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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라의 건국과 초기 역사
청동기가 한반도 동남지역에 전래된 이후 권력을 가진 부족장이 등장하고, 기원전 8세기~7세기 무렵부터 지금의 경주시 일대에 지석묘를 조영하며 생활하였다. 이후 기원전 2세기 초반,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멸망한 고조선의 유민 집단이 세형 동검을 비롯해 초기 철기 등 새로운 발달한 문화를 가지고 영남으로 남하해서 목곽묘를 조영하며 초기 신라를 건국하는 주체가 되었다. 문헌기록에서 이 고조선 유민들은 경주 땅에서 6부촌(양산촌(이씨), 고허촌(최씨), 진지촌(정씨), 대수촌(손씨), 가리촌(배씨), 고야촌(설씨))[1]이란 집단을 이루고 살았다고 전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57년에 이 6부촌의 협의 하에 양산촌 출신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이렇게 초기 신라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제적, 중앙 집권적인 영역 국가가 아니라 아직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느슨한 소형 연맹체였다.
이후 6촌은 6부로 발전했는데, 각각 훼부, 사훼부, 본피부, 사피부, 잠훼부, 한기부가 되었다. 현대 사학계에서는 이들의 지도자 중에서 신라 전체의 지도자가 추대되다가 점차 훼부가 왕위를 독점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초기 신라와 그 주변에 있는 각 지방마다 간, 또는 간지라고 하는 지도자가 있었고 각자 독자적인 세력권을 지니고 있었다. 이 간이라는 칭호는 음운상의 유사성 때문에 여기서 몽골, 튀르크 등 북방 유목민들의 칸(Khan)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런 주장이 얼핏 봐선 뜬금없는 한국기원설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확실히 신라의 '간'은 북방 초원의 가한/칸(khan) 칭호보다 더 앞선 시기부터 금석문을 비롯한 기록에서 나오고 있어서, 서로 어원 관련이 없다고 단정할 수만은 없는 애매한 상황이다. 아무튼 이 간/간지라는 호칭은 신라의 왕명인 거서간과 마립간에도 반영되고 있으며, 파진찬이나 잡찬 같은 신라 관등에 들어가는 글자 '찬(湌)' 역시 '간'과 동일 어원의 변형이 거의 확실하다. 가령 잡찬은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에서는 잡간(迊干)이라고 써 있어 찬과 간의 대응관계가 드러나 있다.
신라 임금의 칭호는 처음엔 거서간이었다가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으로 변했는데, 신라 초기에 박 - 석 - 김 세 성씨가 돌아가면서 왕위를 계승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돌아가면서 왕위를 했다기보다 후대에 세 성씨로 대표되는 집단들이 차례로 왕권을 차지했다고 보는 편이 낫다. 초대 왕(거서간)인 박혁거세부터 8대 아달라 이사금까지는 대부분 박씨가, 9대 벌휴 이사금부터 16대 흘해 이사금까지는 대부분 석씨가 계승하였다. 17대 내물 마립간부터 신라 말기까지는 김씨가 독점 계승한다. 그러나 중간에 4대 탈해 이사금(석씨), 13대 미추 이사금(김씨)이 예외적으로 끼어들어 있어 편의상 세 성씨가 돌아가면서 왕위를 계승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초기의 신라는 기원전에 건국되어 초반부터 진한, 변한(=가야) 지역의 여러 주변 나라나 바다를 건너오는 왜국과 상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국호는 초기에 사로, 사라, 신라 등이 혼용되어 사용되다가, 503년 지증왕 때 신라로 확정했다. 교차검증이 가능한 해외 기록으로는 3세기의 중국 측 기록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진한의 하나인 "사로국"이란 명칭으로 처음 등장한다. 삼국사기나 일본서기는 좀 더 후대에 작성된 것이지만 정사 삼국지는 3세기에 작성되었으므로 사로국은 아무리 삼국사기가 오류가 있다 가정해도 3세기에는 확실히 존재했다고 보다 명확하게 인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주로 사로라는 이름이 나오다가 내물 마립간이 중국에 보낸 사신을 통해 국호를 신라라고 칭했다는 사실이 중국 사서에 나타난다.
2. 성장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사로국 문서로. 역사 고고학적 성과가 대량으로 반영되었다.고고학과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과 삼국사기 상의 서술에는 시기 차이가 있지만, 신라는 성장하면서 경주 지역 주변 진한 12개국을 차례로 병합하거나 복속해 나갔다. 삼국사기상으로는 첨해 이사금(재위 247년 ~ 261년) 시기를 전후로 진한 전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였다. 어떻게 경주에서 시작한 초기 신라가 주변 지역보다 우위를 확보했는지는 4세기 이전 왕족의 묘지나 궁성 유적이 제대로 조사되지 않아 확실히 알 수는 없고 여러 설이 있지만, 경주 황성동에서 대규모 제철 유적이 발견되고 경주 곳곳에서 용광로 유적이 발견됨에 따라 철 생산이 원동력이 아니었겠느냐 하는 설이 유력하다. 실제로 경주 주변 포항, 울산, 경산 등 지역에서 출토되는 고대 철기도 경주의 철기와 형태나 크기가 거의 동일한데, 즉 경주에서 제작된 철기 제품을 주변 지역 진한 소국들에게 전해졌다는 것이다. 사로국은 진한을 완전히 통일하기 전에도 이미 진한의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유력한 수장격인 세력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중국 서진에 진한의 대표로서 사신을 보낸 진한왕도 확실하진 않지만 경주의 사로국, 즉 신라의 왕일 가능성이 높다.
신라가 국가 체제를 공고히 하고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것은 금석문에 최초로 등장하는 왕인 내물 마립간(내물왕)(재위 356년 ~ 402년)때다. 이전에는 박, 석, 김 3개 성씨가 번갈아가며 이사금이 되었으며, 이사금 자리는 '연장자'라는 뜻이 말해주듯, 강한 왕권보다는 여러 군장국가의 리더에 가까운 위치였다. 그러나 내물 마립간 대에 이르러 사로국은 영역 국가 신라로 재편되었으며, 김씨가 독점적으로 지도자 자리를 세습하는 '왕조 국가'로 거듭난다. 그리고 이때부터 '연장자'(이사금) 대신 '간干들의 우두머리'' 간干 중의 간이라는 의미의 '마립간'을 지도자의 호칭으로 쓰기 시작했다. 또 내물 마립간은 중국 전진(前秦)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해 중국과 직접 교류를 시작했다. 46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재위에 있었던 내물 마립간 대에는 크고 작은 여러 사건과 전쟁이 있었다.
내물마립간 전기에는 백제의 전성기를 이끄는 근초고왕이, 후기는 고구려의 전성기에 해당하는 광개토대왕이 재위에 있었던 시기로, 이 시기에 삼국은 마한과 진한 등 군소 세력들을 평정하고 비로소 국경에서 직접적으로 군사적 접촉을 시작하던 때였다. 또 내물 마립간 대에는 왜의 침략이 잦았는데 여러 차례 왜의 침략을 격퇴하는데 성공했지만 그의 재위 말기인 399년 백제, 가야, 왜의 연합군이 대규모로 침공했을 때는 우호 관계에 있었던 고구려 광개토대왕(재위 392년 ~ 413년)에게 사신을 보내 고구려군의 지원을 받았다. 광개토대왕의 5만 대군이 신라성에서 연합군을 격퇴하였고 종발성까지 격퇴시켜 신라인에게 그 성들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군이 신라 땅에 들어온 대가로 이후 한동안 신라는 고구려의 내정 간섭을 당했다.
광개토대왕에 이어 장수왕(재위 412년 ~ 491년) 시절 전성기에 접어든 고구려는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기며(427년) 남진 정책을 펼치면서 백제에 본격적으로 압박을 가했다. 백제 비유왕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한때 적이었던 신라 눌지 마립간(재위 417년 ~ 458년)[2]에게 화친 제의를 했고 신라도 장기적으로 고구려와 대결해야 함을 인식하고 이를 받아들여 나제동맹을 맺었다(433년). 나제 동맹은 진흥왕과 성왕이 대립할 때까지 약 120년간이나 지속되었는데, 455년과 475년 고구려가 백제를 크게 침공했을 때 신라는 백제로 지원군을 파병했으며,[3] 494년과 495년에 걸쳐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번갈아 침공해왔을 때도 백제와 연합해서 고구려군을 격퇴했다.
왜와 친밀했거나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신라는 왜와는 거의 철천지 원수 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4] 일본 측 기록에서도 우호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백제나 가야와 달리 신라에 대해서는 대단히 적대적으로 묘사한다. 그도 그럴 게 신라는 왜와 가장 가까운 나라였기에 그만큼 왜의 약탈이 흔했기 때문이다. 거리가 멀었던 백제는 왜의 약탈이 적었기에 자연스레 본인과 똑같이 신라에 적대적인 왜와 친해진 것.
