 음식을 대량으로 섭취시켜 노인의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인 죽음을 종용하는 케이스이다. 이누이트들도 노인을 얼음 위에 방치하고 떠나는 풍습이 있었다고는 하나 기근이 아닌 이상 극히 드물었다고 한다. 쓸모 없어진 노인을 유기/살해하는 풍습은 서양권이라고 예외가 아니었으며, 고대 로마, 그리스, 세르비아(Lapot), 북유럽권(Ättestupa)에서는 벼랑에서 던지거나 날붙이로 살해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이러저러한 풍습이 있었다더라' 식의 소문만 전해지고 명백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은 케이스도 많기 때문에, 정말로 혹은 빈번히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많은 경우 해당 내용의 설화들은 결국 자녀들이 회심하여 나이든 부모를 잘 모신다는 내용이나 혹은 그렇게 노인을 버린 벌을 젊은 세대들이 받는다는 내용이다. 또한 이런 설화들은 젊은 세대의 입장에서 "만약 이런 풍습이 있다면 나도 노인이 돼서 똑같은 일을 당하는 거 아니야?"라는 공포심이 들도록 설계가 되어있다. 때문에 현대 역사학자들과 문화학자들은 아프로-유라시아에 걸쳐 널리 퍼져있는 노인 유기 설화들이 "아무리 노인들이 나이 들어 힘이 없고 쓸모 없어 보이더라도 지금의 너가 존재할 수 있도록 낳고 길러준 분들이다.", "너를 사랑으로 길러준 이들이었던 노인을 버리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이다" "너에게는 없는 뛰어난 지혜를 가진 분들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결국 너도 언젠가는 노인이 될 것이라는 걸 잊지마라"를 상기시킴으로써 노인을 공경하도록 하기 위한 사회적 훈계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5. 인터넷 용어

인터넷 용어들이 대체로 그렇듯 안 좋은 의미로 많이 쓰이는데, 비유적으로 쓰는 경우 대체로 스포츠팬들이 왕년에 잘 나갔으나 노쇠화하여 팀에 마이너스 요소가 되는 노장 선수를 쳐냈을 때나, 쳐내야 한다고 주장할 때 많이 쓰인다.

그리고, 막장 부모를 강하게 비판할 때도 "고려장 마렵다", "고려장으로 지게에 태워서 갖다 버리자" 같은 식으로 복수하자는 패드립으로 비유하는 표현으로도 쓰이는데, "뭐하냐? 빨리 지게 태워버려", "지게 어디있냐?", "지게! 지게 가져와!" 라고 말하는 식이다. 그래서 대놓고 "고려장" 같은 표현보다는 "지게 태워버린다" 같은 드립을 더 많이 쓴다.

2013 시즌 이후 스토브 리그에서 고참 선수들을 정리하는 두산 베어스의 행보를 두고 고려장 야구라는 말이 있지만, 크보 팬들 사이에서 가장 퍼지게 된 계기는 엘지 트윈스의 라뱅 이병규가 2013년 마지막 대활약으로 하얗게 불태운 후 노쇠화를 이기지 못하고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지게에 담아 고려장을 해야한다며 고려뱅, 지게뱅 등 갖은 별명이 붙으면 유행으로 퍼지게 된다. 프로야구판에서 고려장 명인으로는 선동열[5]양상문이 꼽힌다.

서브컬쳐에서는 드물게 기존 캐릭터를 오랫동안 유지시켰다가 형편없게 하차시킬 때도 쓰이기도 한다.

2020년 이후부터는 지게와 함께 게임 내에 오래 박혀있는 고참 유저들을 상대로 놀리는 용어로 많이 쓰인다.

위와 같은 식으로 본래 없었던 현상이지만 유사한 논리로 고려장이라는 개념 자체는 계속 존재한다.

