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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 김 (金) |
이름 | 대성 (大城)/대정(大正) |
출생 | 700년 |
사망 | 774년 (향년 74세) |
국적 | 신라 |
직업 | 대신라국 시중 |
1. 개요
신라의 인물.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문왕 때 태어나[1] 혜공왕 때까지 산 재상.삼국유사에서는 그의 일대기를 불교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원래 경주 모량리[2]에서 가난한 홀어머니 경조(慶祖)와 살던 아이였고 동네 부자 복안이 나눠준 조그만 밭으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흥륜사의 고승 점개스님이 복안의 집에 시주를 받으러 왔을 때 일이었다. 복안은 바로 베 50필을 내 주었고 점개스님은 복안의 보시에 감탄하며 훗날 큰 복을 누리리라 축원했다. 이에 대성은 어머니 경조에게 자신들의 현생은 전생과 관련되었다고 얘기하며 자신들도 보시를 해서 후생을 위해 복을 쌓자고 제안하면서 밭을 흥륜사에 보시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대성은 홀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꿈을 통해 하늘에서 자신이 환생할 것임을 알린 뒤, 재상인 김문량(金文亮, ?~711)의 집에서 다시 태어났다. 꿈에서 계시를 받은 김문량이 바로 모량리로 하인을 보내 대성을 데려오라 했으나 모량리 사람들은 대성이 보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급사했다고 얘기했다.
김대성은 태어났을 때 대성이라 써진 금으로 만든 쪽지를 손에 쥐고 있었다고 한다. 김문량은 이를 상서로운 징조로 여겨, 새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김대성으로 짓고 혼자 남은 대성의 어머니를 데려와 봉양했다.[3]
새로 태어난 그는 사냥을 매우 좋아했는데,[4] 산에서 곰을 잡아죽인 날 밤부터 꿈에 자신이 죽인 곰이 나타나 '내가 너에게 아무런 해도 안 끼쳤는데 왜 날 죽였느냐! 나도 네놈을 죽여 이 억울함을 풀겠다!'고 공갈협박을 일삼자 두려움에 떨며 살생을 그만 두고 곰의 명복을 비는 절을 세울 것을 맹세했는데, 이것이 장수사로 알려져 있다. 일화에 따라 곰이 "어째서 나를 죽였습니까?"라고 울며 한탄하자 곰을 달래주며 "미안하네. 자네의 혼을 달래주는 진혼사찰을 세워주겠네."라고 하기도 한다.
후에 전현생의 부모가 모두 나이가 많아 세상을 떠나자 전생의 어머니 경조를 위해 석불사(석굴암)을 짓고 현생의 부모인 김문량 부부를 위해 불국사를 지었다고 한다. 유네스코에 따르면 공사는 751년(경덕왕 10년)에 시작해서 774년(혜공왕 10년)에 끝났다고 한다.
사실 삼국유사의 기록이 불교 설화적이고, 또다른 사서 삼국사기에는 김대성이란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만큼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는데, 이기백 교수를 비롯한 몇몇 역사학자들은 경덕왕 4년(745년)에 시중에 올라 750년에 물러난 시중(중시)에 오른 대정(大正)이란 인물과 음운의 유사성을 들어 동일 인물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김용춘 등 다른 인물을 봐도 신라어에서 ㅊ~ㅈ~ㅅ 음의 한자 표기가 달라지는 일이 흔한 편이기 때문이다. 연대를 살펴봐도 삼국사기의 대정이 중시를 지낸 시기는 경덕왕 5년부터 9년(745~750)까지고, 그의 현생의 아버지 김문량도 성덕왕 5년부터 10년(706~711)까지 중시를 지낸 문량(文良)과 동일인물로 추정되어 부자지간으로 연대도 들어맞는다.
다른 기록을 보면 불국사는 법흥왕 때부터 창건했다는 기록 등도 있어 김대성의 건축은 없던 절을 새로 만든 게 아니라 기존의 절을 보수하고 증축한 "중건"으로 보는 견해가 크다.
키는 170cm 쯤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석굴암 본존불을 바라보았을 때 가장 비례가 아름다운 지점이 170cm쯤 되는 성인의 눈높이라는 점에서 유추한 것이다. 즉 창건(혹은 중건)자인 김대성의 눈 높이에 맞추지 않았을까 하는 후대의 추측인 것.
2. 관련 문서
[1] 700년에 태어났다는 설(기록 상 사망 당시 75세(만 74세))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2] 현재 경주시의 서쪽 지역으로 현재도 경주시 모량동이란 지명이 남아있고 중앙선 이설 전에는 모량역이 있었다.[3] 여담으로 베트남에서 김대성과 같은 실제 사례가 보고된 바 있다. 자궁 내 장치(루프)로 피임한 여성이, 어떤 연유로 피임에 실패하여 아이를 가졌는데 태아는 루프 장치와 아무런 탈 없이 공존했고(루프는 원래 자궁 내 염증을 유발하여 수정란의 착상을 막는 용도로 피임률은 99%가 넘는다) 나중에 아이가 이 장치를 손에 쥐고 태어난 것이다.[4] 한국사의 사냥 관련 기록 중 국왕이 아닌 개인의 사냥 관련 서술은 김대성이 최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