한편 2014년 5세기후반~6세기에 조성된 경북 의성 지역 고분에서 전형적인 백제식 금동관모[5]가 출토되어 논란이 되었다. 이 지역은 진한 소국중 하나인 소문국(조문국)이 있었던 지역으로서, 백제식 금동관모와 함께 '의성양식 토기'#(경북 북부지역인 의성,군위,상주,예천,안동,영주,봉화,청송 등지에서 출토되는 토기로 경주 지역 토기와는 다르다.)와 규두대도(圭頭大刀),삼엽문 환두대도(三葉文 環頭大刀)등의 최상위 신분을 상징하는 유물도 출토되었다. 삼국사기에 ‘조문국은 서기 185년 신라가 국호가 바뀌기전인 사로국 벌휴왕에 의해 정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지역 사학자들은 당시 의성일대의 진한이 신라에 의한 ‘정벌’이나 ‘합병’이 아니라 상당 기간 독자적인 세력이나 정치체제를 유지했으며, 그 과정에서 신라뿐만이 아닌 백제와도 교류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하였다.#######
3. 중앙집권화와 국력 강화
지증왕(재위 500년 ~ 514년)과 법흥왕(재위 514년 ~ 540년) 때 국가 체제와 지방 제도의 정비, 불교의 수용과 장려, 율령 반포, 왕권 강화, 영토 확장 등 국가적 사업을 연이어 성공하며 중앙 집권 국가로 변모하였고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지증왕(재위 500년 ~ 514년) 대에 대대적으로 체제를 정비하고 국력 강화를 이루었다. 503년 국호를 정식으로 "신라"로 확정하고[6], 마립간 대신 왕(王)을 칭했는데 이는 '간' 중에서 우두머리인 마립간 대신 '간'을 초월한 그 위의 지위를 못박은 것이다. 또 관등 정비(503년), 상복 제정(504년) 등을 통해 정치 체제를 정비했고 지방 제도도 개편했다(505년). 아울러 502년 우경법을 실시하여 식량 생산이 크게 증대되어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국방력 강화에도 힘을 써 지방에 12개의 성을 지었고, 동시전도 설치했으며(509년), 이사부가 지휘하는 수군을 보내 우산국(울릉도)를 복속시켰다(512년). 어쩌면 북위와 양나라의 제도를 벤치마킹했을 것이다.
법흥왕(재위 514년 ~ 540년) 때는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크게 강화하여 영토를 확장하면서 중앙 집권 국가로 변모해 나갔다. 516년 법흥왕은 병부(兵部, 오늘날의 국방부)를 설치하고 병부의 장관인 병부령(兵部令)을 임명하여 군 체계를 정비하고 군사력을 강화했다. 520년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는 등 국가 체제를 정비했다. 527년에는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불교를 공인했는데, 왕족을 석가족과 동일시하면서 왕권을 강화해 나갔고, 동시에 토속 신앙의 제사장이었던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531년에는 상대등 직위를 신설하여 귀족 대표를 관료 체계에 포함시켜서 귀족 세력을 왕권에 복속시켰다. 532년에는 가야연맹의 중심 국가인 금관가야를 병합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이러한 국력 신장으로 자신감을 얻은 법흥왕은 536년 마침내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7]하였다.
이처럼 지증왕과 법흥왕의 치세를 거치며 국력이 탄탄해진 신라는 차기 진흥왕 때 전성기에 이르게 된다.
4. 진흥왕 시절 영토 확장
전대에 개혁으로 축적한 국력을 토대로 진흥왕은 대대적인 영토 확장을 시도했다. 551년 진흥왕은 나제동맹에 있던 백제와 동시에 고구려를 공격해 고구려의 10군을 점령했다. 이때 백제도 고구려로부터 한강 하류 6군을 점령했는데, 이후 백제군이 한강 유역에서 철군하자 553년에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차지했다.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의 항구를 통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거치지 않고 중국 국가들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는 이후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신라가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불만을 가진 백제 성왕은 왜국과 대가야와 연합하여 신라에 보복전을 시도했지만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가 대승리해, 성왕이 전사하고 수만 명의 연합군을 잃는다.
백제를 꺾은 진흥왕은 북쪽으로 고구려 경략을 계속하여 지금의 함경도 지역까지 진출했다. 556년에는 함경남도 원산, 안남 지역을 점령하여 비열홀주를 설치했다. 이후에도 북진을 계속했고, 568년에 점령 지역을 시찰하면서 마운령 순수비와 황초령 순수비를 세웠다.
한편 서남쪽으로는 남아있던 가야 세력을 경략하여 대가야의 합병(562년)을 끝으로 가야 전 지역을 완전히 병합했다. 이로서 신라는 진흥왕 즉위 시점보다 영토와 인구가 3배 이상 커지게 되었다.
영토 확장과 더불어 여러 사찰의 창건이 눈에 띈다. 진흥왕은 측근들을 통해 황룡사를 비롯하여, 법주사, 화엄사 등 여러 사찰을 건립했다. 활발한 영토 확장을 벌이면서 불교를 통해 국력을 결집하려 모습이 엿보인다. 황룡사는 수도 서라벌 한 복판에 세워져 국력을 결집하는 역할을 했으며, 법주사, 화엄사는 새로 편입된 전방 지역에 세워졌는데, 불교를 통해 새로 복속된 지역의 민심을 수습하여 해당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기록에 의하면 해당 사찰에서 고승들이 화랑들에게 불법을 강연하는 등 군사적 용도로도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경상도의 불교세가 강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5. 백제 및 고구려와의 전쟁
553년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백제와 고구려의 국경이 분리되었다. 백제의 경우 전 국경선이 신라와 접하게 되었고, 고구려의 경우에도 남쪽 국경선이 모두 신라와 접하게 되었다. 때문에 이때부터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6세기 후반까지는 진흥왕의 기세가 워낙 매서웠기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가 움츠러들면서(당시 고구려는 돌궐과 싸우느라 상대 적으로 남방전선에 소홀할 수 밖에 없었다) 삼국시대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전쟁이 적은 시기가 지속되었다. 백제 위덕왕은 재위 초기 아버지 성왕의 복수를 위해 몇 차례 신라를 공격했다가 역관광을 당한 후 죽을 때까지 더 이상 신라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지 못했다. 고구려 평원왕 역시 진흥왕에서 계속 영토를 빼앗기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어전 이외에 일절 보복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때문에 진흥왕 사후 진지왕과 진평왕 재위 전반기까지는 삼국 간에 거의 전쟁이 없는 강제 평화기가 지속된다.백제의 경우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한 후 그의 아들 위덕왕이 복수를 위해 왜와 연합하여 몇 차례 신라를 쳐들어왔으나, 진흥왕이 성공적으로 방어함은 물론이고 오히려 역습으로 백제의 영토를 추가적으로 점령하고 가야를 완전 합병(562년)하는데 이르자, 이후 백제는 왜와 동맹을 더욱 강화하여 방어에만 치중하게 된다. 당시 왜는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백제를 부추겨 함께 신라를 공격하기를 원했으나, 진흥왕의 기세 눌려 소심해진 백제 위덕왕은 왜의 요청을 번번히 거절하며 죽을 때까지 더 이상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지 않았다. 한편 진흥왕 역시 백제의 배후에 왜가 버티고 있는 상황을 직시하고 더 이상의 백제 침공을 자제하고 대신 북쪽의 고구려 공략에 치중하게 된다. 때문에 562년부터 602년까지 40년 동안 신라와 백제 간에는 이렇다할 전쟁이 발생하지 않는 휴전기가 지속된다.
한편 고구려의 경우, 진흥왕이 함경도까지 들쑤시고 다녔지만, 당시 고구려의 국왕 평원왕은 신라와의 대결을 자제했다. 평원왕은 북주의 위협이 계속되고 신라가 전성기에 이른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진흥왕이 고구려 영토를 잠식한 것에 대해 군사적 보복을 시도하지 않고 내치를 다지며 안으로 국력을 강화하는 데만 주력했다.[9] 고구려에서는 온달 등 강경파들이 끊임없이 신라에 대한 보복 공격을 주장했으나 평원왕은 죽을 때까지 끝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590년 마침내 평원왕이 죽자 온달은 처남 영양왕을 설득하여 신라를 침공했으나 본인이 전사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590년). 그러나 이후에도 영양왕은 수를 물리친 것에 탄력을 받아 603년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해왔으나 진평왕이 직접 나서 이를 격퇴했다.
진흥왕 사후 진평왕(재위 579년 ~ 632년)은 53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보위에 있으면서 백제와 고구려의 연이은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며 신라의 전성기를 이어갔다. 진평왕은 한창 때 진흥왕처럼 손수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우는 용맹한 군주였지만, 그도 만년에 이르러서는 노화로 인한 쇠약을 피해갈 수 없었다.