6. 기타

  • 폴 펠리오와 아우렐 스타인등의 고고학자가 발견한 돈황문서 중 일부에는 고구려로 보이는 나라 Keu-li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 해당 구절에 따르면 "Shan-ton 지방의 대신 Chan-Chun-Chi 관할구인 Keu-li 경내의 주민은 턱을 숙여 가슴에 붙이며 인육을 먹고 연로한 부모와 노인을 발가벗겨 죽였다"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장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런데 이걸 믿으면 그 문장에 있는 '산동대신의 관할구역이라는 표현'과, 바로 아래 문장인 그 아래 주민들은 물 속에서 고기처럼 살고 있다도 믿는 수준이다.
  • 쓸모 없어지면 제거한다는 점에서 토사구팽과 비슷한 용어이나 토사구팽이 '필요해서 데려왔다가 쓸모 없어져서 내쳤다'는 뉘앙스인 반면 고려장은 '원래 있던 존재였는데 쓸모 없어져서 내쳤다'는 뜻으로 좀 다르다. 그런데 폴아웃 세계관에서의 시저의 군단의 경우 늙고 약해지면 고려장과 동시에 토사구팽을 행한다고 한다.
  • 한국의 좀 오래된 여관에는 이름이 ○○장 식으로 된 여관이 많은데, 그 중에는 충공깽스럽게도 고려장여관도 있다. 물론 이쪽은 高麗莊으로 한자가 다르다. 다음 지도 확인결과 김해, 양구, 목포에 있으며 로드뷰 확인 결과 김해에 있는 것은 한울모텔로 개명, 양구는 아직 남아 있으며 목포는 확인 불가.
  • 얼음과 불의 노래에서 북부에서는 옛날에 겨울에 식량이 부족해지면 노인들이 자발적으로 죽으러 갔다고 한다.
  • 문헌에 의한 교차검증과는 별도로, 당시 시대 상황을 짐작해 볼 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의견 역시 다수 존재한다. 한국 커뮤니티에서는 우스갯소리로 성리학 중심의 사회라서 효도에 엄격한 것은 물론, 호환이 국가적 문제라서 입산 자체가 쉽지 않던 시대에 어떻게 고려장이 가능했겠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
  • 환경이 매우 척박했던 중세 스칸디나비아에는 일정 나이가 된 노인들이 절벽에서 떨어져 목숨을 끊는 애테스투파(Ättestupa, 씨족의 절벽이란 뜻)라는 풍습이 있었다. 이후 자살을 금하는 기독교가 들어오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복지가 발달하면서 이러한 풍습은 자연스레 없어졌다. 영화 미드소마는 이 의식을 비롯한 여러 괴상한 의식을 지금도 치르는 가상의 스웨덴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 고려장을 주제로 한 도 있다.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
어머니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봄구경 꽃구경 눈감아 버리더니
한 움큼 한 움큼 솔잎을 따서
가는 길바닥에 뿌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 하시나요
꽃구경은 안 하시고 뭐 하시나요
솔잎을 뿌려서 뭐 하시나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
산 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따뜻한 봄날 - 김형영 -
  • 일본과 중국의 경우도 고려장과 비슷한 설화는 있으나, 부모를 살해하거나 유기하는 체계적 관습이 있었다는 고고학적, 문헌학적 증거는 없으며, 이 때문에 양국의 사학계에서도 부모 유기/살해 풍습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현대까지도 동아시아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효의 가치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전란이나 기근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부모를 버리거나 죽이는 일이 있었을 수는 있어도 관습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대신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아동 인권에 대한 인식은 비교적 최근까지 낮았기 때문에 가난이나 남아선호 등의 이유 때문에 아이를 버리거나 죽이는 일들은 평시에도 비교적 잦았다. 일본의 마비키, 중국의 여아 낙태 및 살해, 한국의 80~90년대 한국의 여아 낙태 문제 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1]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해도 기근이나 재해 등 극한의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일어난 일이므로 '풍습'이 아닌 것이다. 이게 풍습이었다면 평화로운 시기에도 빈번하게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애초에 극한 상황에서 약하고 노동력에 도움이 안 되는 순으로 인구를 버리는 행위는 인류 공통의 현상이므로 딱히 어디 무슨 민족만의 풍습이라고 한정 짓기도 힘들다.[2] 중세 시절에 평균 40세 정도면 의외로 높은 편에 속한다.[3] 나라 이름 高麗의 근대 한국어 발음 중 하나이며, 주로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쓰였다.[4] 이것은 원래 중국에서 공자를 주인공으로 한 민담에 나오는 이야기로, 공자천주 고사성어에 대한 유래다. 그리스 로마 신화다이달로스 일화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5] 특히 선동렬의 경우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의 양준혁기아 타이거즈 감독 시절의 이종범 강제은퇴의 주범이다. 이 둘은 에서 영구결번이 된 레전드들이고, 이종범은 선동렬 본인 뒤를 잇는 영구결번(그 당시엔 영결 유력) 기아 레전드인데도 그런 짓을 벌였다...이 때문에 이정후가 기아를 싫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