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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와 중동의 관계를 나타내는 문서이다.2. 역사적 관계
800년 전 이집트의 책에서도 신라가 표기 및 언급되었다. #2.1. 초반
신라와 중동과의 관계는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무역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사산조 페르시아 사람들은 이슬람화 이전에는 역사 기록을 구체적으로 남기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이 당시 신라와 페르시아 사이의 교역 규모는 일부 통일신라 유적에서 페르시아 미술 양식이 반영된 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판타지가 가미된 가상의 이야기지만 중세 이란의 서사시 샤나메의 스핀오프인 쿠시나메에서는 신라가 '바실라'라는 이름으로 극중의 무대가 되었으며, 주인공인 파리둔은 페르시아-신라 혼혈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실라가 상당한 낙원이면서, 페르시아와 힘을 합쳐 아랍을 공격하는 등 상당히 우호적으로 묘사되어 있다.2.2. 중반 ~ 후반
▲아랍인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가 유럽에서 작성한 세계지도.[1] |
중국의 저쪽, 깐수의 맞은 편에 산이 많고 왕이 많은 한 나라가 있는데, 신라라고 불린다. 그곳에는 금이 풍부하다. 그곳에 간 무슬림들은 좋은 환경에 매료되어 영구 정착한다.
- 페르시아인 이븐 쿠르다드비, <도로와 왕국 총람>
- 페르시아인 이븐 쿠르다드비, <도로와 왕국 총람>
중국 해안의 맞은편은 신라와 그 부속 도서들을 제외하곤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라크인과 기타 외국인들이 정착하여 그곳을 조국으로 삼았다. 그들은 깨끗한 물, 비옥한 토지, 이익과 수입의 증대, 광물질과 보석류의 풍부함 때문에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곳을 떠난 자는 극소수다.
- 이라크인 마수디, <황금 초원과 보석 광산> 프랑스어-아랍어 대역 346쪽 영문판 358쪽
- 이라크인 마수디, <황금 초원과 보석 광산> 프랑스어-아랍어 대역 346쪽 영문판 358쪽
신라는 유쾌한 나라다. 중국의 가장 끝자리에 위치한다. 공기가 맑고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기에 사람들은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말하길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이 난다고 한다. 전염병과 다른 병은 물론 드물고 파리와 야생동물 또한 거의 없다. 다른 지역의 어떤 환자도 이곳에 오면 치유된다. 모함마드 자카리야 라지는 "누구나 이 땅에 들어가면 살기 좋으므로 정착해 떠나려 하지 않는데 그건 자원과 금이 풍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로지 알라만이 그 진실을 안다.
- 자카리야 카즈위니, <나라들이 남긴 발자취>
기타 중근동 문헌들의 신라 관련 기록들[2][3]- 자카리야 카즈위니, <나라들이 남긴 발자취>
세계와의 무역도 활발했으며[4] 장보고가 한중일을 연결하는 허브 기지로서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 일대에 청해진을 건설하여 해상을 장악한 때도 이 시기의 일이다. 장보고나 신라삼최, 혜초 등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유학 등 국제 인적 교류도 상당히 활발했다. 신라 정부도 유학생의 책값과 체류비를 지원하고 유학 경력자가 귀국하면 관리로 특별 채용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의하면 연안항해를 하지 않고 당나라 적산포에서 충청남도 해안까지 이틀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주변의 국제 정세가 당, 일본, 발해로 정립되었고, 신라 자체의 군사력도 상당했었기에 200여 년 동안 외적의 침입도 적었다.[5]