7세기에 접어들자 휴식기를 보내며 관산성 전투의 충격을 회복한 백제는 무왕(재위 600년 ~ 641년)이 집권하면서 그동안 방어에만 급급했던 태도를 바꾸어 신라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백제 무왕은 602년, 근 40년만에 신라 공격을 감행했으나(아막성 전투)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605년 8월 진평왕이 백제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자 백제도 신라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이후 한동안 백제 무왕은 수에 여러 번 사신을 보내며 수나라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고구려와 긴장 관계를 이어갔다. 특히 무왕은 수가 고구려를 침공한다면 백제가 앞장서서 길을 터주는 역할을 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611년 수가 마침내 고구려 침공을 위한 동원령을 내렸고 이에 신라는 수나라와 고구려와의 결전을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렇게 신라의 시선을 고구려로 돌려 놓은 상황에서 백제 무왕은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612년 정월) 직전인 611년 10월 돌연 신라를 기습하여 가잠성을 함락했다.(가잠성 전투) 616년 백제는 신라 모산성을 공격했고, 618년 신라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백제가 점령한 가잠성을 공격하여 성주를 전사시켰다. 이렇듯 신라와 백제는 일진일퇴의 소모전 양상이 거듭었다. 그러다가 진평왕 말년인 623년 백제 왕이 신라 6개성을 함락하는 성과를 거두면서 백제는 드디어 가시적인 성과를 냈다. 그러나 수의 개입으로 10년간 소강상태가 이어지며, 632년 진평왕이 죽을 때까지 더 이상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632년 진평왕이 죽자 신라에선 성골 출신 남자 후계자가 없어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재위 632년 ~ 647년)과 진덕여왕(재위 647년 ~ 654년)이 연이어 즉위했다. 신라에 여성 왕이 즉위하자 이를 신라를 공격할 기회로 판단한 백제와 고구려는 신라에 대한 집중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이는 역대 모든 고대 국가들에서는 국왕이 동시에 지휘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대규모의 전투에서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끄는 것이 기본이었고, 때문에 삼국 시대에 국왕이 전사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발생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전장에 서기 힘든 여왕의 즉위는 당시 관점에서 주변국들에게 얕보이기 좋은 구실이었다.
백제 무왕은 선덕여왕 즉위 이듬해인 633년, 10년만에 다시 신라를 침공하여 서곡성을 함락시켰다. 이어 636년 백제 무왕은 다시 신라를 침공하여 독산성을 쳤으나 이번에는 패배하고 물러났다. 독산성 전투 패배 이후 무왕은 더이상 신라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고, 의자왕이 즉위할 때까지 백제와 신라간의 소강 상태가 다시 이어진다.
641년에 즉위한 백제 의자왕은 즉위 이듬해인 642년 신라를 침공하여 여러 성을 함락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특히 642년 8월 대야성 전투[10]에서 백제가 요충지인 대야성을 함략하고 당시 유력자였던 김춘추의 딸과 사위를 죽인 것은 신라로서는 뼈아픈 일이자 김춘추, 김유신, 선덕여왕, 문무왕에게 악감정을 주게 되었다.[11] 대야성 함락 이후 642년 말 김춘추는 직접 고구려로 가 두 달 전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연개소문에게 군사 동맹을 제의한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김춘추를 옥에 감금했으나, 김유신의 신라군이 고구려 국경지대로 진군해오자 김춘추를 풀어준다. 직후 연개소문은 백제 의자왕과 동맹을 맺어 백제와 고구려가 동시에 신라를 압박해 오는 상황이 이어진다. 한편 백제 의자왕은 642년의 군사 활동으로 대야성을 비롯해 신라의 여러 성을 차지하여 기세 등등해져 있었지만 김유신이 있는 신라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이에 백제와 신라는 서로 뺏고 뺏기는 소모적인 공방전을 벌였다. 신라는 호전적인 의자왕에 맞서는 동시에 연개소문의 고구려와도 동시에 싸워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게 되며, 고구려, 백제, 말갈과 동시에 전쟁을 수행하는 등 쉽지 않은 상황이 계속되었다.[12] 이 당시 김유신은 군사의 사기 진작을 위해, 전장을 이곳저곳 돌다가 겨우 경주의 집 근처를 지나칠 때도 시간이 없어 집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아래 사람을 시켜 집 안의 우물물만 마시고 바로 다시 전쟁터로 떠났다고 한다.《삼국사기》 열전에서는 김유신, 계백, 관창 그리고 김영윤 등 많은 한반도의 영웅들의 상쟁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6. 나당동맹
대야성 함락(642년) 직후 신라는 백제와의 전투에 화력을 집중하기 위해 고구려와 화친을 맺기로 결정하고 김춘추를 고구려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처음에 김춘추를 환대했던 연개소문은 백제 성충의 밀지[13]의 편지를 받은 후 돌변해 김춘추를 투옥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642년).고구려와의 회담이 결렬된 후 김춘추는 후방 안전을 위해 왜국으로 건너가 동맹 혹은 중립 요청을 제의했지만[14]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왜는 김춘추 개인에게는 긍정적인 평가를 기록으로 남겼지만 동맹 제의는 결국 거절했다. 한편 김춘추가 왜국에 가 있을 시기, 신라에서는 여자가 왕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는 명분으로 비담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반란은 김춘추와 함께 여왕 지지파인 김유신이 진압했으며, 이로서 두 번째 여왕으로 진덕여왕이 즉위하지만 실권은 김춘추-김유신이 이끄는 근왕파가 신라 정계를 거의 장악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648년 김춘추는 당나라로 건너가 동맹을 제의한다. 신라에서 차기 왕위 계승자나 마찬가지인 거물 정치인 김춘추가 사신으로 오자 당태종은 김춘추를 환대했다. 김춘추는 한달간이나 당나라에 체류하면서 당태종과 여러 차례 술자리를 겸한 회동을 가졌고, 그결과 나당동맹이 체결되게 된다.[15] 나당동맹이 맺어지자 백제, 고구려, 왜, 말갈이 연합을 맺어 이에 응수했다.[16]
- 백제 개로왕은 472년 북위에 밀서를 보내 고구려를 침략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이 사실이 고구려에게 발각되어 분노한 장수왕이 군대를 이끌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략하고 개로왕과 귀족들을 처형하여 백제가 파탄난 적이 있었다(475년). 이때 백제가 멸망할 뻔했지만 문주가 신라에서 원군 1만여명을 데리고 오다가 한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길로 신라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웅진에서 방어태세를 취했다. 장수왕은 남진하여 평택을 접수하고 대전까지 내려와 월평산성을 구축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웅진을 함락하지 않고 되돌아갔다. 이처럼 멸망할 뻔했던 백제는 신라의 도움으로 나라를 이어갈 수 있었다.
- 백제 위덕왕은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수문제에게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한다면 백제가 고구려 지형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물자와 군사를 보내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598년 수 문제가 실제로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1차 고구려-수 전쟁)했고, 이때 백제는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하여 수나라를 지원했다. 그러나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은 실패로 끝났고 백제는 오히려 고구려의 영양왕의 보복 공격을 당하여 어려움을 겪은 바 있었다. 그러자 위덕왕은 수나라에게 고구려를 재침공해달라고 종용했으나 얼마 후 사망했다.
- 위덕왕 사후 무왕 역시 자발적으로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면서 고구려를 침략해 줄 것을 수차례 요청했다.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세워진 후에도 무왕은 당나라에 고구려 침공을 거듭 요청했고 이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기로 결심한 것에 일조했다.
- 642년 김춘추가 고구려에 화친을 제의하기 위해 연개소문과 회담을 하러 갔을 때, 백제 성충은 연개소문에게 밀서을 보내어 고구려가 신라와 화친을 맺는다면 백제는 당나라에 협력하여 당에게 자원을 제공하고 고구려로 진격할 길 안내를 할 것이라고 압박하기도 했다. 백제 성충의 이같은 협박은 연개소문이 신라의 화친 제의를 거절한 결정적인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 백제 아신왕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당한 굴욕적인 패배를 복수하기 위해 무리하게 전쟁을 추진하다가 이를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대거 신라로 도망가자 화살을 고구려에서 신라로 돌려 399년 왜, 가야와 대규모 연합군을 편성하여 신라를 침공했다. 그러나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신라로 구원군을 파견하여 참패하고 말았다. 404년 때도 셋이서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또 패했다.
- 백제 멸망 후 백제부흥군도 왜군을 끌여들여 백강 전투에서 왜가 주력이 된 해군으로 싸웠으나 나당연합군에 패했다.
한편 고구려 역시 말갈 부대를 백제, 신라 전선에 투입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으니, '외세'라는 것을 삼국 바깥 세력으로 정의한다면 '외세의 힘'은 삼국 모두가 예전부터 끌어들이고 있었던 것이다.[17] 이 중 신라는 왜국과는 사이가 나빴고 중국과는 진흥왕 전까진 서해안에 항구가 없어 제대로 교류도 못 하던 상황이니까 오히려 삼국 중 외세 끌어들이기로는 후발주자였다. 말하자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외세 신공을 수백년간 여러 번 당해오다가 도저히 못 참고 쓸만한 외세 동맹을 겨우 하나 만들었는데 그 동맹이 너무 강했던 것.
