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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당관계란 신라, 통일신라와 당나라의 관계를 말하며 당나라가 멸망한 9세기까지 관계가 있었다.2. 역사
2.1. 성립
당나라 이전 통일왕조인 수나라는 대운하 건설 및 고구려 정벌에서 완패하며 국력이 소모되어 무너지고 만다. 그 다음에 당나라가 들어서고 수나라와 같이 고구려를 공격하나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 이럴 때, 신라는 백제의 맹공으로 대야성이 함락되면서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죽을 정도로 궁지에 몰리게 된다. 결과적으로, 백제를 물리치고자 하는 신라와 고구려를 점령하려는 당나라간의 입장이 맞아 떨어져 나당동맹을 맺게 된다.2.2. 초반(우호적 관계)
초반에는 나당동맹을 맺고 각각 고구려와 백제를 치기로 약속하고 그 계획을 실행하며, 668년 이전까지는 꽤 우호적인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645년을 나당연합의 시작으로 보는데, 고구려-당 전쟁이 한창이었을 때다. 당은 신라와 백제에게 고구려의 남쪽 지방을 쳐달라 했으나, 백제는 이 부탁을 무시하고,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러 간 사이에 신라를 공격해 성읍을 빼았었다. 이렇게 백제와 당의 관계는 파탄이 나고, 나당 양국은 더 가까워져 650년 6월을 마지막으로 신라는 독자적인 연호 대신, 당나라의 연호를 쓰기로 해 당나라에게 조공하는 질서가 확립되었다. 남은 두 나라인 고구려와 백제는, 두 나라 모두 나당을 가까이 하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느슨한 연맹을 성립한다.
645년과 650년 사이, 신라는 김춘추를 648년 사신으로 보내 의견을 같이함을 확인하고, 649년 당고종은 신라에게서 뺏은 영토를 돌려주고, 공격하면 당이 백제를 공격할 것이라는 경고를 보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660년, 모든 준비를 마친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과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은 백제를 열흘만에 멸망시키고, 8년 뒤 수많은 전투 끝에 평양성을 함락시키며 고구려도 멸망시킨다. 이때까진 관계가 괜찮았으나 당이 한반도 정복의 야욕을 보인 이후 관계가 파탄난다
2.3. 파탄
자세한 내용은 나당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고구려의 일부 영토만 가지고 가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당나라는 한반도 전체를 가져가려는 야욕을 보인다. 하지만, 신라는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에서 승리하며 당나라를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일단, 당은 고구려 일부 영토만 가지겠다는 협약을 어기고 구 백제 영토를 점거하였으며, 웅진도독부를 세우고 신라와 백제(웅진도독부)는 싸우지 않고 화해한다는 회맹을 세우게 했다. 사실상 당나라의 괴뢰국이였던 웅진도독부를 엄연한 승전국인 신라와 동등시한 것이다. 굉장히 부당한 것인데, 일단 자신들이 맺은 협약을 스스로 위반했고, 백제는 물론 고구려 평정도 신라의 공이 컸으며, 괴뢰국과 승전국을 회맹시킨 것은 부당한 처사이다.
처벌권, 장수 임명권, 병력 징발권, 군사작전권 등 신라의 모든 군령권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처벌을 마음대로 하고, 병마를 징발하며, 장수를 임명했으며, 결정적으로 당군은 정보를 공유하지 않은 채 마음대로 진군과 퇴군을 했다. 신라군은 동맹인데고 불구하고 당군이 철수했다는 말을 들은 이후에야 철군했다.
이러한 갈등과 당의 야욕은 또다른 전쟁을 낳았고, 초반에는 고구려 부흥군이 내분으로 검모잠파와 안승파로 나뉘다가 검모잠이 피살당하고 안승이 귀순하는 등 구 고구려 지방이 많이 어지러웠다. 구 백제와 고구려 영토에서의 싸움을 걸쳐 전쟁은 절정에 다르고, 신라는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로 승리에 쐐기를 박았다.
2.4. 통일신라 시기
당은 나당전쟁 이후에도 반성하는 모습을 안 보이고 신라에 대한 침공 의사를 포기하지 않았으나, 토번의 위협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실행에 옮길 새가 없었다.결국 당나라는 본인들이 실로 어리석었음을 깨닫고 정책을 수정하여 다시 신라와 화친을 맺었고,[1] 통일신라 시기에는 통일신라의 북쪽에 발해가 세워지며 해상으로 무역을 하게 되었으며, 당나라는 고구려 영토를 잃게 된다.
통일신라와 당나라는 교역과 무역이 매우 활발했다. 통일신라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으면서 의복도 당나라의 영향도 받았다. 당나라에는 빈공과에 신라인 합격자들이 많이 있었다.
당나라는 신라의 유교적 소양을 높게 쳐주어 당 현종은 신라를 '군자국'으로 칭하고 신라에 사신을 보낼 때 학문에 뛰어난 인재를 선별하여 보내기도 했다.
신라는 국력에 비하면 당에게 꽤 외교적인 우대를 받았는데, 외국 사신들에 대한 의전서열에서 신라 사신을 1등석에 두었기 때문에 발해나 일본 사신들이 반발하기도 했다.[2]
2.5. 말년과 종결
당나라는 황소의 난을 시발점으로 해서 온갖 봉기들이 일어나면서 어지러워진다. 그리고 황실에서도 심심하면 쿠데타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당나라는 907년을 끝으로 멸망하며 5대 10국 시대가 개막하게 된다. 한편 통일신라도 후기로 가면서 매우 혼란스러워진 것은 매한가지였다. 통일신라에서는 원종과 애노의 난과 김헌창의 난 등 온갖 봉기가 일어나는 한편 골품제는 바뀌지 않고 유지된 탓에 형성된 호족들의 권력이 세지며 태봉과 후백제 등이 건국된다[3][4]. 결국 이 두 나라는 모두 안타까운 최후를 맞게 된다.자세한 내용은 국가 멸망/사례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국가 멸망/사례 문서 참고하십시오.
3. 관련 사건
4. 관련 문서
[1] 발해 건국 초기 당과 발해 사이의 긴장관계가 형성된 와중 신라는 당의 요청에 따라 발해를 공격하는 등 나당전쟁 이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관계개선이 이루어진다.[2] 송나라와 명나라 같은 후대의 중국 왕조들도 북방 민족이나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한반도의 왕조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3] 이 과정에서 신라의 일부 부패한 벼슬아치들은 당나라의 역시 똑같이 부패한 인간들과 내통해서 일부 자국인들을 노예로 팔아먹었고, 당나라는 이들을 혹사시키고 사람 취급도 안 하며 아주 못살게 굴어댔다. 물론 이 일은 장보고에 의해 다 근절된다.[4] 이 과정에서 당나라는 신라 포함 한반도의 나라들에도 도움을 청했지만, 다들 하나같이 본인들 코가 석 자라서 남을 도와줄 처지가 아니었기에 줄줄이 거절만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