당 내륙에 신라인의 거점인 신라방이 구축된 시기도 바로 이때. 그 외에도 신라관, 신라촌, 신라원, 신라소라 이름 붙은 이 시기의 대당 거점이 꽤 많이 있었다. 이는 당대 신라의 진취성과 당나라의 개방성을 모두 보여주는 사례. 뿐만 아니라 국수주의로 돌아선 헤이안 시대 일본에조차도 견신라사(遣新羅使)가 오가면서 교류가 꽤 있었기에 통일신라의 영향을 받은 문화재가 꽤 많으며[6] 심지어 적성국으로 출발한 발해와도 후대에 교역을 트면서 <상경 → 동경 → 남경> 루트를 거쳐 금성까지 연결하는 <신라도>라는 무역로가 개척되기도 했다. 삼국사기에서 인용한 당대 가탐의 저서에 따르면 발해의 동경이 있었던 책성부[7]에서 신라 북쪽 천정군[8]까지의 사이에 39개의 역(驛)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도 매우 융성하여 당시 기록에 따르면 수도 금성(현 경주시)에서는 비가 오는 날 가가호호의 처마 밑만 따라 걸어도 비 한방울도 맞지 않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고 한다. 말기인 헌강왕 때에 이르면 도성의 민가는 모두 기와로 덮고 숯으로 밥을 지었다고 한다. 하긴 그만 한 경제력이 뒷받침되었으니 문화적 성취가 가능했던 것이겠지만. 다만 모두 수도의 융성함을 드러내는 기록이다 보니 여타 지방의 상황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다만 나말여초 대에의 소설이나 지방에 도로가 이어져있는 것 등을 볼 때 지방 사정도 낙후되거나 방치된 것이 아닌 정돈이 잘 정리 되어있고 서라벌만큼 융성한 것으로 보인다.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당대 아랍인(또는 이란인 등)들조차도 신라를 방문하고 고향보다 더 살기 좋아서 아예 눌러앉으려 했다고 그들의 지리서에 기록했다. 기록들에서 일관적으로 서술된 내용에 따르면 실제로 정착한 무슬림도 적지 않았던 모양. 위에 첨부된 '알 이드리시의 세계지도'에도 신라가 표시돼 있는데, 아랍인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가 시칠리아 왕국 노르만 왕조의 루지에로 2세의 지원하에 제작했다. 한국이 포함된 최초의 세계지도로, 다만 신라가 섬나라로 묘사된 오류가 있는데, 멀리서 한국에 오는 사람들은 바다를 항해해서 동중국해에서 올라와 한국에 상륙했기 때문에 한국의 북쪽으로 가 볼 일이 없어 섬나라로 오해한 것이다. 수백 년 뒤 조선을 표시한 유럽 세계지도에서도 조선을 섬나라로 잘못 그린 지도가 상당히 많다. 삼국유사에 용왕의 아들로 나오는 처용이 사실은 아랍에서 온 인물이었다는 정수일 선생의 설이 유명하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서도 혜초가 파사국(波斯國)도 갔다 왔음이 언급되는데 파사국은 페르시아를 음차한 것이다. 반대로 훗날 이란계가 관료층으로 자리잡은 중동, 이슬람의 세계지도나 지리서에선 신라가 언급되며 신라에 정착한 이란인들도 있었다. 한 편 왕오천축국전에서는 시리아도 소블룸국이라는 명칭으로 언급된다.
원성왕릉의 호인석과 처용역시 당시 이주한 이란인 혹은 소그드인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외 신라 주변국에서 견신라사로 파견하여 활발한 교역을 하였고, 반대로 신라가 견탐라사, 견일본사, 견발해사, 견당사 등을 파견하여 활발하게 교역을 하였다.
2.3. 종결
936년 신라가 병합됨에 따라 관계가 끝난다. 이후 중동과의 관계는 고려로 이어지고 11세기까지 신라로 불리게 된다.3. 같이 보기
4. 외부 링크
[1] 참고로 이 지도는 남쪽이 위로 가게 만들어서 신라가 좌측 끝에 있다.[2] 여담으로 중근동 쪽 문헌에서는 이미 고려 시대로 접어든 중세 11세기까지도 '신라'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당시 정보나 교통은 현대 같지 않았다 보니 새로운 왕조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했거나, 혹은 알면서도 과거부터 이미 '신라'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표기했던 듯 하다. 사실 조선 시대에도 외국에서 '고려'라는 명칭을 쓰는 등의 일이 있었고, 멀리 떨어진 아랍도 아니라 가까운 일본이나 여진족에 심지어 19세기 이양선을 타고 오는 서구 열강까지 고려란 표기를 쓰기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일은 꽤 흔했던 듯하다. 현재까지 쓰이고 있는 한국의 영어명 코리아 자체가 이미 고려를 어원으로 한다.[3] 참고로 신라를 구체적으로 직접 언급한 이슬람 문헌은 서력 851년 집필된 <아크바르 알 신드 왈 힌디(위대한 중국과 인도)>라는 책이다.[4] 당나라, 발해, 일본은 물론이고 심지어 멀리 아라비아 상인도 왔다. 이는 당이 다른 중국 통일 왕조보다 더 개방적인 성향이었던 탓도 크다. 반대로 조선이 해외 교류가 거의 없었던 것도 명이 폐쇄적인 성향이었기 때문이 큼.[5] 당과 일본 모두 삼국 통일 전후 혼란기에는 한반도로 병력을 보냈지만 전부 신라에게 격퇴당했다.[6] 헤이안 시대의 경총(經塚)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의 금동불입상이 대표적이다. 덴무 덴노 시절에 제정된 팔색성(야쿠사노가바네)이라는 씨성제가 신라의 골품 제도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7] 지금의 중국 길림성 훈춘.[8] 지금의 북한 함경남도 문천군 덕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