당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백제, 신라와 모두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당나라와 백제의 외교 관계가 결렬된 645년 이전까지 당나라는 신라보다 백제와 훨씬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645년 이전까지 당나라에 파견한 사신의 수도 신라보다 백제가 월등히 많았다. 백제 무왕이 고구려 멸망을 위해 당나라 외교에 무척 공을 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당나라는 신라와도 외교 관계를 맺고 있지만, 두 나라 간의 관계는 그리 매끄럽진 못했는데, 선덕여왕을 여자면서 왕노릇 하겠냐고 당 태종이 대놓고 조롱한 것도 이 때까지는 당이 신라를 중요한 외교 파트너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사례다. 아래에 나오지만 당 태종은 나중에는 태도를 싹 바꾼다.
당나라의 외교 정책에 변화가 생긴 것은 645년이었다. 당 태종은 645년 고구려 침공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백제 무왕의 거듭된 간청과 후방 지원 약속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을 결심하는데 한몫했다. 당 태종은 출병하면서 외교 관계에 있던 백제, 신라에게 모두 원군을 요청했다. 연개소문의 김춘추 구금(642년)으로 고구려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신라는 당나라가 출병을 요구하자 원군을 보내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했다. 반면에 백제 의자왕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한다면 적극 돕겠다고 약속했던 선대 무왕의 약조를 지키지 않고 당나라의 파병 요청을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구려로 출정 중이던 신라의 배후를 공격했다. 백제의 이같은 행태에 격분한 당 태종은 백제와의 외교를 단절하고 죽을 때까지 백제의 사신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신라만이 당나라의 유일한 한반도 외교 파트너로 남게 되었다.
물론 앞서 전술된 것처럼 신라와 당나라의 관계는 처음엔 꽤 삐걱댔다. 당태종의 여왕제도 비난으로 신라 귀족들이 여왕 때문에 국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해 비담의 난까지 이어졌다는 학설도 제기되고 있으며, 나당 동맹이 체결된 648년에 김춘추가 당나라로 파견된 것도 애초에 당 태종이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것에 대해 딴죽을 걸었기 때문이었고, 이를 해명하기 위해 신라 조정은 김춘추를 당나라로 파견했다. 당나라에 파견된 김춘추는 의외로 당 태종과 죽이 잘 맞았다. 체류하는 동안 당 태종과 김춘추는 여러차례 술자리를 가졌고 이 와중에 나당 동맹이 체결되게 되었다.
6.1. 당나라와의 영토 협약에 대해
나당동맹 체결 당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대동강을 경계로 국경을 나누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의 실제 기록에는 진덕여왕 2년(648년)에 당시 이찬이던 김춘추가 당 태종을 알현해 백제의 침공을 고하고 군사를 내줄 것을 요청하자 당 태종이 그에 응했으며 복귀하는 도중에 고구려의 순라병에게 걸렸다가 겨우 탈출한 이야기가 실려있으며 당 태종과의 영토 분할 협약에 대한 직접적인 내용은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물론이고 구당서나 신당서에도 등장하지 않고 있다.다만, 구당서 199권 동이(東夷) 편에, 백제부흥군의 복신이 유인궤에게 보내는 서신의 내용 중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존재한다.
聞大唐與新羅約誓, 百濟無問老少, 一切殺之. 然後以國付新羅.
듣자하니, 대당과 신라가 약조하여 맹세하기를 백제의 늙고 어린 것을 묻지않고 모조리 죽인 후에 나라를 신라에게 주기로 하였다고 한다.
듣자하니, 대당과 신라가 약조하여 맹세하기를 백제의 늙고 어린 것을 묻지않고 모조리 죽인 후에 나라를 신라에게 주기로 하였다고 한다.
또한 문무왕이 설인귀의 서신에 보낸 답장인 '답당설총관인귀서(答唐薛摠管仁貴書)' 서두에도 당 태종이 했다는 약속이 표현되고 있다.
朕今伐髙麗, 非有他故, 憐你新羅攝乎兩國, 每被侵陵, 靡有寧歳. 山川土地非我所貪, 玉帛子女是我所有. 我平定兩國, 平壤已南百濟土地, 並乞你新羅, 永爲安逸.
내가 지금 고려를 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끌림을 당해서 매번 침략을 당하여 편안할 때가 없음을 가엾게 여기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바가 아니고 보배와 사람들은 나도 가지고 있다. 내가 두 나라를 바로 잡으면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하겠다.[18]
내가 지금 고려를 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끌림을 당해서 매번 침략을 당하여 편안할 때가 없음을 가엾게 여기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바가 아니고 보배와 사람들은 나도 가지고 있다. 내가 두 나라를 바로 잡으면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하겠다.[18]
복신의 서신문의 경우, 복신 자신도 '聞(들었다, 듣자하니)' 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서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는 저항하는 것이다' 라는 의미로서 '인용'에 가깝지만 신라가 당과 짜고 백제 땅을 넘겨받기로 했다는 점이 당시 한반도의 통념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며 답당설총관인귀서에 등장하는 당 태종의 발언은 일종의 구두 계약에 가까운데다 남겨진 문서가 없어 밀약의 확증이 되기 어려울 뿐더러 만약 효력이 있었다면 당 고종이 웅진도독부를 세우고 신라 왕을 계림 도독에 임명한 사건 등이 일어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 태종이 언급한 신라에게 할당하는 영토의 범위가 꽤 구체적이고 신라가 적극적으로 당과의 협력전에 열심이었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만 바라보기는 어려운 점도 있다. 당시 신라와 당나라간의 영토 협약이 어떻게 되는지는 확실치 않고 추정할 수 있는 가설들 뿐이다.
이 후 영토 협약 문제는 성덕왕 34년, 성덕왕이 패강(浿江, 현재의 대동강) 이남을 사여(賜與), 즉 빌려달라고 요청했고[19] 당시 당나라 황제였던 당 현종이 등주(登州)를 침공한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김의충 편으로 패강 이남을 신라에 넘겨줌으로써 일단락되었다.
7. 삼국통일전쟁
7.1. 가야멸망전
7.2. 백제멸망전
진덕여왕 사후 왕위에 오른 김춘추(태종 무열왕, 재위 654년 ~ 661년)는 나당연합의 백제와 고구려 정벌을 실행에 옮길 것을 당에 촉구하였고 고종이 이에 응하여 마침내 660년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군과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각각 해상과 육로로 백제 공격을 개시했다. 이미 지속적인 전쟁으로 국력이 많이 소진한 상태에서 내부적으로는 의자왕의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삼는 등 무리한 정치 질서의 문란과 지배층의 향락으로 국가적 일체감을 상실했으며 무엇보다 중원 대제국과의 전쟁 경험이 부재했던 백제는 결국 660년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웅진성과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7.3. 고구려멸망전
한편 고구려도 고구려-수 전쟁부터 이어진 잦은 대규모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했고 연개소문의 쿠데타에서 시작됐던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하여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이러한 점을 간파한 나당연합군은 소규모 공세를 반복하여 고구려의 국력이 점차 고갈되기를 노렸다. 신라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나라와 대결이 있을 것을 미리 예측하고 고구려와의 전투에는 소극적으로 임하면서[20] 전력을 비축했다. 665년 실권자 연개소문이 죽었고, 연개소문이 권력을 나눠준 그의 세 아들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고구려는 극심한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특히 장남 연남생은 대막리지에 있었으나 권력 다툼으로 인해 동생 연남건, 연남산이 연남생의 아들을 죽이고 연남생을 공격, 연남생은 패했고 도망갈 곳이 없자 당나라에 항복하였다. 이렇게 고구려의 1인자에서 당나라의 앞잡이로 전락한 연남생은 요동 지역 방어선을 무너뜨리는데 많은 일조를 하였다. 이런 상황에 고구려 남부 전선 역시 연개소문의 동생이던 연정토가 12개 성을 바치며 신라에 투항하는 등 제대로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고구려는 무너지고 있었다. 666년 제3차 고구려-당 전쟁이 발발했고, 신라 역시 전쟁 상황을 보다가 668년 국력을 총동원해 기록상 20만 대군으로 남쪽에서 쳐들어 올라갔으며 사천 전투의 승리를 거쳐 668년 7월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에 먼저 도착해 있던 당군과 합류해 평양을 포위했다. 마침내 9월에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가 멸망했다.7.4. 나당전쟁
하지만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더 큰 전쟁이 남아있었으니 바로 나당전쟁이다.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결국 신라를 이용하여 삼국의 영토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심 때문이었다. 당나라는 신라가 차지하기로 되어 있던 구 백제 영토에 웅진도독부를 비롯한 5도독부를 설치하여 백제 땅을 날로 먹으려 했고, 이어 신라 본토에 계림대도독부를 두어 백제, 고구려에 이어 신라까지 먹으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심지어 당나라는 취리산 화맹 사건으로 문무왕과 괴뢰국 웅진 도독부의 도독 부여융을 거의 동급으로 대우하는 굴욕을 주기도 했다.신라는 당나라의 직접 지배를 용인할 생각이 없었지만, 당나라의 연이은 굴욕적인 조치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발하지 않고 표면적으로 이에 응하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당나라와 있을 전쟁 준비에 돌입해 있었다. 당나라가 백제땅에 5도독부를 설치한 것은 패강 이남은 신라가 차지하기로 한 약조를 깬 것이었지만, 신라는 이에 항의하기보다 5도독부에 주둔한 당나라 군대를 백제 부흥 운동을 진압하는데 활용했다. 백제 부흥 운동 진압 과정에서 신라군은 당나라군과 협력 작전보다는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는 길을 택했는데 그 결과 신라가 토벌한 지역을 신라의 직접 영토로 편입해 나갈 수 있었다. 신라 영토의 확대로 구 백제 지역에서 당나라 5도독부의 영토가 계속 줄어들자 결국 백강 전투(663년) 이후 당나라는 5도독부를 웅진도독부로 단일화하고 나머지 4개 도독부를 폐지했다.
