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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 ||
<colbgcolor=#bf1400> 경복궁 계조당 景福宮 繼照堂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 |
건축시기 | 1443년 (창건) 1866년 (중건) 2023년 (복원) |
<colbgcolor=#bf1400> 계조당[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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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복궁의 건물로, 동궁의 정당(正堂)이다.조선 초, 중기에는 경복궁의 동문 건춘문 안쪽에 있었으나 고종 때 중건한 이후 근정전 마당의 동쪽, 동궁 영역 중 제일 남쪽으로 위치가 변경되었다.
2. 이름
'계조(繼照)' 뜻은 직역하면 '계승해(繼) 비춰준다(照)'이다. 즉 '계조'라는 명칭은 '왕위계승'을 뜻한다.3. 역사
1427년(세종 9년)에 경복궁의 동궁을 지었으나, 계조당을 처음 지은 시기는 1443년(세종 25년)이다.# 이 때 세종은 당시 세자였던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여 모든 나랏일을 맡겼다. 그래서 세자가 신하들과 조회를 할 수 있는 전각이 필요하여 건물을 새로 지은 것이다. 문종은 여기서 조회는 물론이고# 서연(書筵)[2]을 하고, 일본 사신을 만나기도 했으며#, 양로연도 열고#, 생일 축하를 받기도 하였다.# 마치 ‘소(小) 근정전’ 같았다고 보면 된다.그러나 계조당은 애초 세자의 대리청정이란 특수 상황에 맞춰 지은 것이기 때문에 문종이 즉위한 이후엔 쓸모가 없어졌다. 결국 1452년(단종 즉위년)에 승하한 선대왕 문종의 뜻에 따라 철거한 뒤# 재건하지 않았다.
400여 년이 지난 1866년(고종 3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같이 재건했으며# 이때 효종의 잠저였던 어의궁을 옮겨다 지었다.# 고종은 이 계조당을 다듬고 고쳐 완성했다. 고종은 계조당을 재·개건하면서 ‘세종과 왕세자(문종)의 예’를 전거로 삼았다. “세종이 계시고 문종이 계조당에서 대리청정했던 그 시대가 모든 제도와 문물, 법식이 가장 융성했던 때”라고 꼽았다. 고종은 이어 “내가 세종의 업적을 계승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동궁(순종)이 훗날 나(고종)의 가르침을 받들기를 바란다”면서 계조당 개건 의미를 밝혔다. 고종은 “동궁(순종·재위 1907~1910)이 조종조의 예절을 익히고 매번 고사를 따르니 참으로 가상히 여긴다”고 덧붙였다. 영의정 심순택(1824~1906)은 “세자(순종)의 총명이 뛰어나다”고 맞장구쳐주었다.
고종은 계조당을 다시 고쳐 건립하면서 당시 17세가 된 세자(순종)에게 ‘나도 세종처럼 대리청정시키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후 여러 행사 때 왕세자가 축하를 받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1891년(고종 28년)에 고쳐 지었다.#
<colbgcolor=#bf1400> 계조당 복원 조감도 |
2023년 9월 20일 공사를 마치고 일반에 공개했다.# 하지만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은데, 단청 작업은 고증 연구를 통해 2024년에 진행될 예정이다.
복원 후에는 전통문화교육 공간 등으로 활용한다.#
4. 구조
<colbgcolor=#bf1400> 계조당 및 행각 내부 구성도 |
- 정면 5칸, 측면 3칸의 총 15칸으로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 공포는 이익공 양식의 전각이며, 5개의 잡상과 토수[3]를 놓았다. 내부는 모두 트여 있으며 마루로 구성되었다.
- 동쪽과 남쪽은 빈 월랑으로 되어있으며, 서쪽과 북쪽은 담장으로 되어있다. 동행각은 12칸, 남행각은 13칸이며 이중 남행각 중앙의 3칸은 대문인 명사문(明四門)이고 북서쪽 담장에는 쪽문이 있다.
5. 부속 건물
}}} ||<colbgcolor=#bf1400> 《북궐도형》의 동궁 일대 내부 구성도 |
5.1. -오상방(五相房)-
장악원(掌樂院)의 부서중 하나로 악공(樂工)들의 처용무(處容舞)를 교육하는 곳이였다.
5.2. -동궁 원역처소(東宮 員役處所)-
원래는 각 관아의 서리(書吏)가 쓰던 세자궁 장방(世子宮 長房), 세자를 경호하던 별감(別監)들이 쓰던 세자궁 별감방(世子宮 別監房), 세자궁의 요리를 만드는 세자궁 수랏간(世子宮 水剌間)등이 있었으나 후대에 원역처소로 개축했다. 제반관서에 딸린 구실아치인 원역들이 머무는 처소였다.
5.3. -통장청(統長廳)-
훈련도감(訓鍊都監)에 소속된 무예청(武藝廳)에서 우수한 무예별감(武藝別監)인 통장(統長)이 근무하던 곳이였다.
5.4. -문기수청(門旗手廳)-
깃발을 드는 기수들을 관리하던 관청이였다.
5.5. -춘방(春坊)-
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이였다.
5.6. -계방(桂坊)-
세자의 경호를 담당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이였다.
오위도총부 서편에도 계방이 있는데 이건 당시 세자인 순종의 경호를 강화하기 위해 계방의 인원을 늘려서 이를 수용하기 위해 지은걸로 추정된다.