이 와중에 신라는 대 고구려 전쟁에 당나라와 함께 참전하면서도 핑계를 대며 김유신을 출전시키지 않는 등 주력군을 최대한 아꼈다. 마지막 평양성 전투에서는 신라군 전군을 동원했다고 하지만, 고구려와 당나라의 마지막 전쟁은 666년 이미 시작됐고 신라는 남쪽으로 귀순해오는 고구려군만 받으면서 있다가 전황이 확실해지자 668년 뒤늦게 막차를 탄 것에 가까웠다. 이와 동시에 문무왕은 구진천 등을 시켜 당나라와의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신라는 건국 이래 전통대로 백제와 고구려 정복 지역에 대해서도 유화 정책[21]을 펼쳤는데, 이는 점령지에서 무자비한 살육을 일삼았던 당나라군과는 대조적인 조치였다. 이러한 유화 정책은 고구려와 백제의 잔존 세력들이 신라의 편에 붙어 당나라와 싸우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신라는 '일통삼한'의 기치를 내걸고 백제인과 고구려인들의 규합에 나섰다. 실제 나당 전쟁 당시 신라군에서 백제인, 고구려인, 말갈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과반수 이상이었다. 신라는 고구려 멸망(668년) 직후 투항한 고구려의 왕자 안승을 골품제 최고 등급 진골로 편입시켜 고구려 유민들에 대한 유화, 동화 정책을 펼쳤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문왕 6년(686년) 때는 고구려인에게 경관(京官)을 주었는데, 본국(고구려)의 관품(官品)을 헤아려 준 것, 문무왕 13년(673년) 백제에서 온 사람에게 서울[22]과 지방[內外]의 벼슬을 주었으며 그 관등(官等)의 서차(序次)는 본국(백제)의 벼슬에 견주었다고 되어 있으니, 신라가 당시 상황을 얼마나 비상 사태로서 진지하게 해결에 임하려 했는지 알 수 있다.[23]
670년 3월 신라가 옛 고구려땅인 요동에 주둔하고 있는 당나라군을 선제 공격하면서 나당전쟁이 시작되었다. 곧 당나라 본국에서 대규모 군대가 신라 본토를 향해 출병했다. 요동을 비롯한 옛 고구려 땅에서 당나라군과 고구려계 유민이 중심이 된 신라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요동에서 당군을 저지하고 있는 동안 신라는 670년 7월부터 백제 땅에 주둔해 있는 당나라군을 차례로 공격하여 구 백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해갔다. 전쟁 개시 1년 후인 671년에는 백제의 고토를 대부분 수복할 수 있었다. 그동안 요동과 황해도 이북의 옛 고구려 땅에서 벌어진 나당전쟁에서 크게 활약했던 고구려 유민계 부대는 계속되는 전투 끝에 전력을 크게 상실하고 있었다. 약 1년여년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당나라군은 가까스로 옛 고구려 땅을 통과하여 672년 7월 마침내 대동강에 도달했다.
672년 8월 석문 평야(현 황해도 서흥군)에서 당군과 신라군의 대규모 지상전인 석문 전투가 벌어졌으나 신라군이 패배하고 말았다. 석문 전투 패배 후 문무왕은 대규모 회전으로는 당군을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일단 시간을 벌 목적으로 당나라와 일시적인 화친을 맺는 등 화전 양면 전술을 구사했다. 문무왕이 외교전을 펼치는 사이 육상전에서 신라는 당군의 진격을 임진강에서 저지시키는데 성공했다. 673년말 이후 당군은 더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임진강과 한강 사이에서 지리한 소모전을 벌였다. 그러는 동안 신라는 한반도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공성전에서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여 각지에 대규모 축성을 실시하며 방어를 강화해 나갔고, 동시에 당군에게 상대적으로 승산이 높다고 생각한 수군을 강화해 나갔다. 문무왕의 화전양면술로 인해 당 고종은 한동안 적극적인 공세를 자제했다. 그러나 문무왕의 화친은 시간을 벌려는 일시적인 전술에 불과했고, 당나라가 방심하는 틈을 타 신라군은 다시 평양성까지 치고 올라갔다.
문무왕의 화친이 일시적인 전술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분노한 당 고종은 674년 다시 당나라 본토에서 대규모 병력을 신라에 재출병시켰다. 고구려 유민계 부대가 전력을 크게 상실했기 때문에 이번에 본토에서 출병한 당군은 675년 비교적 신속하게 신라 본토에 도달했다. 신라군은 당나라 대군을 맞아 675년 9월 매소성에서 당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했다(매소성 전투). 매소성 전투의 승리는 신라가 전쟁에서 주도권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매소성 전투 패배 이후 수세에 몰린 당군은 더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이후 18차례의 전투를 치르면서 천천히 강원도쪽으로 후퇴했다. 매소성 전투 이후 승산이 사라지고 전쟁이 장기전 국면으로 전환되자 당나라는 장거리 보급선 유지에 상당한 곤란을 겪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당군이 더욱 불리해지자 마침내 676년 3월 이후 당군은 신라에서 단계적으로 철군하기 시작한다. 7월 이후 더이상의 육상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당나라가 신라 정벌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당은 마지막 수단으로 백제 멸망 때처럼 수군을 통해 일거에 돌파구를 마련해 보겠다는 의도로 대규모 수군을 파견했다. 이에 676년 11월 금강 하구에서 대규모 해상전인 기벌포 해전이 벌어졌다. 기벌포 해전에서 무려 22번에 걸친 전투 끝에 신라가 승리를 거두었고, 기벌포 해전에서 대패한 당나라군은 결국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당시 신라와 백제,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은 매우 컸고 당군은 크게 패하였다. 선뜻 보기에 당나라의 군사력이 훨씬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신라와 그 유민들도 만만치 않은 것이었고 결과는 당군의 패배였다. 당나라군이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한 후 당나라는 신라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하였다.
현대에는 나당전쟁 이후 신라가 차지한 고구려 영토가 너무 적어서, 불완전한 통일을 이룩하였다는 점이 널리 지적된다. 일단 당시 신라인들이 삼한을 일통했다고 스스로 생각했던 것은 분명한데, 예를 들면 삼국사기 신문왕 12년(서기 692년)의 기사를 보면 김춘추와 김유신 등이 한마음으로 이룬 일통삼한(一統三韓)이 명시돼 있다.[24] 참고로 이 시기는 발해가 건국되기 이전이다. 상당한 수의 고구려 유민이 신라에 흡수된 것 또한 사실이며, 행정 구역 설정(9주 5소경)이나 군사 편제(9서당) 같은 걸 봐도 옛 고구려, 백제, 신라 땅에 거의 동등하게 영토와 군대를 분배하고 있다.
그러나 신라가 이렇게 통일신라를 자부하던 중 북쪽에서 또 다른 고구려 유민 집단이 주체적으로 발해를 건설했는데, 고구려의 후계자를 주장한 발해의 존재를 고려한다면 삼국통일이라는 용어는 적합하다고 보기 어려워지지만 이는 발해가 국제사회에서 고구려로 인정받지 못한 걸 간과하는 견해다. 당시 신라는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자성을 부정하면서 북국이나 북적이라고 불렀으며, 발해를 고구려라고 보면 이미 망한 고구려의 정통성을 흡수했다는 명분에 흠집이 생기기 때문이었으나 이는 신라 혼자만의 억지가 아니라 당나라도 인정한 견해였다. 현대에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 주장하며 북한을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니라 반국가단체 취급해서 나라 이름도 그 쪽이 자처하는 정식(조선 민주주의 ~)으로 불러주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이 문제에선 신라가 현대 대한민국보다도 월등히 유리했다. 북한은 그래도 국제 사회에서 두 한국 중 하나로 인정은 받는 반면[25] 발해는 당나라에게서 고구려의 후신이라는 인정을 끝내 못 받았으며 일본 황실에나 고려 왕을 자처하는 불쌍한 꼴이었다.[26] 현대 한국인 입장에서야 만주 지역까지 넓게 색칠된 걸로만 보면 이견의 여지가 없는 고구려로 느껴지겠으나, 당대 현실에서는 영토 크기가 다가 아니기 때문에 실제 일어난 일은 꽤 달랐다.
고로 삼국통일 이후로는 통일신라 시대보단 남북국시대라고 칭하는 사례가 현대에 늘어났다지만, 강대한 당나라를 물리치고 대동강 이남 한반도 지역을 수호한 것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일이며 사실 나당전쟁에서 이겨 신라가 안동도호부를 격퇴하지 못했다면 30년 후 발해 건국도 불가능했다. 결국 신라는 나당 전쟁을 통해 한반도 남부는 직접적으로, 한반도 북부와 만주는 간접적으로 당나라에 대해 지켜낸 것이다. 이후의 기간은 나라의 이름은 통일 신라로, 이 시대를 통일 신라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북쪽에 곧 건국된 발해가 당대 외교적 명분에선 훗날의 고려보다 좀 쳐지는 면이 있었을지언정 고구려의 후신이었던 건 사실이기에, 오늘날에는 교과 과정에서 남북국시대라고도 가르친다. 이후 신라는 중앙 집권 제도를 실시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자랑하게 되는데 이 약 130년의 기간을 신라 중대라고 구분하며 대체적으로 신라의 전성기는 이때쯤이라고 볼 수 있다.
8. 통일신라[27]의 발전
이를 바탕으로 정치와 경제, 사회 전반도 안정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은 스스로의 통치를 돌이키는 과정에서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고 사회 전반의 안정을 가져왔다고 스스로 평하고 있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을 전후하여 나타난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왕권 전제화다. 태종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 군주로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했고, 갈문왕 제도도 없앴으며, 아울러 이 때부터 한동안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나아가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통일 이후 진골 귀족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전제화 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당시 통일 신라는 나름대로 파격적인 피정복민 회유 정책도 실시하였다. 신문왕 6년 때는 고구려인들을 위해서 본국(고구려)와의 관품을 해아려 주는 높은 관직을 주었고 문무왕 13년 때에는 백제인에게 서울과 지방의 벼슬을 주었는데 그 관등(官等)을 백제 본국의 벼슬과 견주어 주었다.예를 들어 경관(京官)인 신라의 대나마(大奈麻)는 본국(백제)의 달솔(達率)이었으므로 대나마에 임명하였다.
신라의 절풍 |
삼국통일에 힘입어 그 동안 군사력에 치중하였던 역량이 내부로 쏟아지면서 신라는 화려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화려한 예술품들과 불교 예술이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으며[32], 특히 헌강왕 시절에는 서라벌에는 집집마다 기와가 덮여있었고,집집마다 숯으로 밥을 하여 연기가 피어나지 않았던 등 국력의 강대함을 자랑했다.[33] 8세기 ~ 9세기에 들어 아랍과 페르시아의 신라에 대한 기록이 크게 늘어나는데, 관련 기사 일관적으로 귀금속이 많이 나고 자연 환경이 좋다고 나와있다. 물론 먼 나라의 이야기를 적은 얘기니만큼 황금의 나라 지팡구처럼 허구나 과장도 어느 정도 있겠으나, 알려진 절대 다수의 사료가 긍정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좋게 보인 게 있는 듯.#[34] 영문판[이미지][36][영문판] 사실 외국인, 특히 멀리서 온 서역인들은 모두 수도이자 무역 중심지였던 경주시와 경주를 중심으로 한 인근의 번영한 항구나 도시 등에서 머물렀을테니 당대 서라벌의 영화로움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저런 식으로 쓰는게 무리는 아닐 수도 있다. 원성왕릉(괘릉)을 지키는 무인상도 전형적인 중앙아시아 수피주의자의 터번을 쓰고있는 등 직접 보지 않으면 묘사하기 힘들 정도로 자세한 점을 고려할 때 이미 상당수의 서아시아, 중앙아시아계 집단이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당시 중동 사람들에게는 섬으로 여겨져 신라라는 섬이 있다고 기록된 경우가 많았다. 주로 무역 중심지가 배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남쪽인데다, 역사적으로 육로란 육로는 고구려와 백제부터 시작해서 발해, 고려, 후백제 등이 막고 있었기 때문에 접근할 수 없었으므로 이러한 인식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당시 수도 서라벌의 인구는 수십만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서는 "수도에 17만8936호, 1360방, 55리와 35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삼국유사》진한조)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경주 한 곳에만 80만 ~ 90만 명의 인구가 살았다는 뜻. 고려 수도 개경의 2배 ~ 3 배, 조선 수도 한양의 4배가 넘는 수준이다. 그러나 학계는 서라벌은 커녕 통일신라 국가 전체의 최대 인구를 400만 내외로 추정한다. 또한, 그 시대에 전체 인구 400만명 가운데 경주에만 90만 명이 몰려 살았다는 건 근본적으로 납득이 어렵다. 그리고 지도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지만 경주 중심부의 경주 분지 지형상 90만 명이나 몰려살 수 있을만큼 들이 넓지 않다.[38] 그래서 삼국유사의 17만 8936호는 17만 8936구(약 35만)의 오기가 아니냐는 주장부터 서라벌과 그 일대 수도권을 다 합친 기록이 아니냐는 등의 설들이 있다. 또한 신라의 수도 범위를 경주로만 한정하지 않고 넓혀서 본다면 90만명이 충분히 살 수 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관련 기사
9. 쇠퇴기
"세상 이치에 밝은 사람들, 모두 다 수도를 떠나 떠돌아 다니네, 나라가 장차 망하리, 나라가 장차 망하리"[39]
8세기 후반에 이르자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중앙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치열해지고,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신라의 국운은 쇠퇴하기 시작하고 국가가 해체되는 국면에 접어든다. 이 시기에 성장한 신라의 지방 세력을 역사적으로는 호족이라고 칭한다.혜공왕이 죽고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한 이후 왕권은 약화되었고 귀족 세력이 다시 정계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반란과 쿠데타가 일어나, 중앙 정치는 불안정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이로서 시중보다 상대등의 권력이 더 커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녹읍을 토대로 농민들의 부담은 무거워졌다. 설상가상으로 자연재해가 잇따르고[40], 왕족과 귀족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백성들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랐다. 피지배 계층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호족들에게 의탁하거나 아니면 도적이 되어 지방에서 반란이 잦아졌다. 지방 세력이 강화됨에 따라 공무역이 쇠퇴하고 9세기 중엽의 문성왕(文聖王) 이후 민간 무역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당과의 활발한 무역으로 인해, 신라인의 왕래가 빈번한 산둥반도(山東半島)나 장쑤 성(江蘇省) 같은 곳에는 신라방(新羅坊)이 생기고, 장보고 등의 해상 세력이 약진하기 시작한다. 장보고는 중앙 정치에도 개입, 신무왕의 즉위를 도왔지만, 태자비를 세우는 데까지 손을 쓰려다가 옛 부하였던, 수도에서 온 자객 염장에게 살해당하고, 청해진도 해체되었다.
하지만, 녹읍제가 부활한 757년에 신라의 지방 행정 제도가 전면적으로 재개편되어 9주 5소경제가 정비된 점으로 미뤄 보아, 녹읍제의 부활이 전대의 녹읍과 같은 단순한 관리 녹봉의 성격을 떠나서 관료전의 설치 이후 촌락에 대한 국가와 관료의 이중적인 수취를 통한 지배의 불통일성을 배제하기 위하여 설치되었을 공산이 크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 무엇보다 녹봉제는 쌀의 운반에 드는 인력과 다시 재분배 하는 등에 소요되는 자원을 국가에서 부담해야 하지만 녹읍제는 관료가 직접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경제적이라는 이점도 컸다. 이 당시에 역병이 심하게 유행하여 국가의 인력이 크게 손상된 상황이었기에, 녹봉제를 실시하는 데 들어가는 부담을 덜어야 하는 상황이었던 점도 고려해봐야 하고. 그러나 문제는, 경덕왕 다음 왕인 혜공왕이 왕으로써 그다지 뛰어난 왕이 아니었다는 데 있었단 거다. 혜공왕이 결국 살해되어 무열왕계가 쫓겨난 후, 이 제도는 효과보다는 폐단이 커지게 된다.
그리고 통일신라 항목에도 있지만, 800년대 초반 이 시기는 쇠퇴의 시작은 맞지만 890년 이후의 국가 막장 테크 급은 아니다. 훗날의 후백제보다도 더 넓은 영역을 한때 차지한 김헌창의 난을 중앙군의 힘으로 상당히 빨리 진압하고, 수도에서 가장 거리가 먼 한산주나 명주 같은 지역의 도독이 가까운 반란군이 아닌 중앙군에 협조하는 등 지방 통제력도 강했으며 반란 진압에 공헌한 일부 지역에는 7년간 면세의 혜택을 줄 만큼, 9세기 신라를 막장 왕위 다툼과 식물 정부로 인식하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9세기 초중반까지 신라의 국가적 역량은 충분했다. 오히려 이를 기회로 다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었으나 천년에 이르는 세월의 한계인지, 아니면 골품제를 끝까지 유지해서인지 그 영광을 되찾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고 서기 890년경에 이르면서부터 일개 지방의 독립 선언도 못 막는 처지에 놓인다. 당대 신라에는 골품 신분에 의해 출세의 한계가 결정되는 것 때문에 과거 제도가 존재하는 당나라로 유학을 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빈공과 급제 후 귀국한 6두품 출신의 유학생 들과 선종 승려들은 지방 호족과 결탁하여 반신라적인 입장에서 후삼국 시대를 주도하게 된다. 대체로 700년대 말 96각간의 난을 시작으로 신라가 멸망할 때를 멸망기로 보는 시각은 고려 왕조였고, 이는 삼국사기에 숱한 반란과 기근 흉년 등등을 근거로 하지만 조선 왕조에서는 헌강왕 사후를 쇠퇴기로 봤다. 동국사략에선 800년대 말 최치원의 등장기를 멸망 시점으로 보는데, 이는 대체적으로 전 왕조의 원 간섭기를 비판하기 위해 차라리 신라말이 나았다는 식의 비판을 하기에 그렇고 동국사략을 통해 신라 정통론을 확립한 것도 조선왕조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로 치면 고려 왕조의 쇠퇴를 무신 정권기가 아닌 오히려 몽골의 침입과 원 간섭기로 보는 것과 비슷하다.
10. 후삼국시대와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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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신라 / 후백제 |
9세기 후반 진성여왕 재위기에 이르러 소빙하기가 찾아와 흉년이 들고 나라의 곳간이 비었으며, 중첩된 부패와 사회 혼란이 극에 달하자 888년 무리하게 세금을 거두려 한 사건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연쇄적으로 일어났으며, 지방에선 호족들이 득세하였다. 호족들은 지역의 지배자로 군림하며 군벌이 되어 중앙 정부를 대놓고 무시하는 것은 물론 세금 납부까지 거부할 정도로 위세가 커졌다. 하지만 중앙 정부는 군사력이 약화된 나머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결국 신라에 대한 반란을 합리화하고 지지 세력을 끌어모르기 위해 궁예가 후고구려, 견훤은 후백제를 건국함에 따라, 신라는 삼국시대 말기와 삼국 통일 전쟁 때 개척한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하고 삼국 시대 초반기 때의 영역인 수도 경주시와 영남권 일대로 다시 축소되어 다시 삼국이 정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후삼국시대가 열린 이유와 삼국 유민 의식간의 상관 관계를 부정하는 주장도 있다. 물론 후삼국시대 성립의 직접적인 원인은 신라의 지배력 약화지만 유민 의식 역시 신라의 지배력이 약화된 여러 원인 중 하나이며, 후고구려와 후백제의 건국자가 유민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유민 의식의 유무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부흥 운동의 주도자가 유민 출신이어야 한다는 현대인의 편견에 불과하다. 세계의 여러 경우를 봐도 유민 출신이 아닌 기존 사회 지배층이 대부분 부흥 운동의 주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부흥 운동에 중요한 것은 지도자의 출신보다 반란을 시작할 때 힘이 되어줄 백성들이 납득할만한 명분이다. 유민 의식은 이런 측면에서 좋은 명분으로 작용하며, 유민 의식이 구체제 타도의 명분으로 등장하려면 멸망한 국가에 대한 기억이 있어야 하기에 이는 서로 충돌하는 관계가 아니다.
이렇게 본래라면 중앙 정부에 충성하며 지방 반란 진압에 매진해야 할, 지배층의 핵심으로 기능해야 할 자들이 200년 전 망한 나라의 부흥 운동을 일으키는 상황 탓에, 후삼국시대에 들어오면 신라는 전성기의 성세가 무색하게 경북 지역도 유지를 버거워하는 국가가 되어 진흥왕 때는 고사하고 법흥왕 때만도 못한 상황으로 퇴보한다. 그러나 신라는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궁지에 몰린 상황임에도 사력을 다해 있는 힘을 다 쥐어짜며 급변하는 상황에 발 맞춰 대응했다. 아달라 이사금 이후 728년만에 박씨가 왕위를 되찾게 되었고, 망국이라는 세간의 이미지와는 달리 대야성에서 후백제의 공격을 몇 번이나 막아냈으며, 고려군과 함께 후백제의 용주성을 함락시키기도 했다. 뭔가 해 보려고 견훤의 후백제나 궁예의 태봉과는 달리 신라에 덜 적대적이었던 왕건의 고려와 연합해 이런저런 조치를 하여, 후백제가 경상도를 더 이상 마음껏 제집처럼 드나들지 못하게 하여 수명을 늘리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견훤은 끝내 신라를 침공해 서라벌을 함락하여 경애왕을 제거하고 후백제의 말을 잘 들을거 같았던 김부(경순왕)을 왕위에 올린다.[41]
하지만 후백제의 침공 이후에도 신라는 나라의 존립을 완전히 포기하진 않았다. 경순왕은 후백제군과 견훤이 신라에서 철수하자 후백제와의 관계단절을 선언, 반후백제, 친고려 노선을 견지할 것을 선포하여 사실상 견훤의 통수를 갈겼고 고려와 후백제의 싸움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에도, 신라의 경순왕은 형식적으로나마 취했던 존왕의 의마저도 마음껏 무시하는 왕건과 국서를 교환하고 있었을망정 그래도 나름대로의 저울질은 하면서 왕건에게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고 하였다. 그 과정에서 경주 내부에서도 친고려 정책에 대해 반발하는 기운이 있었고, 견훤의 아들 견신검이 이끄는 후백제 군대가 또 다시 경주를 점령하기 위해 육박한 크나큰 위기 상황에서도 고려와 연합 작전을 펼쳐 경북 의성에서 후백제 군대를 몰아내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므로 경순왕과 신라가 그저 수동적으로 대세에 따라 좀 더 잘 대우해줄 것 같았던 고려에 나라를 갖다 바치고 망했다는 관점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견훤이 고려에 투항하면서 완전히 힘의 균형이 깨지고 대세가 기우는 상황 이전까지는 나름대로 신라의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려고 했던 임금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라의 국력은 나날히 쇠약해져만 가는 흐름을 극복할 순 없었다. 그리고 930년과 934년 고려와 후백제간 고창 전투, 운주 전투에서 고려가 승리하면서 한반도의 정세가 고려 쪽으로 기울자 935년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하여 나라를 왕건에게 들어바쳐 고려에 흡수됨으로서 멸망하고 말았다. 신라 멸망 이후에도 고려시대 초, 중기에 몇 차례의 신라부흥운동이 있었지만 모두 실패하였고 13세기 몽골의 침입을 거치며 삼국 분립적인 의식이 소멸하면서 신라를 비롯한 삼국의 부흥운동 전체가 막을 내리게 된다.
11. 관련 문서
[1] 여기서 병기된 성씨는 촌장의 성씨인데, 마을 전체가 이 성씨를 따랐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표적인 예로 박혁거세는 양산촌 출신이었는데 당시 양산촌의 촌장은 경주 이씨의 시조인 이알평이었다.[2] 참고로 《삼국유사》에서는 "내물 마립간"과 "실성 마립간"라고 나오지만 《삼국사기》에는 마립간 칭호는 눌지 마립간부터 생겼다면서 각각 내물 이사금, 실성 이사금으로 나온다. 이 글에서는 《삼국유사》쪽을 따랐다.[3] 개로왕 이 살해당했을때도 백제 지방에서 온 지원군보다 신라 지원군이 더 먼저 도착했다. 위례성은 이미 늦었지만, 백제가 웅진성에 새 살림 차리는 데는 신라 지원군의 존재가 도움이 되었으니 파견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4] 한국과 일본 사서에는 신라와 왜가 서로를 침공하고 약탈하는 기록만이 존재하는게 대부분이며, 사이좋게 지낸 시기가 거의 없다.[5] 백제식 금동관은 경기 화성, 충남 천안,서산,공주, 전북 익산, 전남 고흥에서 출토되었으며, 수도지역이 아닌 지방에서만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지방세력 포섭을 위한 하사품으로 추정된다.# 백제 중앙세력은 금동관이 아닌 오라관(검은 비단모자)를 쓰고 금제,은제 장식을 부착하는 방식이었다.[6] 이전에 사로, 사라, 신라 등이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신라'는 이미 377년ㆍ382년에 신라 사신이 전진을 방문했을 때 '신라'라는 국호로 표기된 만큼 이전에도 어느정도 대표성있는 국명이지 절대 지증왕 시기에 등장한 신생 국명이 아니다.[7] 법흥왕 때 제정된 신라의 연호는 648년억 나당동맹이 체결될 때까지 지속된다. 나당동맹 체결 당시 당나라가 연호의 폐지를 요구했고 신라가 이를 수용했던 것. 신라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국가다.[8] 황룡사는 진흥왕 대에 세워졌지만 황룡사의 상징으로 알려진 높이 80m에 달하는 9층 목탑은 이후 선덕여왕 대에 추가로 지어졌다.[9] 평원왕은 재위 기간 동안 침략 전쟁을 자제하며 내부적인 국력 강화에 힘썼으며, 덕분에 고구려는 안정을 되찾고 국력이 강화되어 그의 사후 이어지는 수,당의 침입에 성공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10]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11] 대야성은 예전에 대가야의 땅이었으며, 난공불락의 요새로, 훗날 후삼국시대에 신라가 쇠락한 상태에서도 후백제왕 견훤은 대야성을 몇번이나 공격해서 번번이 실패하다 간신히 함락시킨 바 있다.[12] 백제 의자왕은 신라와 고구려가 싸우는 타이밍에 신라의 배후를 공격하기도 했다.[13] 김춘추가 고구려 평양성에 도착했을 때 백제 성충이 보낸 편지가 연개소문에게 당도했는데, 만약 고구려가 신라와 연합한다면 백제는 당나라와 연합해서 고구려를 치겠다는 협박이 담긴 내용이었다. 결국 연개소문은 고구려와 신라의 연합 제의를 거절하고 백제와 동맹을 맺기로 결심하게 된다.[14] 신라는 건국 이래 왜와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이 때 김춘추의 파견이 왜와 처음이자 마지막 동맹 시도였다.[15] 이때 국경을 어떻게 나누는가에는 많은 추정이 있으나 당시 신라는 당나라가 신라와의 동맹으로 고구려의 격파 후 그 땅을 할양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돌변한 당나라의 태도에 대해 고구려 유민과 백제 유민을 지원하여 당나라와 전쟁을 벌인걸로 보는 견해가 있다.[16] 다만 왜는 백제 부흥 운동 때 백강 전투에 참여한 것 외에는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 없고, 백제부흥군이 663년 무너지자마자 태도를 바꿔 신라와 불가침을 목적으로 우호관계를 맺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은 나당연합만큼 원활하게 돌아가지는 않았다.[17] 다만 고구려는 말갈을 사실상 부려먹는 패권국의 위치였으므로 신라 백제가 자기 힘으로 컨트롤할 수 없는 당나라와는 성격이 좀 다르긴 하다.[18] 삼국사기 권제7 신라 본기 제7 문무왕 11년 가을 7월 26일 (http://db.history.go.kr/id/sg_007r_0020_0100)[19] 전당문 장구령편[20] 2차 고구려-당 전쟁에서도 신라는 평양으로 북진하다가 대전 부근에서 백제 잔당이나 좀 잡고 그 핑계로 말머리를 돌렸고, 평양에 고립된 소정방군에 군량만 전달하고 빠졌다. 3차 고구려-당 전쟁에서도 고구려 패망이 확실해지는 시점에서야 대군을 파병하는 등, 전력을 아낀다는 성격이 강하다.[21] 앞서 언급했지만 먼저 복속시킨 가야에 대해서만큼은 아니었다만 그래도 이 당시엔 당나라군과 비교했을 때 굉장히 유화적인 조치였다.[22] 물론 경주시를 이른다.[23] 다만 이는 정복 초반 정복민을 위무하고 당나라와의 결전에 대비한 신라 측의 비상 조치로써, 이후 늘 신라가 그러한 태도로 일관했다고 보는 것 또한 실제 역사적인 사실 관계와는 대단히 동떨어져 있다. 당시 멸망 당한 백제인들과 고구려인들이 이후 결국 신라로부터 분리 독립 시도를 하게 된 건 신라의 융화 정책이 불충분했던 게 원인이며, 이를 지적하는 건 백제인이나 고구려인 등이 하위 귀족 이하로 편입됐다고 오해해서가 아니다.[24] 삼한이라는 단어를 보고 '신라가 말하는 일통의 대상에 고구려는 없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삼국 시대 후반부의 삼한은 마한, 진한, 변한이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 3개국을 뜻하는 단어였다. 고현 묘지명에 적혀있는 '요동 삼한인' 문구와 같이 고구려인들 본인들도 고구려를 삼한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삼한 문서 참조.[25] 물론 북한을 국가로 인정한다 수준이지 국제사회, 특히 서구권에서는 대한민국을 적자, 북한을 서자 정도로 취급하는 현실이다. 이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양 국가들이 대한수교원년을 광복 이후가 아닌 조선 시대 협정 기준으로 설정한 점에서 알 수 있다. 즉 제3자 입장에서는 남북한을 아우르는 마지막 통일왕조는 조선이기에 그 조선의 의미는 당연히 전대의 신라나 고려보다 훨씬 큰데 그 조선의 인구 대부분을 계승한 데다 수도를 그대로 이어받은 한국이 더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마치 영국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로 나뉘면 스코틀랜드를 나라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잉글랜드를 구영국의 정통 적자로 바라보게 되는 거랑 일맥상통. 같은 이유로 영국령 인도의 후신은 파키스탄이 아닌 인도로, 소련의 적자도 ~스탄 나라들이나 우크라이나 등이 아닌 러시아로 보고 있다.[26] 이는 신라가 발해보다 당나라와 더 친밀했던 측면도 있지만 발해가 평양을 제대로 영역화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북국시대 당시 평양의 국적은 여전히 논란이 많지만 발해는 평양에 거의 손도 안 댄 반면 고려는 제대로 영역화한 것을 넘어서 제 2의 수도로 당당히 내세웠으니 중국 입장에서 고려가 발해보다 더 적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고구려 멸망 후에도 당나라가 고구려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발해도 구태여 당을 자극하고자 하지 않았다.[27] 통일신라 문서에도 나오는 얘기지만 신라의 통일을 불완전한 통일로 보고 고려의 통일을 완전한 통일로 보는 측에선 이 시기의 신라에 대해 '후기 신라'라고 칭하자는 움직임도 있으나 대중적으로는 통일신라가 더 넓게 퍼진감이 있다.[28] 정확히는 고구려인 1개(황금 서당), 보덕국민 2개 부대다.(적금 서당과 벽금 서당) 단 보덕국민들도 고구려 유민이다. 보덕국은 신라가 고구려 유민들을 지금의 전라도로 이주시켜 만든 체제고, 황금 서당은 전라도로 이주하지 않았던 나머지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29] 청금 서당과 백금 서당. 부대 상징색은 이름대로 파란색과 흰색.[30] 따로 언급은 없지만 앞서 시대에 편입됐던 가야 유민들도 포함한 것으로 여겨진다. 녹금 서당, 자금 서당, 비금 서당. 녹금 서당과 자금 서당은 통일 이전 진평왕 때 만들었고, 비금 서당은 문무왕 때 설치한 장창당(長槍幢)을 효소왕 때 이름 변경한 것이다. 비금 서당은 말 그대로 장창으로 무장한 부대로 추정.[31] 흑금 서당. 상징색은 흑적(黑赤, 검붉은 색)[32] 신라의 뛰어난 공예, 건축 문화재들이 모두 이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불국사가 이 시기에 중수되고 석굴암이 건설되었다.[33] 가령 구한말 한양의 사진을 보면 초가집도 많았고, 숯으로 밥을 짓는 건 사치에 속했다.[34] 알 마수디( المسعودي )의 기록 <황금 초원과 보석 광산(The Meadows of Gold and Mines of Gems; مروج الذهب ومعادن الجواهر> 프랑스어 번역판 346쪽[이미지] 노란색 부분이 신라(السيلى)', 빨간색이 중국(الصين), 파란색이 이라크(العـراق)다.[36] وليس بعد بلاد الصين مما يلي البحر ممالك تعرف ولا توصف، إلا بلاد السيلى وجزائرها، ولم يصل إليها من الغرباء من العراق ولا غيره، فخرج منها؛ لصحة هوائها، ورقة مائها، وجودة تربتها، وكثرة خيرها، وصفاء جواهرها إلا النادر من الناس، وأهلها مهادنون لأهل الصين وملوكها، والهدايا بينهم لا تكاد تنقطع[영문판] 영문판 해당 부분.[38] 그래서 그런지 경주 분지 땅에서 비교적 외곽 지역인 구 경주 경마장 부지에서도 집단 집터와 숯을 굽던 가마터가 20기나 발견됐다. 이는 당시 경주 분지 땅 안에서 인구 집중이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사례이다.[39] 쇠퇴기 때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진 노래.[40] 상술한 수십만 규모의 인구가 숯으로 밥을 짓는 등 경주 인근의 삼림이 고갈된 결과 홍수에 취약해지고 용수가 부족해지며 사회불안이 심화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41] 이 과정에서 견훤이 왕비를 겁탈했다는 말도 있지만, 견훤이 진짜 왕비를 강간했는가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삼국사기》라는 책이 신라 정통주의를 바탕으로 하였으며, 고려의 김부식이 지은 터라 고려와 대립을 했었던 후백제의 견훤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를 씌웠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록이 남은 자가 승자다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자세한 것은 경애왕 문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